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회자 전문잡지인 ‘목회와 신학’ 2000년 3월호에 게재되었던 내용입니다.

최근에 한국 기독 출판계의 베스트셀러로 떠오른 가계에 흐르는 저주류의 책들을 읽은 지역교회 신자들의 신앙생활에는, 몇 가지 염려스런 징후와 변화가 엿보인다. 필자는 수차에 걸친 필자 자신의 목회상담과 동료 목회자들과의 진지한 토론을 통하여 다음의 몇 가지 ‘조상탓 신앙’의 염려스런 징후를 조심스럽게 지적한다.

‘조상탓 신앙’은 영적 두려움에 휩싸이게 한다. 첫째, ‘조상 탓 신앙’의 크리스천들은 거듭난 후에도 여전히 회심 이전의 저주가 사라지지 않는다는 비정상적인 영적 두려움에 휩싸여 있는 징후를 보인다. 성경은 구약의 모든 저주는 언약의 파기 시에 그 언약 백성에게 임하는 것임을 지적하고 있다(출 20:4~6; 34:6~7; 신 7: 9~10; 민 14:18 등). 그리고 이 저주는 구약의 옛 언약 하에서는 분명히 그 자손에게 영향을 미친다(렘 32:18; 렘 16:10~13).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모든 옛 언약 파기의 죄와 저주를 십자가에서 다 지시고 속죄하신 신약시대에도 옛 언약의 죄와 저주가 새 언약 하의 그리스도인에게 여전히 영향을 미친다는 것인가? 결코 그럴 수 없다.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대속의 효과는 ‘죄에 대한 책벌’과 그 결과로써의 ‘저주’를 단숨에 사라지게 한 ‘영 단번’(Eternal Once)의 속죄사역인 것이다.

물론,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에 의해 옛 언약 하의, 혹은 회심 이전의 ‘죄책과 저주’가 하나님과의 법률적, 관계적 차원에서는 단번에 영원히 사라졌다 해도, 죄는 아직도 우리의 육체에서 여전히 왕 노릇하며 그 오염과 부패성을 우리의 삶 속에서 명백히 드러낸다. 그래서 우리는 로마서 7장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갈등을 거듭난 이후에도 계속 직면케 되며, 육체의 소욕과의 싸움을 계속 아니 할 수 없는 것이다. 죄가 우리 몸에서 왕 노릇하지 못하고, 몸의 사욕을 좇지 못하게 하려는 ‘거룩한 싸움’을 성화의 과정에서 계속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일부 신도들은 그들의 반복되는 죄의 심각한 내적 오염과 무의식적 영역에서 저항하기 힘든 중독성, 그리고 심지어는 유전적인 기질과 선천적인 오염 앞에서 깊이 절망하게 되는 법이다.

조상을 통한 오염과 부패는 있어도 저주는 없다. 필자는 그동안 20여 년 동안의 목회현장에서 이런 죄의 처절한 속박 밑에서, 알콜 중독과 니코틴 중독, 성 중독, 혹은 소비 중독 등에 시달리며 반복되는 자신의 죄에 대하여 스스로 저항하기를 포기해버리고 좌절해 버린 수많은 어두운 영혼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들에게는 분명 자기 의지의 한계와 도덕적 절망 속에서 수없이 반복하여 부르짖던 기도와 때로는 일시적인 성령체험에도 불구하고, 곧 또다시 무너지고 마는 자신의 내적인 부패성 앞에서 ‘이해할 수 없는 의혹’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왜 나는 항상 이럴까?” 라고….

이들에게 그 죄의 연원이 ‘당신’이 아니라 바로 ‘조상’에게 있으며 그 집안에 흐르는 무서운 ‘저주’에 그 뿌리가 있다는 것. 그래서 당신은 당신의 인격적 노력으로 결코 그 반복되는 죄의 악습을 극복할 수 없노라는 설명은 굉장히 매력적인 것이 된다.

