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성경 다시 보기(21) (마28:18~20)

2023. 11. 5. (일)

박 영 선 목사

1. 내용

가. 서론

(1) 마태복음 28장의 말씀은 기독교 신자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기독교인으로 살게 된 자기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임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땅끝까지 가서 모든 족속에게 주의 이름을, 주의 가르침을 가르치는 일이다. 한동안 유행했던 표어 중에 가든지 보내든지 하라, 라는 표어가 있었다.

땅끝까지 가서 모든 족속을 제자로 삼는 일은 임무이다. 그러나 이 임무가 우리가 기대하는 것 같이, 나는 예수를 믿었으니 오늘 죽어도 천국에 갈 것을 확신한다, 내가 살아 있는 한 복음을 전파하고 예수를 증거하리라, 라고 묶이는 바람에 현실적이지 않게 되었다.

현실은 그것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과 경우를 가지는데, 표어로 표현된 명분과 목적에 붙잡혀 있다 보니, 당연히 해야 할 일들이, 일상에서 실천되거나 적용될 틈이 없이 긴 세월을 살다가, 그제야 부름을 깨닫는다.
그러니 땅끝까지 복음을 전한다는 의미가 성경적으로 보충 되어야 한다.

나. 본론

(1) 요한복음 17장 18절에 의하면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니까 너희는 땅끝까지 가라는 말의 의미는 예수의 오심에 연속되어 있다. 또한 예수의 오심을 반복하는 의미가 있다.

예수님은 내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의 살과 피가 우리의 죄를 씻고 새사람으로 거듭나게 하며 영생을 허락하셨다, 라고 잘 알고 있다.

예수가 오시고 구원을 베풀고, 우리에게 다시 예수에게 주어졌던 임무가 연속되고 확대되는 간단한 이해보다 조금 더 가 보면, 예수께서 자신이 오신 것 같이 우리를 보낸다는 것은 이런 뜻이 있다.

예수의 성육신은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음을 믿게 하시고 저들을 사랑하신 것을 알게 하옵소서, 라는 뜻이 있는 것이다.

예수의 오심은 구원을 이루는 임무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나를 보냈는데 아버지가 나를 보낸 이유는,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 같이 내가 옴으로써 나와 이 인류가 하나 되게 하려고 왔다는 것이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관계이며 신분이며 지위이다. 동양권에서는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것은 넘을 수 없는 서열이다. 유대인들에게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것은 동격이다.

그래서 아들과 반대되는 개념의 단어는 종이다. 아들은 기업을 이을 자이며, 주인이고 종은 부림을 받는 하인인 것이다.

예수의 오심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방법의 완성이면서도 그것을 굳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심으로써 우리와 동등하다는 것을 보여주셨다.

우리가 신을 생각할 때 처음 생각하는 것은 권력이다. 전지전능하신 분이다. 이 전지전능의 내용은 다 권력이다. 없는 것도 만들고 말을 듣지 않으면 죽여 버리는 권력의 개념이지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라는 것은 이 권력과 전혀 다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신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신이 우리와 하나가 되자고 하면 몸 둘 바를 모른다. 이렇게 겁을 먹은 모습이 우리의 신앙 모습인 것이다.

부모를 무서워하는 것은, 이전 시대에서는 당연한 것이었다. 부모를 두려워해야 했고 어려워해야 했다. 부모는 자식에게 고함을 질렀고 그래서 아버지에 대해 좋은 기억이 별로 없다.

돈도 어머니가 주셨고 좋은 일은 어머니가 다 하셨다. 아버지는 고함 지르고 화를 낼 때만 역할이 있었다. 이런 모습이 우리에게 인간의 서열을 알게 했고 그 서열은 언제나 권력적인 계급이라는 편견을 가지게 했다.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지옥에 갈 우리를 천국에 가게 하셨다는 간단한 내용만으로는 채울 수가 없다. 하나님을 외면하고 벌 받아 마땅한 인간에게 하나님이 찾아와 하나님이 본래 목적한 인간이 되게 하겠다고 하시는 것이다.

너희와 나는 본래 사랑과 감사의 관계였으니 이 관계로 돌아가자, 라고 하시는 것이며 이것이 구원이다. 하나님은 이것을 사랑, 은혜, 긍휼로 설명하신다.

