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성경 다시 보기(17) (마5:1~12)

2023. 9. 3. (일)
박 영 선 목사

1. 내용

가. 서론

(1) 오늘 본 산상수훈에 나오는 팔복은 신자들이 가져야 할 성품이다. 이러한 신앙 성품을 가지면 복을 받는다, 가 아니라, 이런 성품을 가진 것이 복이라고 한다. 이 복은 우리의 기대와는 다르다.

본문 11절,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번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예수로 인해 박해를 받는다. 왜냐하면, 예수도 박해를 받았기 때문이다. 박해를 받는 예수님의 성품이나, 신도들의 성품은 여기에 있는 대로 심령이 가난하고 애통하고 온유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르고 긍휼히 여기고, 마음이 청결하고 화평케 하는 자이다. 그런데 박해를 받아야 하고 그것이 복이라고 한다.

(2) 우리가 기대하는 복은 형통이다. 남에게 자존심 구기지 않고, 꾸지 않고, 나누어 줄 수 있고 밤낮 웃을 수 있는 것 이 복이다. 성경은 박해를 받아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박해를 받는 우리의 성품은 예수의 성품이 되어야 한다고 한다.

이러한 역설과 모순이 우리의 신앙 현실이다. 성경은 예수의 성품을 가져야 하고, 그러나 박해를 받아야 하고, 그것이 복이라고 한다. 이러한 삼중적인 모순과 역설을 이겨내지 못하면 늘 불만에 차게 되고 현실을 살 수가 없다.

나 본문

(1) (엡 4:17~24) 여기서 이방인이라는 것은 유대인이 아니다,라는 뜻이 아니고 예수를 모르는 자들을 뜻한다.

예수를 모르는 자들이 하는 행위는 허망하다. 허망하다는 것은 아무리 애를 써도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지하다. 모른다는 것은 최고의 벌이다. 이리 가야 하는지, 저리 가야 하는지를 모를 때, 모르는 것이 최고의 벌이다. 모르면 잘못된 곳으로 갈 수밖에 없다.

열심히 해서 아무것도 아닌 곳에 가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모르면 잘못된 곳에 갈 수밖에 없고 틀릴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있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15장 포도나무 비유에서 설명한 것처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가지가 줄기에 붙어 있으면 절로 열매를 맺고 떨어져 있으면 땅에 떨어져 말라서 썩고 밟힌다.

그 후의 행동은 구태여 노력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끊어지면 끝이다. 하나님의 자녀로 묶여 있지 않으면 우리는 생명을 공급받지 못하며 가치를 공급받을 수 없다. 자라날 수가 없다. 충만해질 수 없다.

하나님과 끊어져 있으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소멸되는 것이다. 여기에는 선택이 없다. 책임도 없고 가치도 없다. 결과가 있을 수 없다.

지금 말씀드린 것과는 다른 것이 여러분에게 필요하다. 어떻게 하면 가치가 있을까, 어떻게 하면 열매를 맺을 수 있을까? 가지에 붙어 있어야 한다. 가지는 예수님 자신이다.

이 에베소서를 말씀을 팔복에 비추어 생각해 보자.

심령이 가난하고, 애통하고, 긍휼이 여기고, 온유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르고, 이런 것들은 예수의 생명에 붙잡혀 있어야만 비로소 할 수 있는 것이다.

분별이 있고 가치를 알고 무엇이 영광인지를 알아야 수치를 알게 된다. 이것이 복이다. 그러나 이런 성품을 가지고 있으면 복이다, 라고 간단히 말하면 안 된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성품을 가지고 계시면서 이 복을 우리에게 주시는 분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박해를 받으시고 이 복을 우리에게 약속하신다.

복을 그냥 주는 것이 아니라, 이 복 때문에 박해를 받고 복을 우리에게 주신다. 예수님은 이 복을 우리에게 나누고자 오셨으나, 사람들 손에 잡혀 조롱당하고 고통 속에서 죽었다.

예수님은 죽어서 그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고 우리는 예수같이 살고 싶다는 소원을 가지게 되었다. 하나님과 분리되어 생명에 대한 감각이 없던 우리가 생명에 대한 욕구와 간절함이 생겼다. 의와 진리에 대해 소원이 생긴 것이다.

