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성경 다시 보기(19) (요 12:24~33)

2023. 10. 1. (일)
박 영 선 목사

1. 내용

가. 서론

(1) 오늘 본문에 보는 것과 같이 예수님은 그 생애의 마지막을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것으로 마친다. 예수의 죽음은 우리의 이해로서는 이해하기 어렵다.

신이 자기를 믿는 신자들을 위하여 죽는다는 개념은 인간 사회에서는 없다. 신은 절대자이고 생사화복을 주관하고 우리가 가서 엎드려 빌면, 간절히 조르면 보상을 해주는 분이지 우리를 위하여 신이 편을 들고 더 큰 결과를 위해 자신이 죽는 신은 상상이 가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님은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썩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라고 비유로 설명하시고 자신이 죽는 일에 대한 고통스러움을 토로하신다.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더하겠느냐? 아버지여 이때를 면하게 하옵소서. 그리고는 바로 마음을 바꾸어서, 그러나 제가 이때를 위해서 왔나이다.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시옵소서.

그러자 하늘에서 소리가 있기를,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한 영광되게 하리라, 라고 하셨다.

사람들이 못 알아듣는 문답을 나누셨다.

성경은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신과 그 신을 믿는 신자들에 대한 이해가 우리와 전혀 다르다.

나 본론

(1) (히 2:14~16) 하나님의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니 그들을 구하러 오시는 예수님도 혈과 육으로 오셔서 우리가 처한 자리까지 오시기 위해 죽음의 자리에 오셨다.

그의 죽음은 실패가 아니라 우리를 붙잡기 위해 필요한 행위였다. 그리고 그의 부활에 우리를 참여시키셨다.

사망으로 사망의 권세를 잡은 자 마귀를 없이 하시고, 천사들을 붙들려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려고 하신 것이다.

사망은 이제 없어졌다. 사망이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 소멸되는 것인데, 예수님이 오셔서 사망의 자리에 들어오심으로 사망의 자리가 없어졌다.

(고전 15:55~58)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승리를 얻었으니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가 되라고 연결하고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데리고 가려는 자리는 우리의 상상을 벗어난다. 권력자 앞에서 보상을 받기 위하여 착하게 사는 것, 곧 도덕과 윤리를 지켜 보상을 받는 자리가 아니다. 여기가 어렵다.

너 착하게 살아야 복 받을 거야, 라는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 착한 것은 악 하게 굴지 않았다는 정도에 불과하다.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는 정도가 아니라 더 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가 말하는 구원이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신다. 하나님의 자녀란 동양적인 개념에서는 대응할 수 없는 서열의 차이이지만 성경에 기록된 히브리인들의 개념에서는 대등한 관계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의 자녀라고 부르시며 우리에게 자신을 아버지라고 부르라 하신다. 우리는 놀란다. 이 모든 일은 왜 일어났는가? 하나님은 그 아들을 보내시며, 아들로 하여금 사망을 없애시며, 사망까지 들어와 우리를 불러내시는가?

사랑이다. 사랑은 무엇보다도 진지한 것이며 무엇보다도 위대한 것이다. 감격스러운 것이다. 하나님에 대하여 우리가 가지는 공포가 있다. 우리가 반복적으로 회개를 하는 것은 우리가 세상의 종교성에 너무 붙잡혀 있기 때문이다.

잘못을 안 하면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기르시는 것이다. 크는 동안의 시행착오는 당연히 있는 것이다.

잘못을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자고 하는 것이 기독교이다. 여러분의 기도는 마땅히, 잘못했어요, 의 반복이 아니다. 다음에는 잘하겠습니다, 이다.

제가 얼마나 못났는지, 제 실력이 무엇인지를 봤습니다. 힘을 주시옵소서. 이렇게 더 나아가는 것을 성경은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는 보상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 있다. 잘 잘못을 심판받는 관계가 아니라, 부모가 자식을 키우는 관계이다. 자식은 부모를 위해 죽지 못하지만, 부모는 자식은 위해 죽을 수 있다. 이것이 예수님의 죽음이다.

못난 것들이 못 알아보고 하나님을 죽인다. 비난하고 저주하고 부끄럽게 죽인다.

빌라도는 예수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고 이렇게 얘기한다. 나는 그에게 사형을 언도 할만한 죄를 찾지 못했다. 너희들이 원한다면 예수를 사면해 주마. 그러자 백성들이 말한다. 아니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고 바라바를 놓아 주시오.

당시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바라바 만도 못 한 존재였다. 왜일까? 배신감을 느꼈다. 메시아가 이렇게 붙잡혀서 수모를 당한다는 것에 대해 깊은 배신감을 느꼈다.

