재미로 읽는 서양음악사(24회)

하이든, 그 생애와 음악Ⅰ

여러분은 예술성이 뛰어나고 사색적인 음악과 형식이 단순하지만 우아한 음악 중 어느 것을 더 좋아하십니까. 아마 자신의 성격에 따라 조금씩 다르겠지요. 오늘은 교향곡의 아버지라 불리는 프란츠 요셉 하이든(Franz Joseph Haydn:1732~1809)의 생애에 대해서 간략하게 알아볼까 합니다. 물론 여러분들은 여러 가지 책이나 다큐멘터리 영화 등을 통해 다양한 정보를 알고 있을 것으로 압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하이든의 생애와 음악을 논하는 것이 진부한 일일수도 있겠죠. 그래서 오늘은 그의 생애를 시대별로 구성해보고 그의 음악이 왜 그렇게 표현 되었는가를 인간학적 관점에서 알아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시다시피 음악사에서는 낭만주의 음악과 고전주의 음악이라는 시대적 구분을 만들었고 이 두 음악적 트렌드는 오늘날까지 인류에게 가장 많은 긍정적 가치를 제공하는 음악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중에서 1750년부터 1802년까지의 음악, 단순하고 우아한 음악, 형식과 음악적 기교를 중시하는 음악, ‘겔런트 스타일(Galante Style)’의 음악이라고 부르는 음악을 음악학자들은 ‘고전주의 (Classicism)’라고 불렀습니다. 우리가 흔히 고전음악 혹은 클래식 음악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상 이 50년 동안의 음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는 차후에 자세히 그 구분의 당위성을 말씀드릴 기회가 있을 것이므로 여기서는 고전주의의 대표적 작곡가의 삶에 대해 이야기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음악학적으로 ‘겔런트 스타일’이라 말하는 고전주의 음악은 모차르트와 하이든에 의해 비인을 중심으로 발전하였고 후에 베토벤이 이를 이어받아 완성한 형식입니다. 이 음악은 형식에서 단순하고 명쾌하며 무엇보다도 선율과 화성의 질적 아름다움을 추구합니다. 군더더기 없는 선율이나 화성의 아름다움 이것이 이 시기의 제일가는 트렌드였지요.  우선 하이든의 음악인생을 알아보죠.

1.하이든의 어린 시절

하이든의 어린 시절은 당시 유럽의 사회적 환경으로 봤을 때 매우 어렵고 궁색한 시간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의 국경지방인 로라우(Rohrau)에서 마차수리공으로  일을 하셨지만 살림은 매우 어려운 형편이었습니다. 하이든이 6세가 되던 1738년 로라우에서 11km떨어진 하인부르크에 사는 하이든의 친척이자 초등학교교장이었던 프랑크라는 사람의 집으로 가게 되는데 이는 사실상 아버지와 영원히 이별하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프랑크 아저씨의 집에 온 하이든은 그로부터 음악 기초이론과 하프시코드, 바이올린 등을 배우게 되는데 그 재능이 매우 뛰어나서 아주 쉽게 악기를 익혔습니다. 1740년 그의 나이 여덟 살이 되었을 때 비인 성 스테판 성당의 음악감독인 로이터선생이 재능있는 어린이를 찾아다니다가 하이든을 만나게 되고 그를 비인으로 데리고 가게 됩니다.  이때 하이든의 목소리는 매우 아름다워서 모두들 감탄했다고 하는군요. 하이든이 어린 시절 본격적으로 음악공부를 할 수 있게 된 성 스테판 성당은 15세기에 건축된 오스트리아의 대표적인 건축물로 비엔나의 가장 중심지에 위치하고 있어 비이너 들에게는 아직까지도 상징적인 마음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이 스테판 성당은 옛 비인성의 가장 가운데 위치하고 있어 합스부르그 왕가의 모든 귀족과 왕족들이 미사를 드렸던 곳으로 그 규모와 정교함은 고딕양식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한 유서 깊은 성당에서 하이든은 그의 음악적 재능을 소년성가대원으로서 펼쳐 보일 수 있었고 그곳에서 음악의 기초적인 이론과 발성, 그리고 오르간 주법의 기본을 익힐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비인소년합창단이 가끔 우리나라에 공연을 오는데 바로 이 성 스테판 성당의 소년성가대가 모태입니다. 이들 소년합창단은 남성성가대가 소화하지 못하는 높은 음역을 담당하거나 성가의 화려한 장식적인 멜로디 즉 디스칸투스(Descantus)등을 노래하곤 했습니다. 물론 이당시 여성들은 교회법으로 예배의식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에 어린 남성인 소년 성가대가 여성의 음역을 대신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요즘 생각하면 인권 단체에서 여성차별이라는 항의를 들을 법도 했지만 이러한 남성만의 성가는 중세초기부터 교회법으로 엄중하게 적용되어왔습니다. 아무튼 어린 하이든은 비인의 가장 화려하고 도시의 중심에 위치한 스테판 성당에서 기숙하면서 음악공부를 철저하게 받을 수 있었다는 점이 매우 중요합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이든은 변성기에 접어들게 되고 소년성가대원으로서 노래를 할 수 없게 되었지만 칸토르였던 로이터의 지시에 따라 어린 동생들의 발성과 기본적인 음악활동을 도와주는 보조교사 역할도 담당하였습니다.

