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 다시 보기(3) (창 12:1~3)

2024. 2. 11.(일)
박영선 목사

1. 내용

가. 서론

(1) 아브라함의 등장은 조금만 주의 깊게 들여다보면 매우 놀라운 자리에 등장한다. 우리가 신앙이라는 관심을 가지고 성경을 볼 때 너무 세밀한 단어들에 매이는 바람에 전체의 그림을 놓칠 때가 많다.

아브라함을 향한 하나님의 축복도 대표적인 그런 경우다. 이 축복이 어떤 자리에서 등장했는가를 살펴보면 우리의 놀라움은 더 커진다.

아브라함의 등장은 창세기 12장인데 1장부터 11장까지는 창조와 타락의 이야기다.

하나님의 창조는 생물을 만들었을 때 특별히 사람을 만들었을 때 가장 크게 축복하셨다. 생육하고 번성하라. 땅에 충만하라.

여호와께서는 이것을 보시고 심히 기뻐하셨다. 창조는 놀랍고 위대한 것이었으며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충분히 기쁜 일이었다.

(2) 인간을 만들 때는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만들자고 하셨다. 다른 생물과 달리 특별한 존재로 만드셨다. 그리고 매우 만족하셨다.

많은 축복 속에 경고는 딱 한 가지만 있었다.

동산에 있는 모든 열매를 먹되 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아담과 하와는 먹고 말았다. 부끄러움과 공포를 알게 되었다. 그것으로 그들은 스스로 영광을 만들거나 만족을 만들 수 없는 존재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들은 하나님께 묶여 있어야만, 하나님께 공급을 받아야만 포도나무처럼 저절로 열매를 맺을 수 있다. 하나님과 끊어지면 땅에 떨어져 마르고 썩을 뿐이다.

그들은 그 선택을 했고 쫓겨났다. 생명을 공급받지 못하자 아름다움을 만들지 못하고 썩어갔다. 살인이 일어나고 공포가 생기고 도망을 해야 했다. 두려움과 외로움 속에서 살았다. 900년 이상을 살았지만 모두 죽음으로 끝났다.

하나님의 아들들인 그들은 사람의 딸들을 좋아했다. 이 표현은 영적인 것인데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존재론이 성립되어 있지 않고 사람이 가지는 존재론으로 격하되었다는 뜻이다.

나. 본론

(1)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멸하기로 하셨다. 노아의 홍수가 일어난다. 노아의 홍수는 단순한 심판이 아니다. 하나님의 외치심이다.

나는 너희를 이렇게 만들지 않았다. 나는 영광과 존귀를 목적했는데 너희는 스스로 비참한 상태로 떨어졌고 나는 이것을 두고 볼 수가 없다.

노아의 홍수는 모두를 심판하여 없애 버리겠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창조의 목적에 대해 의지를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화를 내어 나타내셨다. 그러나 노아의 가족은 남기셨다.
노아의 후손들은 바벨탑을 쌓는다. 하나님께서는 이때도 은혜를 베푸신다. 다 죽이지 않으시고 흩으신다.

하나님의 말을 듣지 않는 인간들을 없애버리는 방식을 택하지 않으시고 영광과 존귀로 이끌고 나가겠다, 는 의지를 다시 한번 보이신다.

이 의지가 아브라함에게 하신 축복으로 터져 나온다.

기독교는 착하게 살면 보상을 받는 종교가 아니다. 잘못하면 벌 받는다, 에 머물러 있지도 않다.

하나님께서 피조물인 인간에 대해 책임을 지시겠다는 종교이다. 하나님은 이것을 약속하시고 의지를 보이신다. 일반적인 종교의 개념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

하나님은 왜 열심히 사는 우리에게 보상을 하시지 않는가?

우리가 작년에 신약성경 다시 보기를 공부할 때 가장 중요한 본문은 엡 1:3~6이었다. 여기에는 전부 하나님의 의지가 담겨 있었다. 구약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실패한 인간을 어떻게 할 것인가? 라고 말씀을 먼저 하시지 않는다.

