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로 읽는 서양음악사<열한번째 이야기>

18세기 헨델과 영국의 음악사회

우리가 헨델을 이야기 할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아마도 합창 ⌜메시아⌟일 것입니다. 조금 더 헨델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의 합창을 듣고 조지 1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경의를 표했다는 에피소드정도 이겠지요. 그런 그가 런던의 유명한 엔터테이너였다는 사실은 좀 의외이기도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음악사에서 너무 그의 음악적 측면만을 부각시킨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즉, 헨델은 바로크시대의 양대 산맥으로 바흐와 함께 대위법 합창음악을 극대화시킨 최고의 음악가로서 인정하여야 하지만 한 인간으로서의 삶은 매우 극적이고 절박한 한사람의 생활인일 수밖에 없었던 사실이 간과되었지 않았나, 합니다.

1.헨델과 런던

헨델은 1685년 북독일의 ⌜삭소니⌟란 마을에서 태어나 ⌜자코브⌟란 음악가로부터 오르간과 하프시코드, 그리고 바이올린과 오보에를 배웠다고 합니다. 그는 또한, 여러 선배 작곡가들의 작품을 연구하고 이를 분석하면서 당시 대위법음악의 다양한 기법도 터득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의 나이 18세가 될 무렵 당시 독일 오페라의 중심지로 알려진 함부르크에서 첫 오페라 ⌜알미라⌟를 공연하여 돈을 좀 벌게 됩니다. 21세가 되던 1706년에는 오페라의 본고장 이태리의 여러 음악도시를 여행하면서 오페라의 작곡기법과 공연기술들을 배우게 됩니다. 동시에 자신의 작품도 발표함으로서 작곡가로서의 입지를 쌓기도 합니다.

헨델의 운명은 1710년 휴가를 받아 런던으로 여행을 떠나면서 바뀌게 됩니다.  그는 런던에서 오페라 ⌜리날도⌟를 작곡하여 공연하게 되는데 이 작품이 아주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오페라가 성공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 당시의 상황을 잠시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헨델은 ⌜예루살렘 해방⌟을 쓴 ⌜에어론 힐⌟ 이란 사람을 알게 되는데 그는 이 당시 ⌜헤이마켓⌟ 극장의 지배인이었습니다. 돈이 매우 급했던 헨델은 ⌜롯시⌟가 시나리오를 쓰면서 동시에 작곡에 들어가 2주 만에 완성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빨리 완성하게 된 데는 이 곡이 이미 이탈리아에서 대성공을 거둔 ⌜이그리피나⌟라는 곡의 대부분을 그대로 사용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시나리오 작가인 ⌜롯시⌟는 이를 따라가지 못해 불평을 했다고 할 정도였답니다.

이 오페라가 초연된 헤이마켓 극장은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하니 헨델로서는 무척 운이 좋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성공하게 된 이유가 음악적인 매력보다도 이탈리아풍의 화려한 무대장치에 있었다고 합니다. 더구나 공연 중에 등장하는 번개며 천중이 불꽃을 만들어내고 이것이 화재로 이어질까봐 소방수가 대기 중이었다고 하닌 참 아이러니 한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오페라의 대성공은 헨델에게 있어 런던이라고 하는 도시의 가능성에 고무되었을 뿐 아니라 그 후 정착을 결심하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지요. 오늘날에도 어떤 현상이 크게 번져나가는 모습을 보고 ⌜리날도 선풍⌟이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이는 여기에서 유래된 것이지요.

2.2차 런던방문

고향 하노버로 돌아와 1년을 보낸 헨델은 런던에서의 경이로운 성공을 잊지 못하고 1712년 다시 영국으로 건너가게 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헨델도 마음이 바뀌어 아주 런던에 정착하기로 마음을 먹고 기회를 엿보게 됩니다. 그러던 중 조지 1세 영국 왕이 템즈강에서 뱃놀이를 자주 한다는 말을 듣고 왕이 템즈강에 나오는 시간에 맞춰 몇 명의 오케스트라 단원들을 배에 태우고 자신이 작곡한 관현악곡을 연주합니다. 이 곡이 유명한 ⌜수상음악⌟입니다. 헨델은 이 곡을 열심히 연주하였고 이를 멀리서 듣고 있던 조지1세가 “저 음악을 연주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신하들이 “헨델이라는 사람입니다.”라고 고했고, 왕은 그를 왕궁으로 초대하라고 지시를 내렸다고 합니다. 물론 그 이후 헨델은 영국 왕실 아카데미의 일원으로 월급도 받고 안정된 생활이 보장되었다고 합니다. 흔히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하는데, 헨델은 이렇게 과감하고 용기 있는 행동을 통해서 런던에서의 생활이 탄탄하게 만들어지게 되었답니다.

