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성경 다시 보기(24) (빌 2:12~18)

2023. 12. 17. (일)

박 영 선 목사

1. 내용

가. 서론

(1) 오늘 본 본문은, 너희 구원을 두렵고 떨림으로 이루어라, 라고 하는 명령문으로 되어 있다.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구원론일 수 있다.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무엇이며 어떻게 받으며 받으면 어떻게 되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내용이다.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 그래서 부흥기에, 당신은 구원의 확신이 있습니까, 라는 질문을 하고, 그렇습니다,라고 답을 했다.

이어지는 질문에서, 당신은 오늘 죽어도 천국에 갈 확신이 있습니까?, 라고 묻는다.

부흥 시기에는 이 질문이 짚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고백이었지만, 따지고 보면 죽고 난 다음이 문제가 아니라 살아 있을 때가 문제이다.

예수를 믿고 죽으면 천국에 간다는 것은 알겠는데 살아서는 왜 고난을 받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한국교회의 문제가 되었다.
(2) 코로나를 겪으면서 교회들이 제일 먼저 했던 기도도 빨리 코로나가 끝나고 부흥시대로 돌아가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물론 그것이 우리에게도 복이다.

그러나 코로나 기간을 통과하면서 더 깊은 이해가 생긴 것은, 신자가 죽지 않고 살아 있는 동안에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이냐, 하는 문제이다.

나. 본론

(1) 항상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하는 이 말은 오늘 본문 위에 있는 빌립보서 2장 5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십자가 사건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말임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를 통해서 베푸신 구원을 영광으로 여기시며, 모든 인류에게 허락하신 은혜라는 내용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구속해 주신 것은 알겠는데, 왜 새삼스럽게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라고 하셨는가?

우리의 운명과 현실의 삶에 대한 중대한 질문이 아닐 수 없다.

본문 15절과 16절은,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말은, 구원을 받은 자가 구원이라는 운명이 시작되었다, 는 것에 그치지 않고 어떤 결론에 가야 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즉, 구원은 운명이지만 그 내용에서 존재와 가치가 중요한 것이며 이를 위해 과정이 있다고 한다.

우리가 구원을 논할 때, 예수님의 피 흘림을 성경이 말하는 대로 더 풀어 보고자 했다.

십자가에서 고통과 수치를 당하고 돌아가신 것은 무슨 의미인가? 예수를 믿어서 착하게 산다. 우리의 인생을 주님을 위해 헌신한다. 이 정도로 설명하기에는 예수의 죽음이 너무 크다. 상품의 가치와 가격이 안 맞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예수의 죽음에 맞는 행동을 해야겠다는 것은 좋은데 부담을 가지다 보니 조금씩 왜곡이 생긴다.

(2) 구원은 죄와 사망에 있던 우리를 생명과 성령의 법으로 이끌어 내신 것이다. (롬 8:1~2)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더 이상 벌을 받거나 정죄받지 않는다. 이러면 당연한 반문이 뒤따른다. 제 마음대로 살아도 되나요?

모르는 사람끼리라면 법이 필요하다. 그러나 자식과 부모 사이에는 법이 등장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혈육이라는 관계가 등장한다. 자식이 아무리 잘못해도 자식을 죽일 수는 없다. 자식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니 혈연관계에서는 부끄러워할 수는 있지만 죽일 수는 없다.

성경은 하나님의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면서도, 믿음이라는 단어를 등장시킨다. 우리는 믿음을 선택이라고 오해할 때가 많은데 믿음은 자격과 조건이라는 말에 대비 되는 말로 쓰이는 것이다.

믿음은 자격도 조건도 아니다. 혈육 관계에서 가지게 되는 관계의 친밀성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끌어안으시고 다시는 분리시키지 않겠다고 하시는 연합성의 선언이다. 이것이 믿음이다.

조폭들도 그들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법이 아니다. 법으로는 조폭이 성립될 수 없다. 조폭이 조직을 유지하는 힘은 의리이다.

의리에서 “의”자는 오를 “의”자를 쓰지만 사실은 뜻“의”자로 바뀌어야 맞는다. 왜냐하면, 의리란 같이 살고 같이 죽는다, 우리는 한편이다, 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맞고 틀린다를 따지지 않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예수 안에서 우리와 의리를 지키기로 하신다. 나는 결코 너를 버리지 않겠다. 너도 나를 버리면 안 된다.

(롬 7:25)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께 감사하면서도 여전히 갈등 속에 있음을 고백한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롬 8:1) 그러나 바울은 깨닫는다. 자신이 갈등 속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나를 죄와 사망이라는 기준으로 보시지 않고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만 대하시겠다고 약속을 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부모가 자식에게 요구하는 것은 오직 하나다. 훌륭해져라, 이 말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겪는 고난 속의 일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깨닫게 된다.

