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성경 다시 보기(16) (마4:1~11)

2023. 8. 20. (일)
박 영 선 목사

1. 내용

가. 서론

(1)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이다. 광야에 나가 기도하시고 사탄에게 세 번 시험받는 얘기가 나온다. 우리는 지난번까지 율법이 무엇인가 하는 성경의 설명을 살펴보았다.

율법은 말하자면 경기장과 같다. 사방을 둘러서 규격에 맞게 줄을 긋고 네트를 설치해서, 경기를 할 수 있게 한다.

경기장에서는 득점을 위한 인과 아웃이 분명하기 때문에 판정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경기장에는 경기가 들어와야 한다. 시합이 있고 선수들의 경쟁이 있어야 한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지만 믿음이 율법을 파기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율법을 완성한다. 경기장은 줄을 바로 긋고 줄을 밟으면 안 되고 하는 차원이 아니라, 경기가 성립되게 해야 하고, 경기를 보는 우리는 선수들이 얼마나 진지하게 경기에 임하며 총력을 기울이는가를 보면서 인간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보게 된다.

나 본론

(1) 구약이 경기장을 준비했다면 신약에서는 경기하는 모습이 소개되고 있는데, 가장 모범적인 선수는 예수님이었다.

예수님은 우리도 경기하도록 하셨다. 그 경기는 다만 승부에 매이거나 하는 상황이 아니라 인간은 인간 된 가치를 어떻게 발휘하는가, 어떻게 누릴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사탄은 인간에게는 떡만 있으면 된다, 고 주장한다. 인간에게 의식주가 중요하지만, 예수님의 대답은 하나님의 말씀이 더 중요하다고 하신다.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은 순종해야 하는 명령이나 고급한 뜻이 담겨 있다는 주장이 아니다.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강조한다. 누구에게 말씀하시는가? 말씀은 상대가 있어야 한다. 우리이다. 그러니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우리에게는 말씀을 주시는 하나님이 계시다, 는 것이다. 나는 혼자 독립적으로 근거를 가지지 않는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과 신뢰의 대상이다. 하나님 있음이 중요하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그러나 사탄은 성전에서 뛰어내리라고 한다. 신이 있다면 너를 다치지 않게 받아주실 것이다. 예수님은 다시 대답하신다. 신은 우리의 필요와 우리가 납득하는 대로 좌우되시지 않는다. 그분은 스스로 있는 자이며 모든 것의 시작이고 내용이고 방법이고 완성이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셨다. 예수가 오신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설득하고 납득시키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떨어지는 운명을 가질 수 없다고 단언하시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사탄은 내게 절하면 이 세상을 다 주겠다고 한다. 예수님은 이번에는 질문과 동떨어져 보이는,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고 그분에게 절해라, 라고 답을 하신다.

우리가 세상에서 가장 가지고 싶어 하는 것은 권력과 많은 소유물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경지라고 답을 한다.

(엡 1:3~6) 이 말씀은 벼락같다. 또는 불꽃놀이처럼 보인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지시를 하시지 않는다. 너희는 내 기쁨이 되고 영광이 되고 찬송이 되는 거야. 이렇게 외치고 계신다.

사탄의 도전에 대해 예수님이 답하신 것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알아야 한다.

(2) 종교는 신을 믿는 신자와 대상인 신이 있어야 성립한다. 세상에서는 자기를 설명하는 신이 없다.

일반 종교를 보면 신을 따르는 신자는 있는데, 신에 대한 이해는 없다. 그러니까 치성으로 대신한다. 헌신을 하면 보상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천지신명이시여. 신이 있다면 동 천지 감 귀신 하사 내 소원을 들어주시옵소서. 신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면서 내 정성은 보상받게 해 달라고 했던 것이다.

기독교에도 있다. 예수를 믿는 것은 맞는데, 하나님이 예수를 보냈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모른다. 하나님이 누구시며, 우리에게 어떻게 살라고 하시는지를 잘 모른다.

죽기 살기로 그냥 믿는다. 저 사람은 예수 안 믿어도 천국에 갈 거야. 이런 말이 저항감 없이 나온다.

종교는 신이 어떤 분이며, 신은 나에게 무엇을 요구하며, 자기를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신을 감동시키는 방법을 찾는다. 헌신, 심지어는 자해 같은 치성이 전부이다. 이러면 신앙이 자라지 않고 흠을 없애는 데서 그친다.

잘못을 자꾸 지우려 하지 말고 잘하는 쪽으로 나가야 한다. 완벽하게 할 수 없다. 그러나 해봐야 한다.

축구에서 공격수가 수 없는 슈팅을 하지만 정작 한 골 얻기가 어렵다. 실력이 없는 걸까? 아니다. 상대편의 수비도 잘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팀웍이 중요하다.

우리는 완벽해져서 편안해지려고 한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주는 무한한 약속, 무한한 보호, 은혜, 함께 하심에 대해서는 부족하다.
(3) 탕자의 비유는 둘째 아들이 유산을 미리 달래서 받은 후 탕진하고 돌아오는 얘기이다.

둘째 아들은, 저는 이제 아들이 아닙니다, 품꾼으로 취급해 주십시오.
아버지는, 무슨 소리냐, 새 옷 입히고 새 신발 신기고 가락지 끼워라.

돌아온 아들에게 보상을 하고 있지 않다. 너는 원래 내 아들이다. 네가 나가서 무슨 짓을 했던, 너는 내 아들이라는 지위와 신분이 깨질 수는 없어.

아버지는 아들의 친구들까지 불러서 잔치를 연다.

믿었으니까 잘해서 복 받자. 이건 아니다. 나는 다른 존재였구나. 내가 모르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나를 택하셨구나. 나는 그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존재이구나. 우리 선조가 실패했어도 하나님은 우리와의 관계를 끊지 않으셨구나. 이런 배짱이 있어야 한다.

