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성경 다시 보기(15) (롬3:19~31)

2023. 8. 6. (일)
박 영 선 목사

1. 내용

가. 서론

(1) 오늘 본문 말씀은 구원을 얻는 모든 성도들에게 매우 낯익고 익숙한 감사한 본문이다. 율법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고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영생을 얻는다는 귀한 말씀이다.

이 구원론에는 많은 단어들이, 주제들이 포함되어 있다. 구원론에서 말하는 구원, 즉 예수를 믿으면 된다, 고, 거의 공식화된 우리의 이해보다, 생각해야 할 많은 주제들이 있다.

율법이 있다.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을 뿐이고 심판 아래 서는 것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는 믿음으로만 구원에 이른다.

본문은 율법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는 것이 믿음이요, 은혜다, 라고 말한 뒤, 그렇다면 믿음이 율법을 폐하느냐, 소용이 없다고 하느냐? 고 묻는다.

그렇지 않다. 율법을 굳건히 세운다. (롬 3:31)
여기가 신자들에게는 익숙하지 않다.

나. 본론

(1) 율법은 분명히 정죄용이다. 잘못한 것을 확인시키는 경계선이나 기준 같은 것이다. 성경은 율법으로는 죄를 깨닫는다고 한다. 죄를 더 죄 되게 한다.

율법이 아니었으면 내가 그것이 죄인 줄 몰랐을 거다. 은혜는 다르다. 하나님이 우리를 값없이 죄와 사망의 자리에서 구원하여, 영생에 이르는 영광의 꽃으로 만드시겠다는 하나님의 의지였다.

인간은 율법 아래에서는 맥을 쓸 수가 없는데 하나님은 무엇을 근거로 하여 하나님의 의지를 발동하시는가? 다시 말해 믿음의 문제이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신뢰하는 것이다. 신뢰는 어떤 관계에서 일어나는가? 여러 가지 관계에서 우리는 신뢰를 요구한다. 사회생활을 해 보면 이웃에 사는 사람, 친구가 된 사람, 직장동료, 모임의 회원으로 만나는 사이, 우정을 나누는 사이 등에서도 법과 규칙이 아니라 신뢰로 관계가 이어진다. 이 신뢰는 기대는 하지만, 믿는다는 말의 완성에 이르는 것으로 보기엔 미흡하다.

왜냐하면, 어느 곳에서나 배신이 있고 낙심과 절망이 들어오기 때문에 우리가 형성한 신뢰 관계는 무너지기 쉽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 예수를 믿으면, 이라고 할 때의 그 믿음은 무슨 뜻인가? 여기서 형성된 신뢰 관계는 깨질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전능하심, 능력, 치열함의 문제가 아니고 관계의 근거가 다르다.

인생의 관계에서도 결코 배신할 수 없는 관계가 있는데 그것이 혈육이다. 부모나 자식을 배신할 수 없다. 미워하거나 원망할 수 있지만 끊거나 지울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될지라. 여기서 출발했다. 나는 너희의 아버지요 너희는 자식이니라. (출 6:7)

너희는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롬 8:15)

믿음은 진정성이나 열심의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과 묶으시는 작업이다. 그렇다면 율법은 왜 필요한가?

우리의 치성으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혈육으로 묶어서 하나가 되었다면 이제부터는 개판 치지 마라. 이것이 율법이 등장하는 이유다.

율법은 죄를 죄 되게 하며 죄를 깨닫게 한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는 적극적인 것을 만들어 낼 수 없다. 여기서 그리스도가 필요하다.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엡 1:6)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묶으시는 하나님의 의지이다. 하나님이 공포스럽다면 그 사람은 아직도 율법을 못 벗어나고 있는 것이다.

율법을 잘못한 것을 가려내는 것이라고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신앙은 잘 잘못의 구별을 논하지 않는다. 명예로운 것과 부끄러운 것이 남는다. 무슨 차이가 있는가?

“율법은 정죄하려는 것이고 은혜는 영광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래서 율법은 필요 없고 은혜로 이 자리에 와 있다.”

