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성경 다시 보기(20) (요 14:6~14)

2023. 10. 15. (일)

박 영 선 목사

1. 내용

가. 서론

(1) 오늘 본문 요한복음에서 보는 것처럼 예수님은 자신을 이렇게 표현하셨다.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또 나사로를 살리신 장면에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 고 굉장한 은유로 자신을 설명하신다.

우리는 예수님을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메시아, 즉, 구원의 주님으로는 생각해도, 당신 자신이 가치와 의미의 본문이라는 것은 잘 모른다.

예수님은 자신이 생명의 방법이라 하지 않으시고 생명 자체라고 하셨다. 기독교 신앙의 특별한 면모이다.

모든 종교는 신에 대한 설명과 신에게 기대할 수 있는 것과 보상을 받는 법이 있어야 한다. 기독교를 제외한 여러 종교의 신들은 계획과 뜻과 의지를 가지고 있지 않다.

숭배자가 치열함과 도덕성을 근거로 해서 혹은 제물을 바치는 희생으로 자신의 필요를 받아 내기에 바쁘다. 신 자신에 대한 설명은 거의 없다.

(2) 기독교의 신은 창조주이고 심판주 이면서 그 아들을 보내어 우리를 구원한다. 우리를 진리와 생명으로 부르는 것이다. 이에 대한 성경적인 이해가 많이 필요하다.

나. 본론

(1) 예수는 구속자로 우리의 죄를 위하여 대신 죽으시고 죄값을 갚으셨다. 그래서 지옥에 갈 우리를 천국에 가게 하셨다. 복을 주시고 영생을 주신다.

우리의 단순한 고백이다. 그러나 예수는 방법론으로 오시지 않았다. 예수는 새로운 세상을 열기 위해 오셨다. 아담으로 인하여 죄와 사망이 왕 노릇 하던 세상을 예수로 말미암아 은혜와 생명의 세상으로 바꾸었다. 세계관이 바뀐 것이다. (롬 5:12~ 21)

세계관이란 우리가 어떤 질서에 붙잡혀 있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가 아는 세상 질서는 죄와 사망이 왕 노릇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생존경쟁을 해야 하고 약육강식이 규칙이 되었다.

예수를 믿으면 죄와 사망이 더이상 기준이 아니다. 은혜와 생명의 세상에 들어오게 된다.

(롬 8:1~2)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죄와 사망, 실패, 소멸이 운명이 아니고 생명과 성령에 의한 영광과 천국이 운명인 세상에서 있게 된 것이다.

믿으면 보상이라는 조건보다도 더 크게, 영광의 자리까지 데리고 가겠다는 하나님의 의지가 보여진 것이다.

우리가 예수를 믿은 후에도 보상의 차원에서 신을 대하니까, 우리는 잘못을 안 하기에 급급하다. 그래서 잘못을 하면 빨리 회개해서 지운다. 그러나 이렇게 하면 잘못을 지우는 것이 최선이지, 잘하는 것에 대한 요구와 가능성은 제시되지 않는다.

우리의 신앙이 세상에게 어떻게 편견으로 받아들여졌는가를 알아야만 우리 신앙의 특별함을 알게 된다.

욥기에서 욥은 의인이고 잘못을 한 적이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고난을 당한다. 고난을 당하자 욥은 당황한다.

왜 하나님은 나에게 고난을 주시는가?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가? 욥은 하나님을 원망하지 못하고 자신이 태어난 것을 원망한다. 내가 태어난 날이 달력이 없었더라면, 엄마는 왜 나를 낳았을까, 내 생일이 지워 졌으면, 이라고 원망한다.

마침 울고 싶은 아이 때려 주듯이, 친구 셋이 와서 빨리 회개하라고 한다.

무엇을 회개하는가?
네가 잘못하지 않았는가?
무엇을 내가 잘못했는가?
네가 잘못하지 않았는데 벌을 내리신단 말이냐?
나도 그 점이 이상하다. 나는 잘못한 것이 없는데 왜 하나님이 나를 고통 속으로 몰아넣으시는지 나도 궁금하다.
네가 말을 그따위로 하는 것만 봐도 네가 잘못한 것이다. 네가 잘못했겠지, 하나님이 잘못하셨겠느냐?

