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 다시 보기(5) (창 22:7~18)

2024. 3. 10.(일)
박영선 목사

1. 내용

가. 서론

(1)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실 때마다 자신을 소개하시는 말이 있다. 나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그래서 이 세 인물의 생애는 하나님을 이해하고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한 역사와 기억이다.

아브라함은 부인 사라가 애를 낳지 못해서 처음에는 다메섹 엘리에셀을 양자로 삼았다가, 다음에는 사라의 몸종인 하갈에게서 이스마엘을 얻고 그 정도로 후사를 이어갈 생각이었는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서 낳는 아이를 유일한 후계로 삼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이삭에 대한 이해를 성경적으로 풀어야 한다.

(2) 오늘 본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삭을 백 세에 얻었지만, 아브라함이나 사라는 믿지 않았었다.

그러나 백 세에 애를 얻고, 하나님께서 창조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게 된다.

그 애를 이번에는 바치라고 하신다. 어렵게 되었다.

죽일 자식이라면 애초에 안 주시면 되는데 줄 때는 이유 없이 주시고 방법도 이해가 안 갔었는데 그 애를 잡으라고 하시는 것은 납득할 수 없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 명령을 지킨다.
하나님은 명령에 순종하는 아브라함에게 이렇게까지 약속하신다.

내가 나를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너에게 약속한 것을 네 자손 대대로 지키겠다.

나. 본론

(1) 여기서 조심해야 할 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밖에 없는 자식일지라도 명령을 듣고 바쳤다는 것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 자리까지 너를 기르겠다.
이점이 이삭 사건의 절정이다.

네 몸에서 난 자식으로 대대손손 후손으로 삼겠다는 말씀과 하나밖에 없는 그 자식을 잡으라고 하시는 것은 모순이다.

그러나 말이 안 되는 이 자리까지 너를 키우겠다, 가 이 사건의 핵심이다.

이삭에게 나무를 지게 해서 모리아 산을 올라간다. 산꼭대기에 올라가 나무를 펴 놓고 이삭을 묶고 잡으려고 하자 하늘에서 사자가 나타나 말한다.

그 애를 잡지 말라. 내가 네 믿음과 순종을 보았노라.

이삭 대신 머리에 뿔이 나뭇가지에 걸려있는 숫양을 제물로 바치게 된다.

이 장면을 히브리서 11장에서는 이삭을, 잡으라고 했다가 돌려받은 애인데, 사망으로부터 돌려받은 것이라고 얘기하고 있고 이것을 부활에 관한 상징적 사건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삭 자신은 기본적으로는 창조의 상징이었다. 낳을 수 없는 애를 낳았기 때문이다. 아버지도 늙고 어머니도 늙어서 더 이상 생산할 수 없는데 그 아들을 주신다. 이렇게 이삭은 창조의 상징이었는데, 그를 잡으라고 하시고 잡으려 하자 되돌려 주셔서 이삭은 부활의 상징까지 된다.

기독교의 신비를 창조와 부활로 설명하는데 창조가 완벽하다면 부활이 왜 필요할까? 부활이란 창조에 어떤 잘못이 있기 때문에 회복하려는 것 아닌가? 라는 의문이 들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창조는 잘못된 것이 아니다. 창조의 목적인 인간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기 때문에, 죽음이 창조 세계에 들어왔다.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셨고 그 모습을 보고 심히 기뻐하셨다. 그렇지만 선악과는 먹지 말라고 금령을 한가지 주셨는데 그들이 먹는다. 여기에 모순이 있다.

먹으면 안 되는 것을 왜 만드셨을까?
먹지 말라고 한 것을 인간이 먹으려고 할 때 왜 말리지 않으셨을까?

하나님은 인간에게 하나님을 거부할 수 있는 자주권까지 주셨다. 여기에는 한계가 없어서 감히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할 수 있는 데까지 자유가 확장되어 있었다.

인간은 그 거역에 대한 벌을 받았다기보다 생명으로부터 분리되자, 가지가 땅에 떨어져 마르고 썩는 것 같이, 하나님이 부르셔도 숨었다.

너희 왜 숨었느냐? 벗었으므로 부끄럽고 두려워 숨었습니다.

생명에서 끊어진 존재는 소멸하며 존재의 가치가 부끄러워진다.

