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 다시 보기(9) (출 16:1~12)

2024. 5. 12.(일)
박영선 목사

1. 내용

가. 서론

(1) 오늘 본 출애굽기 16장에서는 14장과 15장에서 보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 너무나 돌발적으로 달라진다. 14장은 홍해를 건너는 이야기이고 15장에서는 그것을 감사하여 모세와 온 백성이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로 가득하다.

바로를 굴복시킨 열 가지 재앙을 보았고 길이 없었던 홍해 앞에서 하나님께서 바다를 가르사 이스라엘 에게는 길을 내어주시고 쫓아 왔던 애굽 군대는 바다에 엎어버리셨다.

15장에서 그들은 이렇게 노래한다.

이 때에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이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니 일렀으되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

이 찬양은 모세가 대표로 되어 있지만, 모세와 백성이 함께 부른 노래이며 이스라엘의 역사이다. 홍해가 갈라지고 이스라엘을 구원해낸 하나님의 놀라운 개입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본 것이다.
그리고 오늘 본 16장처럼 그들은 주린다. 아주 쉽게 이 두 문제의 어려움을 대조하자면 바다를 가르고 길을 내신 하나님이 다음 날 아침 밥상은 안 차려 주신 거다.

나. 본론

(1) 한국교회가 부흥시대를 경험한 것처럼, 아니 한국교회 전체를 놓고, 잠시 일별하면, 순교의 시대가 있었다. 교회는 이렇게 뿌리를 내리면서 살아났고 부흥이라는 시대를 맞이함으로 우리는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과 구원의 현실성을 믿게 되었다.

많은 사람 들을 향한 하나님의 폭넓은 찾아오심과 은혜 베푸심도 보았다.

여러분도 주변에서 얼마든지 감동을 보았을 것이고 개인적인 감동도 있었을 것이다.

문제는 감격하고 평생을 주를 위하여 살리라, 하면서 울었지만, 다음 날 아침의 일상이 종전과 똑같이 발톱을 세우고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안 믿을 수는 없지만 만족스럽지는 않은 현실.

이러한 신앙의 실체는 무슨 이유일까? 이 내용이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대조되고 있다.

15장에서는 바로로 대표되는 그들이 알고 있었던 세계의 권력과, 자연 질서라는 누구도 변경시킬 수 없는 내용을 이보다 더 큰 권력으로 순종시키는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다음 날은 일상으로 돌아갔다. 이것이 대조되고 있다.

이 대조가 15장 찬송의 내용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생로병사의 세상 질서를 누구도 어길 수 없다. 그리고 세상에서는 약육강식일 수밖에 없다. 강한 자가 모든 먹이를 독식한다.

이런 생존경쟁 속에서 하나님이 세상 질서를 깨고,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하신다면 우리의 세계관은 바뀌어야 한다.

사도신경의 고백대로, 창조주가 계시며 우리는 그의 사랑을 입은 자녀이다. 하나님과 분리되었던 인류 역사에 하나님이 개입하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다.

그리고 부활을 주사 모든 사람을 새롭게 하시며 창조를 완성하실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 그 완성은 종말에 이루어진다.

우리의 세계관은 바로 이것이다. 이러한 세계관 속에서 세상의 질서로는 할 수 없는 일을 하시는 우리 하나님께서 신앙고백을 한 우리를 왜 옛 세상 속에 그대로 놔두시는가?

세상 사람들은 누구나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누구나 태어나고 자라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우리는 이것을 자연주의 세계관이라고 한다. 자연주의 세계관은 모든 인류가 몸담고 있는 세상의 질서이다.

그러나 이 질서 속에는 가치가 없다. 죽어버리면 그만이다. 생존경쟁을 하기때문에 피해자는 많고 승자는 적다. 사람들은 여기에 반발하고 싫어한다. 그래서 허무주의라는 이름도 붙어 있다.

이 상황을 못 견딘 인간이 최소한의 자기증명을 하겠다고 나선 것이 실존주의이다.
실존주의는 내가 죽는 것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는 것에서 출발한다. 그러니까 살아 있는 동안에는 내 마음대로 하겠다. 이것은 반발이다. 그러나 이 반발의 가장 중요한 근거는 체념이다.

도망갈 수 없다. 이겨도 죽는다. 내 꿈은 아무 소용도 없다.

(2) 성경이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 보여주려는 것은, 너희가 살고 있는 세상의 질서가 최종 질서가 아니다.

