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 다시 보기(1) (창3:1~10)

2024. 1. 14(일)
박영선 목사

1. 내용

가. 서론

(1) 작년 한 해는 신약성경 다시 보기를 했고 올해부터는 구약성경 다시 보기를 한다. 순서상 구약성경을 먼저하고 신약을 이어가야 맞지만, 우리의 경험을 보면 우리가 믿고 이어가는 것이 아니라 태어난 후에 믿고 이해를 한다.

실존적 신앙의 경험과 역사적 신앙의 유산은 그 이해에서는 역순으로 되어 있다.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만나고 우리의 운명에 대해 알게 되자 하나님은 그동안 무엇을 하셨는가, 교회에 유전되어 오는 성경의 역사는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인가, 하는 것들을 되돌아보게 된다.

신약을 할 때 우리 이해의 가장 중요한 시점을 종교를 정의하는 것에 두었다. 모든 종교는 신이 있어야 한다. 신이 없고 윤리와 도덕만 있는 것은 하나의 법이다.

신이 있다는 것은 도덕법이나 윤리를 벗어나서 우리에게 필요한 어떤 결과를 인간의 힘으로 만들어 낼 수 없는 일에 신의 힘이 필요하기 때문에 인간은 신을 초월자로 상정한다.

(2) 신은 우리에게 자신을 설명하고 우리를 설득시켜야 한다. 그러나 인류가 만든 모든 종교는 신자가 신을 설정해 놓고, 신을 설득하여 보상을 받는 방법을 택한다. 보상을 받는 조건은 도덕과 치성이다, 우리 기독교에서도 그 방법을 늘 쓴다.

죄를 회개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다시 돌아와 밤새워 기도하면 하나님이 보상해 주셔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종교에 대한 이해를 잘 보여 준다. 그러나 기독교의 신은 목적과 계획과 내용과 의지를 가지고 있다.

신약을 시작하면서 언급했던 중요한 성경 구절은 엡 1:3~6이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전부 신이 가지고 있는 의지를 설명하고 있다. 우리가 신을 납득시켜야 하는 것이 아니라 신이 우리를 납득시켜야 한다.

나. 본론

(1) 우리는 저 사람은 예수 안 믿어도 천국에 갈 사람이야, 라는 말을 쉽게 한다. 맥이 빠진다. 구원은 착하게 살아서 받는 보상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류에 대하여 목적을 가지고 계신다.

창세기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자기 설명을 보면, 하나님은 천지를 지으셨다. 지으신 모든 것이 만족스러웠다. 하나님의 영광의 작품이라고 하신다.

이 안에 아담과 하와를 만드는 얘기가 등장한다. 그리고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축복하셨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다는 것은 외모가 그렇다기보다는 본질에 있어서 닮았다는 것이다. 인격과 지위와 신분이라는 차원에서 대등하다, 는 뜻이다. 당연히 기독교에서 인간의 신분과 지위는 고급하다.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과 닮게 만드시고 복을 주시고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셨고 땅에 충만하여 땅을 다스리라고 하셨다.

그런데 뜻밖에 금지사항이 나온다. 모든 열매는 먹어도 되는데, 선악과 만은 먹지 말라고 하신다. 아담과 하와는 먹고, 망한다.

우리 모두는 이에 대해 의문을 가진다.

먹으면 안 되는 것을 왜 굳이 만드셨는가?
만드셨으면 못 먹게 지키시지 먹도록 내버려 두고 화는 왜 내시는가?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다. 고급한 지위와 신분을 가졌다. 땅을 다스릴 수 있는 지위도 받았다. 거기에 선택권이라는 자주권이 주어진다.

창조주이시면서도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할 수 있는 선택권을 우리에게 주셨다.

우리의 질문은 하나다. 그걸 왜 주셨는가?

기독교는 우리의 상상과 만족에 불과한 종교가 아니다. 거기에 머물면, 하나님의 자리까지 우리를 초대하고 계시지만, 우리는 못 가는 것이다. 그곳에는 어떻게 가야 하는가? 우리가 하나님의 의지대로 조작되거나 조정되어 갈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내가 만족하고 납득해서 나의 자주권을 발동해야 갈 수 있다.

왜 이렇게까지 복잡한 내용이 필요한가?

기독교는 사랑과 믿음의 종교이기 때문이다.

사랑과 믿음은 좋은 게 좋은 거다, 가 아니다. 대등한 관계에서만 꽃이 피며, 다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영광과 아름다움이다.