이삭의 사건을 통해 성경이 얘기하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라는 생명에서 떨어져 나가 썩어가는 인간의 생명을 되돌려 창조의 목적을 완수하시기 위해 부활을 주셨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아까의 그 질문, 창조를 잘하셨으면 타락도 없었을 것이고 부활도 필요 없지 않았을까? 라는 질문이 다시 나온다.

부활은 왜 사망을 전제 조건으로 해야 하는가?

(2) (롬 11:25~32) 이해가 쉽지 않은 구절이다. 이 로마서의 수신자는 로마에 있는 기독교인들이었다. 이방인이다. 이방인이 예수를 믿어 교회를 세우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너희는 예수를 믿었고 선택받았던 이스라엘 민족은 예수를 못박았지만 그것을 자랑하면 안 된다. 원래 이스라엘이 제사장 노릇을 잘했으면 증거와 생명이 너희에게 넘어가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실패했고 사도직도 실패했다. 그런데도 너희는 구원을 얻었다. 그러니 너희에게는 아무런 근거도 자격도 없었는데 오직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대로 은혜로 구원받은 것 아니냐?

너희가 근거 없이 구원을 받은 것처럼 이스라엘도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구원은 하나님께서 창조 때부터 가지셨던 인간에 대한 뜻이요 의지이기 때문에 무엇으로도 방해할 수가 없다.

롬 8:29에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다고 되어 있다. 그렇다면 인간이 죄짓는다는 것이 예정되어 있었던 것인가? 인간은 죄를 지어도 괜찮은가?

롬 8:32에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셨다고 한다면, 모든 사람이 한 번씩 실패하도록 허락하신다는 말인가?

하나님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왜 이렇게 긴 역사를 쓰시는가?
인류 역사는 성경적으로는 구약 역사가 약 4천 년쯤 신약 역사가 약 2천 년쯤으로 되어 있다. 일반역사에서는 선사시대나 다른 시대를 훨씬 더 긴 것으로 보고 있다.

이것과 상관없이, 하나님이 인류에 대해 가지셨던 뜻과 목적을 이루는 방법에 대한 증거들은 구약에서는 이스라엘 역사와 함께, 신약에서는 교회 역사와 함께 지금 설명되고 있다.

아담의 실패는 무엇인가? 왜 이삭을 잡으라고 하시는가?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계시는가?

(엡 4:17~24) 여기서 말하는 마음이 굳어진 옛사람과 심령이 새롭게 된 새 사람에 대하여 기독교인들은 도덕적 이분법으로 생각한다. 잘못하는 죄와, 잘하는 믿음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과 이삭의 사건에서도 하나님은 내가 너를 여기까지 끌고 오겠다, 라고 하셨다.

믿지 않는 자들은 자기 욕심대로 살 수밖에 없고, 믿는 너희는 하나님이 너희를 어떻게까지 만들려고 하시는 가를 예수 안에서 본 자들이다. 이곳으로 와라.

선악과를 따먹었고 그 결과를 구약에서 보았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죄인으로 태어난다. 그러나 예수를 믿어서 갈등 속으로 들어와 있다. 내 마음대로 살 수 있는 나에게 주어진 선택의 자유와 예수를 알고 난 후 알게 된 내용, 즉, 인간은 하나님 영광의 꽃으로 부름을 받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 학교에서 교과서를 통해 제대로 배워 나가는 것과, 배웠지만 생각이 안 나서 못 좇아가는 것과, 학교도 없고 교과서도 없어서 시험을 볼 수도 없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다.
예수 안에서 보이는 하나님의 영광과 아버지의 뜻을 순종한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를 우리는 보았다.

그러니 자신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몰라서 죄를 짓는 것과 아는데도 죄를 짓는 것은 다르다. 아는데도 죄를 짓는 것은 실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잘하고 싶은데 왜 안될까? 실력이 딸리는 것이다.

잘못한 것을 뉘우치고 고행을 해서 지우려 하지 말고 한 걸음 더 나아져야 한다. 실패를 통해서 배워야 한다.

인간이란 이래서는 안 돼.

하나님께서는 이 훈련을 위해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까지 허락하신다. 배워라. 그래서 여러분은 믿는 사람들 속에서 배우지 않고, 죄와 사망이 왕 노릇하는 믿지 않는 사람들 속에서 배운다.

직장에서 사회에서 배운다. 여러분이 양보하지 않으면 안 되는 각박함 속에서 떠밀려 산다.

