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사형수 김용제 이야기)

1997년 겨울 한반도는 추웠다. ‘6·25 이후 최대의 국난’이라는 아이엠에프(IMF) 사태가 온 나라를 먹장구름처럼 뒤덮고 있었다. 그 엄혹했던 한 해가 다 가기 직전의 12월31일 조간신문 한 귀퉁이에 또 하나의 살벌한 소식이 실렸다. “23명 사형, 15년 만에 최대 규모.” 법무부는 “장기 미집행 사형수가 너무 많아 교도소의 수용 부담이 커졌기 때문”이라고 했다. 16년 전 분위기가 어땠는지는 모르겠으나 요즘 사형을 집행한 다음 비슷한 말을 했다면 법무부 당국자는 엄청난 곤욕을 치러야 했을 것이다. 세상에 ‘수용 부담’ 때문에 스물세명의 목을 매달다니.

그 23명의 사형수 가운데에는 나이 서른도 안 된 김용제라는 청년이 있었다. 그가 대법원 확정 판결로 사형을 선고받은 것은 1991년 11월30일로, 꼭 6년1개월 동안 사형수로 지낸 셈이다. 그사이 몇 번의 집행을 모면했지만 결국 사형대 앞에 서게 됐다. 그는 자신을 돌보아 온 수녀에게 이런 유언을 남겼다고 했다. “‘인간 대접을 해주신 것에 감사드리며 짧으나마 인간답게 살고 갑니다.” 그는 어떤 사연을 뒤로하고 밧줄을 목에 받았던 것일까.

“인간이 다 개로 보였다…더 못 죽인 게 한”

1991년 10월19일은 토요일이었다. 가을의 절정이었지만 만날 애인 하나 없던 불우한 청년들은 도서관에 틀어박히거나 동아리방에서 기타나 두들기고 있어야 했고 나도 그중의 하나였다. 시커먼 복학생들이 옹기종기 모여앉아 술추렴을 하기 시작하던 즈음, 갑자기 한 후배가 들어서더니 황망한 소식을 전했다.

“트럭 한 대가 여의도 광장을 싹 쓸어버렸대요. 수십명이 죽었대요.” 인터넷은 고사하고 컴퓨터도 귀하던 시절, 무슨 일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뉴스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여의도에 우리 조카 사는데….” “야, 아무개도 오늘 거기 데이트 갔어.” 불안한 시선과 쫑긋 세운 귀로 뉴스를 맞이한 우리는 후배의 전언만큼은 아니라 해도 여의도 광장에서 벌어진 엽기적인 사건에 말을 잃었던 기억이 난다.

지금처럼 공원이 조성되기 전, 한때 비행장으로까지 사용되었을 만큼 드넓었던 여의도 광장은 주말을 맞아 인파로 그득했다. 가족끼리 연인끼리 자전거를 타며 내지르는 환성과 학생들의 새된 웃음소리, 모처럼 가족들끼리 손잡고 거닐며 나누는 담소 소리에 여의도는 시끌시끌했다. 언제부턴가 광장 한켠에 서 있는, 흰색 프라이드가 부릉거리며 들썩일 때 아무도 그에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누군가의 시야에 흰색 프라이드의 움직임이 들어왔다. ‘제 갈 길 가겠지.’ 그러나 머금고 있던 미소를 풀지 않고 있던 사람들의 얼굴은 급속도로 얼어붙었고, 입에서 나오는 비명의 데시벨은 점점 높아갔다. “어 어 어 어 저 미친놈이!”

흰색 프라이드가 마치 영양 떼를 덮치는 사자처럼 인파 가운데로 달려들었던 것이다. 비명과 엔진 소리가 여의도 광장의 하늘을 찢었고, 눈 깜짝할 사이 프라이드의 작달막하지만 튼튼한 몸체는 여러 사람들을 치받았다. 일단의 희생자들을 짓밟은 차는 맹수처럼 포효하며 방향을 바꿨다. 부웅 부우웅. 죽을힘을 다해 넓디넓은 광장에서 벗어나려는 사람들을 향해서 자동차는 다시금 전속력으로 달려들었다. “도망가는 사람은 끝까지 쫓아갔다.” 훗날 김용제의 회고다.