기독교는 신이 그가 만드신 인간에 대하여 이러한 목적을 가지고 있는 종교이다. 그리고 이러한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처음 창조 때부터 가지고 계시는 의지를 버리지 않으신다.

우리는 이 선택권을 부담스러워한다. 그리고 선택을 잘못해서 받는 현실의 불편함을 싫어한다.

이걸 먹으면 너희가 죽는다, 는 말의 의미를 우리는 오해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불순종해서 사망이라는 형벌을 받았고 예수님이 오셔서 지옥에 갈 우리를, 피 흘려 대속해 주셨고, 그래서 우리는 천국에 간다, 고 생각한다. 문제를 잘잘못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더 깊은 이야기를 놓치고 있다. 사망은 벌이 아니다. 하나의 현상이다. 요한복음 15장 식으로 얘기하면 예수님은 포도나무요 우리는 가지이다. 가지가 줄기에 붙어 있으면 절로 열매를 맺되, 가지가 끊어져 있으면 땅에 떨어져 마르고 썩는다. 그러니까 사망은 소멸되는 것이다. 존재와 가치가 소멸된다.

인생을 살아내려면 생존경쟁이 필요하다. 그런데 생존경쟁에서 이긴 승자들도 죽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 승자의 성공도 성공이 아닌 것이 증명된다.

사망이란 생명에서 분리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생명이 유입되지 않는다. 썩을 수밖에 없다. 구원이 왜 영생인가? 끝없는 생명이라는 것보다 더 크게 생명에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죄는 하나님과의 분리이고 선악과를 먹어서 인류는 하나님과 분리되었다. 하나님에게 묶여 있지 않고 내가 주인이 되겠다고 한 결과이다.

내가 나의 주인이 된다는 것이 자주권이 아닌가? 그 자주권으로 하나님을 모실 것이냐 내가 주인이 될 것이냐 하는 사이에서 인류는 내가 주인이 되기로 했다. 선악과를 먹은 것이다.

어떻게 구별하는가? 인간이 도덕을 택하는 것은 규칙을 택하는 것이다. 내가 규칙을 어디까지 지킬 것인가? 그러나 도덕은 적극적인 약속이 없다. 왜냐하면, 도덕은 의지를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규칙이 아니시다. 심판자가 아니다. 의지를 가지고 있는 창조주이다. 우리의 아버지이시다.

현실에서는 어떻게 드러나는가? 자식을 꾸중할 때 드러난다. 내버려 두지 않는다. 그러면 안 돼. 왜 안 돼. 그런 건 안 되는 거야.

훌륭해지라는 것이다. 내 자식이라는 이름에 먹칠하지 마라. 부모의 공갈이 아니다. 부모의 사랑이다.

모든 종교가 신을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으로 여기고, 무릎을 꿇어 사정사정해서 보상을 받으려고 한다. 기독교만은, 너 그러지마, 내가 너를 그렇게 만들지 않았어, 그러지마, 라고 하신다.

(2) 우리가 끝없이 도덕성을 추구하고 치성을 드리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가 신을 납득 시켜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자 즉각적으로 나타난 현상은 이들이 수치를 느끼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부끄러운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된다.
옷을 벗어 부끄럽다는 것보다는 이들이 자신들 안에 가치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기름이 소모된 등잔이다. 불을 붙일 수가 없다. 두려워한다. 자기를 지탱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걸 깨닫게 된다.

예수님이 오셔서 죄 값을 치르셨다, 는 말을 우리는 오해한다.

예수님은 죄로 인해 하나님과 분리된 우리를 다시 하나님과 묶으셨다. (요17:21)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아버지가 우리를 놓지 않고 있으며 아버지가 인류에 대해 가졌던 목적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은 이렇게 관계와 연합의 차원을 얘기하셨다. 부모가 자녀를 기를 때 야단도 치고 매질도 하지만 자녀가 부모에 대해 공포를 가지지는 않는다. 부모가 자식을 포기하지도 않는다.

탕자의 비유는 놀랍다.

작은아들이 자기의 몫을 달라고 하여 받은 후 집을 나간다. 나가게 놔둔다.

나가서 작은아들은 소비밖에 할 수가 없었다. 생산은 없었다. 아버지 집에는 늘 생산이 넘쳐났다. 나는 이제 굶어 죽게 되었다. 아버지께로 돌아가겠다.