이렇게 말할 때 우리는 믿음이 율법을 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율법을 굳게 세웠다는 오늘 본문을 이해해야 한다.

(2) 예수님은 율법의 마침이 되신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다. 이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신앙이 율법이 된다.

“너 제대로 믿는 거야?” 우리는 이 말을 분발하라고 쓰지 않는다. ‘이렇게 잘못하면 지옥 가는 거 아니야,’ 라고 약해지는 사람이 있을 때, 그 사람이 무너지는 데 일조를 한다.

율법적 신앙과 은혜와 믿음이라는 차원의 신앙은 그 실상이 무엇인가? 이것을 비유로 밖에는 설명할 방법이 없다.

율법은 경기장이다. 경기장은 규격과 규칙이 있다. 규칙은 이를 벗어나면 죽이겠다가 아니다. 경기에서의 실점이 될 뿐이다. 예수를 믿어 경기장 안에 들어오면 잘못했다고 죽여버리지 않는다. 잘못하면 꾸짖고 부끄러워 하라고 한다. 고치라고 한다. 공갈을 치지 않는다.

이렇게 율법적인 것과 믿음의 차원이 어떻게 다른지를 명백히 알아야 자유를 알게 되고 명예를 알게 된다. 적극적인 책임을 영광으로 알게 된다.

집에 가서 신명기 29장을 꼭 찾아보라. 신명기는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꺼내고 인도한 모세가, 40년 광야 생활을 마치고 죽음에 임박해서 마지막으로 하는 유언, 경고, 격려이다.

하나님이 너희를 어떻게 꺼내었는지 기억해라. 열 가지 재앙과 바다를 건너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게 했다. 그러니 너희 들어가는 땅에서 하나님을 떠나지 말라. 그의 약속과 율법 안에서 사는 신앙을 실행해라.

그러나 보는 눈과 듣는 귀와 깨닫는 마음은 하나님께서 아직 주시지 않았다. (신 29:4)

이 말은 구약 내내 메아리쳐서 이사야 6장에서 다시 언급된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이 보좌에 앉으신 것을 보고 천사들의 찬송 소리를 듣고 놀란다.

하나님이 탄식을 하신다.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이사야가 답한다. 주여 제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그러나 저희가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실패의 사역을 이사야에게 맡기신다. 이 문제가 예수가 오시자 이렇게 변한다. 마태복음 13장 씨뿌리는 비유이다.

농부가 씨를 뿌렸다.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고 돌짝 밭에 떨어지고, 찔레밭에 떨어져서 결실을 맺지 못했다. 그러나 옥토에 떨어지자 많은 열매를 맺었다.

제자들은 의아했다. 아니 그 쉬운 얘기를 왜 비유로 말씀하십니까? 비유는 내용이 어려워서 이해하기 쉬우라고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것으로 얘기하는 것 아닙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신다. 선지자의 말이 오늘 내게 응했느니라.너희가 들어도 모르고 보아도 깨닫지 못한다. 그러나 내가 왔다. 들어도 모르고 보아도 모르는 내용이 바로 나 예수다.

예수는 무엇인가? 부정적 차원에서 막았던 경기장에 경기자로 오신 분이다. 여기에는 규칙이 있다. 그리고 이 경기장에서 경기를 하지 않으면 별 의미가 없다.

테니스장에는 라인과 네트가, 배구장에도 라인과 네트가 축구장에는 라인과 골대가 있다.
여기에는 실점과 득점이 있다. 실점했다고 죽이지 않는다. 이 문제는 한국말에 묘하게 표현이 되어 있어서 우리의 이해를 돕는다.

야구 경기에서 첫 타자 삼진, 두 번째 타자 플라이 볼, 세 번째 타자가 1루에 나갔다. 아나운서는 말한다. 2사 1루 상황입니다. 두 사람 죽고 하나가 남았다고 한다.

