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세기 유럽인의 삶과 음악

유럽에서 살면서 우리나라의 환경과 달라서 당황스러웠던 일들이 많이 있지만 그중에 자연환경의 차이로 인한 스트레스는 견디기 어려웠습니다.  유학시절, 제가 비엔나에 도착한 날은 1985년 5월 31일 이었는데, 처음부터 극심한 고통을 느낀 것은 안개 때문에 앞이 거의 보이지 않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하루 이틀이 아니고 매일같이 이어지는 짙은 안개와 혼돈, 그 속에서 지내야 하는 답답함은 오월의 따뜻하고 아름다운 산과 들 속에서 자라온 저로서는 참 견디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그때, 전 왜 유럽인들의 피부색이 아이보리색이 되었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18세기 비엔나의 봄은 어떠했을까요?
16세기 이후 북독일의 마틴 루터에 의해 시작된 종교개혁과 칼뱅에 의한 개신교의 개혁목표는 예배의식의 단순화, 신자들 자신이 부르는 찬양, 성경말씀의 일상 생활화, 등으로 시작합니다. 이러한 개혁목표는 결국, 찬미가의 단순화와 화성법적인 음향의 표현에 무게를 둡니다.

결국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음악이 비엔나의 음악적 경향을 주도하면서 소위 비엔나 고전악파를 형성합니다. 이 비엔나 악파의 음악은 전 유럽음악의 모델로 알려지면서 음악에 있어 범세계적인 유통구조를 갖게 됩니다. 소위 공통관습시대라고 하는 유럽음악의 보편화시대입니다. 이 공통관습시대라는 말은 유럽 각 민족이 가지고 있는 음악적 유산, 즉 민속음악을 바탕으로 하여 비엔나 고전악파가 지향하는 음악작곡의 기법을 공유함으로써 모든 민족의 사람들이 음악에서 만큼은 소통의 문제가 일어나지 않는 시대를 말합니다.  

크반츠(Quantz)라는 학자는 “모든 민족의 음악을 공통으로 접합시킨 음악이 가장 이상적인 음악이다.”(1752년),라고 주장하였고, 프랑스의 샤바농(Chabanon)은 “음악을 국제적 언어로 사용할 것”을 강조했습니다.(1785년) 이러한 현상은 유럽의 모든 민족이 음악을 하나의 감성적 소통의 대상이자 수단으로 인정하고 이러한 인식을 통해 세계인이 평화와 일체를 이끌어 내야한다는 믿음을 가졌던 것입니다. 결국 21세기에 들어와 유럽은 EU라는 경제공동체를 만들었는데, 이는 우연 이 아니라 이미 수 세기 전부터 그 필요성을 느껴왔던 것입니다.

18세기 유럽인들의 삶은 인간의 존엄성을 인정하고 인간중심의 가치관을 목표로 한 정치와 사회현상이 보편화되는 시기입니다. 이제 유럽인들의 생각은 귀족이나 왕권에 무조건 복종하고 그들이 만들어 놓은 계급과 사회적 계층의 희생물이 아닌 사회의 중심적인 역할자로서 문화와 예술을 형성하고 이를 소비하는 역동적인 인간상을 구현하고 있었습니다. 이를위해 과학자는 누적적 과학론에 의거하여 모든 과학적 현상은 과거의 결론에서 출발한다는 논리로 교육을 통한 지식의 전수를 중요하게 다루었습니다. 물론 이전의 과학적 사고는 창조적 과학론에 근거하고 있었지요. 즉, 창조적 과학론이란 신에 의해 모든 자연과 그 질서가 창조되고 관리된다는 논리이지요. 이러한 유럽인들의 변화된 사고는 바로 음악의 공급과 수요의 형태를 바꾸어 놓는 배경이 됩니다.

18세기는 대중화 시기입니다. 대중화란 산업의 발달로 지식과 정보의 생산이 늘어나고 더불어 음악의 공급이나 수요역시 귀족 중심에서 일반시민들의 여가활동으로 그 범위가 넓어지는 시기라는 것입니다. 음악작품뿐 아니라 모든 예술장르들이 일반 대중을 모델로 하거나 그들을 작품의 중심으로 끌어 오게 되면서 당연히 대중의 생각과 취향이 예술의 흐름을 지배하게 됩니다. 루소가 부르짖었던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말은 예술의 목표와 대상이 자연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것을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과학자들은 자연의 원리와 규칙성을 인지하고 이를 인간 삶의 진보를 위해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음악사회에서는 여러 직물협회나 조합 등의 단체가 중심이 되어 음악을 연주하고 감상하는 소위 “게반트하우스 음악”이라는 형식이 만들어 지면서 본격적으로 음악의 대중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2. 초기고전주의 음악

음악사에서는 그리 크게 다루는 시기가 아니지만 회화나 미술사에서는 이 시기를 “로코코 시기”라 하여 매우 독특한 기법의 그림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음악에서 전고전주의(로코코)시기란 1720년부터 1750년 경 까지 짧은 시기로 이 시기에는 소위 감정적 스타일의 시대라 하여 감성적이고 다정다감한 음악을 가장 선호하는 시기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러한 스타일을 “감정과다양식” (感情過多樣式:Empfindsammer Stil) 이라 부릅니다.