아버지가 기뻐한다. 왜일까? 자발적으로 왔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포기한 적이 없다. 그러나 나갔다가 들어오는 과정을 허락한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을 것을 아셨는가, 모르셨는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라는 선택권이 얼마나 무한정한 것인가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이 자유 속에서 하나님께서 그 목적을 성실하게 이루려 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일은 현대인에게 반복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우리는 예수를 믿으면, 예수를 믿지 않는 자와 구별이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고 기도하면, 고난의 강도도 줄어야 한다고 여긴다. 세상이 열(10) 이라는 고난을 받으면 그래도 우리는 다섯(5) 정도는 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러나 차이가 없어 보인다.

왜 이렇게 하시는가? 선악과를 만드신 것과 똑같다. 우리의 선택과 우리에게 준 자유의 실력을 우리에게 확인시키신다.

내가 어디까지 왔나? 내 실력은 얼만큼인가? 확인했으면 더 가자.

우리는 기도한다. 더 이상의 괴로움은 싫습니다. 이쯤에서 그만하게 해 주십시오. 하나님께 다 맡기겠습니다. 제발.

네가 원하는 수준에서 그만둔다구? 정신연령이 여섯 살에서 멈추고 죽을 때까지 그대로 간다구?

나는 그 꼴은 못 본다. 네가 청소년기를 지나고 나에게 반발해도 좋다. 커라. 하나님이 인간에게 무엇을 주었는지를 봐라. 그 자유 속에서 어떻게 권리와 책임을 채워야 하는지를 배워라. 그리고 네 자신에게 채워라.

다. 결어

(1) 하나님의 성실하심이 없으면 우리는 빨리 죽는 게 최선이다. 죽지 않고 버티면 무엇이 남는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성공이 전부인가?

젊었을 때는 성공이 전부이다. 늙으면 얘기가 다르다. 누가 더 많이 익었느냐? 누가 더 많이 내용을 가졌느냐?

그래서 나이가 들면 두 부류로 나뉜다. 원망하는 자와 감사하는 자. 한 부류가 더 있다. 생각이 없는 자.

우리 기독교 신앙의 최대의 약점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의지를 가지고 계신다는 것에 대해 믿음이 너무 없다.

우리는 최선을 다하고 보상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내가 원하는 것을 받지 못하니까 체념한다.

그 내용이 구약 내내 반복되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왜 끝없이 우상을 섬겼는가? 자신들의 필요를 보상해 줄 신을 자꾸 만들었다. 하나님은 강력히 아니라고 하신다.

하나님 우리가 무엇을 그렇게 잘못했습니까? 이것은 현대의 기독교 신앙인들에게 계속 반복되고 있다.

하나님 제가 무엇을 잘못했습니까?
잘못한 게 없는데 왜 이러십니까?
너 커야 한다.

(2) 그러니 잘못한 게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잘해야 한다. 도덕성이나 윤리의 문제가 아니다. 인간이 가자는 품격, 가치에서 더 만들어져야 한다.

하나님께서 선택권을 잘못 쓴 인류가 저지른 저주받은 현실에 대하여, 그것을 과정으로 삼고 하나님이 목적한 바를 더 풍성히 이루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역사이며 십자가이다.

신은 세상을 이분법으로 보시지 않는다. 내가 내 아들을 보냈으니 믿으면 천국 가고 안 믿으면 지옥 간다, 가 아니다. 그의 영광의 찬송의 자리에까지 우리가 갈 수 있도록 만들고야 말겠다고 하신다.

하나님은 이것을 위해 우리에게 오늘을 주시고 그 속에 임재하신다. 여러분은 비로소 여러분이 겪는 어떤 한계가 있을지라도 하나님이 여기서 나를 만드신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3) 큰 애와 작은 애가 싸우면 누구를 야단치는가? 큰애다. 쟤가 먼저 그랬어. 왜 나한테 화를 내? 너는 큰 놈이잖아.

우리의 생각 속에는 뜻밖에 하나님이 없다. 우리의 부모님이 되신다는 생각이 없다.

너는 내 자식이다. 나는 너를 위해 죽을 수 있다. 부모를 위해 자식을 잡는 경우는 없단다. 여러분의 하루하루의 인생과 경우들에 대하여, 보다 깊고 놀라운 시각과 안목을 가지고 기다릴 수 있어야 한다.

적극적인 신앙의 자세로 더욱 성장하며 나이가 들수록 풍성하기를 바란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하나님이 되셔서 우리에게 축복하시고 우리의 존재와 운명에 대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거셨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그 아들을 보내실 만큼 창조주이심과 아버지 되심을 나타내셨습니다. 우리 인생의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것도 증명하셨습니다. 자라나게 하옵소서. 위대하게 하옵소서. 감사와 찬송이 끊이지 않는 우리의 현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