우리는 흠 없고 순전한 자로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로 보내진다. 물론 전도나 선교도 답이 된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우리가 보내져서 겪는 긴 과정이야말로 구원이 목적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해주시는 은혜이다. 물론 그렇지만 이렇게 간단한 얘기가 아니다.

(롬 12:1~2) 여기를 읽으면 이런 생각이 든다. 착하게 경건하게 선하게 살아야 해. 그러나 이 단어들은 추상명사이고 현실에서의 적용은 어렵다.

착하게 산다는 것은 윤리와 도덕의 기준을 먼저 생각하게 되고 더 나아가도 죄를 짓지 않겠다, 에서 그친다. 성수 주일하고, 구역모임에 빠지지 말고, 그러나 현실은 더 나아가야 한다.

(롬 12:3~13) 여기에는 기독교인들이 지켜야 할 신앙적 윤리가 잔뜩 나열되어 있다. 그러나 이 본문은 그런 얘기가 아니다.

이 본문은 네가 할 수 있는 것을 해라, 라는 뜻이다.

세계적인 영웅이 되려고 하지 말라. 기독교로 전 세계를 항복시키려고 하지 말라. 네 자리에서 네가 할 줄 아는 것으로 신자 노릇을 하라.

아무것도 안 하면서 큰 기대와 짐 속에 있기 때문에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일을 못 하고 있다.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이다.

계명 중에서 제일 큰 것은 무엇입니까?

첫째는, 네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둘째는,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이것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다.
누가 이웃인가요? (어디까지 책임을 져야 하나요?)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 까지 가다가 길에서 강도를 만나, 모든 것을 뺏기고 거의 죽게 되었다.

제사장이 그냥 갔고 레위인이 그냥 갔는데 사마리아인이 그를 데리고 여인숙에 가서 치료하고, 머물게 하고 돌아올 때 셈을 할 테니 잘 돌보아 달라고 하고 갔다.

네가 보기에 이 강도 만난 사람에게 누가 이웃이냐?
자비를 베푼 자입니다.
너도 가서 그렇게 해라.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잡종으로 보고 사람 대우하지 않았다.

사마리아인은 선행을 베풀기 위해 그런 기회를 찾아다닌 것이 아니었다. 자기 길을 가다가 강도 만난 자를 본 것이다. 그는 돌본 후에 자기 용무를 위해 가던 길을 갔고 돌아오는 길에 다시 들렀다. 그의 생활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았다. 그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했다. 너희도 그렇게 해라.

(3) 예수님께서 너희가 땅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말씀은 오늘날 그대로 현실이 되었다. 이스라엘에서 볼 때 한국은 가장 먼 곳이다. 유럽식 표현으로 우리는 극동이다. 동쪽의 끝이라는 거다. 여기까지 복음이 들어왔다.

우리의 선조들이 전혀 메시아를 모를 때 선교사들은 한국에 보내졌다. 오늘 우리도 메시아를 모르는 사람들 속에, 삶이 지치고 하나님을 모르는 민족 속에 보냄을 받았다.

이민족 모두를 구원해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전도적 사명이지만, 우리에게는 한계가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일상을 일주일 내내 바쁘게 하신다. 이 속에서 여러분의 이웃이 어디에 있는가를 보라고 하신다.

가족, 직장, 이웃 사람이다. 우리 모두는 우리가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짐에 묶여 있다. 결혼은 두 사람의 사랑을 보장하지 않는다. 두 사람에게 인생을 같이 살라고 주문한다.

짐을 나누어져야 하지만 우리는 상대방 때문에 이 어려움이 왔다고 생각한다. 아니다. 같은 일을 두 사람이서 겪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여러분에게 위로가 되어야 한다.

우리 인생의 모든 문제는 명분으로 분류되어 있어서 하나님은 어떤 분이며, 우리의 인생을 어떻게 만드시는가에 대한 스토리가 없다. 그러니 본문을 이해하기보다는 정답과 해결에 묶여 있다. 늘 불만이다.

하나님 아버지, 저는 진심입니다. 왜 저에게 답하지 않으십니까?

네가 하는 일이 내가 베푼 일이다.
이 고생이 하나님의 일이라구요?
그렇다. 너 이 고생 없었으면 사람 안 됐어.
정말입니까?

다. 결어

(1) 벤허는 원수였던 메살라의 죽음에서도 마음의 한을 풀지 못했다. 그러나 벤허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소서, 라는 간구를 하시는 것을 보고 마음의 칼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우리가 원하는 평안은 고민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벤허라는 영화가 하고 싶어 하는 말은 이것이었다.

