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성경 다시 보기(12) (롬 10:9~15)

2023. 6. 25. (일)
박 영 선 목사

1. 내용

가. 서론

(1) 오늘 본문은 한국교회의 지난 30년간 부흥 시대 때 하나님이 베푸신, 우리를 가장 감격시킨 구절이며 우리에게 확신을 주었던 구절이다.

본문은 가슴이 떨리는 약속이며 경험이다.

본문은 우리의 결단과 결심을 얘기하지 않는다. 예수를 누가 소개해야 알게 될 것 아니냐? 소개하고 전하러 온 자는 누가 보냈겠느냐? 이렇게 역추적을 한다.

그래서 구원은 하나님의 의도와 의지에서 출발했다는 근거를 밝히고 있다. 본문 15절에서는 전도의 영광, 선교의 기쁨이 있음을 우리에게 알게 한다.

(2) 이러한 놀라운 의지가 있음에도 16절은 ‘그러나’로 시작하여 앞에 있었던 경험을 뒤집는다.

“그러나 그들이 다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이르되 주여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이사야 53장 1절의 인용이다. 수사학적 부정문이다.
이스라엘은 믿지 않았다.

그리고는 17절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하나님이 이 복음을 아들을 보내는 진정성과 권능으로 이루셨다, 라고 한다. 말하자면 16절의 반전을 다시 반전시키고 있다.

18절은 또 다르다.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냐 그렇지 아니하니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끝까지 이르렀도다 하였느니라”시편 19편을 인용했다.

그리고는 19절에서는 다시 ‘그러나’로 시작한다.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였느냐 먼저 모세가 이르되 내가 백성 아닌 자로서 너희를 시기하게 하며 미련한 백성으로서 너희를 노엽게 하리라 하였고”

무엇을 못 알아들었다고 하는가? (19절 상반절)

너희가 못 알아듣고 배신할 것이라는 걸 몰랐단 말이냐?

신명기에서 모세가 한 말을 바울은 19절에 인용했다. 이스라엘의 실패는 열왕기에 와서 바벨론에게 포로가 될 때 실패한 것이 아니고, 그전에 이미 이스라엘이 실패할 것을 그래서 벌을 받을 것을, 신명기 32장에서 예언했다는 것이다.

한 걸음 더 나간다. 20절이다.

“이사야는 매우 담대하여 내가 나를 찾지 아니한 자들에게 찾은 바 되고 내게 묻지 아니한 자들에게 나타났노라 말하였고”

바울은 이사야가 이미 몇백 년 전에 마치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버리고 이방을 택한 것처럼 예언했다고 말한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버리고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벌하고 이방을 찾아왔다고 하는 것은 버렸다는 뜻은 아니라는 것이 19절에 언급되어 있다.

이스라엘을 버리고 이방을 찾아가는 것은 이스라엘을 질투하게 하려는 것이라.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그들을 바벨론에 팔고 얼굴을 돌려 이방에게 구원을 주고 하는 일련의 행동들은 말하자면 온 세상을 구원하겠다는 하나님의 원래의 뜻을 이루는 것이기도 하고, 이스라엘에 대한 본래의 하나님의 진심이 그보다 더 귀하다는 것을 말하기도 한다.

그래서 21절이다.

“이스라엘을 택하셨고, 불순종에 대하여 벌하셨지만 그들을 꾸짖으시고 돌이키기 위해 이방에게 은혜를 베푸셨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야단치시는 데 그치지 않으시고 돌이키게 하셔서 더 가자고 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간절한 심정이요 행동이었다.

나. 본론

(1) 신약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이 문제는 종종 오용되었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몰라보고 십자가에서 죽였어. 그러나 우리는 예수를 믿었어.

기독교 역사 2,000년 동안 기독교는 유대인을 멸시하고 비난하고 정죄했다. 그것으로 우리의 믿음과 선택을 자랑했다.

그러나 본문은 이스라엘을 버렸다고 얘기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들이 질투하도록 해서 더 가게 하실 것이라고 말한다.

이스라엘의 실패는 다만 실패가 아니다. 거기에는 신약시대를 사는 우리가 교훈으로 삼아야 할 깊은 내용이 있다.

