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 다시 보기(12) (민 14:13~19)

2024. 6. 16.(일)
박영선 목사
1. 내용

가. 서론

(1) 오늘 우리가 민수기 14장에서 만난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입국에 실패하는 장면이다.

하나님이 모세를 애굽에 보내어 그의 백성을 구출할 때 종 되었던 땅에서 해방되고, 약속의 땅 즉,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들여보내기로 약속했다.

애굽에서 나올 때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혼자 하신다. 백성들의 불만과 원망이 있어도 하나님이 밀어붙여서 구원이 이루어진다.

가나안에 들어갈 때 열두 정탐꾼 중 열 명이 반대한다. 싸워보나 마나 승산이 없다, 라고 하자 백성 모두 가 들고 일어나서 모세를 쳐 죽이려고 하고 분통을 터트린다.

하나님은 시내 산 금송아지 사건 때처럼 모세에게 나타나셔서 이 백성을 멸하고 너로 새 민족을 만들자, 라고 하신다.

(2) 모세의 답은 시내 산 때와 같았다.

하나님 진정하십시오.

이 표현은 낯설다. 우리는 신을 도무지 동등할 수 없는 높은 분으로 생각하고 떨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권위를 이렇게 생각하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은 부모 같은 분이다, 라는 것을 계속 강조한다.

우리는 이런 생각을 쉽게 갖지 못한다. 우리는 하나님과 조금만 친밀해져도 개판을 친다. 그래서 일정 부분 겁을 먹는 것도 필요하긴 하다. 그러나 실력만 생긴다면 우리에게 허락된 지위와 신분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를 깨우쳐야 할 것이다.

나. 본론

(1) 하나님이 오늘 본문에서도 시내 산 사건 때처럼 쉽게 받아들이시고 멸하기로 했던 것을 취소하신다. 그러나 말씀하신다.

이 백성은 가나안에 못 들어가고 40년 동안 광야에서 방랑 생활을 하다가 다 죽고, 출애굽 때 20세 미만이었던 후손들을 데리고 가나안에 들어가겠다.

생각해보면 출애굽은 열 가지 재앙과 홍해를 건너는 것 때문에 매우 강조되어 있다. 구약에서도 출애굽의 하나님이라고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특별한 의미가 되고 하나님께서 역사에 개입하신 증거가 된다.

그러나 출애굽은 가나안을 들어가기 위한 시작이다. 우리가 오늘 함께 광화문을 가자고 할 때 제일 먼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일단 이 교회를 나서야 한다. 가나안에 들어가려면 먼저 애굽에서 나와야 하는 것과 같다.

이 일이 너무 놀랍고 감격적인 일이어서, 어디를 가야 하는가, 는 잘 기억을 못 한다. 구원도 죄와 사망에서 꺼내어 천국에 가자는 얘기다.

우리가 천국을 다 사모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쉽게 들여보내 주지 않으신다. 구원을 얻었지만 고달픈 현실을 살게 하신다. 이 과정이 종종 구원론에서 빠지기 때문에 우리는 의심하거나 체념을 한다.
(롬 5:1~2) 종 되었던 자리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한다. 여기서 즐거워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알게 되고, 무엇을 베푸셨는지 알게 되고 어떤 목적이 있으신가를 알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기쁨과 감동의 외침으로 나온다.

(롬 5:3~4) 구원을 얻고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했는데 현실은 환난이다. 영광을 목적으로 시작된 구원에서 왜 처음 만나는 것이 환난인가?

우리는 예수를 믿었고 천국에 갈 확신이 있다. 그래서 부흥시대에는 늘 그렇게 물었다.

구원의 확신이 있으십니까? 오늘 죽어도 천국에서 눈을 뜬다는 것을 믿으십니까? 우리는 흔쾌히 그렇다고 답을 했다.

그러나 눈을 뜨면 현실이 있다. 현실에는 풀리지 않는 위협과 시험과 어려움이 넘친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날들을 상당히 오래 살아야 한다.

환난을 겪고 인내하고 연단을 받아야 소망이라는 결론에 가게 된다. 인내는 견디는 것이고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감수하는 것이다. 연단이란 경험이라는 뜻이다. 이런 일들이 많이 쌓여서 소망의 자리에 간다.

우리는 환난도 인내도 연단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 과정은 우리에게 필수적으로 있어야 하는 과정이기에 그렇다.