나사로의 경우도 그렇다. 마리아는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내 오라비가 죽게 되었다고 알린다. 그러나 예수님은 즉시 가시지 않는다. 나중에 죽은 다음에 예수님이 오신 것을 마리아가 가슴 아파한다. 선생님이 일찍 오셨으면 제 오라비는 죽지 않았을 겁니다.

무덤에 가보자. 무덤에 가셔서 예수님은 우신다. 이제 살려낼 것인데 왜 우셨을까? 예수님의 눈물은 분노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이 사망 아래 있음을 대단히 분하게 생각하셨다. 보복을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너희는 이 정도의 존재가 아니다, 라고 외치시는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의 영광이야. 그런데 지금은 이렇게 됐어. 몹시도 분해하셨다.

이것이 운명일 수 없어. 나사로야 나오너라.

하나님은 예수를 보내셔서, 하나님이 실제로 있다는 것과 한 번도 인간을 외면한 적이 없다는 것을 보이셨다. 나는 너희 편이다. 하나님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사 우리가 어디까지 갔던 간에 내가 너희를 외면하는 자리는 없다고 선포하셨다. 말구유에서 십자가까지.

너는 고아가 아니다. 나는 너와 함께한다. 만일 네가 지옥에 간다면 내가 따라 들어갈 거다. 지옥은 지옥일 수 없다.

(4) 우리가 현실에서 고통과 어려움을 당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아이가 집에서 엄마가 하지 말라고 하는데도 공놀이를 하다가 유리창을 깼다. 아이는 엄청 혼이 난다.

어느 날 친구가 와서 놀다가 친구가 문짝을 부수었다. 엄마는 방글방글 웃으면서, 얘야 너희 집이 어디냐? 함께 가자.

아들은 시험에 들었다. 내가 유리창 하나 깼을 때는 죽일 듯이 야단을 치더니, 친구가 문짝을 부수었는데도 방글방글 웃으실 수가 있는 것인가?

엄마는 친구 집에 손해배상을 요구하러 가셨다. 그러니 화를 낼 필요가 없다. 엄마는 아들에게 손해배상을 요구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왜 고통을 주시는가?

하나님은 자격을 묻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한계를 뛰어넘는 영광을 주시기를 원한다.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우리 인생에 개입하신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 들을 다 잘한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내가 성장해야 하기 때문에 꾀를 부려 그 과정을 넘어갈 수 없다. 실제로 해야 넘어간다. 닥쳐진 위협과 도전을 이길 때까지 해야 한다. 우리를 만드신다.

하나님께서는 착하고 말 잘 듣는 우리를 원하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 목표하시는 기독교 최고의 가치는 사랑과 믿음이다. 이것은 우리의 지위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신뢰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사랑과 믿음이 성립하려면 대등한 관계에 있어야 한다. 한쪽이 우월하고 한쪽이 열등하면 사랑은 동정이 되고, 믿음은 강요가 된다.
하나님은 우리가 잘할 때 상주시지 않는다. 우리를 사랑과 믿음의 상대로 정하시고 그 자리까지 오라고 하신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어떤 경우라도 우리는 문제없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우리를 위해 그 아들을 주신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은사로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롬 8:31~32)

우리가 겪고 있는 현실은 우리를 시험하고 있다. 너는 어디까지 컸어? 어디까지가 너의 종점이라고 생각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셔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 이것을 어떻게 정성과 지극함으로 얼버무리는가?

현실에서도 하나님은 십자가와 방불한 일을 나를 만들기 위해 하고 계신다. 변명하고 도망을 갈 수 있는가?

우리는 누가 더 편하게 사는 가에 관심이 있다. 이것을 시샘할 건 없다. 나는 나다. 내 이름은 어떤 다른 존재와도 바꿀 수 없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각각 다르게 구체화 되어있다.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

나를 아무도 대신할 수 없어. 나는 누구를 응원할 수 있어. 나는 누구를 비난하기도 해. 나는 누구를 돕기도 해. 나는 누구에게 시험이 되기도 해.
이 모든 것을 합쳐서 하나님은 나를 만드신다.

다. 결어

(1)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시험이 되었었다. 모두가 예수님을 환영하지는 않았다. 예수님이 마지막에 예루살렘에 입성해서 백성들의 환호를 받았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그러나 권력으로 이스라엘을 해방시키리라고 생각했던 예수가 잡혀 죽게 되자 모두가 분노에 떨었다.

차라리 바라바를 놓아 줄지언정 예수를 죽이십시오.

빌라도가 말했다.

명절에 특사 한 사람씩을 놓아주지 않느냐? 특별한 죄도 없는 이 사람을 놓아주자.

그러나 백성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라고 소리쳤다.

(2)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랑이다. 나는 이런 하나님이야. 나는 너희에게 사랑과 믿음을 요구하는 이런 하나님이야. 내가 제시한 문제의 답은 다른 답이 있을 수 없어. 네가 내가 목적한 사람이 되어가는 거야.

여러분 각자의 현실이고 여러분이 싫어하는 여러분의 실존이다. 그러나 이것은 복되고 위대하다. 대체할 수 없다. 이것을 기억하여 승리하는 삶이 되기 바란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하면서도 우리는 늘 머뭇거리고 도망 다니기에 바쁩니다. 그러니 철이 들게 하옵소서. 우리의 하루하루가 헛되이 지나지 않고 변명이 되지 않고, 책임지고 노력해서 위대하게 되게 하옵소서. 도망가지 말고 실패할 때마다 다시 일어나 우리의 하루가 헛되지 않은 결과를 만들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