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 다시 보기(2) (창 9:8~17)

2024. 1. 28.(일)
박영선 목사

1. 내용

가. 서론

(1) 우리는 지난 시간에 창세기 4장에 나타나는 아담의 불순종에 의한 인류 운명의 비극적 현실에 대해 생각했다. 내가 자라나면서 교회 안에서 들었던 구원론은, 아담이 불순종해서 인류가 사망에 처해 졌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 아들을 보내사 순종하게 하여 십자가에서 죽고 우리 모두를 구원했다는, 분명하고도 직선적이었다.

순종과 불순종으로 나누어지는 바람에 기독교 신앙은 먼저 율법주의를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관계성이다.

관계성이란, 하나님이 인류에게 누구인가, 인류는 하나님에게 누구인가, 라고 얘기할 때, 성경은 그것이 혈연이라고 얘기한다.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이며 사랑하는 대상이다. 그래서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것은 불순종의 문제라기보다는 아담이 하나님에게서 분리되었다는 것에 심각성이 있다.

탕자의 비유에서 보듯이 아버지를 떠난 것이 문제이다. 아버지는 기꺼이 작은아들이 달라고 하는 몫을 주어서 보낸다. 상식적으로 보면 그때 꾸짖거나 말렸어야 한다.

아담의 범죄에 대한 우리의 불만이다.
먹으면 안 되는 걸 왜 만드셨나?
만들었으면 못 먹게 해야지, 왜 놔두셨나?
그래 놓고는 왜 화를 내시나?

탕자의 비유와 시사하는 바가 같은 것이다.

(2) 성경은 처음에 창조 이야기와 아담의 실패 이야기를 한 다음, 창세기4장에서 11장까지 인류가 무엇을 했나, 아담의 불순종은 어떻게 후손들에게 유전자로 나타났는가를 말한다.

아담과 선악과의 문제는 순종과 불순종의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은 안 만들 수도 있었고, 말릴 수도 있고, 못 먹게도 할 수 있었지만, 자유를 주셨고 선택권을 주셨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준 자유는, 하나님마저도 외면할 수 있는 자유였다.

나. 본론

(1)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자 즉각 자신들이 벗었다는 것과 두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생명에서 끊어지자 가치가 없어지고 가난해진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만들 수 없다. 요한복음 15장이다.

가지가 줄기에서 끊어지면, 말라 썩어진다.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자 살인이 생겨난다. 살인은 다만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형제를 죽이는 것이었다. 무서운 것이다. 혈연 사이에서도 서로를 감당할 수 없었다. 부패, 악취, 병균이 생기기 시작했다.

가인은 도망을 갔다. 그는 남들이 자신을 죽일 것을 염려했다. 그래서 성을 쌓아야 했다. 후손인 라멕은 이렇게 말했다.
가인을 해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벌을 7배나 내린다고 하셨으면 나에게 덤비는 사람에게는 내가 벌을 77배나 내리겠다.

방자하고 교만한 얘기가 아니다. 분노이며 자폭이다.

여러분이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지면, 화를 낸다. 누구에게 인가? 현실, 세상, 사회에다 화를 낸다. 심지어는 신에게 화를 낸다.

본인이 답을 낼 수 없다는 증거이다.

아담의 후손은 구백 살 전후로 살았다. 그들은 죽었다. 죽으면 천년을 살아도 만년을 살아도 헛되다. 죽는다는 것은 그의 존재와 삶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렇게 죽었고 남은 사람들에게는 노아의 홍수가 벌어진다. 노아의 홍수를 통해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나는 너희를 이따위로는 창조하지 않았다. 이건 아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노아와 다른 피조물들을 남겨 두신다. 하나님은 노아를 살려 두신다. 바벨탑 때에도 죽이시지 않고 흩으신다. ( 편집자 주: 이 부분이 어렵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아를 살려두신 이유는 우리에게 창조의 목적을 이루시고야 말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인간이 하나님이 의도한 가치를 만들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인간의 선택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노여워하시고 안타까워하셨다. 그래서 예수가 오셨다.

우리 조상 아담이 범죄했으나 예수가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셨고 우리는 천당에 가게 되었다, 라는 이 설명이 얼마나 많은 함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우리는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과 분리되자 왜곡, 부패, 비극이 생겼다. 그러니 원래대로 갔으면 진리, 생명, 기쁨, 영광이 있을 것이었다. 이것이 기독교의 구원론이다.
나 오늘 죽어도 천국에 갈 것을 확신해. 이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최고의 고백이다. 그러나 천국에 가기까지는 우리의 삶이 왜 고달픈가? 에 대한 설명이 반드시 필요하다.

(2) (롬 5:1~11) 이 말씀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신앙고백이 다 들어 있다. 죄 가운데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를 위하여 예수께서 오셨고, 우리의 죄 짐을 지고 피 흘려 죽으셔서, 우리는 영광과 승리를 약속받았다.

