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 다시 보기(8) (출 3:1~12)

2024. 4. 21.(일)
박영선 목사

1. 내용

가. 서론

(1) 모세의 이야기가 나오면, 특히 주일학교를 거친 신앙인들은 모세의 위치가 구약성경에서 가장 높기 때문에 결론의 차원에서 시작을 읽는다.
그래서 이 이야기의 배경과 시작에 어떤 모순과 긴장이 있는지 놓친다.

모세가 호렙산에서 양 떼를 몰고 가다가 떨기나무에 불이 붙은 것을 보았다. 자세히 보니 신기하게도 떨기나무는 타지 않고 불은 붙어 있어서 가까이 가서 보게 되었다.

그 가운데서 소리가 났다.

모세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곳이니 네 신을 벗어라. 하나님의 음성이었다. 모세는 신을 벗고 엎드렸다.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인데 지금 고생하고 있는 내 백성을 구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너를 보낼 테니 내 백성을 구하라.

(2) 모세의 반응은 계속 거절이었다.

내가 누구길래 가며, 내가 왜 가야 합니까?
내가 너와 함께 할 테니 걱정말고 가라.
그들이 제 말을 듣지 않을 것입니다.
걱정마라. 내가 함께하겠다.
모세는 끝까지 안 가겠다고 했고 하나님은 화를 내셨다.

심지어 모세는 이렇게까지 말한다.
나는 입이 뻣뻣해서 말을 제대로 못 해서 못갑니다.

하나님이 대타까지 주신다.

네 형 아론을 함께 보내겠다. 아론이 네 입이 되어 전할 말을 할 것이며 너는 형 앞에 하나님같이 될 것이다.

그래도 모세는 안 간다고 했고 하나님은 화를 내셨다. 모세는 마지 못해 가게 되었다.

나. 본론

(1) 이 이야기가 왜 이렇게 길게, 모순으로, 충돌로 설명되는 것인가? 하나님은 모세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을 구하러 가자고 하셨다. 바로를 대적하여, 그의 노예가 된 이스라엘을 구하러 가자.

모세의 생애에서 이스라엘과 애굽은 특별한 관계에 있다.

모세는 이스라엘 사람인데, 이스라엘의 인구가 늘어 강성해지는 것에 위협을 느낀 애굽이, 남자로 태어나는 이스라엘의 아이를 모두 죽이고 여자들만 살려라, 라고 탄압을 하는 위기의 순간에 태어났다.

또 애굽은 이스라엘 전 민족을 노예로 삼으려고 했다.

태어난 모세를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되자 3개월 만에 갈대 상자에 넣어서 나일강에 버리고 모세의 누이 미리암이 기회를 본다. 때마침 목욕하러 나온 바로의 공주가 갈대 상자를 발견하고 불쌍히 여겨서 자기가 기른다.
공주가 모세를 데려가는 것을 보고 공주에게 건의한다. 유모가 필요할 테니 좋은 유모를 소개하겠습니다. 모세의 어머니가 유모가 된다.

우리는 이 사실을 크게 봐서 모세는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에게 신앙교육과 자기 민족의 정체성을 배웠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한 면이 있는 것은 사실인데, 그것이 모세에게 얼마만큼 영향을 미쳤는지는 조금 더 가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모세가 분발하여 자기 민족을 구해야겠다고 결심한 때는 그의 나이 마흔 살 때였다.

그러니까 그때까지는 바로의 왕자로 잘 먹고, 잘살고 있었고, 중간에 고민도 생기고 갈등도 겪었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일단 그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보기에는 애굽 사람이고 그는 이스라엘 사람이 겪어야 하는 노예의 핍박과 고통은 몰랐다.

오히려 가해자 쪽에 있었다.

그러다가 어떻게 된 일인지, 나는 히브리인으로서 책임을 다해야 하겠다, 라는 결심을 하고 자기 백성을 보러 나갔다.

애굽 관원이 자기 백성을 혹독하게 다루는 것을 보고 분을 참지 못하고 관원을 쳐 죽여서 묻어 버린다. 다음날 또 백성을 보러 나갔는데 이번에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싸우는 것을 보았다.

모세가 말했다. 너희는 왜 같은 민족끼리 싸우는가? 싸우지 말라. 그러자 그 사람들이 말한다. 네가 어제 애굽 관원을 죽인 것 같이 우리도 죽이려고 하느냐? 누가 너를 우리의 재판관으로 삼았단 말이냐? 네가 도대체 뭐냐?

이스라엘 사람들이 볼 때는 분명히 모세는 애굽 사람이었다.

모세는 일이 탄로가 난 것을 알았다. 이스라엘 민족에게도 영접을 받지 못하고 애굽 사람으로도 살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제3의 지대로 도망갈 수밖에 없었다. 거기는 어떤 정체성도 없는 유목민들이 사는 미디안 광야였다. 여기서 그는 자그마치 40년을 살게 된다.