인간은 언제나 자신의 내부의 약점을 환경 탓, 혹은 조상 탓으로 되돌리려고 하는 책임회피의 유혹에 직면하게 된다. 필자는 거듭난 성도에게도 여전히 옛 죄의 오염과 부패가 남아 있으며, 그 뿌리에는 조상으로부터 내려온 유전적이고 영적인 영향력이 존재함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가계에 흐르는 오염, 혹은 부패, 혹은 기질적 유전적 결함’이라고 부를지언정, 결코 ‘저주’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구약의 그 모든 ‘언약적 저주’는 그리스도의 새 언약 하에서는 모두 사라졌으며, 신약 성도들에게는 다만 ‘사랑의 징계’만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 그리고 사랑의 징계’가 있을 뿐, 옛 언약 하의 그 무시무시한 ‘언약 파기의 저주’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기 때문이다. 구약의 저주란 ‘은혜의 단절’을 가리키는바(렘 16:13), 어찌 그리스도 안에 있는 거듭난 성도에게 ‘은혜 밖의 저주’-‘율법의 저주’가 현존할 수 있단 말인가 ?필자는 성도의 삶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심각한 ‘조상으로부터의 오염과 부패’는 분명 있을 수 있어도, 결코 ‘저주’는 없다는 사실을 성도들이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우리 목회자들은 이것을 교우들에게 확실히 알리고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둘째, 인격적 만남보다 신비적 경향을 더 선호한다. 가계 치유자들의 권면은 신자로 하여금 신앙생활 중 ‘사죄의 확신’을 풍성히 누리지 못하게 하며, 십자가 은혜의 ‘인격적 만남’보다는 ‘신비적 만남’을 더 선호하는 경향을 갖게 한다. 이들은 ‘조상으로부터 내려온 저주’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개인적인 죄의 고백을 통한 인격적인 사죄의 확신’만으로 부족하다고 여긴다. 그래서 ‘인격적인 의뢰를 통한 그리스도와의 속죄체험’보다는, 조상으로부터의 저주와 악령의 영향력을 원천봉쇄 시켜주는 이른바 ‘비인격적인 의뢰’, 즉 ‘신비적인 의뢰’와 ‘자신의 의지적인 결단이 전제되지 않는 기도’를 선호하는 도피적 경향을 드러낸다.

특히, 이들은 한 인간의 인격적 개체성보다는 인간의 “연대성/집단성”(Corporate Per- sonality)을 강조하며, 악령이 이 연대성의 원리에 의해 부모의 죄를 통해 많은 신생아들에게 직간접으로 침투한다고 주장한다(이윤호,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이렇게 끊어라」, 117쪽). 이런 악령을 ‘가계 영’(Family Spirit)이라고 부르며, 그 후손은 본인의 의지나 본인의 인격적 동의가 없이도 이 귀신의 영향을 받거나 침입을 받는다고 주장한다.

