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성경 다시 보기(14) (히 11:8~16)

2023. 7. 23. (일)
박 영 선 목사

1. 내용

가. 서론

(1) 우리는 히브리서 11장에서 성경이 말하는 믿음에 관한 내용을 읽고 있다. 믿음이란 상대를 신뢰하는 것이며, 성실한 것이고 상호 간에 우정이나 애정이나 그 이상의 위로나 감사를 결실하는 것이다.

모든 종교는 신과 그를 믿는 신자가 있어야 존재한다. 신이 어떤 신인가를 설명해야 하고, 신자들은 그 신을 믿으면 어떤 보상을 받을 수 있는지, 그 관계는 어떻게 성립시킬 수 있는지를 배워야 한다.

성령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가 사랑과 믿음이라고 한다. 보통의 종교에서 말하는 두려운 신, 달래고 만족시키면 우리의 소원을 보상으로 들어주는 신과는 전혀 다르게 자신을 설명하신다.

(2) 일반적으로 신은 권력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신자들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다. 그래서 충성의 표현으로 많은 제물을 바치거나, 자해하거나, 등의 방법으로 신을 감동시키려고 한다.

우리는 거꾸로다. 신이 우리를 만들었고 목적이 있고 그러한 내용과 운명에 대해 책임을 지겠다고 한다. 그러니 어떤 치성을 드리면, 어떤 제물을 바치면 하나님이 내 소원을 들어줄까, 하는 공식은 성립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을 속이는 것이 되며, 구약 내내 지적하신 바와 같이 그것은 우상이다.

우상이란 무엇인가? 내 필요를 채우는 방법으로 신을 조작하는 것이다.

우상은 계획도 없고, 의지도 없고, 설명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반복적으로 하나님께 치성을 드려, 내 소원을 채우려 한다. 늘 어긋난다.

나. 본론

(1) 하나님은 아들을 보내어 십자가로 우리를 구원하여 우리의 죄를 사하셨다. 지옥에 갈 우리를 천국에 가게 하셨다는 것은 믿지만 이것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하고 죄를 사하셔서 천국에 가게 하는 일은 어디부터 시작하는가? 우리는 그것이 은혜임을 알고 있다. 은혜는 공짜이고 값이 없지만, 성경이 말하는 은혜는 하나님의 의지이다.

그러니 은혜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목적이 성취될 때까지 어떤 조건, 어떤 관계에서도 포기하시지 않는다, 는 것이다.

지옥에서 건져냈을 뿐 아니라 천국으로 데리고 가시려는 것이다. 그러면 데려가시면 되지, 왜 고난 속에 방치하시는가? 열심히 신앙생활을 해도 왜 만족을 주시지는 않는가?

오늘 본문 히브리서 11장은 어떻게 저들이 잘 믿어서 아무 보상도 없는 인생을 철저히 잘 지켰는가, 를 말하고 있지 않다.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났고, 이방인들 속에서 나그네 인생을 살았다. 자식 때에도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장막에 거했다.

이들은 결과를 알지 못하고 붙들려 나왔다. 왜 그랬는가? 하나님은 모든 인간이 붙들려 있는 작은 소원에 이들이 붙잡혀 있기를 원치 않으셨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역사에 개입하셨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보상에 머무를 수 없었다.

이들은 약속을 받지 못하고 죽었다. 왜냐하면, 약속은 그 너머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기를 기뻐하셨고, 하나님이 준비한 목적지에 가도록 하셨다. 그러면 믿음은 무엇인가? 상대방에 대하여 가지는 하나님의 정이며, 의리이며, 관계이다.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셔서 우리를 꺼내어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곳 으로 이끄셨다. 하나님의 동력은 무엇인가? 하나님에게 우리는 믿음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믿음은 관계이고 교제인데 우리는 믿음을 방법론으로 생각한다. 믿습니다. 반복해서 외치고 그것이 진정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믿음은 너희가 보이는 치성, 자기희생, 봉사, 선행이 아니다. 나는 너희의 아버지이고 너희는 내 자식이다. 너희는 내가 누구인지를, 그리고 너희는 나에게 누구인지를 깨달아서 인격 대 인격으로 만나자. 그리고 믿음과 사랑을 함께하자.
(2) 하나님은 우리에게 누구신가? 지금부터 설명하겠다.