사도신경의 고백처럼 존재하는 모든 것의 의미와 가치를 만들어 내시며 그 일을 완성하시기 위해 아들까지도 십자가에 못박으셨다. 이렇게 우리를 사랑하시며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과 지위를 주셨다.

이 감격은 왜 세상 질서에 바로 압도되는가? 다시 말해 우리가 신앙고백을 한 그 상태에서 세상으로 다시 보내셔서 우리를 고통스럽게 절망하게 하시는가?

많은 신앙인은 고통을 당하는 것이 죄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죄를 짓지 않으면,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 고통이 없어지고 평화롭게 복 받는 인생을 살 거라고 기대한다.

그러나 두 가지에서 안 된다.

하나는,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도록 세상이 내버려 두지 않는다.

다른 하나는, 아무리 잘해도 행복과 평화는 보상으로 받지 못하고 만다.

이게 무엇인가?

하나님은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게 하시고 세상 질서의 결론이 누구의 손에 있는지, 우리라는 존재의 가치와 의미는 무엇인지 가르친다.
그러면서 왜 체념으로 분노로 끝나야 하는 세상 속에 놓아두시는가?

하나님은 우리를 기르신다.

우리는 아담의 실패를 알고 있다. 아담은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 선택권을 하나님에게 등을 들리는 선택권으로 사용했다. 사망을 초래했다. 생명과 가치와 명예와 영광을 생산하시는 하나님과 분리되었다.

(요 15:4)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죄는 썩지 않는다. 썩는 것은 증상이다. 하나님과 분리된 결과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과 분리된 세상에게, 너희 스스로는 가치와 의미를 만들 수 없다고 선언하셨다. 이것이 세상의 역사가 보여주는 실제의 내용이다.

세상 역사는 힘의 경쟁이다. 각 정부는 힘으로만 질서를 잡는다. 힘에 의한 질서는 모두를 만족시킬 수 없다. 그래서 다른 힘에 무너지고 폭력은 반복적으로 일어난다.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나는 너희를 사랑한다. 너희는 사랑과 믿음으로 나와 교제를 하자. 너희는 나의 기쁨이며 나의 모든 것이다. 나를 아버지라고 불러라. 너희는 내 자식이다.

아이는 언제가 제일 예쁜가? 한 열 살까지이다. 이때까지는 자기 선택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크면 반발이 생긴다.

왜 내가 엄마 말을 들어야 하는가? 나는 나다.

이것은 중요하다. 나라는 존재의 정체성과 가치와 명예에 대하여 내가 선택하겠다. 내가 납득을 해야 하겠다.
왜 이렇게 하는가?

무엇이 인간의 최고의 가치인가에 대한 질문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그것을 가만두지 않는다. 멋있고 명예로울 틈이 없게 한다. 속여야 하고 죽여야 하고 매일 발톱을 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왜 이 속에 우리를 두셨을까?

보라고 하시는 거다.

너희는 나와 감격스러운 관계를 맺었다. 내가 만들려고 하는 너희는 저세상과는 다르다. 그 속에서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부활이십니다, 라고 고백해야 한다.

(3) (롬 8:28) 잘못한 것도 잘못으로 끝나지 않는다. 네 실패도 실패로 끝나지 않는다. 네가 죽어도 죽음이 너의 운명이 아니다.

하나님, 결론이 정해져 있다면 왜 이렇게 어려운 과정을 거치십니까?

선악과는 만들지 마시고 매일 생명 나무 열매 먹게 하시고 매일 형통하게 하시고 서로 만나면 웃게 하시면 되지 않습니까?

다섯 살이다. 다섯 살에 머물러 평생을 살겠다는 거다.

인간에게는 자주권이 있다. 자신이 선택을 해야 한다. 가치를 분별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내용을 예수를 통해 보여주시는 것이 예수의 탄생이다. 성육신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런 존재가 되기를 바라신다. 뺏어서 채우는 것은 명예가 아니다.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 이 세상에는 없는 말이다. 하나님만이 하신다.

우리가 인간에 대해 생각할 때 우리는 다른 세계관에 불려왔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래야 죄가 무엇인지를 인간은 세상에서 아무런 가치를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다. 결어

(1)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구원을 완성하신다.

너희는 나를 누구냐, 하느냐?
주는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너는 반석이라. 내가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너희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너희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용서하며 불쌍히 여기며 인간답게 살아라.