이런 싸움을 계속하다가 막판에 욥은 드디어 하나님, 우리 계급장 떼고 만납시다, 라고까지 말한다.

하나님은 물으신다. 너는 무슨 근거와 배짱으로 네가 잘못하지 않고 내가 잘못한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가?

나는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청구서를 드리면 갚아주시는 분이지 그분 스스로 심판자가 되시지 않는다. 심판의 기준은 잘했다, 잘못했다, 이므로 도덕성만 남게 된다.

그래서 신자들에게도 남아 있는 표현이 ‘착하다’이다. 이 말은 세상에서 어디까지 발전했는가 하면, 저 사람은 예수 안 믿어도 천국에 갈 사람이야, 라고 한다. 우리도 일부 공감을 한다. 착하다, 는 것은 도덕을 기준한 것이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아들을 보내신 것은 그것과 비교할 수 없다.

우리가 원하는 구원과 보상에 대하여 하나님의 목적과 뜻은 우리의 생각과 다르며 하나님은 전적으로 책임을 지고 있으시며 의지가 있으시다. 이것이 하나님의 정체성인 것이다.

(2)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격과 조건을 묻기에 앞서서 내가 하나님인 책임을 지겠다, 고 하신다. 그 책임은 권력의 문제가 아니라, 사랑을 약속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에게도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신다. 공포의 대상이나 잘잘못의 심판자가 아니라, 부모가 자식에게 갖는 마음을 가지고 계신다.

그런데 왜 아들을 보내어 굳이 십자가에 못박는 것인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는 이유는 우리가 사망을 초래했기 때문이다. 사망이란 죄값을 치루는 것인데, 죄란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이고, 분리되자 모든 생명은 부패하기 시작했고 왜곡되며 소멸했다.

하나님은 이 자리에 예수님을 보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이다. 바로 임마누엘의 하나님이다.

이것은 착한 사람들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죄인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하나님을 버려 모든 가치와 운명이 소멸하고, 실패할 수밖에 없는 자리에 하나님이 들어오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소멸하거나 분노의 대상으로 버려지는 것을 면하게 되었다. 이것이 기독교의 구원론이다.

그러면 당연히 우리가 왜 열심히 착하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질문이 나올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죄가 가지는 비겁함과 치사함이다. 우리는 못난 생각을 하는 거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고, 하나님이 아들을 보내어 대신 피를 흘리게 하실 만큼 위대한 지위를 가지고 있음에도, 영광과 생명에 대한 반응보다 비겁하고 못나고 억지를 부리는 반응이 먼저 튀어나온다, 는 것을 우리는 이해 해야 한다.

기독교 신앙은, 나는 믿어서 천국 가고 너는 안 믿어서 지옥에 간다는 구별이 아니다. 예수를 믿으면 현실의 도전 속에서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 로 구별이 되어야 한다.

명예나 영광은 쉬운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돈으로도 치성으로도 얻을 수 없다. 깊은 이해와 훈련과 경험 속에서 쌓인다.

하나님은 역사를 요구하시고 각 개인에게 인생을 요구하신다. 그런 방법으로 하나님은 하나님의 지혜와 의지로 우리를 그곳에 이르게 하신다. 우리는 다시 질문한다. 그래도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기까지 할 필요가 있는가?

십자가에서는 무엇이 드러나는가? 하나님 없는 인간은 모든 가치와 명예에서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 그를 구하려고 왔음에도 아들을 죽인다.

하나님 없는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이웃을 잡는 것과 똑같다. 죽여서 빼앗아야 한다.

야곱이 그랬다. 얍복 나루에서 홀로 남아 어쩔 줄 모르고 있었는데,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 씨름하고, 야곱은 고집을 꺾지 않는다. 고집을 꺾지 않는다는 것은, 그가 모든 일에서 빼앗아야만 되는 자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사자가 그의 몸을 치고 간다. 아니 그냥 가면 어떻게 합니까? 내가 이긴 보상을 주시든가, 축복을 하고 가셔야지 그냥 가실 수는 없습니다. 너는 이름이 뭐냐? 야곱입니다. 빼앗아야 내 필요를 채울 수 있는 약탈자입니다.