(2) 모세는 자신의 정체성이나 운명을 선택할 여지가 없어졌다. 팔십이 되어서야 하나님께서 호렙산에서 부르셨다.

내가 너를 보내어 내 백성을 구원하려고 하니 너는 가라.

그 백성은 자기를 쫓아낸 백성이었다. 그 백성을 구하기 위해 바로 앞에 함께 서라는 것인데, 모세는 애굽에서 보기에는 말도 안 되는 배신자였다.

애굽 궁정에서 키워 주었는데 애굽을 배신한 자에게, 이제는 이스라엘을 구하겠다고 바로와 맞서는 자리에 서라는 명령을 주신 것이다.

당연히 모세의 첫 반응은 내가 누구이길래 가야 합니까? 일 수밖에 없다.

여러분이 길을 가다가 험한 싸움에 개입할 때가 있다.
왜 어른에게 이렇게 심하게 구는가? 좀 참으라.

이러면 바로 나오는 반응이 있다. 너는 누구냐? 이때 누구는 누구인가? 관등 성명은 아니다. 네가 이 일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 라는 뜻이다. 네가 경찰이라도 되는 것이냐?

모세가 뱉은 이 말은 굉장히 중요하다. 여기에는 어떤 원한이 숨어 있느냐 하면, 나를 보내겠다고 하는 당신이 신이라고 하시는데 당신이 나에게 해준 것이 무엇 있습니까? 내 인생에서 한 번이라도 만나 주신 적이 있습니까? 나와 관계를 맺은 적이 있습니까? 내가 무엇을 근거로 하여 당신 명령을 따라야 합니까? 나에게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아니면 내가 당신을 알기를 합니까?

그러자 하나님께서 뜻밖의 대답을 하신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일을 이룰테니 가라.

모세는 이렇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당신은 도대체 누구십니까? 신분을 물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스스로 있는 자라는 것은 우리에게는 낯선 설명이다. 우리는 어디엔가 속해 있어야 신분을 가진다.

나는 한국 사람입니다. 이때는 나라에 속한 것이다. 국민의 자격이 있다. 그러나 스스로 있는 자라고 하면 망막하다.

하나님은 모든 것의 주인이시고 누구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없다. 자체 생산과 내용을 무한히 가지고 계신 분이다. 모세가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하나님이 덧붙여 설명하신다.

나는 너희 조상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아마도 모세는 이 말은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모세는 자신의 생애에서 하나님을 만난 적도 없었고 제대로 교육을 받은 적도 없는 것처럼 대답했다.

하나님이 몰아붙이신다. 네 형이 마중 나올 것이다. 기뻐할 것이다.

모세는 할 수 없이 간다. 우리에게는 마음에 들지 않는 표현이다. 우리는 마음속에 모세가 당당한 위인이었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꿈과 비전으로 맞장구치는 위인이었기를 바란다.

(3) 이 사건은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예수를 믿으면 담대한 모세로 출발하지 않고 어쩔 줄 모르는 모세로 신앙생활을 시작하고 이 기간은 상당히 길다.

자신의 정체성을 모르고 애굽의 궁정에서 40년을 자랐고 그 후 회개하려고 했으나 회개를 받아 주지도 않았다, 그리고 애굽이나 이스라엘 민족에게 적대적인 사람으로 몰려 도망을 나왔다. 히브리인도 애굽 사람도 아닌 것이다.

모세는 자신의 처지를 아들의 이름을 지을 때도 나타냈다. 큰아들은 게르솜 인데 이방 나그네라는 뜻이다. 이름 없는 떨거지라는 표현이다. 본인이 소속될 곳이 없었다.

모세는 하나님의 고집으로 할 수 없이 바로 앞에 선다.

서기 전에 하나님은 모세에게 지팡이를 던져 보라고 하셨고 지팡이는 뱀이 되고 뱀을 손으로 잡자 다시 지팡이가 되었다.

품속에 손을 넣었다가 빼보니 하얗게 문둥병에 걸리게 되었는데 다시 품에 넣었다가 뺐더니 깨끗해졌다. 모세는 이 두 가지 기적을 보고 마지 못 해 간다.

그러나 바로의 마술사들이 이 기적을 따라서 하는 바람에 바로는 뜻을 굽히지 않는다. 그래서 열 가지 재앙이 생긴다.

한 재앙이 생길 때마다 바로는 기가 죽는다. 마음을 돌이켜, 네 백성을 데리고 가라, 라고 했다가 괜찮아지면 마음을 바꾼다.

두 번째 재앙이 온다. 돌이켰다가 다시 마음을 바꾼다. 열 번을 반복한다. 결국은 사람과 짐승의 모든 맏이가 다 죽는 참혹한 재앙을 경험하고서야 바로는 결국 항복한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데리고 나와 홍해 앞에 서게 된다. 앞은 바다이고, 뒤는 쫓아오는 애굽 군대이고 백성은 그사이에 놓이게 되어 아우성을 친다.