그러니 땅끝까지 가서 모든 족속을 제자로 삼으라는 것은, 신이 누구인지를 알리는 일에 너희가 가서 증거가 되고 기적이 되라고 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내용에 익숙하지 않아 반갑지 않다. 마치 놀러 갈 때 아버지가 같이 간다고 하면 놀라는 것과 같다. 요즘은 좀 다른 것 같다. 아버지가 아들과 같이 놀아 주기도 한다. 전에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하루에 두 번 볼 이유가 없었다.

여러분도 필요할 때만 하나님께 무릎을 꿇는다. 하나님이 어떤 대상보다도 놀라운, 고상한, 위대한 우리의 상대라고는 생각을 못 한다.
기독교 신앙에서도 뜻밖에, 진정성을 보이는 경우에, 권력의 냄새를 풍기고 겁을 준다. 너희 안 믿으면 지옥가.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너무 가난하다. 유치하다.

(2) 예수를 보내심으로써 예수가 인간이 되셨고 하나님이 인간과 하나가 된 것이다. 나로 인하여 너희와 아버지가 하나가 되었다. 더이상 너희에게 아버지는 공포의 대상이 아니다. 너희 아버지는 너희의 실패나 부족함으로 너희를 포기하거나 잊어버리는 분이 아니다. 어찌 그 자식을 잊어버리는 부모가 있겠느냐?

이것이 성육신이며 예수님도 이렇게 우리를 보내신다. 땅끝까지 모든 족속에게. 우리가 서 있는 바로 이 자리이다. 우리는 한국에 태어났고 21세기를 살고 있다.

십자가는 하나님 의지의 처절함을 나타내고 있지 않다. 하나님이 없는 세상에서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 폭력이다. 신이 왔는데도 신에게 폭력을 썼다. 구원을 베풀었는데도 배신을 했다. 이것이 십자가이다.

하나님 모르는 인간은 권력 이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내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는 남의 것을 빼앗아야만 했다. 모든 명분과 권력은 폭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쓰인다.

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는가?

그들은 예수님의 기적을 보았다. 그를 왕으로 삼고 싶어 했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그러나 예수가 무력하게 붙잡혀 가자 실망을 했고 배신감을 느꼈다. 우리를 속인 저 사람을 십자가에 매달아라. 무엇에 분노했는가? 내 소원과 내 기대에 응답하지 않은 것이다. 그가 신일지라도 내 필요에 응답하지 않는다면 죽여 버려라.

인간은 여기서 그냥 돌아서서 가지 않는다. 굳이 죽이라고 한다. 빌라도는 말했다.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을 수 없다. 그를 십자가에 못 박을 이유가 없다. 놓아 주자. 명절에는 죄인 한 사람을 사면해 주는 법이 있지 않는가?

그를 놓아줄 바에는 차라리 바라바를 놓아 주십시오.
십자가의 진면목이 드러난다.

하나님이 없는 인간은 그의 필요를 위해 모두를 죽인다. 보복하고 자폭하고 함께 죽는다. 아무런 명예나 기쁨의 단어는 사용하지 못한다.

그러니 십자가를 감상적으로 생각하지 말라. 왜 십자가가 필요했는지 진상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주장한다. 내가 열심히 믿고 이렇게 간절히 비는데 왜 하나님은 응답하시지 않는가? 무엇을 더 하라는 말인가? 모든 신자의 갈등이며 신자들의 얼굴이 어두운 이유이다. 성경과 믿음에 대해 기대하지 않는다.

죽은 다음에나 지옥에 안 가면 됩니다. 이런 체념과 자폭이 교회와 신자들에게 큰 시험 거리이다. 이러한 왜곡에 대해 깊이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은 권력이 있으시지만, 이것을 다 감수하신다. 놀라운 일이다.

우리를 항복시키기 위하여 우리의 반발, 폭력, 조롱, 못난 짓을 감수하신다. 그리고 죽으신다. 기독교는 이런 종교이다. 잘잘못에 대한 심판자가 아니라 아버지이시기 때문이다.

그는 아버지야, 얼마든지 용서하셔. 그럼 평생 못나게 굴어도 돼? 부끄러워해야지.

신앙은 이렇게 성숙하고 우리는 이렇게 철이 들어간다.