(히 2:5~13) 5절: 장차 올 세상을 천사들에게 복종하게 하심이 아니니라. → 착하게 살면 천국에 가는 것 아니다. 천사는 도덕적으로 결함이 없는 존재이다. 이 5절을 보고 찔림이 있어야 한다. 이것 외에는 신앙의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6절~8절: 만물을 그 발아래에 복종하게 하셨느니라. →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을 인용한 것이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피 흘려 죽으실 것이고 하나님께는 영광의 극치가 된다.

이 인용은 시편 8편 4절 이하에서 인용한 말씀이다. 여기 4절에 사람이 무엇이기에 라는 구절에서 사람은 예수가 아니라 인류다.(히 2:6 사람이 무엇이기에 라는 구절에서 사람은 예수다.)

(시 8:1) 사람이 무엇이길래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깊이 살피시고 존귀와 영광으로 관을 씌우셨습니까? 만물을 다스리게 하시며 주의 영광으로 삼으셨습니까?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을 높이 찬양하나이다.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구약 성경의 고백이다. 우리는 예수를 높인다. 고마워한다. 쩔쩔맨다. 그러나 더 가야 한다.

육신으로 오시고 십자가를 지시고 피를 흘리셨다. 성자 하나님이 인간과 똑같이 혈육이 되시므로.

9절~10절: 하나님이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참 인간이 되셔서 인간의 한계와 인간의 죄를 같이 경험하시고 사망까지 겪으신다.
11절~12절: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 성자 하나님이 우리 인간들과 동일시된다. 하나님은 우리를 신과 신자라는 차별적인 관계로 대하지 않으신다. 권력적 질서가 아니라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맺으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가족으로 대하신다. (롬 8:32)

하나님은 우리의 존재와 신분을 붙드신다. 어떠한 상황과 조건이 있어도 뛰어넘으신다. (롬 8:38~39) 우리를 채우시고 완성을 바라시고 기뻐하시며 자신의 영광으로 삼으신다.

(엡 1:3~6)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가지셨던 궁극적인 목적을 포기하지 않으신다.

(3) 히브리서가 말하는 믿음은 무엇인가?

아벨은 하나님 앞에 합당한 제사를 드렸는데 죽임을 당한다. 그러나 아벨은 아직도 증거를 하고 있다. 그것은 세상이 가지는 결과와 목적을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에 살아있는 것은 복이고 죽은 것은 벌이다, 를 넘어선다. 세상의 규칙을 뭉개버리시는 것이다.

이삭이 태어날 수 없는 자리에서 태어난 것도 놀랍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죽이라고 하신다. 그래서 죽은 자가 부활하여 후손을 하늘의 별 같고 바다의 모래 같게 한다.

하나님이 우리에 대해서는 사망도 권세도 잘못도 다 넘게 하신다. 우리라는 존재가 하나님 앞에 누구 인지를 깨달으라고 하신다.

(요 17:3)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말하고 있지 않다. 안다는 것은 혈육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분리시킬 수 없다. 어떤 장해도 없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 존재의 현주소이다.

하나님은 모든 권력과 지혜를 동원하여 나를 만들고 계신다. 우리는 이 과정을 싫어한다. 못난 짓이다.

여러분이 사람이 되려면 순진한 것이 끝이면 안 된다. 거짓말 안 하기, 주일 성수가 유일한 신앙의 눈금이면 안 된다. 순진 무쌍, 열심 무쌍으로 자신을 속일 수는 없다.

거짓말은 안 할 수가 없다. 거짓말을 안 하는 사람은 바보들뿐이다. 생각이 없다는 뜻이다. 왜 거짓말을 해야 하는가? 정답을 아는데 그걸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부모의 소원을 아는데 그 결과를 만들지 못한다.

이번 시험 잘 봤니?
일단 화를 면해야 한다.
잘 봤어요. 100점 같아요.
86점이 나왔다. 너 왜 거짓말했어?
이럴 리가 없는데요.

무엇을 배우는가? 실력이란 쌓아 나가야 한다는 것을 배운다. 그리고 이 속에서 무엇이 가치 있는 일인가에 대한 분별이 생긴다.