이 점에 대해 필자는 다른 의견을 제시한다. 물론 사람은 설혹, 이런 ‘가계 영’(Family Spi- rit)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하더라도, 그 귀신의 영향력을 자신의 의지로 극복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인격적으로 거부할 때에는 악령이 임의로 들어올 수 없다는 사실이다. 더욱이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거듭난 인격’으로 성령 안에서 이미 이런 ‘가계 영’을 위시한 모든 악령들의 영향력에 대하여 대적하고 싸울 수 있는 ‘능력과 권세’(Power and Authority)를 부여받았으므로, 자기의 인격적 동의 없이 조상의 죄나 저주에 의해 자동적으로 악령이 들어오고 그를 지배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에게 임한 성령의 권능은 원천적으로 이미 악령의 지배, 죄와 사망의 지배에서 그를 해방시켰기 때문이다. 비록 그가 육에 속한 그리스도인이 되어 다시 죄와 사망, 육신의 생각, 몸의 사욕, 악령의 영향 하에 산다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인격적 태도 여하에 따른 것이다. 그가 그 후 다시 자신의 삶을 전인격적으로 회개하고 사죄의 확신 속에서 성령의 충만을 구하며 성령의 능력과 권세 아래서 은혜의 삶을 살기로 작정하면, 언제든지 그 모든 어둠의 권세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이처럼 놀라우신 하나님의 은혜는 자신의 인격적 결단(회개와 간구)에 따라 전심으로 구할 때 전적으로 부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성도의 인격적 결단의 중요성을 무시하고 약화시키는 귀신론은, 성도로 하여금 자포자기 하거나 자신의 인격적 결단없는 의존 -일종의 주술적이고 신비적인 비인격적인 의존- 을 강화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그래서 조상탓 신앙은 알게 모르게 ‘은사 의존성’ 혹은, ‘카리스마적 지도자에 대한 노예적 의존’의 경향을 무의식적으로 강화시키는데, 이는 십자가의 은혜를 ‘인격적 만남’을 통해 누리게 하기보다는 ‘신비적 만남’을 통해 누리게 하는 신학적 경향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리스도의 언약적 대표성은 인간으로서의 연대성에 의해 저절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나의 전인적 신앙고백과 결단에 의해 새 언약 관계 속에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기억해야 한다. 우리의 신앙은 한마디로 인격적, 언약적 신앙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 거듭난 이후에도 부정적 자아상을 강화시킨다. ‘가계 치유자들이 권하는 신앙노선’은 자신의 거듭난 이후의 상태를 저주상태(Under Curse Condition)로 파악하는 신학적 오해와 신앙적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래서 아직 ‘부정적인 자아상’을 거듭난 이후에도 계속 강화시키는 경향을 보인다. 이들은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신자의 ‘위치와 신분’(Position and status)에서는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되었지만 ‘상태’(Condition)에서는 여전히 ‘육신과 세상과 사탄의 공격 및 조상의 죄로 인해 대물림된 저주로부터 구원받아야 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이윤호, 131쪽). 필자는 이런 입장에 있는 분들이 ‘저주’(Curse)라는 용어를 좀더 신학적으로 바로 사용하기를 바란다. 차라리 ‘대물림된 저주’라는 용어 대신에 ‘영향 받은 부패성’이란 용어를 사용한다면 신학적 혼돈을 훨씬 덜 초래할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라고 하였는데, 이는 ‘대속적인 저주를 받음’으로써 그 결과로 우리는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 받은 것’이다(갈 3:13). 바울은 그 후 자신이 육체의 소욕과 싸우는 성화과정, 즉 칭의에서 출발하여 영화를 향해 나아가는 순례의 상태(Condition of Pilgrim)를 한번도 ‘저주의 상태’(Condition of Curse)라고 쓴 적이 없다. 이것은 오히려 은혜 아래의 상태라고 강조하였다(롬 6:14). 그리고 성화의 과정 중에서 ‘영화에 대한 소망’과 ‘믿음’을 피력할 때마다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롬 8:34), ‘누가 끊으리요’(롬 8:35)라고 거듭 승리의 확신에 잠겨 적극적인 감사와 찬양을 외치는 것이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가계 영, 악령 등의 총칭)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조상과 관련된 과거의 일로 포함되는 시간의 총칭),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공간의 총칭)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이와 같은 긍정적인 신앙의 자아상은, 거듭난 성도는 구약이나 조상의 저주 아래 있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아래 있음을 확신할 때에 나온 것이다. 이런 확신이야말로 칭의의 신분과 위치에서 영화를 지향한 성화의 상태에 있는 그리스도인이 반드시 가져야 할 ‘거듭난 자아상’(Born Again Self-image)인 것이다.

넷째로, 가계의 영적 점검은 과거 지향적 사고다.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주장하는 이들은 그 ‘저주’를 ‘복’으로 바꾸는 신앙의 원리와 실천을 강조하는데, 필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얻은 은혜와 복’을 누리는 신앙의 원리를 가르치는 것이 더욱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저주’를 ‘복’으로 바꾸는 신앙생활의 전 3단계로,

(1) 가계의 영적 뿌리를 추적하라.
(2) 가계 위에 역사하는 하나님의 권세를 주장하라.
(3)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능력을 당신의 가계에 적용하라고 권한다.
(4) 당신의 가계에 저주와 악영향을 가져온 조상을 용서하라.
(5) 당신의 죄에 대해 회개하고 순종하라.
(6) 당신 가계의 무단 침입자를 축출하라.
(7) 하나님의 치유의 능력을 찬양하고 자신 및 가계를 축복하라고 권면한다.

여기서 필자는 가계 치유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와 능력을 주장하고 적용하며, 악령을 내쫓고 자손들을 축복하는 데 적용하는 일에 조금도 이의가 없다는 점을 밝히고자 한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새롭고 특별한 것이 아니라, 이미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교회가 자연스럽게 청하고 있는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는 사역인 것이다. 필자가 염려하는 것은 신자가 ‘가계의 영적 뿌리’를 추적해야 한다는 가계 치유자들의 과거 지향적 사고이다. 이들은 두 명의 부모, 4명의 조부모, 8명의 증조부, 16명의 4대조 조상 등 30명의 영적 뿌리를 추적하여 그 조상의 죄와 저주를 저지하여야 하며, 그를 위해 가계 점검표를 사용할 것을 권면한다. 그 목록표는 저주목록과 함께 다음과 같다 (이윤호, 155쪽).

