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성경 다시 보기(18-3부) (엡 4:13~16)

2023. 9. 17. (일)
박 영 선 목사

1. 내용

가. 서론

(1) 우리가 지난 시간에 중요한 길을 이렇게 열었다. 기독교는 결국 우리의 현실 속에서 하나님이 없다, 고 하는 세상에서 대항하여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예수님의 공생애 첫 시험에서도 사단이 세상에서 필요한 것은 권력이라고, 얘기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이다, 라고 얘기한다. 세 번째 시험에서도 내게 절하면, 세상을 주겠다고 한다. 예수님은 오직 하나님께만 경배와 영광을 돌려라, 라고 한다.

왜 이렇게 다른가? 오늘 본문은,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러야 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제부터 어리석어서는 안 된다. 생각이 모자라면 안 된다. 이 세상의 시험과 위협에 대하여 답을 가지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2) 이 세상이 하는 시험, 유혹, 어리석음, 거짓말 등은 무엇이냐 하면, 신이 있다면 그 신은 절대자, 라는 것이다. 권력에 대해서 절대자다. 그러니 네 힘으로 풀 수 없는 문제를 신에게 도와 달라고 하라.

그 신은 어떻게 해야 움직일까? 네가 두려워하고 죽을 때까지 종노릇 하겠다, 라고 너를 맡기면 네 말을 들어 줄 것이다.

이것이 모든 종교다. 기독교를 제외한 모든 종교는, 인간이 만든 것이고 거기서 신은 공포이다.

그에게 힘을 빌리기는 하지만 그 신은 공포여서, 유다의 아하스 왕은 그 힘을 얻기 위해 자기 자식을 제물로 바친다. 놀라운 일이다. 자식을 바쳐야 말을 들어주는 신인 것이다.

아하스의 입장에서 국란을 당하여 나라는 구해야 되고 방법은 없는 왕으로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지라도 그 신은 무가치한 것이다.

나. 본론

(1) 성경은 뜻밖에 다른 모든 종교가 하지 않는 말을 하는데,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라고 한다. (요일 4:16)

사랑의 반대말은 공포이다. 증오도, 무관심도, 동정도 아니고 공포이다. 그러니 기독교의 신은 공포의 대상이 아니다. 그에게 우리가 어떤 도움을 받으려고 하는 것보다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다.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행사하신다. 우리가 신약 성경 다시 보기의 주제를 하나님은 누구신가, 로 잡았다. 그리고 이 주제의 본문은 에베소서 3장 3~6이었다.

그리고 6절은 이렇게 말한다.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여기에는 권력이나, 경쟁이나, 거친 것이나, 독주해야 하는 처참한 폭력성이 없다. 예수님의 생애는 이것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라 해도 좋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신 이유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신약을 열면서 오시고 구약은 내내 율법에 대한 것이었다. 설명했듯이 율법은 경기장이다. 규격과 규칙이 있고 경기를 하는 장소이다.

그러나 이 경기장은 무대일 뿐이다. 실제 경기는 아니다. 경기와 공연은 신약에 와서 예수님이 시작하셨다. 예수님은 무엇을 시작하셨는가? 사랑하기 시작하셨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오셨다.

팔 복은 어떤 인간이 가져야 하는 완전한 덕목이 아니다. 팔 복은 상대를 위한 덕목이다. 심령이 가난하고 애통하고 마음이 일정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르고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고 라는 것은 모두 상대를 위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바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어떤 이웃인가? 세상의 폭력밖에는 모르는 이웃이다. 그 폭력은 내 필요를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없어서 이웃으로부터 뺏어야 한다. 생존경쟁이고 약육강식이다.

이에 대하여 하나님은 나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다, 라고 하신다. 나는 너희를 그렇게 만들지 않았다. 너희는 생애는 그런 싸움과 경쟁이 전부가 아니다. 너희는 내가 만들어 놓은 성품을 이루기 위해 내가 만든 역사와 우주와 인생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2) 기독교를 이해하기 위해 여러분이 입문하는 최초의 자리는 구원론이다. 우리는 구원을 이렇게 이해한다. 하나님을 배반하여 죄와 절망에 빠진 우리를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셔서 그 아들을 보내어 아들이 십자가에 흘린 피로 값 주고 샀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오늘 죽어도 천국에 갈 것을 믿는다.

이 고백은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단단하고 단순한 신앙으로 좋은 것이다. 그러나 하나의 문제가 있다. 너무 부정적이고 소극적이다.

죄 사함을 받고 형벌을 면하고 천국에 가는 것이 전부이다. 천국에 가는 것이 우리를 어떻게 만들고자 하는 것인가에 대한 설명은 없다.

영생에 대한 약도는 있지만, 본질이 되는 사랑에 대한 개념이 없다. 예수께서 오신 것은 물론 우리의 죄를 씻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죄를 씻는 것, 잘못을 회개하는 것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예수께서 우리를 예수가 목적하는 곳으로 데리고 갈 수 있는 근거는, 예수께서 피를 흘리심으로 우리는 예수님과 대등한 신분을 가진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다. 구원론에는 이 내용이 없다.