인간이란 어디까지 와야 하는가?

용서하는 데까지 와야 한다. 용서는 쉽지 않다. 용서는 내가 먼저, 나라는 존재와 정체성과 가치와 운명을 알아야만 가능한, 고급한 인간의 행위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설명하는 하나님의 방법이었다.

전지전능하고 무소 부재한 하나님께서 왜 권력을 쓰시지 않고 이렇게 하시는가?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을 납득시키려고 애쓰신다.

어디까지 가야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겠어?
내가 공포가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하면 알아듣겠어?
너는 평안만을 원하는 네 마음을 어떻게 해야 한 계단 올라가게 하겠어?

하나님의 부르짖음이요 애통이다.

(2) 사랑은 정열도 환상도 아니다. 사랑은 오래 참는 거다. 무례히 행치 않는 것이다.

나라는 존재에 대해 약속하신 하나님의 영광과 위대함을 알게 되면 우리는 누구를 비난해서 나를 만족시키는 방법이 치사한 것임을 깨닫게 된다.

상대가 나쁘다는 것을 지적해서 내가 옳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 도덕이다. 도덕은 왜 이렇게 하는가? 도덕은 아무리 잘해도 남을 도와줄 수는 없다. 도덕은 잘못을 안 할 뿐이다.

잘난 사람은 늘 누구에게 손가락질을 한다. 남의 잘못을 말하는 것이 유일한 자기 확인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가난하고 미천한 우리에게 구원이 온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든 것 같이 우리에게 계속 일을 맡기심으로 세상과 우리가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하신다.

(롬 12:14~21) 악을 소탕함으로써 선한 나라를 만들려고 하지 마라. 악인이 악한 역할을 하는 것 같이 너는 선한 역할을 잊지 마라.

신자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세상 사람들은 인상을 쓰고 있다. 왜인가? 겁이 나는 것이다. 건드리지 말라. 건드리면 보복할 거야.

우리는 다르다. 우리는 폭력과 공포에 대한 긴장이 없다. 우리에게서 빛과 생명이 나간다는 것은 이런 뜻이다.

선행을 많이 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존재에서 벌써 다른 것이다. 공감하고 위로하고 함께 울고 함께 웃어라.

정답을 말하지 말라. 너 예수 안 믿어서 그렇게 된 거야. 이 말을 절대 하지 말라.

(3) (롬 8:18~30) 세상이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모두 현실로 겪고 있다. 얕보이면 안 된다. 아무도 믿을 수 없다. 자기 일에 지쳐서 남에게 선심을 쓸 수가 없다.

이 속에서 살면서 하나님이 없으면 무엇이 되는지를 보는 거다. 생명에서 끊어지게 된다. 창조, 명예, 위대함으로 갈 수가 없다. 망하는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

우리가 다르다는 것을 봐야 비로소 그들이 빛과 생명을 본다. 큰 약속이 필요 없다. 하루라는 일상 속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 앞에 여러분이 모르는 하나님의 결과물들이 나타난다.

믿는다는 말을 할 수 없는 세상에서 사는 것이 우리의 고통이다. 그러나 거기서 큰다. 세상은 잘못한 것이 잘못한 것으로 끝나지만, 우리는 잘못한 것이 우리를 만들어 간다. 다음에는 이것보다 낫게 할 거야, 성령이 우리를 밀어내신다.

우리의 고난에는 두 개의 보험이 있다. 하나는 성령이다. 우리의 보증이다. 우리의 존재와 운명의 보증이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의지이다. 하나님이 먼저 준비하시고 부르시고 과정을 인도하신다. 실패하나 안 하나를 보고 있지 않으신다. 다음 단계로 다음 단계로 우리를 인도하신다.

예수님이 맏아들이 되게 하셨다. 하나님의 의지는 놀라워서 믿어 지지가 않는다. 예수님이 맏아들이니 우리는 다 그 밑의 아들들인 것이다.

로마서의 문장은 다 완료형이다. 아직 성취되지 않은 것을 완료된 것처럼 말한다.

우리가 자격 없을 때 조건 없이 부르셔서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다 하셨다.

이것이 아버지의 뜻이다. 인생의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하나님이 일하고 계신다, 내 실력을 확인해 보자, 한 걸음씩 더 나아가자, 라는 복되고 신비한 인생이 되기를 바란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인생과 존재와 운명의 복된 것을 확인했으니 힘써 전진하게 하옵소서. 세상이 우리를 이기지 못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이겨서 하나님 영광의 증인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