영어는 좀 다르다. 투 아웃, 퍼스트 베이스이다. 무엇이 다른가? 물론 여기서 죽었다는 생명이 죽었다, 는 아니다. 경기장에서 게임을 하면 인과 아웃은 득점과 실점이 된다.

득점과 실점은 무엇을 만드는가? 승부를 만든다. 왜 이겨야 하는가? 이기는 실력까지 가야 하기 때문이다. 승패를 도박적으로 가리는 게 아니다.

모든 경기는 실력이 있어야 한다. 실력에는 세 가지 요소가 있다. 체력, 기술, 정신이다. 좋은 경기일수록 양 선수가 모두 최고의 경기에서 나누는 예술을 보게 된다.

신앙은 백척간두 칼날 위에 서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풀어 놓으셨는가? 어떻게 무대가 펼쳐져 있는가? 네가 해봐. 삼진 먹어도 돼. 그러나 삼진을 먹으면 약이 오른다. 열심히 하게 된다. 나는 충분히 훈련했다고 생각했는데 예선 탈락이었다면 인생이 장난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모든 경기의 끝은 예술의 경지에 이른다. 또 문학이든 음악이든 철학이든 인생이든 끝에는 예술성을 갖추게 된다. 예수 없이는 앙꼬 없는 찐빵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은 이미 허락하셨다. 여러분 각각의 개성과 형편을 존중하셨다. 여러분이 겪은 역사와 상황은 여러분을 만드는 경기의 조건들이다. 여러분의 예술성을 위해 있는 것이다.

제가 본 최고의 경기는 몇 년 전 조코비치와 페더러의 윔블던 결승 경기였다. 모든 관중이 페더러의 편을 들었다. 페더러가 득점을 하면 모든 관중이 일어나 환영을 하고 조코비치가 득점하면 신음 소리가 들렸다.

마지막 타이 브레이크에서 세 번의 매치 포인트를 견디고 조코비치가 이겼다. 시상식에서 각자의 소감을 물었다. 조코비치가 답을 했다. 이런 게임을 승패로 결론 짓는다는 것은 얼마나 치사합니까? 거기서는 승자도 패자도 없었다. 아름다운 하나의 예술, 인간의 위대함, 명예와 영광이 드러났다.

다. 결어

(1) 신자로 산다는 것은, 누가 와서 돈 내고 보는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다. 나와 내 가족은, 나와 내 가족을 모르는 남들과, 마치 경기장의 네트처럼 막아서는 사람들과, 함께 산다. 우리는 네트를 걷어치우고 싶다. 라인도 지우고 싶다. 아웃이 없게. 그러면 경기가 성립되지 않는다. 경기가 성립되지 않으면 실력도, 정신도, 예술도 무산된다. 하나님은 우리를 경기장으로 불러 경기자가 되게 하셨다.
이것이 신약이다. 예수는 사망과 실패와 절망과 게임을 한다. 배신하고 몰라보고, 자신들만 좋게 하겠다고 억지를 부리고 있지만, 예수는 그것을 뚫고 십자가에 죽으신다. 처절하고 애타는 감성적인 얘기가 아니다.

(2) 승부는 무엇을 만드는가? 하나님은 모든 인류에게 요구하신다. 너는 승자가 되어야 해. 사망에게 지지마. 헛되고 거짓되고 유치하고 치사한 사람이 되지마. 부끄러워해야 해. 위대해야 해. 멋있어야 해. 괜찮아.

(롬 8:12~17) 고난은 상대가 있어야 성립한다. 승부를 가려야 하며 이것을 통해 나를 훌륭하게 만든다. 우리를 향한 도전이며 현실이다.

여러분의 현실은 여러분을 위한 것이다. 징징거리는 인생을 넘어 영광과 위대함으로 나아가는 승리가 있기를 바란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우리에게는 고난과 고통이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권능과 지혜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줄 믿습니다.

우리 입술에 찬송을 두시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명예와 영광을 알고 그 현실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다시는 원망하고 비난하고 도망가는 비겁함을 반복하지 않게 하옵소서. 믿음의 승리와 인내와 충성과 감사가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