왜 이것을 긴 시간에 걸쳐서 하는가? 내가 실제로 시간과 공간 속에서 그렇게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육체는 하나님의 특별한 창조물이다. 우리는 마음이 편안해지고 즐거움만 있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건 인간이 아니다. 인간이란 울 수 있고 후회할 수 있고, 감사할 수 있고 기뻐할 수 있다.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 군대, 결혼을 통해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인생이 없다는 것을 배운다.

자기가 자신을 책임지는 독립된 인생을 살 수 없다는 것을 배운다. 남을 해치지 않고 나도 방해받지 않는 삶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원치 않는 결과, 원치 않는 불편을 겪어야 한다. 여기서 무엇을 배우는가?

참을 수 있게 된다. 넘어갈 수 있게 된다. 용서할 수 있게 된다. 잘못을 고백하게 된다.

이런 것들이 인간이라는 존재의 진정한 내용물이다. 이런 것들이 사람을 만든다. 유아독존이 되거나, 양심에 걸리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상태가 되려는 것은 하나님의 생각과 얼마나 다른 것인가?

(고전 1:18) 십자가는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믿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다 쏟아부으신다. 우리를 위해 죽을 수 있다. 부모의 마음 아닌가? 부모가 되어 보지 않고는 이것을 모른다. 자식은 언제 철이 드나? 자기 자식을 키워 보면 알 수 있다.

(사 40:12~17) 포로가 된 이스라엘은 어이가 없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가 끌려 오도록 왜 외면하셨는가? 하나님이 답하신다.
(사 40:27~31) 이 세상이 나에게는 한 방울의 물 같고 한 줌의 먼지에 불과하다. 너희는 내가 너희를 배반했다고 한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아무것도 아닙니까? 라고 한다.

나는 언제라도 세상을 쓸어버릴 수 있고 다시 만들 수 있다. 그런데 내가 왜 너희를 혼냈겠느냐? 너희는 나를 우상으로 대했다. 너희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나를 찾아왔다. 나를 얼렁뚱땅 속여 넘겨서 너희 배를 채우려고 했다. 어리석었다. 나는 너희를 그런 목적으로 만들지 않았다. 너희는 지금도 모른다. 다만 원망에 차 있을 뿐이다.

너희가 원하는 것은 평안뿐이다. 머리를 비우게 해달라는 것이다. 그러니 내가 너희에게 고통을 줄 수밖에 없다. 나는 너희를 진정한 존재를 만들겠다.

나는 내 아들을 보내 십자가에 못박았다. 내 진정성을 구체적으로 보였다. 너희도 마땅히 그래야 한다.

나는 내가 하나님인 것을 충분히 설명했다. 너희도 내 자식이라는 것을 너희 인생을, 육체를 걸고 여기까지 와야 한다. 타협은 없다. 포기도 없다.

기독교 신앙과 현실을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 하나님과 우상이 어떻게 다른가를 알지 못하면 여러분의 기도는 늘 허공에 흩어질 뿐이다. 여러분의 현실은 밤낮 원망이 되고 만다.

평안이 궁극적인 목표일 수 없다. 하나님이 어떤 길을 가라고 하시는지 알아야 한다. 그래서 우리를 바보라고 하신다. 욕설이 아니라 애타는 부모의 심정이다.

누가복음 15장 탕자의 비유다. 큰아들은 불만이었다. 평생 순종한 자신에게는 염소 새끼 한 마리 잡아 준 적이 없는 아버지가, 재산 다 말아먹은 탕자 동생이 돌아오자 송아지를 잡으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렇게 하고 있다. 우리도, 왜 나에게 염소 새끼 한 마리 안 주십니까? 라고 한다. 아버지는 이미 말했다. 모든 것이 네 것이다.

다. 결어

(1) 인문학의 마지막 질문이다. 인생이 무엇인가? 인간의 가치가 무엇인가? 인문학은 답을 못하지만, 성경은 답을 한다.

인간은 하나님과 가장 긴밀한 존재이다. 인간은 하나님과 사랑과 믿음으로 연결되어있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주 염소 새끼를 달라고 한다.
제대로 된 신앙을 발동할 때이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소원은 참으로 별것이 아닙니다. 그런 못난 자리에서 우리를 구원하셨으며 인간의 영광과 기적을 알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셨으며 예수를 믿는다고, 십자가를 사랑한다고 고백하게 하셨습니다.

그런 인생을 열심히 살게 하옵소서 남의 입술로 간증을 듣지 말고 내 인생이 그렇게 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내가 영광의 자리에 서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