날 위해서 죽으셨어, 에 머문다. 내가 있는 자리까지 찾아오셨어, 에 까지 가야 한다. 왜 오셨는가? 우리를 죄에서 사망에서 꺼내어 영광의 자리에 가게 하려고 오셨다.

구약성경에서 제일 많이 등장하는 하나님의 역사적 자기 설명은 나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이다. 또 하나가 있다.

나는 너희를 종된 애굽에서 구해낸 너희의 하나님이니라.

종된 애굽에서 꺼낸 것이 전부가 아니다. 자유인을 만들기 위해 꺼내셨다. 가나안을 가려면 먼저 애굽에서 나와야 한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끝나고 만다. 이렇게 된 것을 성경은 책망한다. 히브리서에서 너희는 그러지 마라. 너희는 가나안까지 가라. 너희에게 약속하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까지 가라. 구원이란 하나님의 자녀라는 명예와 영광의 자리에 가는 것이란다.
(롬 3:23~26) 죄를 지어서 다 죽게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영광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에, 영광에 이르게 하기 위해 일단 죄에서 꺼내겠다.

꺼냈으니까 이제는 영광으로 가야 한다. 영광으로 가려면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인생, 결혼, 자식 기르기, 늙어 죽기까지 과정을 다 겪어야 한다.

예수님의 성육신과 우리를 위해 메시아 직을 수행하신 것, 그리고 여자의 몸에서 나신 것, 30세까지 인생을 사신 것, 마지막 공생애를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이 누구시며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가를 증명하신 것이 그것이다. 뿐만 아니라 오해받고 배신당하고 조롱당하고 죽는 자리까지 가셨다. 이 모든 것이 구원의 내용에 속한다.

(히 5:8) 하나님의 아들인데도 죽음을 겪어야 했다는 것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에 대한 어떤 완성이라고 한다. 이 완성은 하나님께 결격 사유가 있어서 무엇이 필요하다는 것이 아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데 우리가 죽음에 넘어가 있으니까, 하나님은 자신이 없는 곳에 올 수가 없는데, 이것을 넘어오신 것이다. 이것이 예수의 죽음이다.

신이 나를 만드시고 나를 사랑한다는 선언을 실제로, 피를 흘려 죽음에 오셔서 나를 부둥켜안고 증명하셨다.

쉽게 가는 게 좋다. 십일조로는 안된다. 십삼조쯤 하세요, 열심히 믿으세요.
이렇게 신도들은 교회에 오면 복잡하지 않게 복 받기를 원한다. 마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생각이 없는 분처럼 생각한다.

이러면 예수를 믿는 것이 현실에 녹아들지 않는다. 실력이 없다.

(3) 로마서 3:23의 단어들을 다시 보자. 먼저 은혜다. 은혜란 무엇인가? 공짜라는 개념이 아니고 하나님의 의지이다. 하나님께서 이 의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조건, 자격, 현실은 결과를 만들지 못한 다 해도 하나님의 권능으로 그것을 뒤엎어 기어코 그의 목적을 이루셨다는 뜻이다. 우리가 조건과 자격을 내놓을 것이 없기 때문에 값없이, 라는 것이다.

다음은 피로써 세운 믿음이다. 믿음은 상호 신뢰이다. 신뢰는 자격과 조건을 넘어서는 관계의 근거를 말한다. 신뢰는 아무것도 모르지만 날 믿으라는 게 아니다. 여기서는 ‘피로써’를 보인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구하기 위해 피를 흘리신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깊고 처절한 하나님의 진심인가?

여기서 그치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하신다. 하나님에게 우리는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피로써’의 진정한 의미이다.

이‘피로써’는 우리에게 혈연을 연상시켜서, 혈연이 되었기 때문에, 믿음으로 서로 묶여 진다는 것이다.
자격이 아니라 내 자식이라는 것이다. 나를 아버지라고 불러라, 너희는 내 자식이다. 어떻게 내가 낳은 자식을 부모가 잊겠느냐? 혹시 그들은 잊을지라도 나는 아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우리를 대접하고 목적하셨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이에 대해 하나님이 어떤 의지를 가지고 계시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적 증언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의지를 가지는 이유는, 자식을 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대신 죽으면 죽었지. 성경도 똑같이 말한다. 내가 죽으면 죽었지 너희를 그냥 놔둘 수는 없다.

우리를 불러서 천국에 데려가 잘 먹고 잘살게 했다, 가 아니다. 각자가 긴 세월 살아야 하는 하나님의 방법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엡 5:1~2)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 하나님의 본질, 하나님의 신성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절대권력이 아니고 사랑이더라, 하는 것에 우리는 놀라야 한다.

권능과 영광은 보통 권력적 의미이다. 세상에서 영광은 승자에게 가는 것이고 가진 자에게 간다.