우리가 심령이 가난하고 애통하고 온유하고 긍휼히 여기기를 바라게 되었다. 예수님은 말한다. 그것을 가지는 것이 복인 것이 사실이지만, 그걸 가졌다고 전부가 아니라, 그것은 박해를 받아야 한다고 하신다. 박해를 안 받고 복만 가질 수는 없는가? 없다.

그러면 박해와 복을 둘 다 포기할 수는 없는가? 가능하지 않다. 복을 포기하게 되면, 너는 감각 없는 자가 되고 생명에서 떠난 자가 되고 무지한 자가 되고 수치밖에는 가질 수 없다.

그런데 왜 박해와 복을 동시에 가져야 하는가?

팔복은 팔복을 가지지 못한 자들을 위해 세우는 것이기 떄문이다.

예수는 너희가 죄인이요 수치 속에 있는데, 그리고 사망 속에 있는데 이것이 얼마나 큰 비극인지 알게 하시려고 우리에게 오셨다. 빛으로 어둠 속에 오신 것이다.

빛을 비추기 위해 오신 것이고 혼자서 우월함을 과시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다. 너희에게 팔복을 허락하는 이유는 무지하고 장님인 자들의 영혼에 너희가 빛과 소금으로 팔복의 내용을 비추어 저들을 깨우치게 하라는 것이다. 함께 복을 누리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팔복은 소유하면 되는 것이 아니다. 비추어야 하고 나누어야 한다. 도전해야 한다. 그렇기에 박해를 받을 수밖에 없다.

우리는 복을 생각할 때, 복을 받으면 더이상 아무런 문제가 없는 상태를 생각한다. 책임도 위험도 어려움도 없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복이 복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하나님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을 당신이 하나님이신 최고의 증명으로 삼으신다.

(빌 2:5~11) 하나님과 동등되는 영광의 자리를 버리고 예수님이 오신 행위는 사랑이요 자랑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하나님된 증거라고 하신다.

이것은 하나님과 그 아들이 다 공감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홀로 높은 곳에서 우리를 굴복시켜서 우리가 쩔쩔매는 것이 아니다. 빌고 조아리고 애를 써서 하나를 얻어 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자녀들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시고 쫓아 들어오신다. 자신이 희생을 당할지언정 자식을 보호하려는 신이다.

너희는 내 자식이다. 나를 본받아라. 하나님의 영광의 풍성에 참여하라. 너희는 내 영광의 꽃이 되어라.

더 가지고 더 우월한 것으로는 기독교 신앙이 완성되지 않는다. 기독교 신앙은 언제나 주는 것이다. 사랑이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대상이 나보다 더 잘되기를 바란다. 그것을 위해 내 몫을 포기할 수 있다.

(2) 팔복에 등장하는 모든 내용은 상대를 위하여 나를 죽이는 것이다. 심령이 가난한 것이다. 잘난척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대화를 아주 밉게 한다.

TV를 보니까 누가 뭐라고 하던데.

야, 그거 아냐. 너는 어디서 그런 뉴스만 보고 있니.
그게 아니고 그게 속인 거야.

너는 왜 말을 할 때마다 성질을 내니?

네가 똑바른 말을 했으면 내가 성질을 내겠니?
금방 칼이라도 뽑을 것처럼 말을 하는데 다음에 보면 또 같이 다닌다. 대단한 실력이다.

상대방의 이야기에 맞고 틀리고를 들이댈 필요는 없다. 인간의 정서는 잘난 척의 끝장이다. 왜 그래야 되는가? 지면 안 되기 때문이다. 필요를 스스로 충족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뺏어야 한다. 그래서 세상은 사망이 왕 노릇을 한다.

하나님은 높은 분이기 전에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시는 유일한 분이다. 무엇을 주시는가? 의식주는 물론이지만, 그보다 더 큰 가치를 주신다. 존재의 충만을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다.

우리의 신은 우리를 신과 같이 만들겠다고 한다. 신과 사랑과 믿음을 나누게 하겠다는 신이다. 사람들이 만든 신들은 겁을 주는 신이다.

그에게 무엇인가를 부탁한다. 병이 낫기를, 전쟁에서 이기기를 부탁한다. 그 대신에 나를 희생하여 제물을 낸다. 이 신들은 다 폭력적이다. 우리가 만들어서 그렇다. 우리는 보상을 받기 위해서 무언가를 내놓아야 한다, 고 생각한다. 그래서 제물도 바치고 재산도 드리고 치성도 드린다.