여러분이 예수를 믿어도 갖는 체념이 있다. 신앙이 좋아도 인생은 고달프다. 신앙이 좋으면 인생이 형통해야 하는데 왜 신앙이 좋아도 고달픔은 여전한가?

우리가 거기에 보내졌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셨다. 우리가 못났다는 조건 속에 보내신다. 우리가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이 무엇을 하시는지도 모르고, 우리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어찌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곳에 보내셔서 우리를 붙잡게 하신다.

내가 너를 위해 죽어도 좋다. 우리는 여기에 놀라야 한다.

이 세상은 이해관계의 세상이며, 힘의 논리가 질서인 세상이다. 얕보이면 안 된다.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승자가 되어야 한다. 빼앗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빼앗긴다.

이런 현실 속에서, 하나님은 나는 얼마든지 너에게 줄 수 있다, 라고 하신다. 우리는 구한다. 제가 필요한 걸 주십시오. 승리, 힘, 형통을 주십시오. 그런 것은 비교도 안 되는 것을 주겠다. 무엇인가요? 사랑이다. 너를 위해서라면 나는 죽어도 좋다.

자식이 부모의 사랑을 깨닫게 되는 것은 몇 살쯤일까? 시집 만 가도 엄마가 우리를 위해 희생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아버지에 대한 화해는 굉장히 늦다.

아버지가 죽고 자신도 죽을 때쯤 되어야, 아버지도 알고 보니 고생하셨구나, 를 알게 되는 것 같다. 그전에는, 나는 아버지를 사랑해, 라고는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아버지는 사랑의 대상이 아니다. 어머니는 사랑의 대상이다. 아버지하고는 용서는 할지언정 사랑까지는 못 온다. 아버지가 맡은 일은 책임이었기 때문에 그렇다. 아무에게도 사랑받지 못한다. 추석에도 모자지간에만 놀러 간다. 아버지는 집을 본다.

이것이 우리에게 큰 편견으로 남아 있다.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너무 이해하지 못한다. 그냥 제가 달라고 하는 것만 주세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신의 이름을 주시며 자신의 신분을 나누자고 하는 것을 몰라서 우리는 쉽고 값싼 것에 묶인다. 하나님이 내 필요를 만족시키지 못했다는 억울함 때문에 세상에서 당하는 고난과 불편함 속에서 자신 있는 신앙생활을 하지 못한다.

(2) (마 11:25~30)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하는 약속의 배경은 하나님께서 슬기로운 자들에게는 자신을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신다는 내용에 있다.

우리의 정성과 지혜에 결론을 만들어 주는 분이 아니고,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진정한 영광과 운명을 주실 수 있다는 뜻이다. 우리는 만들 수 없다.

주를 위하여, 라는 말은 굉장히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주께 해드릴 수 있는 것이 없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아버지의 자녀 다워야 하는 것이다.
넉넉해야 한다. 승부와 경쟁에서 넉넉해야 한다. 승부와 경쟁을 외면하라는 것이 아니다. 세상은 그것이 살고 죽는 문제이지만, 우린 그렇지 않다. 정당한 조건 속에서 정당한 내용으로 경쟁해야 한다. 성실하고 진정성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죽고 사는 문제는 아니다.

사람을 보고 웃어야 한다. 이해관계로 웃지 않는다. 상대방의 존재를 존중하기 때문이다. 상대방을 존중하려면 자신이 존중하다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한다. 이것을 모르면 아무도 존중할 수 없다.

여러분이 괴로울 때 누가 웃으면 꼴 보기 싫다. 내가 힘든 데 너 왜 웃어? 넌 뭐가 편해? 우리는 분노가 다이다. 세상은 죽어도 혼자 죽지 않고 같이 죽자고 덤빈다.

여기서 사랑으로 상대를 만나야 한다. 이분이 바로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마 22:35~40) 율법사가 와서 물었다. 계명 중에 가장 큰 계명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사랑하라는, 와서 벌벌 떨어라, 가 아니다. 착하게 굴어라도 아니다.

둘째는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기독교는 이런 종교인데 이상하게 복을 구하는 종교가 되었다.
명예나 가치가 없어지고 형통하는 것만 남았다. 어려운 세상을 사는 것을 피하면 그만인 종교가 되고 말았다.

왜 어려움 속에 있어야 하는가? 거기서만 진정한 내용이 만들어진다. 가장 편한 것은 끊임없이 마약을 먹는 것이다. 그러면 제정신으로 돌아올 틈이 없다. 당사자는 끊임없이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이 사람을 살아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생각하고, 도전을 받고, 시험을 받으며 부대낀다. 그러면서 실력이 는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진정한 내용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관용, 용서, 공감, 책임을 갖는다. 하나님은 인간을 이렇게 부르고 있는데, 우리는 형통과 승리만을 원한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는 쓸데없는 일에 붙잡혀 있는 자들아, 이다. 목숨을 걸고 쓸데없는 일에 붙잡혀 있다. 다 내게 오라, 내가 쉬게 하리라.

