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성경 다시 보기(25) (엡 3:14~19)

2023. 12. 31. (일)

박 영 선 목사

1. 내용

가. 서론

(1) 오늘 본문을 보면 사도 바울이 하나님 앞에서 에베소 교회를 위하여 비는 기도 내용으로 되어 있다.

성령을 따라 믿음과 사랑의 충만함에 이르기를 에베소 교인들에게 부탁하고 기대하고 기도한다.

우리 신자들이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를 불러내신 믿음의 영광과 충만을 누리도록 하는 것은 복된 기독교의 본문일 것이다.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놓치고 가는 것이 있는 데, 우리가 믿은 후 우리에게 믿음의 영광과 충만을 보여주실 것이 아니라, 왜 우리가 믿었을 때 바로 천국으로 데려가지 않으셨는가, 하는 것이다.

그때 데리고 가셨으면 지금처럼 고생할 필요도 없고 하나님도 걱정하시지 않아도 되고, 우리도 만족하고 살았을 텐데 해결책도 주지 않으시고 믿은 것과 안 믿은 것이 별로 차이나지 않는 현실을 주신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고, 자랑스럽지도 않은 인생을 내버려 두신다. 이런 상황 속에서 본문에 나오는 기도와 같이 충만과 풍성을 구한다는 것은, 선뜻 현실감이 없고 이에 대한 질문이 있어야 한다.

왜 그 질문을 해야 하는가? 믿음이 없어서가 아니다. 현실이 우리 기대와 다르기 때문이다.

나. 본론

(1) 교회라는 것은 신자들의 공동체이다. 각 개인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위하여 본문에 나오는 기도문이 성립하고 있다.

공동체라는 것은 연합, 관계, 교제를 전제로 한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이 단어들이 가지는 의미는, 먼저 출생이다. 물론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출생은 아니다.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말한다.

새 사람으로 출생하는 일이 공동체 안에서 늘 있어야 하고 출생한 아이가 자라나야 한다. 아이가 자라나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혼란을 겪게 된다.

아이가 이 혼란을 극복하고 정체성에 대한 생각이 정리되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성인이 되지 못한다.

성인이 된다는 것은 자신의 지위와 신분을 이해하게 된다는 것이다. 자신을 알아야 선택을 하고 책임을 지고 남을 도울 수 있다.

교회 안에는 항상 이 네 단계의 과정이 반복된다. 하나님 앞에서 새 사람으로 태어나고 하나님의 자녀로 진리를 배우며 순진함과 축복 속에서 행복하게 사는 시간을 가지게 된다. 네 단계 중 가장 행복한 것은 이 두 번째 단계이다. 이 두 번째 단계가 왜 계속되지 않고 고민과 반발의 단계가 있는가?

두 번째 단계에서 아이는 자기의 주장이나 판단이 없다. 그래서 책임도 짐도 없다. 하라는 대로만 하면 된다. 엄마가 하지 말랬어. 엄마가 시키는 대로 했어.

아이는 세 번째 단계로 온다. 사춘기에 온 것이다. 나는 왜 엄마가 시키는 대로만 해야 해? 나는 하기 싫은데. 나한테도 물어 봐줘.

이 단계를 하나님께서 요구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은 당신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가 납득하기를 바라신다.

이것은 선악을 구별하거나 도덕적인 분별에 그치지 않는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정체성과 운명에 대해 질문을 던지시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해 각 개인은 하나님께 대한 항복을 하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통해 무엇을 하시려는 지 비로소 알게 된다.

이 항복은 유소년기에 있을 수 있는 단순한 복종이 아니다. 우리의 항복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충만하심으로 채우신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세상에 보이셨던 충만함을 우리도 교회로 세상에 보이라고 하신다.

예수님은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우리를 구하러 오신다. 우리가 찾거나 간절히 필요로 해서 그 응답으로 오신 것이 아니다.

(롬 5:8) 이 구절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인, 창조, 부활, 종말에 관해서 창조주로서의 책임을 다하신 것이다.

우리가 구원론을 말할 때, 하나님께서 죄로 인해 지옥에 갈 우리를 예수를 보내어 사하시고 우리를 천국에 들어가게 하셨어, 라고 간단히 말하면 안 된다.

하나님을 떠나서 아무것도 만들 수 없게 된 인간을 버리지 않으시고 본래 가지고 계셨던 창조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우리를 하나님의 충만으로 가르치셔서 성숙한 존재가 되게 하셨다.

(히 5:8) 하나님은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우리의 못난 것을 대조하여 자신을 증명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우리를 완전하게 만드셔서 자신이 창조주임을 증명하겠다고 하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멸망의 자리, 부패한 자리, 무지한 자리에 까지도 따라 들어오사 하나님 되심을 증명했다.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내 계획이 그렇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러니 너희는 반드시 내가 목적한 창조의 목적에까지 도달해야 한다.