우리의 신은 그렇게 하라고 하지 않는다. 내 말을 따라서 네 인생을 살아라, 고 얘기한다. 내가 언제나 너의 도움이 되겠다. 나에게 물어봐라. 네가 하는 일에 대해 나와 같이 의논하자, 씨름하자.
구약 내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어떤 씨름을 하는지 봐야 한다. 여기를 읽지 못하면 얘는 밤낮 틀려, 얘는 지옥에 가고 얘는 상을 받아야 해, 가 된다.

도덕적 이분법이 되는 것이다.

여러분도 인생을 돌아보라 후회가 있다. 불만도 있다.
그게 누구 탓인가? 내 탓이다.

부모가 하는 말도 선생님이 하는 말도 듣지 않았다. 하나님 앞에 나와 빌지도 않았다 그래 놓고는 원망을 한다. 지금이라도 정신이 들어야 한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누가 가장 지혜로운가? 누가 가장 잘 나를 인도할 것인가? 하나님이다. 성경이다. 스스로 결정하고 순종해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못한다. 실력이 있어야 한다. 실력이란 하루아침에 생기지 않는다. 많은 시행착오 속에서 생긴다. 그리고 은혜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새 생명을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실패를 극복할 수 없고 한계를 극복할 수 없다.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보이신다. 예수는 인간으로 오셨고, 우리와 동일한 조건 속에서 우리를 위한 인내, 용서 속에서 우리에게 답을 제시한다.

예수가 우리를 위한다는 것을 세상이 오해하고 받아들일 실력이 없다. 그래서 원망하고 질투하고 배신하여 죽이기까지 실력이 없다.
예수님은 이것까지 받으신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소서. 저들이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예수를 못 박은 자는 지옥에 갔다. 그렇게 말 못 한다. 그들을 위해 예수님이 기도하셨기 때문이다. 우리의 이름도 그 기도에 들어 있을까?

하나님은 그 아들을 우리에게 보냈다. (요 3:16~17)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다 멸망하지 않고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구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무엇을 하시려는 지를 봐야 한다. 창조주이며 심판자인 하나님의 계획, 요구는 구원이다. 근거는 무엇인가? 사랑이다.

이렇게 하면 구원을 얻는다, 보다 훨씬 더 큰 것이 사랑이다. 사랑은 포기하지 않는다. 사랑은 어떤 조건이라도 좋다. 그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을 받아들인다.

구원과 믿음으로 여러분의 당락을 결정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예수님은 몽치에 맞고 손바닥으로 맞고 배신을 당하고 수모를 당하고 비난받는 것을 수용하신다. 사랑하기 때문이다.
나는 엄마가 엄마라고 생각 안 해. 사랑을 하면 이 말을 받아들인다. 그래, 너는 나중에 좋은 여자 만나서 네 자식은 그 말 안 하고 살기를 바란다.

사랑이란 무시무시한 거다. 우리의 무지와 감각 없는 것을 담아서, 우리의 항복의 날까지 기다린다.

(3) 예수님이 부활하시자 제자들이 말한다. 자, 이제는 마지막이죠? 주의 나라가 언제 오나요? 그것은 아버지 손에 달렸다.나는 모른다. 나는 간다. 너희들이 내 대신해라.

우리도 밤낮 쓸데없는 것 달라고 했다. 화를 내고 원망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가 해야 한다. 우리가 아니면 안 된다. 여러분의 신앙이 어디까지 왔느냐, 와 상관없이 해야 한다.

팔복은 신자의 성품인데 이 성품을 이루는 조건은 사랑이다. 하나님이 이 사람들을 사랑하신다.

너 그 꼴로 사니까 너는 지옥에 갈 거야. 이 말은 절대 하면 안 된다. 어차피 지옥에 갈 사람이지 않는가? 왜 그걸 말로 하겠는가?

인간은 죽기까지는 모르는 거다. 좋은 말을 해야 한다. 웃어야 한다. 그 사람들이 물으면 대답을 하자.

넌 뭐야? 나는 널 사랑하는 사람이야.
왜 사랑하는데? 너는 몰라도 돼. 왜? 설명해도 몰라. 정신이 나갔구나. 맞는 말이야.

이런 표정으로 살아야 한다. 심각한 표정으로 가지 말라. 진지하고 치열하지 않아도 된다. 늘 따뜻하게 쳐다보아야 한다. 모든 사람을 따뜻하게 쳐다보라.