예수를 안 믿으면 지옥에 가. 나는 천국에 갈 거야. 성경은 그렇게 간단한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

이스라엘의 실패는 무엇이며, 저들의 실패가 어떻게 이방의 구원이 되는 것이며 이것은 이스라엘 에게는 어떤 의미가 되며, 신약시대의 교회에는 어떤 교훈이 되는 것인가?

우리가 은혜를 받으면 우리는 실존적 신앙관에서 출발한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우리에게 알게 하신다. 내가 누구인지를 알게 하신다. 우리의 운명을 하나님이 붙잡고 계시며 나를 사랑하신다. 나의 믿음을 영원히 지키신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이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하나님이 그렇게 큰일을 하셨는데 저들은 왜 멸망했을까?

우리는 생각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더 가게 하시려고 예수를 보내셨다. 그래서 구약은 도덕적 판단으로 가치가 있을 뿐이다.

아니다. 예수의 오심과 이방의 구원은 이스라엘을 시기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자극시키려고 했다는 것이다. 놀라운 일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대해 왜 화를 내셨는가? (사 66:1~4)

너희들이 성전을 지은 것이 무슨 자랑이냐? 내가 하나님인데 내가 거할 곳이 없겠느냐? 온 우주가 다 내 집 아니냐? 너희가 나에게 정성을 바친다고 소도 잡고 양도 잡고 하지만, 그렇게 정성을 다했으니 복을 달라고 나를 구슬리고 있는 것이냐? 나는 너희에게 목적을 가지고 있다.

나는 너희들을 만들어서 내용과 운명을 갖추려고 하는데 너희는 그건 한 번도 안 묻는다. 그리고는 필요한 것을 얻으려고 아첨만 떨고 있다.

저희가 언제 그랬습니까?
너희가 우상을 왜 만들었는지를 봐라.

우리가 종종 묻는 질문이다. 이스라엘은 왜 우상을 만들었을까? 하나님이 답하신다. 너희가 원하는 것을 내가 해주지 않으니까 만든 것 아니냐?
내가 왜 너희의 소원을 안들어 주는 지 아느냐?
너희는 내 뜻과 다른 것을 늘 구한다.

형통하게 해주세요. 병 안 걸리게 해주세요. 자식들 평안히 크게 해주세요, 건강하게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확 죽게 해주세요, 눈을 뜨면 천국이게 해주세요.

야, 이 나쁜 놈들아, 너희는 나를 뭘로 아는 거냐?

난 너희의 아버지야, 너희는 내 백성이야, 내가 어떻게 너희를 얼렁뚱땅 키우겠어? 죽어서 천국 가는 게 다야? 너희의 인생을, 너희의 실존을, 너희의 정체성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때우자는 말이냐? 짐승도 그렇게 살지 않는다. 애써서 살고 자기 새끼들을 지킨다. 더 이상의 욕심을 내지 않는다. 너희는 왜 짐승만도 못하냐?

생각하지 않도록 해달라고 나에게 비는 게 말이 되냐?

이스라엘아, 내가 너희에게 왜 이러는지 한번 생각해봐라. 너희는 말한다. 우리가 성전 짓고, 제사 드리고 율법을 지키지 않습니까?

너희는 더 가야 한다. 그런데 너희는 너희의 소원을 들어줄 우상을 만든다. 그리고는 내가 무엇을 하려는가 에 대해서는 아무런 반응도 없다. 이것이 불순종이 아니냐?

(2) 순종은 분별과 선택과 책임이다. 저는 제 뜻대로 안 하고 하나님 뜻대로 하겠습니다, 고 말하면 책임이 면제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며 그것을 이루기 위해 어떤 길을 가야 하는지에 대해 책임 있게 반응해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 시대, 이 나라, 이 자리에 보내셨다. 여러분의 가정, 직장, 속해 있는 사회에 보냈다. 이것이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정하신 길이다. 그런데 여러분은 여기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한다.

우리 대통령이 잘해서 아무 근심 없게 해주세요. 이스라엘 백성이 하는 기도로 바꾸면 이렇다. 바로가 잘해서 우리도 잘살게 해주세요.

너희는 종이 아냐. 너희는 자유인이야. 너희는 내 자녀야. 너희는 명예롭게, 거룩하게, 지혜롭게 선택하는 존재가 되어야 해. 이건 환경을 바꾸는 문제가 아니야. 너희 자신이 그런 존재가 되어야 해.

