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 다시 보기(7) (시 105:16~22)

2024. 4. 7.(일)
박영선 목사

1. 내용

가. 서론

(1) 오늘 본 본문 같이 시편 105편에서는 요셉의 생애를 매우 간단하게 소개하고 있다. 요셉은 야곱의 열한 번째 아들이다. 라헬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라 특별히 편애했다.

좋은 옷을 입히고 일도 안 시키고, 형들은 나가서 목축업을 했어야 했다. 철없는 요셉은 형들의 잘못을 고자질도 해서 형들이 미워했다.

형들은 요셉을 죽이려다가 팔아먹기로 한다. 요셉은 아랍 상인에게 팔렸고 애굽의 노예로 팔려가 애굽의 시위 대장 보디발의 종이 된다.

요셉은 여기서 잘해서 신임을 얻었고 집안의 책임자가 되었다.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을 했고 이를 물리쳤으나 무고를 당하여 시위대 안의 감옥에 갇히게 된다.

(2) 요셉은 형들에게 죽임을 당하고 팔려가고 억울하게 옥살이를 한다. 그의 생애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억울함의 연속이었다. 그가 얼마나 상처를 받았는지는 오늘 본문을 보면 알 수 있다.

(17절~19절) 그가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

몸이라는 단어 옆에 각주가 달려있다. 각주 2를 난하주에서 찾아보면 혼(히)이라고 되어 있다.

몸이 쇠사슬에 묶여 있다는 것이 아니라, 혼이 쇠사슬에 묶여 있다는 것이다. 직역하면 쇠사슬이 혼을 뚫었다, 는 뜻이다.

차꼬를 차고 쇠사슬에 묶인 것만 해도 대단히 고통스러운 상태인데, 요셉의 고통은 육신에 가해지는 것보다 영혼에 가해라는 것이 더 컸다. 우리말로 혼비백산이다.

나. 본론

(1) 요셉은 철이 없었고 아버지가 이뻐해서 형들의 미움을 샀다. 그리고는 팔리고 갇히고 처형밖에는 남은 것이 없는 상태다. 이때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꿈을 꾸게 하신다. 꿈의 내용은 심각하다. 아무도 해석할 수 없었다.

그러자 술 맡은 관원장이 그가 잠시 전에 감옥에 있었을 때의 일을 기억하고 바로에게 아뢴다.

감옥에서 요셉을 만난 적이 있고 요셉에게 꿈 얘기를 했는데 제가 그의 해석대로 풀려났습니다. 요셉이 풀려나와 바로의 꿈을 해석한다.

앞으로 7년 동안 풍년이 들 것인데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풍년이 들 것 입니다. 그러나 그 후 7년 동안 흉년이 들어서 앞에 있었던 풍년을 다 잡아먹을 만큼 심각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되겠느냐?

풍년 때 있는 대로 다 저장해 놓아야 합니다.

바로는 요셉을 총리로 삼는다.

요셉의 이야기는 그가 총리가 된 것이 핵심이 아니다. 그렇게 되어서 자신의 가족을 구했다는 것이 핵심이다. 가족들은 대부분 형 들이고 요셉을 죽이고자 했던 사람들이다. 요셉은 나중에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 하나님께부터 비롯된 일임을 말한다.

요셉 이야기의 어려움은 이 드라마 안에 있는 내용의 전개가 매우 역설적이기 때문이다.

형들이 동생을 죽이려 한다거나, 팔아먹는 다거나, 유혹을 받는다거나, 무고를 당한다거나 하는 사실들이 그렇고 감옥에서는 죽을 만큼의 고통을 받았고 일말의 기회도 없었다.

그러다가 바로가 꾼 꿈 때문에 총리대신이 되어 백관을 제어하고 장로들을 교훈하게 되었다.

드라마의 연결이 매끄럽지 못하고 아이러니와 모순과 역설로 차 있었다.

그러나 요셉에 대해서, 그가 정직히 행했더니 성공했다, 라는 식으로 각색이 되곤 한다. 요셉이 이 모든 고통을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참았다, 그래서 총리가 되었다, 라고 해석을 한다.

(2) 요셉의 이야기는 이 역설들은 과연 무엇인가를 설명하는 데 핵심이 있다. 요셉의 이야기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일어난 일이 무엇인가를 알려주는 결론이기 때문이다.

구약은 하나님을 설명할 때,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까지만 하고 요셉은 언급을 안 한다. 또 다른 하나님에 대한 설명은 너희를 종 되었던 곳에서 구하신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인데 출애굽을 이야기한다.
신약에 오면, 하나님은 그 아들을 우리에게 보내신 하나님이 된다.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인류에게 무엇을 어떻게 하는가, 하는 설명이 전개되고 무르익어 예수에 와서 절정에 이른다.

