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성경 다시 보기(13) (히 11:1~7)

2023. 7. 9. (일)
박 영 선 목사

1. 내용

가. 서론

(1) 우리는 중요한 신앙의 갈림길에서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는 문제에 부닥친다. 이 순종은 굴복이 아니며, 책임을 떠넘기는 것도 아니며, 수동적으로 기다린다는 것도 아니다.

순종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한 항복의 표시이다. 힘에 의한 항복이 아니라, 이해와 감동에 의한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신앙의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 순종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아니라 내가 길을 선택하고 능동적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2) 그러나 내가 하고 싶은 것 다 버리고 하나님께 나를 맡긴다, 는 아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 같이 이 잔을 비켜 가게 해 주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라고 기도하는 것이 순종이다.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아버지께 맡겼더니 아버지께서 다 해결하셨다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께 구했으나 다른 뜻을 가지신 아버지를 따르기로 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내려와 보라, 네가 남은 구원하면서 네 자신은 왜 구원하지 못하느냐?
이런 힐난과 수모를 감당하셨다.

이런 결정에는 분별이 있어야 하고 지혜가 있어야 한다. 이 지혜는 많은 시행착오 끝에 얻어진다.

나. 본론

(1) 이러면 당장 질문이 나온다. 다 우리가 책임을 질 거면 은혜란 무엇인가? 은혜는 하나님의 의지이다. 은혜는 공짜도 아니고 면죄도 아니다.

내가 목적한 것을 이루기까지 너를 포기하지 않는다, 는 하나님의 의지이다.

은혜를 받았다고 하면, 나는 죄 사함을 받았어, 마음이 편해, 라고 할 상황이 아니다. 오히려 이제부터는 죽었다고 복창해야 맞는다.

그렇다면 은혜로도 충분할 것 같은데 믿음은 왜 필요한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한다. 무엇을 소원하면 그 소원하는 것을 미래에 보는 방법이 믿음이 아니라, 믿음을 가졌다면 그것은 이미 실체가 되어 있는 것이라고 얘기한다.

믿음이 방법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믿음이라는 단어가 마치 하나의 인격인 것 같이, 우리의 기대와 소원에 답을 주고, 나아가서는 세상이 물질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알게 한다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고 소원하고 의심하고 궁금해한다는 것 자체가, 세상에서는 해결할 수 없다는 뜻이며, 그러면 누구냐? 에 이르게 되고 믿고 나면 그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 6절을 보면 믿음이 방법론이고, 이해하게 되는 기능인 것 같아서 우리는 히브리서 11장을 읽을 때마다 에녹 등 선진들이 행동을 잘해서 보상을 받은 것으로 생각한다.

본문 3절에 ‘믿음으로’는 ‘믿음이’라고 바꾸어 읽어야 한다.

우리는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것을 믿을 수는 없다. 본 자와 아는 자가 믿음을 행사해야 한다.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지냈다는 것은 아벨의 제사가 가인의 제사보다 더 낫다, 는 뜻은 아니다.

인간들의 제사는 뚜렷한 대상이 없이 잘 먹고 잘살게 해주십시오,인데 하나님이 아벨의 것은 받으심으로 하나님이 인간의 소원에 반응하신다, 는 것을 보여주셨고 아벨은 그 첫 번째 인물이 되었다.

장차 일어날 일에 하나님은 노아를 준비시킨다. 일어날 미래를 정해 놓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반응을 물으신 것이 아니며,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가지는 하나님의 자세가, 하나님의 행동의 근거가 믿음이라는 것이다.

믿음이 있어야 한다, 는 말은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믿음은 관계를 성립시키는 단어이다.

관계를 성립시킨다는 것은 다른 어떤 조건보다도 크게 관계가 맺어졌다는 것이다.

의리. 의리보다 무서운 것은 무엇인가? 혈연이다. 자식을 버릴 수 없고 부모를 잃을 수 없다. 제일 큰 관계가 혈연이다. 이 관계는 나중에는 사랑이 되고 의리가 된다.

하나님은 하나님 되심을 너와 나의 관계는 다르다, 고 말씀하신다. 즉, 믿음을 행사하시는 것이다. 아벨도 에녹도 노아도 하나님이 부모 노릇을 하시고 그들을 아끼고 대접하셨다.

그들은 하나님을 모르고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였다.