그가 한심할수록 따듯하게 쳐다보라. 왜 쳐다봐? 멋있어서.

몇 가지 단어를 외어 가지고 다니다가 갑자기 생각이 안 나면 주머니에서 꺼내라.

만나서 반갑습니다.
아까 만났잖아요, 이제와서.
죄송합니다. (그리고 준비해 둔 다음 말을 하라.)

여러분이 하는 반응을 하지 말라는 뜻이다. 여러분의 반응은 보통, 이 새끼가, 이다. 여기를 넘어야 한다. 왜?

하나님께서 내 반응처럼 반응하셨으면 우리는 다 지옥에 가 있을 게 뻔하지 않은가?

나뿐 아니라 우리 부모, 자식 친구, 등 우리 모두는 희망이 없었던 존재였다. 하나님이 거기에 오셨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왜요, 몰라도 된다. 얼만 큼요? 이만큼이다. 십자가였다.

팔복은 무엇을 하는가? 너 자존심 세우지 마라. 너 싸우지 마라. 너 예의를 지켜라. 그리고 그에게 매달려서,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우겨라.

무엇을 근거로요? 내가 너를 사랑하고 있지 않느냐? 너희도 이렇게 살아라. 이게 사랑이다.

하나님이 오셔서 이렇게 하셨다. 세상이 자기 일을 하듯이. 그러면 세상은 무엇을 하는가? 사망과 죄를 만든다. 사망은 모든 것을 무효화 한다. 죄는 무엇인가? 하나님과 분리되는 것이다. 잘못하고 있는데 그것이 잘못인 줄 모른다. 폭력 이외에 아무것도 없다.

모든 문제에 고함을 지르고 엎어 버리고 상대방을 쳐부수어서 자신의 분노를 채운다. 그럴수록 분노는 더 커진다. 분노가 진정되지 않는다. 사망이고 폭력이다.

그럴듯한 말을 해도, 자유를 주장해도 폭력이 되고, 정의를 주장해도 폭력이 된다.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도 사람을 죽어야 한다. 세상에서는 사람을 살리는 방법은 없다.

예수에게만 있다. 죽지만 부활로 가셨다. 죽음이 소멸이 아니라, 하나의 씨앗이 되셨다. 그리고 그 씨앗은 30배, 60배, 100배, 의 결실을 얻는다.

다. 결어

(1) 그런 논리 속에서 예수님은 우리를 세우셨다. 너희는 이길을 가라. 예수님이 오셔서 율법의 경기장 안에서 경기를 하신다. 하나님 있음을 펼치신다.

용서하시고 붙잡으시고 우리를 사랑한다고 말하신다. 그 사랑을 받은 우리가 우리의 인생 속에서 세상 사람들을 경기장에서 만난다. 그들은 폭력이고 우리는 사랑이다.

폭력이 이기는가? 사랑이 이기는가? 하나님이 이길 수밖에 없다. 끈질겨야 한다. 사망이 더이상 갈 곳이 없을 데까지 가야 항복을 한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무덤에 장사하자 모두가 떠나버렸다. 그런데 거기서 부활의 꽃이 피고 무한정 열매가 맺혔다.

여러분은 자신의 만족을 위해 끊임없이 권력을 요구한다. 해결책과 능력을 요구한다. 그래서 여러분에게 주어진 복을 놓친다. 사랑과 무한한 권능을 놓친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권능이요 지혜다. 여러분은 이 십자가의 길로 부름받았다. 그러나 이 기회를 놓치고 있다. 특별한 거 안 하셔도 된다. 웃어야 한다.

예의를 지켜야 한다. 끈질겨야 한다. 여러분이 많은 열매를 맺기 바란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인생을 어떻게 바꾸셨는지 알게 되기를 바란다. 여러분의 인생이 그러한 기적이 되기 바란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인생은 복된 인생이며 기적의 인생입니다.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 앞에 십자가의 승리를 이루어야 합니다. 상대에게 죽어 나가지만 그 속에서 하나님의 생명이 일을 합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보고 겁을 먹지 말게 하옵소서. 무덤을 보고 절망하지 않게 하옵소서. 무덤에서 피어나는 부활의 생명과 권능에 대하여 증언하고 열매를 맺게 하옵소서. 그 안에서 모두와 함께 손을 잡고 찬송하는 우리 인생이 되게 하옵소서. 이 복을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과 나누는 인생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