성경에서의 영광은 아름다움의 극치라는 것이다. 승부의 문제가 아니다. 아름답다는 것은 권력과는 상관이 없다. 힘의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은 영광 기쁨 감사 같은 단어들로 우리와 자신을 표현하신다. 그리고 여기까지 오는 과정을 이렇게 요구하신다.

서로 사랑하라. (요 13:34~35) 예수님이 주신 새 계명이기도 하다.

(엡 5:8~14)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사랑 이외엔 없다. 능력이 아니다. 능력은 세상을 살아가기에 필수 불가결한 요소이지만, 여러분의 인간으로서의 본질은 사랑이어야 한다.

사랑이란 아무도 해칠 마음이 없는 거다. 보복을 해서 답을 얻으려고 하지 않는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이런 것들은 우리의 인생 속에서 어떻게 적용되고 있는가?

여러분들이 신우회를 만들거나, 전도지를 나누거나, 무슨 말을 할 때, 내가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은 건데, 너한테만 얘기할게, 너 예수 믿어, 안 믿으면 지옥에 가, 나는 그게 슬퍼, 이렇게 말하지 말라.

사람이 달라야 한다. 나는 지옥에 가지 않고 천국에 간다. 오늘 죽어도 그렇다. 그럼 안 죽으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떠들고 다니기만 한다.

예수 믿는 자는 어떻게 인간 됨을 어떻게 존재론을 나타낼 것인가? 이것이 우리의 모두 관심이어야 한다.

(엡 5:15~18) 여기서 말하는 성령 충만은 하나의 계기, 또는 격발로서의 충만이 아니다. 매일 배우며 쌓아 나가는 것이다. 안목을 가져야 한다. 분별력이 생겨야 한다. 그것을 위해 선택을 해야 하고 선택한 결과를 책임져야 한다. 많은 시행착오와 후회를 겪어야 한다.

단순한 구원론에서는 죄를 회개하여 빨리 지우기를 요구한다. 그러나 성경은 말한다. 네가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을 아는 것이 첫 단계이다. 아는 것을 실천하는 것이 두 번째이다. 실천을 해보면 안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안다는 것을 하려면 많은 연습이 필요하다. 네가 하지 않아도 세상이 너에게 도전하여 매일 못살게 군다. 어떻게 할래?

우리는 이렇게 기도하면 안 된다. 오늘 저를 괴롭힌 사람들을 처벌하거나 처치해 주시옵소서.

그러나 우리는 이와 똑같은 기도를 한다. 오늘 저 열심히 살았습니다. 모르고 지은 죄가 있다면 용서해 주세요. 그리고 오늘 지은 죄를 다시는 짓지 않겠습니다. 이 기도 이외에는 기도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기도하라. 하나님, 해보니까 안됩니다. 하나님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이 반발이 나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넘어설 수가 없다. 여기서 세상 사람들은 안 돼? 그럼 관두지, 로 간다. 체념이다. 죽는다는 것도 알고 있지만 아무도 얘기를 꺼내지 않는다.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르다. (롬 8:16~17) 그리스도와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한다. 너희는 하나님의 상속인이므로 배워야 할 일이 있고 실력을 키워야 한다.

너희는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지만, 성령께서 너희를 위해 기도하신다. 하나님이 우리 편을 든다면 무엇이 우리를 막겠느냐? 사망이냐. 생명이냐, 권세자냐? 어떤 피조물이라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다.

이런 말은 왜 나왔는가? 우리가 나는 끝장이다, 이건 아니다,라는 절망과 자폭에 이르렀을 때 이 말씀이 필요한 것이다.

(롬 8:1)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구원하였음이라.

다. 결어

(1) 우리에게 포기는 없다. 우리는 커야 한다. 매일매일 세상의 도전 앞에서 경기를 하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선을 긋지 않은 경기장을 쓰고 우리는 네트도 선도 있는 경기장을 쓴다. 매일 물어야 한다. 주님은 어떻게 하셨어요? 몇 밤 지나면 고쳐 주실래요?

절망과 낙담이 인간을 만든다. 거꾸로 우리도 신의 자녀라는 사실에 걸맞는 자리까지 들어가야 한다.

나이가 들면 세상의 폭력과 거짓말이 정말 헛된 것이라는 사실을 점점 더 알게 된다. 이것이 늙는 재미이다. 원숙해지는 것이다. 아직 여기까지 이르지 못했어도 성경이 말하는 구원론, 인생살이, 역사에 대해 하나님은 언제나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것처럼 치열하게 우리를 붙들고 계신다. 이 사실을 안다면 하나님의 자녀가 가지는 명예, 영광, 감사, 찬송, 등의 단어들이 고맙게 여겨질 것이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매우 놀라운 운명과 지위와 신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늘 패자이며 자책 밖에는 거두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두 가지 사실이 손을 잡을 수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습니다. 너는 부활의 주님을 믿느냐? 네, 라고 대답했습니다. 이것이 현실에서 어떻게 펼쳐지며 내가 어떻게 영광의 자리까지 가게 되는지 기대할 수 있게 하옵소서. 믿을 수 있게 하옵소서 그리고 다 함께 찬송의 자리에 이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