사랑은 짐이 아니다. 사랑은 매우 간절하지만, 사랑하는 사람만큼 행복한 사람은 없다. 사랑을 할 수 없는 것처럼 불행한 일은 없다. 사랑을 못 하는 것과 같은 비극은 없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그것을 놓치고 있다. 예수를 믿는데 예수가 왜 왔는지, 그를 보내신 이는 누구인지, 나에게 무엇을 목적하셨는지 모르고 매일 달라고 한다. 이미 준 것은 어떻게 해야 할 줄을 모른다.

(3) (고전 1:26~31) 세상의 것들은 진정한 인간의 존재론을 만들 수 없다. 이기는 거, 더 가진 것이 사랑을 만들지 않는다. 사랑은 받아야만 한다. 사람은 사람을 사랑할 수 없다. 우리가 한때 사랑했었던 기억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랑은 소유욕이었다.

결혼 후에 싸우는 이유가 이것이다. 내가 널 사랑했는데 너는 왜 이 모양이야? 사랑은 상대방이 아무래도 좋은 거다. 하나님도 그러셨다.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을 수 있는 사랑이다.

사랑이 우리를 건방지게 만들거나, 방탕하게 만들거나, 제멋대로 하게 만든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비겁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지하고 못났다. 우리는 죽지 못해 산다. 하루씩 버티며 산다. 세상이 이 원리 속에 있다.

여기에 우리가 사랑을 입은 자로서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있을 때 그 아들을 보낸 것처럼, 우리를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 앞에 세우신다. 빛을 보지 못하고 소망이 없는, 폭력 이외에는 모르는 자들 앞에 세우신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이며, 사랑받은 자들의 넘쳐나는 사랑이어야 한다고 성경은 말한다. 여러분이 세상 사람을 모두 구해야 한다고 요구하지 않는다. 사랑은 사랑하는 것이 자랑이다.

너희는 다른 조건과 자격으로 이 사랑의 자리에 와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나만이 줄 수 있다.

주안에서의 사랑이 무엇인가? 십자가이다. 사랑은 기꺼이 헌신하며 희생한다. 사랑은 빠지고 헌신과 희생이 나오는 바람에, 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고 주를 위하여 땅끝까지 가겠습니다, 는 문장에서 핵심이 빠지고 윤리가 되었다.

어떤 종교적인 일을 하는데 인격이 풍기는 향기가 없고 발전이 더디다. 여러분이 가야 할 길을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면, 여러분도 손해요 세상 안에서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하게 된다.

(엡 4:22~24) 존재의 본질, 성품과 소망하는 것과 자랑이 다르다. 죽으면 천국에 간다. 살아있는 동안에는 무엇인가?

내가 보내진 세상에서, 싸움과 보복뿐인 그곳에서 평안과 형통없이 시달리며 사는 나는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있어야 한다. 여러분은 존재가 다른 것이다. 너는 손해 볼 수 있다. 그러나 너는 죽는 순간까지 다른 존재로 살아가는 것이다.

다. 결어

(1) 마태복음 16장에서 베드로가 멋진 답을 한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주는 그리스도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맞다. 내가 이제 죽어야 한다. 주여 그리마옵소서. 제가 막겠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고백은 있는데 그 고백이 무엇인지 모른다. 예수가 메시아라는 것은 아는데 그 메시아가 정치적이고 군사적이고 보이는 결과물일 것으로 오해했다. 인간이라는 가치와 존재와 신분을 바꾼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베드로는 예수를 세 번 부인했으나 예수께서 불러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 물으신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됐다. 그 조건으로 너의 남은 생애를 복음 전하는 자로 살아라. 할 말이 없는 지금의 조건으로 살아라. 그렇게 죽음을 뚫고 걸어가라.

구전된 얘기로는 베드로는 예수님과는 거꾸로 된 자세로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얘기가 있다.

여러분 각각의 생애가 예수님의 생애를 잇는 기적이며, 영광이며, 자랑이며, 유일한 소망이라는 것을 세상 앞에 보이기 바란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큰소리칠 틈이 없습니다. 세상은 우리를 이리 저리로 몰고, 눈 한번 감으면 코를 베어가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주께서 우리들의 조롱과 원한에 찬 보복 속에 말없이 죽어가신 것처럼, 견디게 하옵소서. 그렇게 하나님의 일을 주님처럼 이루게 하옵소서. 우리의 생애가 기적이며 하나님의 임재라는 것을 믿습니다. 이 인생을 살아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