그러니 사춘기를 넘어가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평탄한 길을 주시지 않는 것은 우리를 기르시기 위함이다.

우리는 사춘기를 지날 때 두 가지를 배운다.

첫째, 왜 싸울까? 다 정직하게 살면 되잖아.

둘째, 전부 도둑들이네. 이 인생을 살 필요가 있나? 그래서 죽음을 생각한다. 절망하고 생각한다. 이런 인생을 왜 길게 살아야 하는가?

여기서 드러난다. 하나님 없이 사는 자들의 만행이 보인다. 그리고 나는 나에게 묻는다.

너도 저렇게 살고 싶으냐? 너는 무엇이 인간다운 것이라고 생각하냐?

예수 안에 있으면 정말 인간다워집니까?
그렇다. 내가 어디까지 갔는가 봐라.

(2) 십자가상 칠언에서 가장 놀라운 말씀은 무엇일까.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소서. 저들이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내가 목마르다.

이렇게 세 말씀 중에 첫째와 둘째는 예수님께서 주인으로 하시는 말씀이다. 세 번째는 가장 낮은 자리에서 동료에게 하는 말이다.

십자가 앞에는 로마 군사들이 있었고 그들은 동료가 아니다. 차라리 바라바를 놓아 주시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소서, 라고 했던 군중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시면서 그들을 동료로 인정하고 내가 목마르다 라고 하셨다.

세상에서는 매일, 지면 보복을 하고 싶다. 이것에서 벗어나 세상을 동료로 삼고 가족으로 삼는 다른 종족이 바로 우리이다.

물론 싫다. 그러나 해야 한다. 실천의 문제가 아니라 배워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이란 이래야 하는 거야. 내가 너에게 똑같은 말해줄 수 있지만 나 예수 믿기 때문에 참는다. 이렇게 하지 말라.

이런 말은 멋있게 해야 한다. 그러니 웃고 말아야 한다.

악역들은 이 역할, 악한 표정을 잘한다.

악당이 악역을 하듯이 너희는 다르게 하라. 평생이 걸린다.

이 말은 하지 않으려 했어. 바로 이 말을 참아야 한다.

넌 지옥 간다. 어차피 갈 사람 아닌가? 참아야 한다.
이렇게 어른이 되어 가는 거다.

(3) 하나님은 왜 이 방법을 택하셨는가?

아들이 죽는 게 쉬운가? 자기가 죽는 게 쉬운가? 부모가 죽는 게 쉽다. 하나님은 이걸 하신다. 고통 속에서 아들을 죽이시는 거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세계관, 인생관, 존재론이 세상과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니 갈등이 있다. 있는 곳은 세상이고 믿는 곳은 천국이다.

오늘 하루도 갈등의 계속이다. 여기서 어떻게 천국 백성답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이다. 연륜이 필요하다.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야 일정한 수준에 간다.

그 모든 것을 회개로 지우지 말고, 그 상처를 잊지 말고, 그렇게 말한 것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는 것을 기억하여 다음엔 웃을 수 있어야 한다.

그저 웃고 돌아서라.
그다음은 이렇게 말해 보자.

넌 참으로 내 친구야. 나한테만은 솔직한 말을 하는구나.

구약 내내 하나님도 이스라엘과 이렇게 씨름을 하셨다. 이걸 모르고 구약을 보면, 왜 이들은 이토록 말을 안 들을까? 말 잘 들으면 복 받을 텐데. 사실은 우리는 알고 있다. 말 잘 들어도 복을 못 받는다는 것을.

복이란 예수를 닮아 가는 것이다. 고통이 면제되는 것이 아니다. 하루를 얼른 보내 버리지 말라 하루에 주어지는 기회와 책임이 있다. 여러분의 자리를 지켜내라.

벤허는 메살라가 주인공이 아니고 벤허가 주인공이다. 세상은 모두 큰소리치며 나쁜 짓 하고 있지만 권력과 폭력 속에 있지만, 주인공은 여러분 한사람이다.

그 책임과 명예를 놓치지 말라.

【기도】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우리로 이 땅에서 하나님 없는 모습을 보게 하사, 하나님을 아는 자의 명예와 영광을 채우십니다. 배우게 하시고 기르십니다.

우리는 나이를 헛되게 먹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 다워지고, 예수님을 닮아 부활에 동참합니다.

저 죽어가는 자들 앞에서 여기 길이 있다, 여기 명예가 있다, 여기 보상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우리의 인생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