성경은 이 약탈자를 해석할 때 보호자가 없는 사람이라고 푼다. 나는 살려면, 누구를 잡아야 하는 존재입니다. 너는 다시는 고아라고 하지 말라. 내가 너의 아버지다. 너, 자식 이기는 아버지 봤느냐? 네 이름은 이스라엘이다. 하나님과 싸워 이긴 자다.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을 이기는가? 자식은 부모를 이긴다. 자식이 이기지 않고 부모가 진다.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안다. 자식을 위해서는 부모가 죽을 수 있다. 십자가는 이것을 증명하고 있다.

하나님 없는 인간은 무엇이 되는가? 정의, 평화, 진리, 생명 등이 모두 자기의 강도짓을 정당화하기 위한 변명에 불과하다.

(3) 인간은 스스로 만족할 수 없다. 남에게 도움이 될 수는 더욱 없다. 여기에 예수가 오셨다. 나는 줄 수 있다. 무엇이든지 줄 수 있다. 내 이름으로 내게 구하는 것은 내가 다 주겠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모든 필요한 것을 주실뿐 아니라, 우리도 우리가 모두의 필요에 답을 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드시겠다고 한다.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이보다 더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아버지의 뜻을 다 이루고 아버지의 부요하심과 그 의지와 복 주심을 십자가로 증명하셨다. 그 후에 아버지께로는 왜 가시는가?

불러낸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의 권리, 명예를 이루시기 위해 가신다.

그래서 우리는 잘못을 회개하는 일이 아니라, 명예와 영광으로 부르셨다는 사실에 집중해야 한다.

우리는 다른 세상에 있다. 전쟁을 한다면, 잘못하면 죽는다. 그러나 경기를 한다면, 금을 밟는 것이 실점이 된다. 여기서 우리는 커나간다.

율법은 경기장이고 예수가 오셔서 여기서 경기를 하신다. 경기는 인간이 만들어 내는 아름다움과 위대함의 한 모습이다. 정성, 치열함, 누적된 기술, 체력, 정신력과 인간만이 가지는 예술적인 아름다움까지 나타난다.

다만 승부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 사람이 지나갈 때 환호한다. 그는 기계가 아니며, 복권이 아니며, 그 사람이 한 인격이라는 사실에 우리는 환호한다.

예수님은 싸우셨다. 비겁함, 거짓됨, 핑계, 외면, 자책, 분노, 폭발을 용서, 회복, 기다려주심, 편들어 주심으로 갚으셨다.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온전히 자신을 우리에게 주는 것으로 인하여, 우리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의 변화된 신분과 정체성에 놀라게 된다.

잘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실력이 늘어야 한다. 실력은 기술만의 문제가 아니다. 체력이 필요하다. 정신력을 갖추어야 한다. 인격이 자라야 한다.

인간은 상대를 꺾어 이기는 것이 영광이 아니다. 어떻게 인간 노릇을 하는가? 함께 기뻐할 수 있는가? 어떻게 나를 낮추고 상대를 섬길 수 있는가?

다. 결어

(1) 마지막 만찬에서 제자 둘이 나선다.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 편에 앉혀 주십시오. 너희는 내가 왜 왔는지 아직도 모르는구나.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오지 않았다. 나는 섬기러 왔다.

우리는 헌신을 하거나 겸손을 떨자고 하는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다. 상대방의 영광을 뺏거나 상대방을 짓밟아서 강자가 되려고 하지 않는다.

(롬 8:31~39) 운명은 무엇으로도 우리를 바꿀 수 없다. 하나님이 우리 편이기 때문이다. 여러분이 겪는 어떤 절망, 자책, 경우라도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도망갈 수 있는 것은 없다. 하나님이 외면하시는 자리는 없다.

너무 부끄러운가? 멋있어지라. 회개하지 말고 달라져라. 자책으로는 본전에 갈 수 있을 뿐이다. 그 위를 가야 하지 않겠는가?

비겁하고 부끄러운 것을 알아야 한다. 수치를 알아야 한다. 영광으로 가는 것이 우리의 권리이며 책임이며 운명이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운명을 기억하게 하사 우리의 인생을 복되게 하옵소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로 주님을 닮게 하옵소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인간의 복된 것,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영광으로 채워지는 우리의 인생이 되게 하사, 더 많은 기회에 생명이 되고 진리가 되고 부활이 되고 기적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