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성경 다시 보기(23) (엡4:13~24)

2023. 12. 3. (일)

박 영 선 목사

1. 내용

가. 서론

(1) 오늘 우리가 보는 에베소서 4장 13절 이하의 말씀은 우리가 즐겨 외우고 확인하는 말씀이다.

그리스도의 충만한 자리까지 자라나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사람을 입으라.

그러나 이 말씀들은 윤리적 명분론이 되는 때가 너무 많아서 예수를 믿는 자의 새 사람됨, 그리고 예수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나는 일들은 분명한 소개가 부족한 것 같다.

명분과 윤리라는 면에서는 기독교적인 것이 분명한데 우리에게 무엇을 실제로 요구하는가, 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말하자면 구원론에 관한 설명이 부족하다.

신자들이 나는 오늘 죽어도 천국에서 깨어날 것을 확신해, 라고 말하는 것은 분명하고 단호한 예수 믿는 자의 고백이다. 그러나 이 말이 가지는 깊이와 방법과 과정에 대해서는 이해가 부족하다.

확신과 운명은 선언이 되었는데 현재는 없는 고백이 되었다. 죽으면 천국을 가는데 살아 있는 동안에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되는지, 라는 문제에 약하다.

봉사하고, 구제하고, 예배보고, 성경 공부하고, 이렇게 말하면 어려울 것이 없다. 그러나 신자의 삶은 이것보다 더 실제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확인해야 한다.

나. 본론

(1) (롬 6:17~21) 우리가 구원을 받기 전에 세상의 운명은 죄 아래 있었기 때문에 사망이라는 운명을 벗어날 수 없었다.

기독교인이 되어서야 깨닫게 되는 죄에 대한 성경의 설명은, 죄는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것이다. 이것은 도덕이나 윤리의 문제가 아니고 관계의 문제이며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졌다, 는 것이다.

오늘 에베소서 4장의 본문에서는 생명에서 끊어졌다고 하고, 요한복음 15장에서는 포도나무 비유로 나무가 줄기에서 끊어졌다고 한다. 당연히 마르고 썩을 수밖에 없다. 사망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면 생기는 결과이다. 이것은 소멸이다. 가치와 의미와 존재의 소멸이다.

죄가 왕 노릇 하면 사망밖에는 결실할 수 없었으나, 이제 예수가 오셔서 그의 의로운 행위로, 생명이 왕 노릇하는 곳으로 부름받는 것이 구원이다.

우리가 스스로 하나님께부터 오는 은혜를 끊어버린 것 같이,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 자신의 의지가 드러난 것이다. 하나님으로서 피조 세계에 대한 책임을 지키겠다는 약속의 실천이기도 하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과의 화목이며,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어져 우리의 생명이 영생이 되었다. 이때 영생은 생명이 영원하다는 것이 아니라, 생명이 얼마나 풍성하고 충만한가를 말한다.

그래서 구원은 지옥에 갈 우리가 천국에 가게 되었다는 우리의 운명을 말하는 것보다 더 크게 이해해야 한다.

죄가 사망으로 우리를 다스려서 우리의 전 생애를 쓸모없게 만든 것 같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로 생명이 가지는 명예와 영광을 우리가 가득 채우게 되었다.

이것은 우리가 믿으면, 하늘로부터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는 것처럼 영광의 자리에까지 자라나는 과정이다.

은혜로 구원을 얻었다면 하나님께서 명예와 영광을 그냥 주시면 되지 않는가? 왜 갈등과 의심과 걱정의 인생을 살아야 하는가? 예수를 믿어도, 믿지 않는 사람들과 다른 것이 없다.
다른 것은 죽은 후에만 다르다. 저들은 지옥에 가고 우리는 천국에 간다. 살아서는 안 믿는 사람들이 더 잘사는 것 같다.

그러니, 내가 믿어서 무슨 유익이 있는가, 라는 질문이 나온다.

그러나 성경이, 믿으면 형통한 삶을 살게 하고 믿지 않으면 불행한 삶을 사는 것처럼 우리를 가르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걸 알아야 한다.

(롬 7:21~24) 예수를 믿고 착하게 살고 말씀을 따라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우리 속에 반발이 있고, 내 마음대로 살고 싶은 고집이 있다. 해보면 고집이 이기더라. 이 현실은 도대체 무엇인가? 나는 왜 구원받은 사람처럼 살지 못하는가?

(롬 7:25)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한다. 그러면 제대로 믿었을 때 고통이 없다는 이야기다. 제대로 믿었더니 갈등이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한 분파가 있다. 구원파이다. 중국에서는 워치만니가 유명했고 우리나라에서는 박옥수 목사가 있다.