그러나 이 내용이 한 개인의 행운, 한 개인의 모범, 한 개인의 보상으로 해석이 되고, 연결되는 전체 스토리를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내용이 가지는 무게, 웅장함, 진정성을 놓치고 있고 우리에게 적용도 잘못하고 있다. 그래서 언제나 모범생이어야 한다. 그래야 형통하다, 하는 가르침이 정답이 되고 만다.

신자들의 현실은 모범적이어도 고난이 있다. 모범적이지 않으면 더 고난이 있다. 형통한 삶은 별로 없다. 형통은 여섯 살까지만 있고 그 후에는 말하기도 싫어진다.

성경이 우리에게 하는 이야기가 얼마나 현실적인지, 어떻게 하나님이 실제로 일하시는지에 대하여 우리는 잘 모른다. 설마 하나님이 이렇게 일하실까, 생각한다. 그래서 성경이 요구하지 않는 인생을 살고 기회를 허비한다.

요셉은 야곱의 아들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한 약속, 이삭에게 한 약속, 야곱에게 한 약속이 무엇을 만들어 내는가에 대한 결론이 요셉에 와서 나타난다.

아브라함의 등장은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어 인류가 죽게 될 운명 속에 있었는데 느닷없이 복을 주신다고 약속한 것이다.

아브라함이 뛰어났다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왜 여기서 갑자기 복을 선언하시는가? 우리는 놀라야 한다.

내가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아담이 선악과를 먹어 모두 죽게 된 것 같이 너로 인하여 모든 족속이 복을 얻을 것이다. 사망의 역사가 뒤집히는 장면이다.

지금 현실이 죽음 속에 있는데 그 약속이 말이 됩니까?

하나님은 답하신다. 그래서 이삭을 보내신다. 이삭은 생길 수 없는 자손이었다. 하나님이 만드셨다. 이삭을 죽이고, 다시 말해 죽을 수밖에 없는 이삭을 하나님이 다시 살려내셨다. 창조와 사망까지 왔는데 이제는 부활이 있다고 선언하신다.

야곱은 말했다. 이 사망의 자리를 왜 걸어야 하는가? 내가 더 나은 권력과 조건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왜 내가 손해를 보는가?

장자가 되려고 태 속에서부터 싸웠으나 장자가 되지 못했다. 팥죽으로 장자권도 뺏고 아버지 축복도 속임수로 받았으나 그로 인한 보상은 없고 목숨을 구하기 위해 피난을 가야 했다.

피난 가서 온갖 지혜를 짜내서 재산을 불렸더니 처남들이 죽이려고 든다. 돌아갈 데가 없어서 자기를 죽이려고 했던 형에게로 돌아가게 되었고 결국 얍복 나루까지 온다. 사방이 사망이고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 하나님이 만나 주신다.

하나님의 사자가 야곱의 환도 뼈를 치고 떠나려 한다. 이제 너의 인생은 네가 알아서 해라. 난 상관하지 않겠다. 야곱은 급하게 매달린다. 살려 주십시오.

네 이름이 뭐냐?

약탈자, 날강도입니다.

너는 왜 야곱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느냐?

제게는 보호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살아남으려면 제가 이기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런 방법이 없으니 저를 축복해 주십시오.

네 이름을 다시는 고아라고 부르지 마라.
너는 보호자가 있다. 나는 네 부모다.
자식 이기는 부모 봤냐? 너는 하나님과 싸워 이긴 자니라.

야곱은 얍복 나루 사건 이후에 디나 사건을 만나기도 하고 요셉을 잃기도 했다. 평범 이하의 삶을 살다가 요셉을 만난다. 죽은 줄 알았던 요셉이 그의 집안을 살려낸다. 하나님의 축복이 어떻게 결과를 맺는지를 본다.

(3) 요셉이라는 결론을 만날 때까지 신앙인이 현실 속에서 하는 기도는 이것이다.

어떻게 하면 형통과 감사 속에서 살 수 있습니까?

사실은 이런 기도는 소용없다. 하나님은 우리를 편안하고 모범적인 존재로 만드시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저게 뭐야? 라고 놀랄만한 반대 상황을 보이신다. 그걸 통해 경험을 쌓게 하신다. 그리고 우리를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신다.

치열하다. 거짓말을 만나야 되고 살인자를 만나야 한다. 억울함을, 원망을 만나야 한다. 후회와 한숨과 절망을 만나야 한다. 무엇을 가르치려고 하시는가?
하나님이 없으면 무엇이 되는가를 봐라.

하나님이 없으면 우리는 아무도 믿을 수 없다. 스스로를 믿을 수도 없다. 스스로를 만족시킬 수 없다. 희망도 없다.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무엇인가?