아담이 실패하여 사망을 만들어 냈고 이들은 아담의 자손이었다. 하나님은 인류를 잘했다, 못했다, 로 나누지 않겠다고 하신 것이다.

너희들이 잘못했어도 나는 하나님 노릇을 하겠다. 내가 창조할 때 가졌던 목적을 이루고야 말겠다. 이런 의지가 창세기에 이미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이 구약에서는 잘 나타나지 않지만, 드문드문 찾아볼 수 있다.

너희는 내 자녀다. 나는 너희의 아버지다.

야곱의 사건에서도 확인했고 신약에 오면 더 분명해진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않고 양자의 영, 아버지의 자식이라는 영을 받았음으로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느니라. (롬 8:15)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신앙 행위는 끊을 수 없는 관계에서 피어나는 꽃이어야 한다.

믿음이 조건이 되어 보상을 받는다면 그것은 믿음이라고 하지 않는다. 처절하게 정성을 바치는 문제도 아니다. 하나님이 누구신가 하는 문제이다.

우리가 실패했을 때에도 하나님이 포기하지 않는다. 우리를 처벌해서 영 벌로 보내지도 않으신다.

(2) 하나님이 의지와 목적을 가지고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신다면, 우리를 자녀로 삼고 있다면, 신앙생활이 왜 어려운가?

우리가 믿음을 고백하고 순전한 순종을 약속해도 우리의 현실을 왜 이렇게 살게 하시는가? 하나님은 우리를 평안하게 하실 수 있는 분이 아닌가?

히브리서 11장은 히브리서에 있다. 쉬운 얘기이다. 내용이 무엇인가 하면, 지금 내가 던지는 질문을 본문에서도 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를 잘 믿는데 왜 이렇게 신앙생활이 어렵습니까?

(히 3:12~19) 쉽게 읽으면 출애굽은 했지만 가나안에는 들어가지 못한 이스라엘의 역사를 다루는 것으로 보인다.

출애굽 사건은 우리들에게 그 자체로만 이해가 되어 있지 가나안 입국에 대한 이해는 대단히 부족하다.

여기서 롯데타워를 가려면 맨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일어나서 이 교회를 나가야 한다.

구원이란 먼저, 죄와 영 벌에서 꺼내져야 한다. 하나님은 왜 꺼내셨을까? 가야 할 곳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죄 사함을 받았어, 나는 오늘 죽어도 천국에 가, 여기에 머무르면 안 된다.

출애굽은 굉장한 사건이다. 열 가지 재앙이 있었고 홍해를 갈랐다. 불기둥 구름 기둥의 인도를 받으며 바위에서 나오는 샘물을 마시며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고 걸었다.

그 어느 역사보다도 하나님이 개입하셨다. 충분히 돌보셨다. 이 모든 것이 가나안을 들어가기 위함이었다. 가나안은 천국을 의미하지 않는다.

종이 되었던 곳에서 나와 자유 시민이 되는 것이다. 여기를 가지 않는다. 성경은 믿음이 없어서 못 갔다고 한다.

하나님은 이들에게 너희는 가나안에 못 들어간다. 이 광야에서 죽어라, 라고 명하셨다. 많은 사람들이 질문한다. 이들은 천국에 갔나, 지옥에 갔나?

그들은 천국에 갔다. 모세와 함께 죽었던 것이다. 그러나 성경의 어조는 너희들은 다 죽어버려, 라고 하는 것 같아 심각하고 절망적이다.

히브리서 3장 16절이다. 하나님은 누구에게 화를 내셨는가?

모세를 따라 애굽에서 나온 자들이다. 그들은 믿음으로 가나안에 들어갔어야 했는데 그것을 거부했기 떄문이다.
구원이란 가장 1차적으로 천국에 가거나 죄 사함을 받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어떤 관계를 가지고 계신가를 아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원인과 결과의 방법으로 부르지 않으셨다.

너는 내 자식이야. 그래서 우리에게도 요구하신다. 하나님은 내 아버지야. 이렇게 이해하라고 하신다. 잘했는가, 못했는가는 2차적인 문제이다.

저 사람은 예수 안 믿어도 천국에 갈 사람이야.
이렇게 착하게 살았으면 됐지 뭐가 더 필요해?

하나님을 인격적인 대상으로 여기고 신앙이 크는 것이 아니라, 윤리와 도덕에 의해 하나님이 나에게 보상을 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쩌다 한번 선행이라도 하고, 어쩌다 한번 착한 일을 해서 이만하면 됐지요, 라고 확인하려고 든다.