구원이란 부패하고 아무런 능력이 없어 허무했던 우리가 영광과 위대함과 찬송과 기쁨과 감사의 자리에 가는 것이다.
(2) 하나님은 이 일을 왜 교회 공동체 안에서 하시는가?

성육신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역사이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부활의 영광이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태복음 (28:18~20)에서 보는 것처럼 우리가 모든 민족에게 예수님의 증인이 되라고 명령하신다.

천국 가는 문제보다 더 중요하고 시급한 내용이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이 되는 인간을 만들어 내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 일을 역사 속에서, 오고 오는 모든 세대 속에서 모든 인류에게 이루시겠다고 교회를 세우셨고, 제자들을 파송하도록 허락하신 것이다.

우리는 선교적 차원에서 이 일을 잘 이해하고 있지만, 그것 보다 크게,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라는 말씀이 덧붙여진다.

교회는 십자가를 상징으로 내 걸고 교우들이 모인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시려고 하는지 어떻게 하시려고 하는지에 대해 증인이 된다. 그리고 교인들만의 충만에 만족하지 않고 세상이 만들지 못하는 가치를 만들어 세상과 대조한다.

세상은 무엇을 잘못하는가? 그들은 결국 보복하고 원망한다. 이 질서와 다른 것을 보이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문둥병자를 낫게 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셨지만, 십자가를 지신 것처럼, 우리도 폭력이나 강제로 상대를 조정하지 않고,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내가 그 앞에서 어떤 존재인가를, 우리보고 나타내라고 하신다. 이 성육신을 교회만이 잇고 있는 것이다.

교회가 같이 모여 함께 유익을 도모해야 마땅하지만 동시에, 권력 싸움이 전부인 세상과는 명확히 대조되어야 한다.

이것은 권력 싸움이 아니고 승부가 아니기 때문에 예수님의 탄생을 제일 먼저 연락받은 사람들은 들에 있던 양치기들이었다. 그들이 보고 들은 것은 하늘 전체를 채운 천군 천사들의 찬송이었다.

하늘에는 영광이요 땅에는 평화로다. 너희가 베들레헴에 가서 말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우리가 하는 찬송과 선포의 증거니라.

천군 천사까지 동원하여 예수님의 탄생을 우리에게 알리신 하나님의 방법은 온전한 침대가 아닌 말 밥통에 누워계신 메시아를 보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인생을 통하여 우리와 같이 되셨고 우리를 경험하셨다. 우리의 삶에 동참하여 우리 편을 드셨다. 지금 우리가 필요로 하는, 주어진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과 기술과 권력을 가지는 것과는 전혀 달랐다.

이것이야말로 역사 속의 교회가 이해해야 할 가장 중요한 내용이다.

아까 말한 단계 중 어느 단계가 가장 행복하다고 했는가? 두 번째 단계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부모가 있어야 한다. 어른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부모의 경지까지 자라야 한다. 교회의 책임이자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이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 는 것은 그것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세상에 오신 것 같이 너희도 세상의 모든 조건 속에서 어른으로 성장해 가라는 것이다. 성경의 표현으로 하나님의 영광에 동참한다는 것이다.

보상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어떤 신분인지를 알라는 것이다. 신앙이 보상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면 어려움을 왜 겪어야 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이유는 사망의 자리에 들어가기 위해서이다. 왜 사망의 자리에 들어가셔야 했는가? 인류의 운명이 사망으로 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사망의 자리에 따라 들어오시기 위해 오해를 받고 수모를 겪고 고통을 받고 죽으신다.

세상의 질서로 보면 죽는 것은 지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있을 수 없는 이 일을 우리에게 보이심으로써,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보이는 것은 잘못되었다, 부패하고 왜곡되었다, 라고 우리에게 권면하신다.

교회에 나온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교회로 모인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교회가 십자가를 내어 단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통해서 당신이 하시려는 일이 얼마나 감격적인 일인가를 보이신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모든 지혜와 권능을 동원하여 당신이 하나님이심을 우리에게 보이신다. 교회의 존재 이유인 것이다.

우리 모두의 공통된 기도가 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좀 더 좋은 여건과 환경을 주시면 좀 더 하나님의 일을 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앞으로 메시아가 될 사람들이 아니다. 여러분은 이미 메시아가 되어 있다.

한 율법사가 주님 앞에 와서 했던 질문을 다시 생각하라. 율법 중에 제일 큰 것이 무엇입니까?