애를 낳으면 길러야 하고, 공부를 시켜야 하고, 더 나아가게 해야 한다. 한 인간이 존재하고 속박과 어려움을 해결하는데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는 것은, 위에서 말했듯이 그 과정들이 우리에게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롬 5:5) 본문의 사랑은 권능보다 더 큰 뜻이다. 권능은 상대방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으로 힘을 자랑할 수 있지만, 하나님은 소망을 이루기 위하여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으신다. 그러니 소망은 세상의 어떤 해결, 권력, 승리보다 더 큰 것이다. 우리가 받는 대접에서 이렇게 다른 것이다.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를 위하여 기꺼이 자신이 죽을 수 있다.

우리는 현실에 주어지는 과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죽어서 빨리 천국에 갔으면 좋겠다고는 말해도 현실의 과정을 어떻게 충족시켜야 하는지를 모른다.

(2) (신 8:1~6) 이 말씀은 아까 민수기 14장에서 본 것처럼 백성들이 하나님의 약속과 인도하심을 거부하여 그 발로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 길을 40년 동안 방황하다가 죽었다.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에서는 어떤 의미를 지닌 벌이었을까?

광야 생활을 통하여 너희에게 확인시킬 것은 너희의 소원과 목적이 무엇인가를 확인한 것이다.

너희의 소원과 목적은 한평생 살다가 죽을 것인데 사는 동안 평안하고 형통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광야 생활 내내 불평을 하고 하나님을 시험하고 그것 때문에 많은 벌을 자초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인간이라는 존재의 정체가 무엇인가? 가치가 무엇인가? 어떤 목적을 기대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40년 동안 밖으로는 방랑 생활에 불과하지만, 각 개인에게는 이 질문으로 다가왔다.

이문제는 어렵거나 형통하거나 인간이라면 가지게 되는 질문이고 인간은 이것으로 다른 모든 존재와 구별된다.

어려움을 당하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죽음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 죽는 것이 해답인 이유는 죽으면 책임에서 벗어나기 때문이다.

살아 있다면 그 책임은 어떻게 질 수 있는 것인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끌어안고 사는 수밖에 없다. 인내인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인생에서 만나는 많은 문제를 다 해결하지는 못한다. 쉬운 거 몇 개만 해결한다. 진정한 문제는 해결하지 못하고 간다.

나는 뭐야? 이게 뭐야? 이래서 뭐를 하는 거야?

고칠 수 없는 병, 해결할 수 없는 사고, 짊어질 수 없는 삶의 무게.

이런 것들은 어떻게 해결하는가? 이것을 해결하면 답은 오는가? 고통을 해결하면 고통이 없어지기는 해도 가치가 생산되지는 않는다. 인생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다.

부자나 권력자나 건강한 사람이 그것을 소유하고 있다고 해서 만족하지는 않는다. 그들도 스스로에게서 답을 찾으려고 애를 쓰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답을 알 수가 없다. 그것을 배우는 거다.

이 문제의 답은 하나님에게만 있다.

로마서 5장에서 본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경배를 마땅히 받으실 분이다.

그러나 왜인가? 우리가 무엇이기에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가면서까지 우리를 꺼내고 당신과 영생을 같이 하자고 하시는가? 사랑과 믿음 가운데 살자고 하시는가?

여기까지 따라온 후에 하나님께 항복하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한다는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은 인간에게 어떤 지위와 목적을 주는지를 알고 항복했기 때문이다.

(3) 우리는 상상하기도 어렵다. 피조물인 인간이 스스로 만드는 신을 보면, 지금 이 괴로운 문제를 해결해 달라는 것이지, 가치와 의미가 있는 영광의 자리에 가게 해달라는 요구는 없다.

지금의 고통을 해결해주고, 죽으면 이런 책임에서 벗어나게 해달라는 체념만이 있을 뿐이다. 소망과 기대는 없다. 상상도 이해도 확인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우리에게 보내어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셨다. 여기서 죄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것이다. 생명에서 끊어져 있기에 땅에 떨어져 마르고 썩는다.

그러니 죄의 벌은 사망일 수밖에 없다. 벌이라기보다는 당연한 결론이다.

예수님은 이 죽은 우리를 하나님과 연결해서 다시 생명과 영광을 공급받게 하셨다. 운명이 바뀐 것이다. 우리의 현실은 이 감사와 기쁨으로 충만해야 할 텐데 왜 환난과 시험이 오는가? 우리를 기르시는 것이다.