인간이 세상의 승부에서 이겨도 아무것도 아니야.

사람을 이기려면 상대방보다 더 악해져야 한다. 물론 처음에는 그 방법밖에 없었잖아? 라고 하지만 거기서부터 커나간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 내가 한세상 살고 가는데 내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라는 정체성에 대한 질문에 마주 서게 된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나이와 긴밀한 관계가 있다.

여러분이 겪은 많은 실패와 후회가 일을 한다. 실패와 후회를 지워 버리겠어요, 가 아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그 말한 것 후회합니다, 이다.

야, 나는 네 말 하고 싶지 않았지만 너 같은 사람과 친구가 된 것을 후회해. 아무 소용없는 말이다. 그리고 이런 대답이 온다.

그래, 너 뒷 골목 다닐 때마다 조심해야 할 거야.

좋은 말 해야 한다.

너 이번에 어려운 일 당하고 나한테 실수한 게 있지만, 괜찮아. 우리는 친구야. 도와줄 거 없어? 나는 늘 네 편이야.

이것을 배워 나가야 한다.

이삭을 주시고 잡으라고 하신다. 사망이 온다. 사망이란 하나님이 없는 곳이고 여기는 폭력밖에는 없다.

어디까지 져야 하고 어디까지 우리가 죽어야 하는 가는 그때마다 다르다. 성품, 표정, 말싸움, 적의를 나타내는 행동, 등에서 상대방보다 더 표독해지면 안 된다. 더 악한 말을 하면 안 된다.

결국은 이 말을 들어야 한다.

너는 다르더라.

우리는 사망과 생명에 잡혀 있지 않다. 우리는 영생과 진리와 영광의 꽃이다.

다. 결어

(1) (갈 4:21~5:1) 자유와 종을 나누고 있다. 종이란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하는 자다. 자유란 자기가 선택할 권리를 가진 자이다. 자유와 종의 차이는 무엇인가?

사라는 무슨 의미인가? 내가 약속한, 내가 목적한 인간은 선택권을 가진 아들이다. 자유인이다. 나는 조작되고 조정되는 인간을 만들지 않았다.

우리가 제일 많이 하는 기도이다.

하나님. 저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 뜻대로 살겠습니다. 길을 알려 주십시오.

하나님이 가르쳐 준 길로만 가서 편안히 살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네가 당하고 선택해라. 그게 네 실력이다. 너는 갈 길을 알려 달라고 하지만 어느 길이 옳은 것인지를 판단할 수 있는 지혜와 분별이 너에게 생겨야 한다.

그리고 그 길을 갈 수 있는 실력도 있어야 한다. 그 긴 기간을 내가 허락하니 너는 살아내라.

이것이 우리의 신앙 현실이다.

우리는 늘 자책하고 절어 있거나 자책을 만회하기 위해 선행을 한다. 그리고 회개한다. 그렇게 자책과 회개를 왕복하다가 인생을 다 보낸다.

아니다. 커야 한다. 실력이 늘어야 한다. 지혜가 있어야 한다.

선택을 하려면 지혜와 분별이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경험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시간이 필요하고 역사가 있어야 하며 인생이라는 경우가 있어야 한다.
(2)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를 당장 천국에 데리고 가지 않으시는가? 우리를 기르시려는 거다. 우리가 기꺼이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이 되는 날을 기다리신다.

너의 실패와 눈물을 헛되게 하지 않겠다.
나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다.

왜 하나님께서는 내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시는가?

어리석은 질문이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매일 만나는 사람들 속에서 여러분의 실력을 알 수 있다. 거기서 자라나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롬 11:32에는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두심은 긍휼을 베풀려 하심, 이라고 쓰여 있다. 용서하겠다, 가 아니라 길러내겠다는 뜻이다.

나는 물건을 찍어 내듯이 너희를 만들지 않았다. 이것이 여러분의 자랑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인내해야 한다. 그리고 여러분의 현실을 살아 낼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현실이 불만으로 가득하며 억울함으로 가득한데 하나님은 아니라고 하십니다. 그것 겪어라. 그것이 네게 약이 될 것이다. 내가 내 아들 안에서 약속한 것같이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룰 것이다. 내가 내 아들을 살려낸 것같이, 너희를 살려내며 영광의 관을 씌울 것이다. 이 모든 약속에 대하여 하루씩 배워가게 하옵소서.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현실의 기적을 누리고 이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