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 다시 보기(11) (레 8:1~13)

2024. 6. 2.(일)
박영선 목사

1. 내용

가. 서론

(1) 레위기에 이르면 성경 읽기가 좀 어렵다. 속죄제나 화목제 같은 큰 제사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음식을 가려 먹는 법, 하루를 살아가는 법, 같은 사소한 모든 부분에 대하여 가르침의 내용이 있다.

레위기는 율법, 제사, 절기 등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레위기에서 말하는 제사 제도와 율법에 관한 내용은 보통 자격과 내용으로 많이 읽힌다. 그러나 성경의 의도는 그렇지 않다.

(출 19:1~6)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면 거룩한 백성이 되고 제사장 나라가 될 것이다.

이 말씀을 하신 후에야 출애굽기 20장에서는 율법이 나온다. 그러니까 19장에서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면 이라는 문구는 자격이라기보다, 부름을 받은 거룩한 백성으로의 삶과 이해, 기준 등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기독교 신앙에서 제일 오해를 많이 하는 부분은 이것이다.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는다, 하나님 말씀을 지킨다, 하는 문구들은, 조건과 자격으로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믿는 자라면 이런 명예와 지위와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말씀을 먼저 지켜야 거룩한 백성이 될 자격이 생긴다고 여긴다. 이 둘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 큰 오해이다.

(2) 출애굽기의 제일 큰 사건인 금 송아지 사건 때 하나님은 모세를 불러 40일 동안 율법을 가르치시고 백성들에게 전해 주도록 하셨다. 그러나 지친 백성들은 두려움에 금 송아지를 만들고 말한다.

이는 너희를 애굽에서 구원해 낸 하나님이라.

하나님이 노하셔서 모세에게 말씀하신다.

이들을 모두 진멸하고 너로 새 민족을 이루어 내가 목적한 바를 하자.

모세가 대답한다.

하나님이 그리 마십시오. 하나님답지 않습니다.

이 표현은 놀랍다. 피조물이 조물주에게, 신이시여 신답지 않으십니다, 라고 말하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다. 신이 하는 일에 실수가 있을 수 없고 부족함이 있을 수 없는데 피조물이 이렇게 말한다는 것 자체가 역설이다. 그래서 모세의 말은 강한 반발로 느껴진다.

성경은 이 부분을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다.

이렇게 강조하는 내용이 있기에 성경은 모세의 그런 발언까지 용납한다.

그래, 그럼 관두자.

말하자면 하나님은 지금 어른한테 꾸중을 들은 학생같이 보인다.

그래, 그만두고 그다음으로 가자. 그러나 나는 이 백성과 함께하기 싫으니 너는 내가 보내는 자와 함께 가라.
모세는 간청한다.

하나님 하나님께서 함께 가셔야지 다른 인도자를 주시는 정도로는 안 됩니다.

이 부분은 모세의 지도력의 부족과 하나님의 지도력의 완전함을 말하고 있지 않다.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 것이 우리 민족의 정체성입니다. 하나님의 교훈을 따르는 정도로는 만족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가시지 않으면 저도 안 가겠습니다.

나. 본론

(1) 하나님의 임재는, 모든 제사와 절기에 담겨 있는 본문 그 자체이다. 보통의 종교에서는 신이 초월적인 힘을 가지고 있고 신에게 잘하면 보상을 받는다. 기독교는 신이 자신을 백성과 함께 묶겠다고 한다.

요한복음 17장에서 예수님은 놀라운 기도를 하신다.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들도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아버지께서 나를 보낸 것을 믿게 하옵소서.

하나님은 하늘에서 외치시는 분이 아니다. 너희들 그래서 되겠느냐? 다 와서 회개하라. 이것을 초월적인 모습과 방법으로 우리에게 요구하시지 않는다. 천둥소리와 불을 보내시지 않는다.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가 되고 그 속으로 우리를 부르고 계신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생각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얼마나 지극한 방법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는지를 먼저 생각한다. 아들을 보내시고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게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진정성과 절실함을 동원해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 감동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대와 목적이 우리의 생각과는 다르다는 것을 대부분 놓친다.

신이 직접 오셔야 하는 이유는, 아버지와 내가 하나가 되는 곳에 우리를 부르시기 위해서이다. 그러니 지위와 신분, 명예와 책임에서 우리의 존재는 다른 것이며, 이것이 기독교 신앙이 다른 종교와 전혀 다른 부분이다.

기독교는 잘못을 씻어내어 도덕적인 완벽을 구하고 있지 않다. 신이 우리와 자신을 묶는다는 것을 어디까지 이해하느냐, 하는 싸움이다. 신이 어디까지 쫓아 내려오셨는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

육신을 입는 이유는 육체인 너희와 내가 같은 신분과 조건에 온 것을 보고 내가 너희를 얼마나 크게 대접하고 있는가를 기억하라는 것이다.

십자가상의 가상 칠언에서 예수님은 외치신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먼저, 예수님은 죽음과 사망을 받아들이셨다. 그래서 아버지로부터의 분리까지 겪으셨다. 그러나 우리의 구원은 이런 정도를 넘어서야 한다.

아버지와 분리의 자리에 있는 인류를 구하기 위해 아버지와 잠시 끊어지는 한이 있어도 예수님은 우리를 끌어안으러 오셨다.