좌충우돌하던 자동차는 자전거 대여소 시설물에 부딪치면서 멈춘다. 여기서 천만다행한 일이 생겼다. 앞바퀴에 뭔가 끼면서 차 시동이 꺼진 것이다. 운전자는 계속 기어를 조작하며 차를 움직이려고 기를 썼다. 그러나 차는 다시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까지 넋을 잃고 있거나 망연히 서 있던 사람들이 차로 달려들었다. 그때 차 문을 열고 모습을 드러낸 건 나이 스무살을 넘었을까 말까 한 젊은이였다. 인상도 그리 험악하지는 않았지만 손에 든 등산용 칼에는 명백한 살기가 서려 있었다.

정체불명의 괴한과 몇 명의 시민들이 대치했다. 도망가던 괴한은 소녀 하나를 인질로 잡았다. 겁에 질린 소녀가 울부짖자 그는 칼을 휘둘러 그녀의 배를 찔렀다. 이때 또 하나의 천우신조가 일어났다. 그 칼이 허리띠 버클에 걸렸고 소녀는 무사했던 것이다. 그 순간 에워싸고 있던 사람들이 범인을 덮쳤다. 그중 한 명이 범인의 팔을 낚아챘고 어지러이 몽둥이질이 이어졌다. “잡았다!” 범인은 그 자리에서 맞아 죽었어도 할 말이 없었을 것이다. 이미 그가 지나온 타이어 바퀴 자국 위에서 두 명이 숨을 거뒀고 스무명이 넘는 이들이 피를 흘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마가 찢어져 피가 철철 흐른 상태에서 영등포경찰서로 끌려간 김용제는 기자들의 질문에 악다구니로 답한다.

“사람들이 마냥 즐겁게 노는 것을 보니 내 처지가 원망스럽고 세상에 대해 뭔가 복수를 하고 싶었다.”

“술 마셨습니까?”

“안 마시고 맨정신으로 그랬다! 인간들이 다 개로 보였다. 더 못 죽인 게 한이다!”

처음에 액셀러레이터를 밟아 사람 하나를 친 뒤 그는 아예 눈을 감고 이어폰에서 들리는 팝송만 들으며 가속페달에서 발을 떼지 않았다고 했다. 그의 차 안에는 이런 유서(?)가 남아 있었다. “괴로워 죽고 싶다. 오늘 세상을 하직하기로 했다. 그렇잖아도 힘겨운 세상, 눈까지 나빠 더욱 괴롭다. 세상이 싫다.” 스무살의 청년에게 세상은 왜 그렇게까지 힘겨웠던 것일까.

3심 내내 사형선고 받은 ‘젊은 악마’

김용제는 충북 옥천의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청각장애인이었고 어머니는 역시 눈이 심각하게 나쁜 장애인이었다. 김용제는 선천적 약시였는데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유전적 장애로 보인다. 몇번의 가출과 귀가 끝에 어머니는 끝내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았고 아버지는 실의 끝에 농약을 먹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김용제의 삶은 기구하면서 동시에 불량했다. 중국집 배달원, 멍텅구리 배 선원, 공장 직공 등 안 해본 일이 없었지만 그의 눈이 항상 문제가 됐다. 주소를 보지 못해 헤매는 배달원과 공장 기계에 부딪치기 일쑤인 직공을 용납하는 사장은 드물었다. 심지어 오는 손님한테 인사만 하면 되는, 즉 시력과는 관계없는 나이트클럽 웨이터 일을 얻고 좋아했지만, 그는 왕림한 나이트클럽 사장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손님 어서옵쇼!”를 부르짖다가 바로 잘렸다. “어느 놈이 현관에 소경을 세워놨어?” 사장의 호통이었다.