학교에 다니면 단계별 시험이 있다. 시험은 왜 보는가? 학생 자신에게도 이해의 정도를 깨닫게 해주는 것이며 가르치는 선생님도 내가 가르친 것을 학생들이 어디까지 이해했는가를 알 수 있는 중요한 표지가 된다.

인생에서 어려운 문제를 당할 때 그 문제를 푸는 것과는 달리, 내가 누구냐에 따라 그 도전에 대한 답이 완전히 달라진다.

하나님이 없으면 힘으로 해결해야 한다. 상대방 보다 큰 힘을 가지거나, 너 죽고 나 죽자 밖에는 없다. 폭력밖에는 없는 것이다.
신자들에게 성경은 요구한다.

너를 핍박하는 자를 저주하지 말고 축복하라.
보복의 싸움을 계속하지 말고 축복하라.
보복의 싸움을 계속할 필요가 없다. 적당한 선에서 지고 말아라.

왜 이렇게 요구할까?

존재가 다르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이 가지려고 하고 빼앗으려고 하는 것과 우리가 만들려고 하는 것은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세상은 의식주를 채우고 자존감을 지키기에 바쁘다. 우리는 섬기는 자이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을 용서하는 자이다. 여기에 보복이나 우월감은 없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자, 예수로 구원을 받은 자, 에 맞는 현실을 살아라. 어렵다.

예수를 믿어 형통하고, 기도하면 해결이 되는 현실은 왜 안 주시는가? 인간은 이렇게 되면 생각을 안 한다.
하나님, 이 시험은, 이 도전은, 이 위협은 무엇입니까?
저는 이것을 어떻게 해결해야 합니까?

대부분의 경우는 답이 없다. 완전히 망한다.

(히 5:8)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 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으셨느니라

다. 결어

(1) 여러분이 겪는 고통과 절망은, 인간이란 어때야 하는가에 대해 문을 열게 한다. 형통하면 생각을 안 한다. 이해하거나 공감을 하거나 책임을 지는 일을 하지 않는다. 동료가 될 수 없다.

예수는 우리를 구원하러 오셔서 무엇을 보이셨는가? 우리가 하나님을 외면하고 그래서 죽음에 들어갔는데도 예수님은 동료의식을 보이셨다.

십자가에서 말씀하셨다. 내가 목마르다.
누구한테 하신 말씀인가? 하나님께 한 말이 아니다. 자신을 못 박은 유대인들을 향해서 했다. 빌라도가 예수를 놔주자고 했을 때 차라리 바라바를 놓아 달라고까지 얘기했던 자들에게 한 말이다. 내가 목마르다. 친구에게 말하듯 했다.

이것은 윤리가 아니다. 인간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서 성경을 대신할 가르침은 없다. 여기까지 가는 데 70년이 걸린다. 그 과정을 허술하게 생각하지 말라. 모든 문제를 다 풀고 가지 않는다. 남아 있는 상처와 후회가 있다. 그것들이 일한다.

이긴 것이 일하지 않고 진 것이 일한다.

(롬 8:26), (롬 8:28) 인간이 멋있어지려면 저 밑바닥까지 가 보아야 한다. 그리고 가장 높은 곳까지 인도함을 받는다.

(2) 여러분의 하루를 소중히 생각하라. 오늘 완벽하려고 하지 말라

주일날 모이는 것은 중요하다. 세상에서는 폭력과 승패밖에는 없는데 주일날 하루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는 이름으로 모이는데도 아무 표정 없이 왔다가 아무 표정 없이 돌아간다. 섞이려고 하지 않는다.

미국에서 가서 동양인을 만나 안녕하세요? 할 때 상대가 일본말을 하면그때 같이 실망할 수가 없다. 그 반대도 같다. 나는 그때 왜 대들 듯이 그랬을까?
(3) 여러분의 인생을 하나님은 어디까지 끌려 올리려고 하는가? 창조 때의 목적은 하나님이 우리를 자식으로 만드시는 일이었으며 지금도 포기하지 않으신다.

여러분의 실력만큼 하루를 살아라. 후회하라. 회개하라. 모든 것을 감수하고 앞으로 나아가라. 하나님을 찬송하는 고백이 여러분의 입에서 나올 것을 믿는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삶이 고통스러울지라도 우리의 기대와 다를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지혜이고 하나님의 사랑임을 기억하게 하옵소서. 어떤 하루도 헛되이 보내지 않게 하옵소서. 어떤 실패도 절망하지 않게 하옵소서. 오히려 그것들을 통해 주님을 찬송하는 자리까지 가게 하옵소서. 이 결단이 오늘 지금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