사랑하는 두 연인이 만나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 긴밀함 속에서 인품, 정성, 실력이 드러나야 한다. 매일 선물만 주고 돌아간다면 그 사람과 결혼을 하겠는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관계의 최고의 본질은 사랑과 믿음이다.

기독교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나를 믿어라, 라고 한다. 여기서 믿어라, 는 조건이 아니다. 나를 알아라, 이다. 내가 너에게 누구인지를 알아라.

밤낮 주시옵소서, 좀 그만해라, 이것이 기독교다.
이스라엘 민족의 실패는 무섭다. 하나님은 화를 내신다, 결국 너희에게 나는 보상의 대상일 뿐이냐?

구약에서 이스라엘 민족의 제일 큰 죄는 우상이다.
우상은 내가 원하는 것을 해 주는 신이다.

하나님은 우상을 극도로 싫어하신다.

여호와는 내 이름이다. 나는 내 이름을 다른 이에게, 내 영광을 우상에게 주지 않겠다. (사 42:8)

아버지, 나 이렇게 저렇게 할 테니까 이거저거 사주세요. 우리가 많이 쓰는 방법이다. 이 방법이 통하는 이유는 자식이 아버지에게 부탁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구약을 보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지 않는다. 내 소원을 이루어 주는 신에 불과하다.

하나님은 화를 내신다. 너희가 만든 우상을 보라 입이 있는가? 말을 하는가? 미래를 약속할 수 있는가? 왜 그것들 에게 가서 엎드리는 것인가?

내가 너희와 어떤 관계이냐? 그리고 내가 너희를 어떻게 만들려고 하는지 관심이 있기는 하는 거냐?

너희는 기껏 너희 노력에 대한 보상 이외에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고아가 되지 않았느냐? 이 무지한 것들아. 격노하신다.

다. 결어
(1) (롬 3:23~28) 하나님께서는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로 세우셨다. 여기서 ‘믿음으로’라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해서, 라는 말이다. 하나님이 예수를 보낼 때 구약과 신약을 잇는 새로운 시작의 주인으로 보내셨다. 이때 이스라엘은 완전히 망해 있었으며 400년 동안 완전히 버려졌다. 절망의 끝에 있었다.

예수의 등장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라는 표현으로 설명된다.

믿으면 구원을 얻고 안 믿으면 지옥에 간다, 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저를 믿는 자마다’라는 구절에 붙잡혀 있다. 그러나 요한복음 3:17을 보라.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의도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서 시작된다.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의리도 지키고, 우리의 아버지가 되려고 하시고, 우리와 믿음도 지키고 우리의 아버지가 되려고 하시고 우리와 믿음과 사랑을 나누는 관계가 되자고 요구하신다. 그 핵심은 사랑이다.

(2) (롬 3:23) 그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 는 것은 도덕적인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는 영광과, 그 자녀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영광을 말하는 것이다.

그 사이에 믿음이 있다. 믿음이란 상대를 향한 의리, 정성, 상대를 위해 죽을 수 있는 마음이다.
하나님은 예수를 보내서 이것을 증명하신다. 너희를 위해서는 내가 죽을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답다’를 만드시겠다는 것이다. 하나님 닮은 자녀를 만드시겠다고 한다.

세상에서도 친구가 되려면 그 사람의 자식을 칭찬하는 것이 좋다. 자식을 뭐라 하면 즉시 나쁜 관계가 되고 만다.

세상에는 믿음이 없다. 사랑이 없다. 그러나 우리 안에는 그것들을 원하는 강한 갈증이 있다. 사람에게서는 찾을 수 없어 하나님에게서 찾아야 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이 빼앗아 간 사랑과 믿음에 대하여 넉넉한 자로 나눌 수 있는 자로 서게 될 것이다. 이것이 구원이다.

여러분의 삶에 이 권능이 넘쳐나기를 바란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살면서 제일 많이 겪는 것은 싸움입니다. 불평, 원망, 분노, 보복이 전부입니다. 우리도 싫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평화와 행복입니다. 그 평화와 행복은 아무런 문제가 일어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랑과 믿음으로 성숙해져야 합니다. 다른 것으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믿음의 대상인 것을 아는 것으로, 이 세상을 이기는 우리의 인생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