김용제도 열심히 살아보려다가 장애 때문에 좌절한, 그저 순박한 청년만은 아니었다. 김용제가 자신을 돌보던 수녀에게 보낸 편지들을 모은 책 <마지막 사형수>에 보면 짧은 생 동안 그가 거의 모든 범죄를 저질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절도, 강도, 방화 등등. 하지만 그의 편지를 읽어내려가다 보면 또 하나의 사실을 알게 된다. 그가 막다른 고갯길에서 범죄의 검은손을 여러 번 쳐들었을지언정, 그 고개와 고개 사이의 능선길에서는 필사적으로 정상적인 삶을 살아 보려고 애썼다는 사실이다. 모든 노력은 결국 암담한 절망에 뒤덮였다.

 

생을 포기한 상태에서 김용제는 그때껏 자신을 내리누르던 세상을 향해 온갖 가시들을 창처럼 내뻗은 거대한 고슴도치가 된다. 이 고슴도치는 여의도 광장을 미친 듯 질주했고 두명의 사망자를 비롯해 수많은 희생자를 냈다. 시민들의 분노는 대단했다. 당시 현장 기사를 보면 “그놈을 제가 한 그대로 차에 깔아뭉개 죽여 버려라!”는 목소리도 들린다. 스무살 김용제는 ‘젊은 악마’가 되어 3심 내내 사형을 선고받고 사형수가 된다.

희생자 가운데 윤신재라는 6살 아이가 있었다. 세발자전거를 타고 여의도 광장을 앙증맞게 달리던 아이는 차에 치여 그 자리에서 숨졌다. 그 아이를 자기 손으로 키우다시피 했던 할머니는 그야말로 목이 찢어지도록 악을 쓰고 싶은 심경이었을 것이다. 직접적인 피해를 입지 않은 시민들이 “차로 갈아 죽여라!” 하고 부르짖는 판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쌍둥이 남매 중 사내아이가 한 미치광이 때문에 생명을 잃다니.

김용제가 사형선고를 받은 뒤 할머니는 그를 찾아간다. 자신에게 허리를 끊는 아픔을 준 범죄자가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놈인지”를 궁금해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누구나 현장검증 때 마스크에 모자를 쓴 범인을 보면 “모자 벗겨!”를 부르짖지 않는가. 아마 할머니도 그랬을지 모른다. 신앙의 힘을 빌려 용서하는 마음도 가지려고 애썼겠지만, 또 그를 이유로 이뤄지기 힘든 면회도 가능했을 것이지만, 대체 누군지 얼굴이나 보자는 마음 또한 컸으리라.

그때 할머니가 본 것은 그야말로 ‘사시나무 떨듯’ 벌벌 떠는 모습이었다. 눈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잘못했습니다”를 연발하는 김용제를 보면서 할머니는 그 마음을 누그러뜨린다. “공포에 떨고 있는 용제의 모습을 보고는 그러한 범행을 저지르게 한 책임이 우리 사회에도 있구나 하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내 손자라 여기고 사랑을 심어주려 합니다”

그리고 할머니는 손자의 원수의 옥바라지에 나선다. 책 <마지막 사형수>에 나오는 김용제의 편지에는 할머니의 모습이 이렇게 담겨 있다. 어느 날 할머니는 김용제를 위해 유명한 안과 의사와 함께 방문하여 안경을 맞춰 준다. 안경 정도로는 그의 약시를 보완할 수 없었지만 김용제는 “헛수고인 줄 알았지만 물리칠 수 없었다.” 할머니는 자신이 건넨 안경을 쓴 김용제와 함께 성경을 읽는다. 고린도전서 13장 ‘사랑’의 장이었다.

“사랑은 오래 기다립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으며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고 이익을 추구하지 않으며….” 김용제는 할머니가 성경을 읽으며 하염없이 울었다고 했다. 아마 그도 숨죽여 울었을 것이다. 특히 그 다음 구절을 그들은 이를 악물고 읽었을 것이다. “성을 내지 않으며,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부모로부터 이어진 가난과 장애, 사회로부터 별다른 돌봄 없이 내동댕이쳐진 생. 그 속에서 키운 분노와 앙심으로 악마가 됐던 김용제와, 그 소행에 천금 같은 손자를 잃은 분노와 앙심을 뼈를 깎듯 도려내고 그와 함께 성경을 읽는 할머니. 그들은 울먹이면서 그 구절을 읽어 내렸을 것이다. 마지막 한마디는 두 사람 모두에게 쉽지 않았을 것이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앞으로 견딜 일은 둘 다에게 많았다.