첫째, 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둘째,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것이 모든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예수를 믿으면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이웃은 하나님이 묶어준 옆 사람이다. 그 시대, 그 사회, 여러분의 자리에 있는 사람이다. 직장, 가정, 매일 만나는 사람이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사랑하듯 그를 사랑해야 한다. 그를 사랑하라는 것은 그 대신 살라는 것이 아니다.

(고전 13:4~7) 사랑은 환상이 아니다. 능력이 아니다. 열정이 아니다.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다. 무례히 행하지 않는 것이다. 이기심을 갖지 않는 것이다. 모든 것을 믿고 바라고 견디는 것이다.

살아 있어야 한다. 살아 있는 존재로서 여러분의 가치가 증언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말고의 귀를 벤 베드로에게 이것까지 참으라고 하셨다.

너는 내가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당장 열두 영도 더 되는 (영: 지금의 연대나 여단 규모) 천군을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모든 권력은 아버지와 아들에게 있다. 그러나 그 일은 그렇게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힘으로 해결할 일이 아니다. 존재론과 영광에 관한 문제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도 이렇게 기도하셨다.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소서. 저들이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다. 결어

(1) 신자가 가장 잘못하는 일은 이분법으로 남을 정죄하고 자기를 위로하는 것이다.

나는 믿어서 천국에 갈 것이고, 너희는 안 믿어서 지옥에 갈 거야. 내가 그때 천상에서 너희를 놀리고 있을 거야. 가장 비겁한 신자의 자기 확인이다.

신자는 달라야 한다. 더 부요하고 넉넉해야 한다.

신자들에게 잘 안되는 부분이다. 나는 천당에 가고 저 사람은 지옥에 갈 텐데 살아 있을 때는 왜 구분이 안 되는가? 만족스럽지 않은 거다. 그래서 표정이 안 좋다.
마구간에서 태어난 메시아의 뒤를 잇고 있다는 사실을 놓치고 있다. 하나님은 당신의 충만을, 풍만을, 영광을 우리를 통해서만 받겠다고 하신다.

(2) (엡 5:22~33) 부부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연합과 같다. 부부가 된다는 것을 가장 오해하는 부분은, 나는 사랑해서 이 사람과 살기로 했다, 라는 것이다.

부부란 둘이 서로를 바라보는 사이가 아니고 인생을 같이 살아내야 하는 사람들이다. 남자들의 최고의 죄는 돈을 못 벌어 오는 것이고, 여자들의 최고의 죄는 살림을 못 하는 것이다.

살아내야 한다는 것은 두 사람을 합쳐도 언제나 넉넉하지 않다. 당신만 빼놓고 누구를 만났어도 이거보다는 나을 거야.

둘이 살면 자기의 약점을 마냥 감출 수만은 없다. 아내에게 발각 이 되고 남편에게 발각이 됨으로써 커나가야 한다. 부부싸움을 했다면 다음에는 좀 더 나아져야 한다.

헤어질 수는 없다.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이지 않는가? 그러나 엄마는 고치지 못했는데 아내가 고치는 문제가 있다. 아버지는 못 했는데 남편이 고친다.

우리는 양보해야 산다. 자기의 권리를 양보한다는 수련을 넘어서 없었던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가장 못 견딜 것 같은 것을 받아들이는 존재가 된다. 사망을 짊어진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것처럼.

(엡 1:23) 예수님은 교회 없이 혼자서는 충만하지 않겠다고 하신다. 신자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과 우리가 부부같이 함께 충만을 이루는 일이다.

이는 보상이 아니다. 지위와 신분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격상이 된 것이다. 성경은 우리를 기업을 무를 자라고 한다. 부모가 자식에게 물려 주듯이, 하나님은 통치와 영광에 대해 우리를 동료로 부르시고 있다.

인간은 착하게 살면 그만이 아니다. 도덕성을 지키면 다가 아니다. 하라는 대로 성실히 살면 되는 것이 아니다. 그 신분과 정체성에서 영광을 요구받고 있는 존재이다.

여러분의 현실에서 일어나는 어떤 어려운 일이라도 여러분을 손해 보게 하거나, 넘어뜨리는 일은 없다. 그 속에서 나를 채우시기 위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눈물과 비명이 결코 손해가 아니다.

이것을 확인하는 여러분의 건강한 하루하루가 되기를 바란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도 우리는 자녀 된 신분과 영광을 깨우치지 못합니다. 미련했고 못났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보상을 요구하는 자식이 아니라 아버지가 요구하는 영광의 자리에 나아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에 참여하겠습니다. 이것을 위해 저에게 주어진 현실 속에서 자라날 것을 약속드립니다. 그 승리와 기적을 우리 모두가 경험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