그러나 이 고백에는, 이 약속이 실천되기 위해서는 과정이 있다는 사실이 빠져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고 하나님과 분리가 된 것을 예수께서 회복하셨다. 이 회복이 끝이 아니다. 그 후에 환난, 인내, 연단, 소망과 같은 과정이 있다.

하나님과 화목하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화목해지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만들고 싶은 것이 있다는 뜻이다. 애를 낳으면 길러야 한다. 학교를 보내야 한다.

그렇다면 그것은 왜 환난 속에서 되어지는가? 하나님께서는 물건을 만들고 계시지 않는다. 인격과 성품을 만드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도덕적 이분법에 묶여 있다. 잘 잘못에만 매이는 것이다. 그러나 신앙이 자라면 점점 더 훌륭한 인격으로 나아간다.

이 훈련은 왜 갈수록 어려운가? 중학교를 졸업하면 고등학교에 그 후에는 대학교를 가야 하기 때문이다. 배운 것이 끝이 아니라, 모르는 내용과 경지로 인도함을 받는 것이다.
예수님도 같은 내용을 가르치셨다. 우리가 아버지와 한 몸으로 묶였다면 묶인 다음에는 제대로 된 생명과 진리의 성장이 있어야 한다고 하셨다.

예수께서 죽어서 우리를 구원하셨다면 살아서 더욱더 큰 것을 하시지 않겠는가?

이 싸움은 도덕법이나 권력의 싸움이 아니다. 세상에서 만든 종교에서는 신이 공포이다. 신이 두려운 것은 우리보다 더 큰 힘을 가졌기 때문이다.

성경의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사랑의 반대말은 공포이며 그래서 사랑에는 공포가 들어오면 안 된다. 요한1서는 말한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요일 4:18)

기독교의 핵심이 사랑과 은혜라면 우리에게 종종 치사한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내가 왜 열심히 살아야 하는가?

누군가 나에게 사랑을 고백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이제 나의 노예가 되는 것인가? 사랑을 모르는 것이다. 사랑은 폭력을 거부한다. 이해관계도 거부한다. 기능이나 능력도 거부한다.

기독교 신앙은 이런 인격과 성품을 지닌 사람을 만들겠다고 한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도덕이거나 정성으로 때워 버린다.

성수 주일하고 십일조 내면 되는 거 아냐? 이것은 기본일 뿐이다.

우리가 테니스를 치려면 먼저 테니스 경기장이 있어야 한다. 선을 그려야 하고 네트를 걸어야 한다. 땅을 평평하게 해야 한다. 라켓과 공을 들고 나가야 한다. 십일조와 성수 주일은 이런 준비에 해당한다. 이것이 없이 다음을 갈 수 없다. 그런데 여기를 끝이라고 생각해서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한다.

그다음에 나오는 행동은, 선을 분명히 더 그리고, 청소를 더 깨끗하게 하고 아무도 못 들어 오게 한다. 경기를 하지 못하는 것이다.

경기를 하면 승부를 결정하는데 이러려면 체력이 있어야 한다. 땀과 눈물과 한숨이 채워져야 한다. 그리고 상대가 있어야 한다. 내가 혼자 연습한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그래서 내가 생각한 극대치를 넘어가야 한다. 정신력이 필요하다. 정신력으로 육체의 극대치를 끌어 올려야 한다. 그러나 승부는 정신력의 극대치로 좌우된다. 이렇게 얻어지는 승리를 통해 예술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이때에야 비로소 스포츠는 전쟁이 아니라 인간 된 아름다움 그 자체라는 걸 알게 된다.

하나님은 죄와 사망이 권력을 잡고 있는 세상에 우리를 놓아두신다. 그보다 먼저 우리를 죄인으로 태어나게 하신다. 그리고 생로병사가 전부인 세상 속에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신다.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신앙을 고백하게 하신다. 그러나 환경과 조건이 바뀌는 것은 없다. 우리는 당황한다. 하나님을 알게는 하시고 일상은 왜 계속적으로 힘들게 하시는가? 하나님은 왜 이런 식으로 일하시는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상대를 정해 주시는 거다. 상대는 죄와 사망이다. 그래서 테니스보다 훨씬 더 힘들고 강한 훈련을 겪게 하신다.

한 인간이 어떤 모습, 어떤 태도, 어떤 정신력을 가지고 임해야 하는가를 보게 하신다.

테니스계의 전설적인 악동, 일리 나스타세가 있었다. 경기 태도나 언사가 심히 저질이었다. 한번은 스테판 애드베리라는 스웨덴 선수와 결승전 시합 중이었는데 애드베리가 심판에게 포기하겠다고 했다.