이 음악은 매우 서정적이고 감상적이며 서민들에게 어울리는 구조로 되어있어 음악이 대중화되는데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J.S. 바흐나 도메니코 스카를랏티 같은 작곡가의 음악이 대표적인데 이런 음악은 한 악장 혹은 한부분에서 대조되는 악구(악절)가 나타나서 분위기를 역전시키는 역할을 하게됩니다. 또 2마디나 4마디로 된 동기(Motive)를  만들고 이를 어떻게 발전시켜나가는가가 중요한 문제일 만큼 한 두 개의 주제를 음악의 중심에 두고 전개해가는 방법을 사용합니다. 이는 바로크음악이 여러 개의 연쇄적인 악구를 끊임없이 사용하고 조직해가는 방법과는 사뭇 다른 것이라 하겠습니다. 또 이 음악의 특징 중 하나는 음악을 전개할 때 화성을 분산화음으로 처리하고 이를 짧게 끊어 반복 처리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선율선을 강조하고 두드러지게 합니다.

이러한 기법을 이탈리아의 알베르티가 창안하였다 하여 “알베르티 베이스”(Alberti Bass)라고 부릅니다.  이시기의 독특한 작곡가로 “도메니코 스카를랏티”를 들수 있는데, 이 사람은 1685년 이태리 출신의 작곡가로 1720년부터 27년까지 여왕을 보좌하여 포르투칼과  스페인을 여행하였고, 그 지역의 민속적 음악에 매료됩니다. 500여곡의 하프시코드 음악을 작곡하였는데 하나같이 소박하고 감성적인 매력을 갖고 있습니다.

3.초기고전주의 소나타

몇 년 전 제가 광주여대에 근무할 때입니다. 당시 전 음악과 학과장을 맡고 있었는데,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를 영입하라는 지시를 받고 광고를 냈습니다. 얼마 뒤  불가리아 소피아 음악원 출신의 젊고 훌륭한 “밀코 밀코프”라는 피아니스트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전형적인 동구라파 출신으로, 철저한 음악교육 덕분에 매우 탄탄한 연주 능력을 갖고 있음을 알고 임용한 적이 있습니다. 그분이 제 옆 연구실에 배정되어 함께 근무를 했는데, 시간이 있을 때마다 항상 스카를랏티의 피아노 소나타를 연습하였습니다. 그때 마다 잔잔하게 들리는 그의 피아노 소리에 귀를 기울이곤 했는데, 얼마나 정교하고 세밀하게 피아노를 치는지 저절로 감탄사가 입에서 흘러나왔습니다.

스카를랏티 소나타가 원래 정교하고 감성적이긴 하지만 그의 손끝에서 만들어지는 분명하고 세밀한 타건법은 음악평론가로 20여 년 동안 많은 피아니스트의 연주를 들어왔음에도 그중 최고 수준의 연주가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흔히 우리나라 연주가들이 선호하는 열광적이고 기교적인 악곡보다 조용하고 감성적인 전고전주의 음악을 즐겨 연주하는 동구권 연주자들의 태도가 무척이나 인상적이었습니다.

스카를랏티의 소나타는 화성의 구조가 매우 섬세하고 가늘지만 그 안에는 분명히 목가적인 선율과 정서가 녹아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소나타는 매우 이상적인 전조(modulation)가 다양하게 일어나고 있어 누구나 조금도 방심할 수 없는 매력이 있습니다. 전반부는 딸림조나 관계 장조로, 후반부는 여러 번의 이동을 거쳐 원조로 돌아와 끝을 맺게 됩니다.  

이러한 전조형식은 소나타형식이라는 음악사상 가장 완벽하고 아름다운 음악형식을 완성하는데 큰 틀을 제공합니다. 물론, 이는 비단 스카를랏티만의 공적은 아니지요. 그러나 이러한 전 고전주의 소나타 형식 즉, 전반부의 장조적 흐름과 후반부의 단조적 흐름이 서로 대조적인 형식을 만들어 내는 것은 베토벤에 의해 소나타형식이 완성된 고전주의 까지 발전하여 최고의 음악형식으로 지금까지 우리에게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다음호에서는 여타 전고전주의 음악가들의 생애와 그들의 작곡 스타일에 대해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