할머니의 남편이 화병으로 세상을 등졌고, 자식의 죽음으로 상심한 며느리도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 죽음들 앞에서 어찌 “성내지 아니하고 앙심을 품지 아니할” 수 있었으며, “모든 것을 견디기가” 쉬웠을까. 그러나 할머니는 김용제의 불운한 과거 속에서 용서의 열쇠를 찾는다. 그리고 김수환 추기경과 함께 김용제의 감형을 탄원한다.

“지독한 근시에 어머니의 가출과 아버지의 죽음, 가난 속에서 세상에 대한 원망과 자포자기의 몸부림은 어쩌면 우리 사회의 책임도 있습니다. 따뜻한 사랑과 행복한 가정을 가졌더라면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내 손자라고 여기고 무엇보다 사랑의 마음을 심어주려고 합니다.”

할머니의 사랑과 용서도 헛되이 1997년 12월30일 그는 대한민국에서 집행된 (현재까지) 마지막 사형수 명단에 올랐고 교수대에서 생을 마친다. 김용제는 재소자가 새로 들어올 때마다 엎드려 통사정을 해서라도 그 발을 씻어 주며 죄를 씻기를 바랐다고 한다. 굶주리는 북한 어린이들을 생각하며 꼬박꼬박 금요일 점심을 굶기도 했다. 그 모범수 김용제는 입회인들이 흐느끼자 “울지 말라”고 달래기까지 한 뒤 교수대에 섰다. 약시였기에 안구를 기증할 수 없었던 그는 신장 기증 의사를 밝혔지만 아쉽게도 실패했다고 전한다.

그의 범죄는 이른바 ‘묻지마 범죄’의 원조 격에 해당한다. 특정한 누군가를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아무나 죽어라” 하고 불쑥 자신의 속에서 키워온 강철 가시로 전혀 관련 없는 누군가를 찔러 버리는 범죄 말이다. 그렇기에 그는 더욱 주목받았고 사형을 면하지 못했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요즘 우리는 뻔질나게 일어나는 ‘묻지마 살인’에 직면하고 있다. 몇 년 전 한 살인범은 길을 가다가 “행복한 웃음이 들려” 그곳으로 찾아가 칼질을 했고 한 가족을 송두리째 파멸시켰다.

그런 소식을 들을 때마다 우리는 세상이 왜 이렇게 험해졌지 한탄하고 “그놈들이 한 그대로 그놈들을 죽여라”라고 분노한다. 바로 우리가 그 세상의 까칠함에 돌기를 더하고, 냉혹함에 냉기를 더하며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망각하면서.

며칠 전 한 어머니가 발달장애 아이를 도무지 감당할 수 없고, 모든 수용시설에서 아이를 거부하는 상황에 직면하자 아들을 죽이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린 기사를 읽었다. 언젠가는 “어머니의 상처가 썩어가도록 외면하는 불효자식”에 대한 제보를 받고 취재해 봤더니, 그는 비정규직으로서 병든 어머니와 지적장애인 여동생을 부양하던 노총각이었다. 나는 그를 만나지 못했다. 사전 취재를 가기도 전에 목을 매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이런 일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심하게 말하면 일상처럼 일어나는 세상에서 우리는 살아간다. 누가 밥을 굶든, 시름시름 앓든, 어디에 올라가서 농성을 하든, 세상은 돌아간다. 누가 자살이라도 하면 의지박약한 놈이라고 탓이나 하면 되는 세상이 아닌가. 그렇다면 그 한켠에서 누군가 허옇게 눈을 뜨고 차의 운전석에 앉아 분노로 가득 찬 얼굴로 우리를 노려보게 되는 일이 결코 특별한 일은 아닐 것이다. 과연 우리의 ‘사랑’이 그들의 ‘앙심’과 ‘분노’를 다독일 힘이 있는가. 과연 우리는 그들더러 ‘모든 것을 견디라’고 설교할 깜냥이 남아 있는가. 2013년 세밑, 우리는 김용제와 그를 용서했던 할머니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