그러나 사실은 아버지와 아들은 분리될 수 없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끌어안고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예수님과 하나님인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 있는 것이다.
모세가 말한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으면 윤리나 도덕으로는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지를 알수 있는 방법은 없다.

윤리와 도덕이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다. 우리 존재의 본문은, 우리라는 존재의 근거는 아버지와 하나가 된다는 것에 있다는 말이다.

하나가 된다는 말은, 쉽지 않다. 우리에게는 많은 관계가 있다. 이해관계, 상하 관계, 등이 있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본질적 정체에서 하나가 되자고 하신다. 신분과 지위에서 하나가 되자는 것이다.

우리의 이해는 하나뿐이다. 부모와 자식의 하나 됨. 자식은 부모 말을 안 들어도 자식이 아닐 수 없다. 말 안 듣는 자식일 뿐이다. 우리는 신분과 정체와 운명이 하나님의 자식인 것이다. 하나님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하나 됨 속에 우리를 부르셨다. 인류를 처음 지을 때의 목적대로 이루어 가시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셨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내가 지옥에 갈뻔했는데 천국 가게 되었다, 라는 문제를 넘어서는 것이다.

하나님과 관계가 없던 자가 삼위의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어떤 정체를 가지고 어떤 현실을 살아야 하는지를 알아야 하며 여기서 율법과 제사 제도가 필요한 것이다.

이 책임을 다하지 못하면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니다. 수치스러운 것이다. 윤리 도덕의 차원에서 책임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책임을 다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일을 지킨다는 것은 자유를 빼앗기고 희생을 당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더 큰 명예가 있기에 오는 것이다. 그러니 자랑스럽게 와야 한다.
(2) 교회란 세상과 다른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예수를 구세주라고 부른다. 그러니 교회는 경계하고 의심하는 세상의 모임과는 다르다.

그러니 아이이든 청소년이든 장년이든 교회는 한 가족이 모인 분위기가 맞는 것이다. 그리고 봉사를 해야 한다.

예배 안내위원을 보자. 안내위원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어서 오십시오. 기특하신 분이군요.

우리는 화답한다.

내가 오는 것이 교회의 영광이지요. 나도 여러분과 동일한 신분과 정체가 있음을 주 앞에 고백하려고 왔습니다.

(엡 1:3~6) 본문에 나타나는 약속들은 모두 하나님의 계획이다. 평소 우리가 신앙생활을 한다고 할 때 우리의 가치가 우리도 모르게 윤리와 도덕에 머물러 있게 된다. 신앙은 다른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의 꽃이다.

(엡 1:17~23) 우리가 하나님의 충만함이 된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하나님은 홀로 부족함이 없으신 분인데 왜 인간을 만들어서 이 고생을 하실까?

사랑은 그런 것이다. 사랑은 발산되고 확산되고 제한이 없이 넘어서 나온다. 그래서 기독교에만 충만, 풍요 같은 단어들이 나온다.

사랑은 ‘얼마든지 더 ’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으로 부르고 계신다. 사랑을 보답하는 것은 사랑으로 답을 하는 것 뿐이다. 사랑으로 답을 하려면 자유가 있어야 한다. 대등한 지위를 확인하는 것이다.

다. 결어

(1) 하나님의 구원은 권능, 지혜, 기적으로 되지 않는다. 아들이 직접 찾아온다. 아버지를 외면하고 도망갔으나 하나님은 그 아들을 보내셨다. 대등한 지위로 오셨다. 그리고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셨다.

이 놀라움을 기억하라. 우리가 일상에서 부딪치는 어떤 부족함, 어떤 실수가 있음에도 우리의 신앙은 긍정적 방향으로 갈수 있는 힘을 얻는다.
회계는 잘못을 지워낼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명예는 무엇일까?

식당에서 직장인끼리 회식을 할 때, 나는 예수를 믿기에 술을 마시지는 않는다, 고 할수 있다.

나에게 사이다를 달라.
잘난척하네.
그렇다. 잘난 척하는 거다.
그래도 분위기를 깨면 되겠냐?
내가 나와서 앉았고 웃고 있지 않냐? 그럼 되는 것 아니냐?

이 말을 사장님께 할 건 없다. 우리 안에 그 마음이 있어야 한다. 세상은 남의 요구가 두려워서 모두를 공범으로 끌어드리려 한다. 그러나 우리는 비난을 하지 않는다. 정죄하지 않는다. 시비를 걸지 않는다. 보복하지 않는다. 대신 말한다.

오늘 함께 있어서 너무 좋았어. 내일 또 봐. 너는 내 친구야.
나는 너에게 잘해준 거 없는데 너는 왜 그러니?
아니야. 너는 네 은사를 몰라. 너를 보고 있으면 내가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늘 들어.

(엡 3:14~19) 멋있어지고 영광을 누려라.

(엡 3:20~21)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정체, 신분, 지위, 운명, 책임, 명예를 확인합니다. 우리를 살게 하신 세상에는 이것을 몰라보는 사람들뿐입니다. 그들의 자랑은 폭력밖에 없습니다. 얼마나 비참한 현실입니까? 우리가 가서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이, 인류에게 무엇을 허락하셨는지 증언하게 하옵소서. 우리 자리를 명예로 지키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모두에게 기회가 되고 복이 되고 운명이 되는 하나님의 뜻을 열매 맺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