물론 이단은 아니다. 구원의 감격이 신앙의 전부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구원받았을 때를 기억하는가? 그때는 다시는 죄를 안 짓고 살 것 같다. 다른 것이 모두 필요 없는 행복의 절정에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몇 달 가지 않는다. 이것이 현실이다. 현실은 감격으로만 살 수는 없다.

현실의 삶에서 감격이 부족하다는 것이 아니다. 삶의 고통이 그리고 자책이 켜켜이 쌓여 가는 것이 현실이다.

신자들은 보통 체념하고 신앙생활을 한다. 그래서 표정이 나쁘다. 좋은 표정을 지으려면 그에 상응하는 내적인 실력이 있어야 하는데 잘 안된다. 서로 시선을 피한다. 쓸데없는 질문을 받을까 봐 피하기도한다.

오늘 그에 대한 답을 내보자.

롬 7:25에서 감사하리로다, 고 말은 했지만, 그 다음에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갈등이 계속되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롬 8:1~2) 이 갈등에 대한 성경의 지적은, 옛날에는 이 갈등에서 죄가 이기기도 하고 믿음이 이기기도 했는데 우리는 이것을 죄가 이기면 지옥, 믿음이 이기면 천국이라는 보상의 차원으로만 이해했다는 것이다.

성경의 답은 이것이다. 갈등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사망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사망이란 죄값이다. 그러니 사망이 없어지려면 죄가 없어져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 한순간도 하나님과 떨어져 있지 않은 존재이다. 하나님과 끊어지지 않는다면 쓸데없는 인생과 쓸데없는 운명은 있을 수가 없다. 나는 너희를 그 자리에 불러냈고, 이것이 구원이다.

우리의 갈등은 우리를 자책하게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운명이 아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시켰다.
우리의 갈등은 예수님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도록 우리를 이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잘하는지 못하는지를 보시고 있지 않다.

하나님은 우리를 죄인으로 태어나게 하시고 어린아이로 태어나게 하시고 자라게 하신다. 겪고 울게 하신다. 이런 방법으로 우리를 키우신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다. 아담을 죽이시고 인류의 조상을 새로 만드실 수는 없었는가? 왜 복잡하게 아들을 보내고 구유에 누워 있고 피난 가고 십자가에 매달리게 하셨는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인생, 육체, 역사에서 하나님은 무엇을 증명하시는가?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을 결코 포기하시지 않는다. 네가 나를 부인하는 자리에도 나는 너를 찾아가겠다. 이것이 예수의 죽음이다.

예수의 죽음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목숨까지 버리셨어, 라는 지극 정성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도망간 자리가 어디든지 오시겠다는 것이다.

(2) 십자가를 다시 생각해 보자.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소서.
네가 하나님의 아들 이어든 내려와 봐라.

이 사람은 죄가 없다. 놔 주자.
그 사람을 놔주려면 차라리 바라바를 놓아주십시오.

이 자리에서 기도하신 것이다.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소서. 저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히 5:8)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초월자가 피조물과 어떻게 지위와 능력의 차이가 있는가를 증명하시려 하지 않는다. 폭력과 공포로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지 않는다.

우리를 끌어안는다. 편을 든다. 나는 이것으로 내가 하나님임을 증명하겠다.

우리의 기도와 신앙생활에는 공포가 있다. 안 하면 벌 받을 것 같다. 주일에 등산을 가면 다칠 것 같고, 잘 내려오면 버스가 사고가 날 것 같다. 우리의 신앙 본성이다.

하나님은 벌을 내리시지 않는다. 만일 간섭을 하신다면, 얘야, 너 시간을 이렇게 쓰면 안 된다, 이다.

믿는 자들에 하나님이 주시는 벌은 운명을 가르기 위한 것이 아니다. 운명을 채우기 위한 것이다. 이렇게 얘기하면, 그럼 왜 내가 열심히 살아야 돼?, 라는 질문이 나온다.

(롬 6:15~16) 우리가 은혜 아래 있다면 왜 열심히 삽니까?

네가 잘못 살면 좋은 열매는 없다. 너한테 준 기회는 네가 위대함으로 갈 수 있는 기회이다. 네가 그것을 놓치고 부끄럽게 산다면 은혜를 잘 못 쓴 것 아니냐? 부끄러워해야 한다.

신앙의 기준은 잘하면 명예롭고 못 하면 부끄러운 것이다. 그러니 벌 받고, 상 받고 이상의 노력이 필요하다. 끝없이 명예로, 위대함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 저를 위해 십자가까지 지셨는데 이거 하나 저의 요구를 안 들어주십니까?

내가 들어주면 너는 거기에 붙잡힌다.

욥기를 생각해 보자 욥은 회개한다.