주심이 이유를 묻자, 나 저렇게 하는 것을 못 보겠다고 대답했다. 대회 운영회가 임시 회의를 했다. 나스타세가 저러는 건 저러는 거고 당신은 당신의 게임을 해야 하지 않는가?

애드베리가 대답했다.

관중들에게 이 꼴을 더 연장해서 보여줄 수는 없다. 내가 기권하는 수밖에 없다.

대회 운영회는 나스타세의 게임을 몰수하고 애드베리 에게 우승을 수여했다.

이런 판정을 보고 우리는 크게 놀라는 거 아닌가? 여러분이 일상 속에서 마주하는 악당들이란, 즉 폭력 이외에는 방법이 없는 세상을 말한다.

창세기 4장에서 11장까지에 만나는 한심한 죄와 사망의 형상들은 인류 역사에서 고스란히 계속되고 있다. 인류 역사는 고대, 중세, 근대, 현대 내내 모든 나라들이 권력을 가지면 폭력을 쓰고 수탈했다.

혁명이 일어난다. 전제군주의 폭력성과 비도덕성을 공격하고 프랑스 혁명처럼 자유 평등 사랑을 제시한다. 그러나 권력을 잡으면 그 이상을 실행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된다.

그래서 모든 국가는 법을 만들고 폭력을 쓸 수밖에는 없게 된다. 교통법규든 민사법이든 형사법이든 법이 있어야 한다. 없으면 날뛴다.

우리가 못 살겠다고 아우성 치지만 하나님은 그냥 놔두신다. 너희가 선택한 권리가 무엇을 만들었는지 봐라. 그 선택권을 가졌으면 책임을 질 수 있는 선택을 해라. 여기서 선택권이란 의미가 깊다. 너에게 자유가, 선택권이 어떻게 쓰여야 되는지 명예와 영광의 차원에서 분별하라.

우리는 스스로 명예와 영광을 만들 수 없다. 서구 문명이 우리에게 유익한 부분이 있었다면, 그것은 과학 문명이나 자본주의가 아니라 시민 정신을 알게 한 것이다.

시민 정신은 한 나라의 시민이 되려면 권리만 가져서는 안 되고 책임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고 그것을 우리가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도 스스로 지키지 않으면 방법은 없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한 인간이 선택권을 가지고 무엇을 좇아가야 하는지를 알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은혜를 받는 것이요 구원을 받는 것이다.

(3) 예수 안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는가? 인간이란 이래야 한다는 것을 본다. (엡 1:3~6)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성경은 이것이 우리의 정체성이며 하나님의 약속이라고 한다. 하나님은 우리와 사랑과 믿음을 나누는 자리까지 우리를 키우시겠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커야 우리의 아버지임을 자랑하겠다고 하신다.

(엡 5:15~21) 여러분이 만나는 모든 이웃은 여러분을 위해 존재한다. 예수를 찌른 자도, 그에게 침을 뱉은 자도, 우리를 위하여 존재한다. 천국은 세상에서 악당을 제거해서 만들지 않는다. 우리를 만들어서 이루어간다.

다. 결어

(1) 성령 충만은 감동과 흥분과 행복의 절정에 있는 상태를 말하지 않는다.

성령께서 우리를 분발하게 하시고 감격하게 하시는 것은 언제든지 가능하다. 그러나 에베소서가 말하는 성령 충만은 방탕하지 않는 것이다. 도덕적인 가르침이 아니다.

방탕하다는 것은 술에 취하는 것이고 정신을 잃는 것이다. 그래서 시간이 헛되이 흐르는 것이다.

탕자의 비유에서 둘째 아들은 부모를 떠나자 배울 곳이 없어진다. 보호자가 없다. 모든 것이 소모되는 세상에 있게 된다. 그는 돌아온다. 아버지는 반기고 큰아들은 화를 낸다.

내 친구들에게는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안 잡아 주시더니 모든 것을 탕진하고 돌아온 이놈에게는 송아지까지 잡습니까?

얘야, 내 것이 다 네 것 아니냐?

큰아들은 아들 노릇을 보상으로만 알고 있다. 나갔다 들어오는 것이 전부는 아니지만 돌아와야 기를 수 있다. 아버지를 이을 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고 우리는 자녀이다. 우리가 처해있는 세상의 모든 조건에 대해 우리는 불평할 것이 없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자신을 십자가에 매달리게 하셨다. 그러니 우리를 향하는 어떤 일도 우리에게 손해가 되는 일은 없다.

여기를 이겨야 한다. 여기가 여러분이 이겨내야만 하는 여러분의 오늘이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다시 우리에게 책임이 돌아왔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운명과 약속에 대하여 책임있는 반응을 해야 합니다. 사랑과 영광입니다. 부끄러운 줄 알게 하시고 이 약속 속에서 믿음을 가지고 책임있게 모범을 보이고 자랑과 기적을 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