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로 읽는 서양음악사6

  1.봉건주의와 시민사회
  
지난 호에서 17세기 말 18세기 초를 <폭풍전야>라고 표현 한 것 기억나시죠. 서양사에서는 “질풍노도(Sturm und Drang)시대”라고 하는데, 오늘은 그 폭풍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아보고 그러한 생각들이 음악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그리고 어떤 음악을 탄생 시켰는지, 살펴보도록 하지요.

유럽에서의 18세기는 정치사회사적으로 매우 큰 격변과 격동의 시기를  맞게 됩니다. 이는 기존의 정치권력이나 종교적 권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변화에서 출발합니다. 즉, 15~6세기는 종교의 도덕성에 큰 타격을 입히는 여러 가지 사건들이 일어나고, 이것은 사람들의 본성적 욕구와 정면으로 충돌하게 되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다른 하나는 일부 귀족계층의 부도덕한 사치와 부패가 결국 권력에 대한 도전으로 나타나게 되는 현상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본성적으로 동물적인 욕구를 가지고 있다고 하지요. 예를 들면, 자손을 남기고 싶은 성적욕구, 생명을 지키려는 안전욕구, 생명을 유지하려는 식욕이 그런 것인데요, 이러한 욕구를 제지당하게 되면 언젠가는 그 욕구가 터져 나오게 됩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왜 18세기에 들어서서 이러한 인간의 본성이 충돌하고 결과적으로 인류의 삶의 패턴이  뒤바뀌게 되는 사건이 일어나게 될까요. 사실 봉건주의시대에 권력의 양대 축이라 할 수 있는 정치세력과 종교적 권위는 오늘날 민주주의 국가에서 사법과 행정의 권력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군주의 존재는 오늘날 입법, 사법, 행정의 절대 권력을 한 몸에 쥐고 있다고 볼 수 있지만 그에 대응할 수 있는 힘은 오로지 종교의 권위였습니다. 그래서 한 나라의 왕이 왕으로서 권위를 인정받기 위해서는 종교지도자의 인준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한나라의 군주는 자신의 절대적 힘을 하나님의 대변자인 교황의 인준과 허락을 얻음으로써 배분받게 되며, 이러한 신권의 일부를 국민들에게 선포함으로써 절대 권력의 기반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형식적 절차도 18세기에 나타나는 많은 문학가와 철학자,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과학자들의 출현으로 큰 위기에 봉착하게 되는데, 이것이 계몽주의(Aufklärung)사조의 등장입니다.

계몽주의는 인간의 정신세계를 이성과 논리를 통해 체계화함으로써 인간 삶을 위시한 자연계의 모든 현상을 물리적으로 이해하고 이를 실생활 속에서 이용하려 하였습니다. 즉 자연과학의 발달이 가져다주는 삶이 가장 행복한 것이고 이성적이며 문명적인 생활이라고 본 것이지요. 그러나 이러한 인간의 이성적 사고의 결과는 봉건체제에 대한 도전으로 나타나고 서서히 유럽사회는 민주사회에 대한 열망으로 재편되기 시작합니다.  

  2.베니스와 안토니오 비발디
  
<비발디>(Antonio Vivaldi : 1678~1741) 하면 많은 사람들은 <사계>(四季)를 떠올립니다. 이 음악은 계절의 바뀜에 따른 세밀한 자연묘사와 현악기들의 세련되고 맑은 음향, 과장되지 않은 깔끔한 사운드가 현대인들의 복잡한 마음을 말끔히 씻어줄 수 있는 매력을 가졌다고 봅니다. 그런 이유로 이 곡은 사람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비발디가 살았던 18세기 베니스는 유럽음악의 중심적 도시로서 6개 이상의 오페라단이 상설되어 있었을 만큼 음악을 사랑하는 도시였습니다. 이 오페라단은 혹한기와 혹서기를 뺀 8개월 동안 항상 공연을 했다하니, 요즘 서울과 비교해 보더라도 참 놀라운 일입니다. 더구나 아무리 베니스라 해도 오늘날의 도시규모에 비하면 인구도 훨씬 적고 극장시설도 매우 열악했을 텐데 말입니다. 그럼에도 베니스 사람들의 오페라 관람 열기는 대단했던 것 같습니다.

요즘도 드라마나 영화가 인기 있는 오락물이듯이 당시 베니스는 오페라라고 하는 복합공연물이 재미있는 예술장르로 각광받기에 충분했던 것이지요. 이것은 당시 베니스의 시민들은 1년에 10개정도의 오페라를 관람할 정도였고 늘 새로운 오페라나 음악의 출현을 고대하고 있었다는 점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비발디는 1678년에 성 마르코 성당 악장의 아들로 태어나 부친의 사제직에 대한 간절한 소망과 자신의 음악적 재능을 살려 두 가지를 공부 했습니다.