나는 내가 창조한 인간에 대해 가지고 있는 목적을 타협하지도 않을 것이고 포기하지도 않을 것이며 이루고야 말겠다, 라고 하신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은 땅에 있는 모든 족속에게 허락하신 구원의 약속이었다.

구원은 물론 죄를 지은 우리가 죄 사함을 받고 천국에 가는 것이다. 그러나 천국에 가기까지의 과정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우리는 주로 종교적인 일로 대체한다. 주일을 지킨다. 헌금을 한다. 전도를 한다. 봉사를 한다. 그러나 이것으로 메꿀 수는 없다.

우리의 삶에는 유혹이 있고 위협이 있고 거짓이 있고 우리를 적대하는 세력의 힘이 너무 크다. 우리는 도덕적으로나 종교적으로 너무 부족해서 이것을 대항할 힘이 없다. 여기에 우리의 탄식과 절망이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나님의 의지를 실천해 나가시는가?

하나님과 분리된 우리에게는 공포, 수치, 절망, 비참 등의 증상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하나님이 준비하신 방안은 천국에 가도록 운명이 정해진 우리에게 과정이 있음을 알려주신다. 이 길을 하나님께서 인도 하시며 이 길은 하나님께 약속받은 길이다.

(2) (롬 8:1~2) 하나님은 타락한 인류를 위해 어떠한 일부터 시작하시는가?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우리를 해방시키신다. 그래서 죄와 사망이 없는 세상으로 오게 하신다. 여기에도 법은 있다. 그러나 그 법은 인정사정이 없는 법이 아니다. 하나님의 가족인 우리에게는 사랑의 법이 있는 것이다.

예수 안에서는 무엇을 만드시는가? 예수님은 사망의 자리에까지 따라 들어오셨다. 본래 사망이란 하나님이 없는 곳이다. 그러나 거기까지 예수님이 오셨다. 이제부터는 사망이 힘을 쓸 수가 없다. (고전 15:55~58)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사망은 존재가 없어지고 가치가 소멸된다. 이 사망이 없는 질서가 세워지는 것, 이것이 구원이다. 구원 속에서 사람은 옳고 그름으로 나누어지지 않는다. 자라난다. 하나님과 분리되었을 때는 마르고 썩어갔지만 여기서는 하나씩 배워 나간다.

(롬 8:14~17) 세상의 종교에서는 신이 공포이다. 신이 신으로 대접을 받는 것은 벌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다르다. 벌을 주지 않고 벌을 받을만한 일을 해도 그것으로 우리를 기르시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실패하거나 잘못할 수 있는 환경을 모두 없애고 우리를 기르시지 않는가? 굳이 그 안에서 고난을 겪게 하시는가?

우리가 커야 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커야 하나? 아버지의 상속자로 커야 한다. 아버지와 동등한 지위까지 커야 한다. 다른 종교에서는 신과 인간의 계급과 지위가 뚜렷이 나뉜다. 세상의 종교가 분리를 원칙으로 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끌어당기신다.

믿음을 나누자. 영광을 나누자. 너희는 나의 기쁨의 꽃이 되어라.

그런데 우리의 인생 속에서 어려움이 왜 생기는가?

하나님이 그의 자녀를 키우시기 위해 죄와 사망의 질서 속으로 보내시기 때문이다. 세상에서는 아직도 죄와 사망이 진리이다. 세상은 공포를, 유혹을, 절망을 자폭으로 해결한다. 잡아먹든가, 잡아 먹히든가.

왜 그 속에서 우리를 두셨는가? 보라고 두신 것이다. 저게 인간이 맞느냐? 저렇게 사는 것이 인간의 삶이 맞느냐? 간신히 자리 지키고 살다가 죽는 것이 인간의 존재론이냐?

인간이란 저것보다 더 나아야 될 것 아니냐?