나쁜 짓을 해도 된다. 세상은 감옥으로 보내지만, 하나님은 지옥으로 보내지 않는다. 그러나 못난 짓이다. 부끄러워해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와 가족이 되고자 하는 이유 중 하나는 명예와 영광에 대한 욕구가 있기 때문이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신자는 어떻게 달라야 하는가? 예수를 믿는 사람의 인성의 다름을 보여야 한다. 스스로를 위해서라도 그래야 한다. 이것은 명예에 관한 것이고 부끄러움에 관한 것이다.

내가 잘 대해 주었더니 세상은 더 악하게 굴더라. 어떻게 이겨야 하나? 단번에 이길 수 없다. 결국은 이겨야 한다는 것을 품어야 한다. 노력하고 만들어 내야 한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4장 12절에서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이보다 큰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 감이로다, 라고 약속하셨다.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들어 주겠다, 고까지도 하셨다.

예수님의 제자였던 빌립은 이런 요구를 한다.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옵소서.

빌립은 예수님의 여러 신성을 보기는 했지만, 여전히 예수님이 범인에 불과해 보였다. 신의 아들이라면 신성에 걸맞는 권력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빌립아, 내가 너희와 이렇게 오래 같이 있었는데 아직도 아버지를 모르겠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너희가 원하는 것은 권력이다. 너희의 필요를 채우는 힘이다. 그러나 아버지가 하시려는 것은 너희의 상상과는 다르다. 그것은 아버지의 위대하심에 영광에 참여하는 것이다. 너희가 경배하고 찬송하고 떠받들어야 한다는 얘기가 아니다. 너희는 지위와 신분이 다르다.

다. 결어

(1) 벌을 면하는 정도가 아니다. 상상을 벗어나는 정체성과 신분이 주어진 것이다. 이 신분으로 살아볼 기회를 가지는 것이다. 이 책임이 권리로 주어져 있다.

예수의 이름으로 구하고 응답을 받을 때에 권력은 등장할 수 없다. 예수의 이름이 있기 때문이다. 예수는 사랑으로 오셨다. 긍휼과 자비로 오셔서 영광을 만드시는 분이다.

예수의 이름에는 우리의 생각과 다른 수많은 성경적 내용이 있고 이 내용들이 우리에게 도전하고 있다.

우리가 예수의 이름으로 현실을 살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폭력이 유일한 질서인 세상에서 사랑과 영광을 지닌 존재로서 부딪치는 것은 다만 갈등이고 싸움이 아니다. 어둠에 비치는 빛이 되는 것이다.

부패하는 곳에 들어가는 소금처럼 하나님의 창조에 동참하는 것이며 이 일을 위해 신분과 기회가 주어졌다.

쉽지 않다. 처음에는 몰라서 못 한다. 처음에는 천국에만 가면 그만이었다. 이제는 세상을 불쌍히 여겨야 한다. 예의를 지켜야 한다. 이런 것들이 나를 변화 시킨다. 저주를 하는 것이 우리의 대표적 표현이면 안 된다. 용서와 기다림이 대표적 표현이어야 한다. 그것이 얼굴에 나타나야 한다.
(2) 잘 안되어도 절망하지 않아야 한다.

(롬 8:1)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실패는 있지만 저주는 없다. 심판이 없다. 잘못한 것은 다음에 잘해야 하는 훈련이 된다.

몇 번을 용서해야 하는가? 예수님은 답하셨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

현실이 여러분을 배반하고 여러분 자신이 여러분을 실망시키는 모든 경우 속에서, 결국은 내가 이긴다, 나는 멋진 사람이 되겠다는 다짐이 여러분의 하루하루를 승리로 이끌기를 바란다.

【기도】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현실이 얼마나 놀라운가요? 우리는 부족한 것이 많고 억울한 것이 많고 원망스러운 것이 많지만 그런 것들이 우리를 손해 보게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힘으로 답을 만들지 말고 위대한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라고 하시는 아버지의 가르침입니다. 하루에 한 걸음씩 나아가라고, 붙들고 인도하시고 채우시는 하나님을 기억합니다. 승리의 그 날까지 매일 기도하며 찬송하며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저희가 되게 하옵소서. 포기하지 않는 하나님을 기억하는, 하루하루를 기적으로 만드는 저희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