(1) 주요 죄들: 우상숭배 및 사술·비술에 참여, 성적 범죄, 학대, 부모에게 불효·불공경
(2) 사탄과의 맹세, 계약, 헌신 혹은 자녀들의 이름을 절에 올리거나, 타인이나 바다 등에 판 경우
(3) 종교적인 성향: 다른 종교에 심취, 기독교 이단 혹은 사교집단, 조상 중 박수, 무당, 점쟁이가 있었는지의 존재여부, 조상 중 타종교의 지도자
(4) 반기독교적 (비밀) 이념·연구집단에 가담한 자: 공산주의
(5) 참혹한 일을 경험한 조상: 전쟁, 대형 화재, 홍수, 기근, 전염병 및 지진 등 자연재해
(6) 저주: 조상이나 자신들이나 후손에 대한 저주 혹은 타인에 의한 저주(이런 경우, 학대죄와 관련, 조상이나 자신이 저지른 저주 혹은 화를 불러온 사건을 찾는다)
(7) 신체적: 유전병, 암, 당뇨병, 관절염, 심장병과 같은 만성 질병, 신체적인 약점
(8) 중독적 생활 양상: 알코올 중독, 성 중독, 일 중독, 도박, 폭력, 마약
(9) 가정의 역사: 이혼, 중혼, 객사, 단명(요절), 사고사, 인공·자연유산, 자살, 담배
(10) 정신적인 질환: 정신병원 입원 경력
(11) 하나님 외에 다른 신들의 도움, 힘, 유익, 권리를 받은 경우: (기) 치료, 물질, 재능, 출세, 결혼, 출산이나 특별한 소원을 이룸
(12) 조상 혹은 본인의 신비한 경험이나 특별한 능력을 얻음.

믿음생활은 부활 중심적, 종말론적 삶이다. 물론 이들은 이 목록과 점검표는 조상을 정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당신의 문제의 조건을 발견하고 치유하는 데 있다고 주장한다. 설혹 그렇다하더라도, 이것은 지나치게 구약적이며, 율법적이며, 인과응보적이며, 과거가 현재를 규정한다는 과거 지향적 사고방식이요 접근방식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볼 수 없는 것들의 증거’로서, 믿음이란 ‘미래의 현재화’와 ‘하나님나라의 현실화’이다. 즉 성도의 믿음생활은 어디까지나 과거보다는 미래의 바라는 것들이 현재에 이르도록 하는 데 그 요체가 있는 것이다.

소경의 종말론적 미래는 눈뜨는 것이며, 앉은뱅이의 종말론적 미래는 일어서는 것이요, 귀신들린 자의 종말론적 미래는 귀신에서 풀려 주의 백성이 되는 것이고, 병자의 종말론적 미래는 건강하게 되는 것이고, 죽은 자의 종말론적 미래는 부활하는 것이다. 신약에서 예수님의 치유사역은 이 종말론적인 미래의 하나님나라의 권세와 능력이 이 현재 속으로 침투한 것이었으며, 믿음으로 하나님나라의 종말론적인 실제를 누리게 하는 증거였던 것이다. 즉,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볼 수 없는 것들의 증거인 것이다.

성도의 믿음생활은 그런 의미에서 미래지향적인 것이요, 종말론적인 것이요, 부활중심성의 신앙이다.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자의 현실을 ‘조상의 죄’로부터 그 원인을 찾으려는 영적 뿌리 찾기의 시도는 지나치게 과거 중심적이요 인과율(과거의 원인이 현재라는 결과를 만들었다라는 사고방식)적인 것으로 바리새파적인 해석체계인 것이다.

지난 4대조 30명의 조상들의 생애의 사적을 낱낱이 찾아 그 뿌리를 찾자는 소위 ‘영적 뿌리찾기’는 지나치게 소모적인 것이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불필요한 이전 것을 향한 노력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이 이미 지나갔으며, 그 어떤 과거의 일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는 무효한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고후 5:17).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빌 3:14~15).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착념치 말게 하려 함이라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딤전 1:4).
‘어리석은 족보 이야기에 대한 다툼을 피하라’(딛 3:9).

끝으로, 필자는 이 글이 가계 치유자들에게 냉혹한 비판이 되기보다는 보완적인 충고와 심사숙고의 계기요, 좀더 성숙한 열매를 맺기를 바람에서 쓰여졌음을 다시금 밝혀 둔다.

이문식/산울교회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