너는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내가 틀렸다고 하느냐?
하나님 저는 잘못한 게 없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세계를 보이신다. 얘들은 잘해서 이 결과를 보상받는 것이냐? 이들의 영광은 내가 만든 것이다. 나는 조건과 자격을 묻지 않고 결과를 만드는 하나님이다. 그런데 너는 조건과 자격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죄를 안 짓는 수준에만 머물러 있다. 그래서 창조의 세계에 나오지 못하고 있다.

욥은 이것을 회개한다.

저는 하나님이 누구신지 몰랐습니다. 무엇을 하려고 하시는지도 몰랐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최소한의 도덕과 규칙에 묶여서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을 회개합니다.

예수를 믿지 않으면 도덕적 세계를 벗어날 수가 없다. 예수를 믿으면 회개에 붙잡혀 있으면 안 된다. 잘못을 안 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잘못은 자기를 세우는 격발이 되어야 한다. 이것을 고백하는 것으로 뭉개면 안 된다.

가슴을 쥐어뜯으며 다짐해야 한다. 내가 다시는 이렇게 안 할 거야. 이게 회개다. 울어도 소용이 없다. 핑계를 댈 곳은 없다.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 나다. 내가 되어야 한다.

이것을 위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일상을 주신다. 일상이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웃, 현실이다. 나를 만들기 위해 주신 것이다.

가족, 옆집, 친구, 직장이 있다. 여기서 배우는 거다.

오랜만에 보는 동창이 있는가? 좋은 말을 해라. 반갑다. 기껏 하는 미운 말은 이 정도다. 여전하구나. 미운 말의 값은 내가 치른다. 말을 한 나도 들은 상대도 손해이다. 이것을 깨달으면서 커나가야 한다. 내 옆에 있는 사람이 나 때문에 힘을 얻고 나 때문에 위로를 받는 자리에까지 가는 것,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가는 것이다.

다. 결어

(1) 우리의 이러한 책임은 자유와 연결되어 있다. 자유는 맨 처음 권리로 이해된다. 그래서 우리는 불만이 있다. 먹으면 안 되는 선악과는 왜 만드셨는가? 만드셨다면 왜 지키지 않으셨을까? 왜 먹고 죽게 놓아두셨나?

자유이다. 자유를 주셨기 때문이다. 자유란 선택권이다.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까지 선택할 수 있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지만 우리를 조작하거나 조종하지 않으신다. 놀라운 인간에 대한 이해이다.

결국, 인간은 하나님과 분리되었다. 사망이라는 결과에 이른다. 창세기 1장은 창조가 시작되지만 11장 바벨탑에 이르면서 노아의 홍수로 모두가 죽게 된다. 쓸모없는 헛된 인생이 증명된다.

그리고 12장에 아브라함이 등장한다. (창 12:1~3)

창조 때 하셨던 선언과 똑같은 선언을 하신다. 인간이 하나님을 외면한 상태에서 나는 너에게 목적했던 창조의 목적을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 라고 하신 것이다.

너는 다만 내 말에 순종하는데 그치면 안 된다. 너는 복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이런 존재라고 선언을 하시는 것이다.

처음에 자유는 권리였다. 인간은 자신이 선택한 자유가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뼈에 사무치게 알게 되었다. 그리고 결단한다. 책임 있는 선택을 해야하는 것이구나. 명예와 영광에 대한 이해가 없는 것은 책임이 아니구나.

(2) 성경에서는 이것을 순종이라고 푼다. 그래서 신자들은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라고 하면서 책임을 아버지께 미룬다. 아니다.

순종은 내가 결정하여 따라가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인간이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의와 진리의 거룩함은 인간이 만들 수 있는 결과물을 넘어서는 것이다.

(벧후 1:4) 우리는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복을 받았다.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충만한 하나님.

우리가 인간에 대하여 항복할 때, 가장 큰 항복은 인간다운 것에서 일어난다. 인간답다는 것은 짐승이 아니다. 기계가 아니다. 이해관계를 넘어선다. 아량이 있다, 용서가 있다, 친근하다, 사랑스럽다, 와 같은 것들이다.

우리의 첫째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둘째는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것이다. 여러분이 만나는 모든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 환상 속에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예의를 지키며, 아량을 베풀며, 따뜻한 위로를 나누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오늘부터 이 위대한 첫걸음을 시작하라.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놀라운 존재입니다. 세상은 폭력으로 위협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인간다워라, 하나님을 닮아라, 나는 너희를 영광의 자리로 부른다. 사랑으로 부른다. 이것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없다. 믿음을 가지고 승리해라, 복을 받아라, 위대해 져라. 아멘으로 받고 순종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