우리가 음악의 아버지라고 일컷는 J.S.바흐가 1685년에 태어나니까 비발디보다 7년 후배인 셈이지요. 사실 당시 바흐와 비발디는 시기적으로 동시대인이었고 같은 기독교인이었지만 음악적 세계관은 조금 달랐던 것 같습니다. 물론 비발디는 가톨릭 신부로서 음악을 공부했고, 바흐는 개신교 신자로서, 평신도로 살아온 배경이 조금 다르지만 그 시대를 리드하는 음악가였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공통점이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그 두 사람은 기독교인으로서 신실한 영적 삶을 영위했지만 음악작곡의 방법에서는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한편, 이 당시 베니스의 수도원 에서는 교회성가 전문가를 기르기 위해 고아나 사생아를 위한 음악교육기관이 운영되었는데, 이는 교회로서 불우한 이웃을 돕는 일과 교회의 중요한 구성원을 양성하겠다는 두 가지 목적을 달성하는 셈이었죠. 이 수도원식 음악교육기관은  철저한 음악교육이 계획표에 따라 이루어졌고, 자연히 재능 있는 어린이가 발굴 육성되어 훌륭한 사제나 음악가가 만들어지게 되었습니다.  

3.비발디음악의 특징
  
  비발디의 음악이 동시대의 J.S.바흐의 음악과 다른 면이 있다면 그것은 선율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느냐, 아니면 음향적 색채감을 선호하느냐의 차이가 될 것입니다.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이후 북유럽을 중심으로 튼튼하고 단순한 멜로디를 강조해왔던 개신교의 음악은 바흐에 이르러 최고의 예술적 종교음악으로 등장합니다.

기독교 신앙이 철저했던 바흐의 칸타타나 미사음악들은 대위법적인 선율을 강조하는 전형적인 바로크음악입니다. 그러나 비발디로 대표되는 남유럽 즉 이탈리아나 프랑스 남부 그리고 오스트리아 등지의 음악은 비발디의 색채적 음향을 중시하는 시각적 음악이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관현악곡들을 보면 리듬감이 뚜렷하고 선율이 신선미가 있으며 관현악적 색채감이 선명하여 듣는 이로 하여금 깨끗하고 순수한 숲속의 향기를 느낄 수 있는 음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비발디의 관현악기법으로 특징적인 것은 <콘체르토 그로소>(Concerto Grosso)라는 형식이 있는데, 돋보이는 박진감과 깔끔한 선율선(旋律線)을 가진 협주곡의 원형입니다. 이것은 독주를 맡은 소수의 빠른 악기 군과 반주를 맡은 느린 템포의 다수 악기 군이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서로 경쟁적으로 움직이는 형식을 말합니다. 흔히 20~25명의 현악기 주자(奏者)와 <하프시코드>(Harpsichord), 그리고 오르간 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보통 빠른-느린-빠른 3개의 악장으로 되어있고 사계에서 보듯 4개의 악장으로 구성된 경우도 있습니다.

비발디 음악이 가진 매력이랄까, 독창적 특징을 관찰해 보면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화성적 구성이 대위법적 선율보다 더 중요시 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음악이 절도 있는 흐름과 균형미를 갖춤으로써 당시 이탈리아 사람들의 취향을 잘 표현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 하나는 솔로를 맡은 독주군(獨奏群)에게 기교적으로 화려한 악절을 연주하게 하여 반주군(伴奏群)과 대비를 이루게 하였는데, 이는 음악의 긴장감과 박진감을 잘 이끌어 내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음악의 악절이나 주제 등의 새로운 기법을 통해 비발디는 극적인 장면을 연출하거나 음향적인 효과를 극대화하기도 했습니다.  그 외에도 비발디는 조성감(調性感)이 분명하다거나, 프레이즈(樂節)가 길고 느린 선율들로 사람들에게 충분한 휴식감과 평안을 주는 음악으로 남아있다는 점입니다. 그의 이러한 음악적 선명성(鮮明性)과 휴식감은 바로크라는 거대한 음악사적 흐름 속에서 분명한 이정표를 만들어 주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공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은 안토니오 비발디의 음악과 그 음악의 탄샌배경을 알아보았습니다. 다음 달에는 음악의 아버지라 불리는 요한 세바스찬 바흐의 음악과 삶을 알아보는 시간을 가지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