우리를 그냥 놔두지 왜 와서 구원이니 해방이니 자유니 하는 말들을 외쳐 우리를 충동했는가? 우리는 이제 홍해에 다 빠져 죽게 되었다.

이때 모세가 처음으로 믿음의 고백을 한다.

너희는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열 가지 재앙은 누구를 위해서 있었는가? 바로를 항복시키려고 있지 않고 모세를 항복시키려고 있었던 것이다.

이 일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사람은 어떤 일을 해결할 수 있는 큰 권력으로 크는 것이 아니라, 힘으로는 항복하지 않는 세상 속에서 늘 우리를 엎으려고 하는 현실 속에서 우리는 커나간다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이 분명하지도 화끈하지도 않다는 느끼는 것을 너무 겁내지 말라. 크는 동안에는 아슬아슬한 것이 진짜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한 번씩 기뻐하는 일을 주시지만, 그 기쁨이 사흘을 넘기지 못한다. 나머지는 고생이 훨씬 더 많다.

고생이란 무엇인가? 우리를 키우는 것이다.

주일에 놀러 나가지 않고 교회로 오는 것, 힘든 일이다.

사실은 한 번쯤 빠져도 된다. 여러 번 빠져 보기도 했다. 그런데 빠지면 마음이 불편하다. 등산을 가면 산이 무너질 것 같고 고속도로를 달리면 사고가 날 것 같다.

고민을 하느니 주일에는 속 편하게 앉아 있다가 오자. 설교라도 짧으면 좋겠지.

여기서 큰다. 나는 왜 화끈한 증거가 하나도 없는데 여기에 잡혀 있을까?

모세가 40년을 보낸 시간이다. 그의 분노였다. 반발이고 원한이었다.

그러던 모세의 신앙고백이다. 너희는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너희를 향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홍해를 건너고 모세는 노래를 부른다. (출 15:1~2)

이 때에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이 노래를 여호와께 노래하니 일렀으되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 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

하나님에게 당신은 누구시냐고 묻던 모세가, 자신의 정체성을 하나님을 근거로 확인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아가게 된 것이다.

신자들의 정체성은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대접하시는 가에 묶여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셨다. 복을 주셨다. 온 세상을 다스리게 하셨다. 다른 피조물들의 수동적인 지위와 다른 능동적인 통치권을 우리와 나누셨다.

화끈한 응답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의 임무가 아니다. 체념과 폭력과 원한뿐인 사람들 속에서 하나님이 나의 힘이라고 고백하며 그 하나님이 나를 무엇을 만드시는가를 확인하는 것이다.

저건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럴 수밖에 없다. 하나님이 없으면 근거도 기준도 매달릴 수도 없어서 저럴 수밖에 없다.

우리는 다르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의 꽃이다. 하나님의 영광의 최고의 핵심이 우리라는 말이다. 우리가 복된 것이 하나님의 영광의 증거가 된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렇게 기르시고 완성을 위해 나아가신다.

다. 결어

(1) 모세는 40년을 바로의 궁에서, 다음 40년을 미디안 광야에서, 그리고 마지막 40년을 광야에서 자기 백성들을 위해 희생하며 산다. 여기에 모세의 영광이 있다. 모세의 영광은 하나님의 영광이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하신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어디까지 참으시는지, 어디까지 개입하시고 편을 드시는지를 모세는 배운다.

싸워서 이겨야 하는, 먼저 속여야 하는,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 사람들과는 정체성의 근거가 다른 것이다. 운명과 현실이 다르다.

세상은 우리를 알지 못하기에 우리를 놀린다. 우리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모른다. 우리는 손해 속에서 큰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우리 편이라는 것을 자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음으로써 증명하셨다.

우리를 항복시켜 우리의 찬송을 받는 것으로 자신의 영광을 증명하신다. 가지고 계신 힘으로 증명하시지 않는다.

신자들에게 믿음을 가지라, 참으라, 겸손하라, 는 것은 윤리가 아니라, 인간이라는 정체성에 대한 이해이다.

인간은 관용, 지혜, 깊이, 위로, 나눔이 있어야 한다고 하신다. 그리고 우리에게 아들을 통해 보이셨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 속에서는 잘 볼 수 없는데 하나님은 여기로 우리를 부르셨다.

하나님의 임재, 성육신의 연장이 바로 이것이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매일 승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혹시 인내와 눈물과 속상함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찬송의 일부이다. 승리하는 신자가 되기를 바란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셔서 감사합니다. 아버지의 영광, 아버지의 자랑, 아버지의 기쁨, 이 모든 것은 우리의 것입니다. 나눌 수 있고, 용서할 수 있고 기다려 줄 수 있고, 짐을 질 수 있고, 함께 울고 웃을 수 있다는 것이, 우리가 가지는 생명과 진리입니다. 그 현실 속에 내가 있고 내가 위대해져야 합니다. 내가 없으면 세상은 빛을 잃습니다. 진실도 볼 수 없습니다. 그런 존재라는 것을 평생 잊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