살육이나 거짓말이나 절망과는 반대되는 희망, 눈물과 슬픔에서 기쁨과 감사로 바뀌는 것이다.

이것을 경험하려면 역설적일 수밖에 없고 그래야 실체를 알게 된다.

여러분의 삶에서 최악의 상황을 만났을 때,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인생이 이렇게까지 치열해야 한다는 것을 넘어서, 인간이 이렇게 밖에 안되나? 이렇게 치사해야 하나? 라는 정말 중요한 것을 깨우치게 된다.
이게 인생이야? 이게 인간이야? 나는 인간은 이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세상에는 여기에 대한 답이 없다. 하나님만이 예수 안에서 보이신다. 그리고 우리에게 허락하신다.

여러분이 먼저 문제를 해결하려고 할 때, 하나님은 그다음 단계로 가자고 하신다.

학교 공부는 어디까지 하는 것이 좋은가?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초등학교까지만 했으면 우리 모두는 천재이거나 우등생이었을 것이다.

중학교에서 20등, 고등학교에서 40등, 대학은 3수 해서 2차 대학에 갔다. 그나마 하다 말아서 대학중퇴가 되었다.

이 세상에서는 이것을 실패했다고 하지만, 여기까지 와야, 이 아픔을 겪어 보아야, 이 아픔이 없었으면 깨닫지 못했을 실체를 만나게 된다.

진리는 추상명사가 아니다. 우리라는 존재에 관한 것이다. 이에 대한 답은 어디에도 없다. 기독교에만 있다. 기독교는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의 꽃이라고 한다. 인간은 창조와 부활의 역사에서 가장 빛나는 꽃이라고 한다.

우리의 인생 속에서 하나님께서 쉴 틈 없이 고난 속으로 우리를 보내는 이유는, 더 도망갈 데 없는 곳까지 우리를 보내시는 것이다.

빨리하시기로 말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시고 빨리 하늘나라로 가시면 된다. 그러나 33년을 이 땅에서 생활하셨다. 인생이 겪는 일을 겪으신다. 인생이 어디서 허덕이는지, 무엇을 놓치는지 보신다.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 온전하게 되셨다. (히 5:8)

하나님이 부족하신 것이 있을까? 하나님이 고난을 당해서 채워야 할 일이 있었을까?

인간이 겪는 압박, 세상이 끌어당기는 상황이 있는 현장에 하나님은 오신다. 거기서 우리의 눈물, 비명, 반발까지 경험하신다. 이것은 단순히 신은 전지전능하고 무소 부재하다는 인식을 뛰어넘는 일이다. 더이상 갈 곳이 없는 사망의 자리에 오셔서 인간에게 물으신다.

너는 어디까지 도망갈래?

다. 결어

(1) 우리가 기대하는 형통은 무슨 가치가 있는 것인가?

자식 때문에 살아. 죽지 못해 살아.

이 질문은 여러분들에게 어떤 의미인가? 여러분의 어디를 찌르고 있는 것인가? 여기를 이해하지 못하면 왜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했을까요? 라는 철없는 질문을 하게 된다.

쉽게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려면 하늘에 자막 하나만 거시면 되는 것 아닌가? 여기 쳐다보면 다 살 수 있어.

기독교는 실존이다. 하나님도 추상명사가 아니다. 하나님이 실체인 것처럼 우리 모두는 실체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대접하신다. 우리의 개성 고집, 유전자, 생각, 소원을 실체로 인정하신다. 그리고 말씀하신다.

너 지금 죽을 것 같지? 여기 내가 너와 함께 있다.

(2) 요셉은 복수하지 않는다. 자기의 인생을 억울해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나를 보내셨습니다. 아버님과 형님들, 하나님은 무엇을 주시려고 이 고난의 삶을 살게 하셨을까요? 우리가 얻은 결론이 후대의 후손들에게 교훈이 되고 힘이 되게 하십시다.

여러분의 삶에 지금 포기가 있는가? 외면이 있는가? 타협이 있는가? 잠깐 쉬어갈 수 있다. 그러나 그 자체가 운명이 되고 소원이 될 수는 없지 않은가?

비명을 지르게 되는, 겪기 싫은 모든 현실이 하나님의 진심이다. 여러분이 받는 고통만큼 그것은 사랑이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인생이 되는 것이 마땅하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다만 흙으로 빚으셨으면서 하나님의 형상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랑을, 믿음을 요구하시며 은혜 베풀기를 기뻐하십니다. 너는 내 자식이다. 나를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축복해 주신 인생을 저희는 살고 있습니다. 쉬운 것으로 타협하지 말게 하옵소서. 이 영광의 끝까지 예수의 십자가를 기억하고 인내하고 충성하고 승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