왜 예수님은 나는 섬김을 받지 않고 섬기러 왔다, 고 하셨을까?
내 현실의 필요를 공급받기 위해 신에게 무엇인가를 드리고 필요를 채운다면 그 필요는 무엇인가? 전부 보복이다. 분노와 원한을 푸는 것이다.

인간이 가져야 할 수준은 여기에는 없다.

탕자의 비유이다. 작은아들은 유산을 다 쓴다. 생산은 없이 소모만 했다. 풍성한 아버지께 돌아온다. 반가이 맞는다. 큰아들은 화를 낸다. 나는 아버지 명령을 한 번도 어긴 적이 없는데 나에게 무엇을 주셨습니까? 아버지가 답한다.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무슨 뜻인가? 아버지에게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물론 큰아들은 고단하다. 저와 제 친구들에게는 염소 새끼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복을 받았고 세상은 우리로 인해서 복을 받게 된다. 빛이요 생명이다.

(3) 예수를 알게 되었는가? 생명과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구원하는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우리의 갈 길은 멀다. 만만치도 않다. 어디까지 가야 하는가? 죽음이 눈앞에 어른거릴 때까지이다. 아마도 칠십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젊어서는 버티고 이겨내는 것이 최선이라 생각한다. 나이가 들어 병들고 죽음을 수긍하게 되면 죽어도 좋은데 가치와 명예가 있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예수님은 많은 기적을 행하셨지만, 이것으로 주어질 고난을 면제받지 않으셨다. 제자들의 요구에 답하셨다.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

이 말을 알아듣는 데 평생이 걸린다. 이 과정에서 당연히 갈등을 겪는다. 예수 믿는 것만으로는 못 살겠다. 이것까지도 하나님은 기다려 주신다.

잘못한 것이 없으면 최선이 아니다. 자라나가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간단한 종교 행위와 회개로 때우고 간다. 하루가 다르고 일 년이 달라야 한다. 조금씩 커야 한다.

다. 결어

(1) (롬 8:26~28) 여기에 나오는 모든 것은 시험, 유혹, 자폭을 포함한다. 사람은 좋은 조건 속에서 훌륭하게 되기보다는 나쁜 조건에서 훌륭하게 되는 경우가 더 많다. 누가 뒤집으시는가? 하나님이 뒤집으신다.

우리는 내가 나를 책임지고 있지 않다. 성령께서 우리를 위해 늘 간구 하신다. 이것이 우리가 하루하루를 사는 힘이 되어야 한다.

여러분이 절망할 때 더 이상은 소망이 없다고 탄식할 때 하나님까지 붙들고 쓰러지지 말라. 여러분은 쓰러져도 하나님은 여러분을 붙들고 계신다.

오늘은 울어라. 내일은 내가 새 힘을 주마.

(롬 8:29~30) 하나님의 예정론이다. 하나님은 여러분 각각의 이름을 기억하시며, 여러분을 목적하는 곳까지 이끌기 위해 채우시고 완성하실 것이다. 그런데 이 미래는 완료형이다.

미래 완료. 미래에 일어날 일이 이미 완성된 것으로 제시되어 있다. 왜 그런가? 하나님께서는 죽은 자를 살리실 수 있기 때문이다. 창조와 부활의 하나님이다.

여러분이 생각해야 할 것은 절망이 닥칠 때, 난 더 이상은 못 해 먹겠다, 라고 하면 안 된다. 잘못했어도 하나님은 그것으로 반전을 일으키신다.

하나님은 아들을 보내시고 죽이셨으며 끌어안고 부활하셨다. 그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 나도 있기 때문이다.

(롬 8:31~39) (모두같이 읽음)

【기도】 하나님 아버지, 천지를 지으셨고 우리를 만드셨고 종말을 선언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완성과 영광의 충만을 선언하셨습니다. 거기에 우리가 그 대상이며 목적이며 증인입니다. 우리의 인생을 하나님의 약속 속에서 이해하며 하루하루를 전진하며 이겨나가서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명예와 영광을 채우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