이런 것을 보면 헨델은 이미 젊은 시절부터 음악적인 재능과 함께 사업가로서의 재능도 뛰어났음을 알 수 있겠지요. 그 후 1729년 헨델이 44세가 되었을 때 영국의 왕실 아카데미가 재정문제로 파탄이 나자 헨델은 할 수 없이 음악 사업에 뛰어들게 됩니다. 그래서 극장을 인수하고 오페라를 작곡하여 공연사업을 벌였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오페라라고 하는 작업이 화려하고 다양한 의상이며 소품들, 그리고 1급 배우들의 섭외와 개런티 문제, 조명이나 무대장치문제, 시나리오나 작품의 질문제등으로 매우 곤경에 처하게 됩니다. 작곡가인 헨델로서는 능력에 부치는 여러 가지 일들을 처리해야하는 곤경에 처하게 된 것이지요. 밖에서 본 사업이라는 것과 안에서 직접 경영자로서 참여하게 된 것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겠지요.

45세가 된 헨델은 결국 오페라 사업을 포기하고 오라토리오로 전환하게 됩니다. 오라토리오는 헨델에게 있어서 훨씬 스트레스를 덜 받고 운영할 수 있는 음악장르였습니다. 오페라처럼 의상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무대 장치가 특별히 필요한 것도 아니며, 조명이나 소품들도 특별히 필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단지 합창단과 솔로이스트 몇 명만 있으면 합창곡은 헨델의 전공이니 문제가 없었던 것입니다.

3.헨델의 런던귀화와 음악활동

18세기 초 런던에서는 이탈리아 오페라가 아주 성행했다고 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탈리아 오페라는 그 규모와 화려함에서 가장 앞선 음악이었고 작곡가와 가수의 능력도 다른 어느 지역보다도 뛰어났습니다. 이는 역사적으로 볼 때, 매우 중요한 현상으로 이미 지난시간에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영국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특히 귀족들은 이렇게 화려하고 아름다운 오페라의 공연이 삶의 중요한 재미거리였겠지만 일반 시민들의 입장에서는 조금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1726년 헨델은 영국에 귀화하게 됩니다. 본격적으로 영국에서의 오페라활동을 개시한 것이지요. 귀화이후 헨델의 음악활동은 귀족 중심의 이태리 오페라 공연중심에서 일반서민들을 대상으로 쉽고 대중적인 오페라 제작에 공을 들입니다. 2년 후 영국인들의 오페라에 대한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욕구에 따라 헨델은 “거지오페라(Beggars Opera)”를 발표하여 대성공을 거둡니다. 그 성공의  영국인들의 자존심을 살려준 영어로 된 대사와 서민들의 생활을 이슈로 한 거지를 주인공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인기를 끌었던 것 같습니다.

영국인들은 전통적으로 보수적인 기질이 강하고 자국문화에 대한 자존심이 강한 민족으로 유명하지 않습니까? 음악사에서 헨델의 업적은 오페라와 오라토리오의 형식을 보다 분명하고 체계화 시켰다는데 있습니다. 이는 바흐의 가장 취약점을 보충했다는 점에서 동시대를 살아간 양대 거장들이 정말 신의 의지에 따라 살아간 것이 아닌가하는 숙연한 마음을 갖게 합니다. 다시 말해서 바흐와 헨델은 1685년 동시에 독일에서 태어났고 평생 한번도  만난 적은 없지만 약속이나 하듯이 상대방의 장점을 인정하면서 자신만의 영역을 개척해 나가는 순수한 열정을 보여주었다는 점입니다.

관현악과 독주악기를 위한 협주곡, 그리고 미사음악 전문작곡가로서의 바흐, 오페라와 오라토리오 같은 독창과 합창음악, 교회합창곡과 오르간과 협주곡 전문작곡가로서의 헨델은 일부 중복되는 영역이 있기는 하여도 대부분 상대방의 취약한 부분을 전문으로 작곡한 음악가였습니다. 두 사람은 상호보완적인 작곡가였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합창양식에서 헨델의 모험은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오페라나 오라토리오에서 흔히 음악적인 부분이 강조되다보면 독창자의 기교가 중요시되고 그러기위해서는 아리아 같은 기교적인 부분이 강조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러나 헨델은 아리아보다는 개인의 기교를 무시하는 합창부분을 특히 중요시 했다는 점이 특징입니다. 또한 합창음향의 극대화를 위해 남성의 음역을 최대한 높히고 여성의 음역은 최대한 낮추어서 전체적으로는 합창이 표현할 수 있는 가장 극단적인 음향을 추구했다는 점이 후세의 작곡가들에게 보여준 중요한 가르침이라 할 것입니다.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다음호부터는 고전주의 음악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