2.하이든의 청년기

그러나 그 역할도 잠시 하이든은 성당에서 나와 스팽글러라는 친구를 사귀었는데 그의 집은 여러 명의 가족들이 비좁은 공간에서 지내던 터라 하이든은 친구의 작은 다락방을 얻어 그곳에서 낡은 피아노를 가지고 독학으로 음악공부를 했습니다. 하이든에게 비인에서의 음악공부는 매우 힘든 나날이었습니다. 그는 먹고 살기위해서 하프시코드를 가르치거나 오페라 작곡가 니콜로 포르포라의 성악반주자로 일을 하면서 돈을 벌었습니다. 그리고 가끔은 길거리에서 세레나데를 연주하는 유랑 음악가들과도 함께 연주를 하고 돈을 받았습니다. 하이든에게 작곡법을 지도해준 사람은 그가 반주자로 따라다니던 니콜로 포르포라선생이었는데 그는 하이든의 재능을 높이 사서 거의 무보수로 작곡법을 지도해 주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1753년 포르포라의 가르침을 통해 처음으로 오페라 “꼽추악마(Der krumme Teufel)”를 발표하게 됩니다. 이렇게 하이든의 청년기 활동은 비인의 전통적인 분위기와 민속적 양식을 자연스럽게 그만의 음악으로 표현해 나갔습니다. 이렇듯 그는 점차 음악을 사랑하는 비인의 귀족사회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1756년 그러니까 24세가 될 무렵 하이든은 어려운 음악가를 지원하는 한 귀족의 시골집에 초청을 받게 됩니다. 이 사람은 칼 요제프 휘른버그 남작으로 하이든은 그의 저택에 고용되어 최초로 현악사중주곡을 작곡하면서 약 5개월 정도를 일하게 됩니다. 그러나 휘른버그 남작은 얼마 후 계약을 바꿔 하이든을 친구인 모르친 백작에게 소개하였고 1759년 모르친 백작은 하이든을 정식으로 카펠마이스터(음악감독)로 고용하게 됩니다. 그로부터 하이든은 넉넉한 지원을 약속 받게 되었고 작으나마 오케스트라 편성도 실험할 수 있게 됩니다. 그 후 많은 귀족들이 하이든의 음악적 재능을 알게 되었고 그에게 재정적인 지원을 하게 됐습니다. 하이든의 아내에 대해 알아볼까요. 아내의 이름은 ‘마리아 안나 알로이지아 하이든’ 이었는데 그녀의 부친은 가발을 전문으로 만드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녀는 지적으로 매우 부족한 사람이어서 하이든의 음악세계를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하이든이 작곡한 악보를 케이크 바침 종이로 또 머리 컬을 마는 종이로 아니면 불쏘시개로 사용하고 했다니 하이든의 입장에선 얼마나 화가 나는 일이었을까요. 그런데 처음 하이든이 사랑했던 여자는 이 안나의 여동생이었던 ‘테레제’ 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녀의 부친이 첫째인 안나를 먼저 결혼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고 테레제의 언니인 안나를 하이든과 혼인시켰다고 합니다. 동생 테레제는 그 후 수녀가 되어 수도원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불행의 씨앗이 된 것이지요. 결국 그들 두 사람 간에는 자녀가 없었고 각자 자기 애인을 만들어 몰래 만났다고 합니다. 독실한 신앙인이었던 하이든에게 마리아 안나 알로이지아는 이혼도 할 수 없고 마지못해 함께 지내는 형식적인 부부였습니다. 아무튼 이러한 부인과의 결혼생활도 청년 하이든에게는 무척 힘든 시기였을 것입니다.

3.하이든의 장년기

하이든이 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했던 기간은 당연히 에스터하지 공작의 궁정음악감독으로 일했던 1761년부터 1791년까지 30년간 이었습니다.  모르친 백작의 음악감독으로 2년여를 함께 했지만 급격하게 모르친가문의 가세가 기울어 더 이상 음악가들을 고용할 처지가 못되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다행히도 에스터하지 가문의 음악감독으로 다시 고용되어 하이든은 안정된 직장을 다시 갖게 된 것입니다. 1766년에는 자신을 고용했던 안톤 에스터하지 공작이 죽고 그의 동생 니콜라스가 대를 이어 받게 되면서 하이든의 음악활동은 매우 바쁘고 힘들게 진행됩니다. 하이든은 거의 매주 열린 음악회를 준비하기 위해서 매일 작곡에 몰두해야하는 힘든 나날이 이어집니다. 더구나 이 에스터하지 공작의 궁전은 프랑스의 벨베데레 궁을 모방하여 매우 화려하고 대규모로 만든 궁으로 많은 비인과 부다페스트등지의 귀족들이 여름 휴양차 몰려오곤 하는 휴양지였습니다. 하이든에게는 그들의 무료한 전원생활을 만족시켜야 하는 커다란 과제를 안고 있었던 것이지요. 이러한 특별 과제를 충족시켜야 하는 하이든에게 있어서 가장 고통스러운 점은 자신의 음악적 동료와 인간적으로 교류할 진정한 친구를 만날 수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그에게 있어 필요한 것은 서로간의 음악을 이해해주고 정보를 교환할 수 있으며 국제적인 작곡의 흐름을 함께 논할 수준 높은 작곡가가 필요했던 것이지요. 결국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를 만나 교우하게 되는데 그는 하이든의 24세 연하인 제자 겸 동료였습니다. 이두 사람은 이렇게 운명적인 만남을 통해 비인 고전주의 악파를 자연스럽게 주도해 나갔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