이 과정을 겪고 극복해야 너희의 자리에 가는 거야.

이 순종을 하지 않은 것이 이스라엘의 구약 역사이다.

왜 그러세요? 이스라엘은 여기서 끝났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바벨론에 파셨다. 바벨론은 떠들었다. 우리가 믿는 신이 너희가 믿는 신보다 크다. 그러나 바벨론에 가서 보니 큰 것이 하나도 없었다.

폭력은 더 가지고 있지만, 이스라엘이 율법에서 본 것 같은 신은 바벨론에는 없었다. 그 신은 대꾸도 안 하고 목적도 없고 개입도 하지 못했다.

바벨론은 자신들의 폭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신이라는 변명을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포로는 다만 형벌이 아니고 이스라엘 에게는 중요한 경험이 되었다.

(호 11:1~7) 하나님은 우리를 책임지는 자유인으로 부르신다. 자녀의 신분을 주신다. 구약에서는 출애굽이며, 신약에서는 예수를 믿는 고백이다.

출애굽 얘기를 왜 하는가? 너희는 명령 아래에 있는 존재가 아니다. 너희는 내 자녀이며 나를 잇는 존재야.

우리가 잘못하는 부분이다. 우리는 내가 모든 것을 정하고 내 행복, 내 필요에 대해 하나님께 힘을 빌려와 해결책으로 삼고 보상을 받으려고 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지 묻지 않는다. 그렇게 하려면 어떤 과정과 경험을 가져야 하는지 생각하지 않는다. 어떤 결론에 가는지도 관심이 없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오늘 죽어도 천국에 간다, 는 사실은 우리가 매일 확인한다. 그러나 당장 죽지는 않는다. 그리고 죽지 않는 동안 하나님께서 내 기도에 하나도 응답을 안 하신다.

신앙의 확인이 주일날 교회 오는 것에 멈추어 있다. 평일에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게 잘 안되니까 주일을 철저히 지켰다.
돈을 안 썼다. 뭐 사먹지 않았다. 버스 안 타고 걸어왔다. 이렇게 허전한 공간을 메꾸었다.

그러나 이것이 답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고 체념이 생긴다. 세상 속에 보내졌다는 컨텍스트(문맥)를 모른다. 거기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선교사가 되라는 것 아니다. 존재가 달라지라는 것이다. 세상이 가지는 공식들 약육강식, 적자생존을 위해 세상은 폭력을 쓰지만 우리는 양보할 수 있고 한 걸음 물러날 수 있고 좋은 말을 할 수 있다.

저들은 죽으면 그만인 인생이고 우리는 천국의 부름을 받았다. 주의 이름으로 사는 자는 어떻게 평범한 일상에서 자기 역할을 하는가?

‘예수 믿어’ 가 아니라, ‘내가 용서할게’이다. 그러나 과장되게 하면 안 된다.

말을 길게 하는 게 싫어서, 너 예수 믿으면 모든 것이 해결돼. 이렇게 윽박지르지 말라. 하루 만큼씩만 해라. 한 번만 해보라.

(호 11:8~11) 하나님의 고집과 의지를 보는가? 왜 이렇게 어려운 형편까지 가시는가?

쉽게 갈 일이었으면 내가 내 아들까지 보냈겠느냐? 내가 목적하는 인생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아느냐?

우리는 평일에는 하나님이 없다. 우리는 우리가 잘못해서 복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의 얼굴이 지금의 이 얼굴이 된 것이다.

다. 결어

(1) 시험 한번 잘 보았다고 해결될 인생이 아니다.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의 강요가 아니라 약속이다. 너희는 내 이름으로 부름을 받고 있지 않느냐? 그러니 너희 인생에 대해 겁내지 말라.

(사 43:1~7) 미국도 러시아도 여러분을 위해 세웠다. 히틀러도, 어떤 뛰어난 자도 여러분에게는 조역에 불과하다. 여러분 각자가 주인공이다. 여러분의 현실과 조건이 바로 역사이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창조주이시며 구원자이시며 약속을 이루시는, 결론을 내시는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우리의 현실은 하나님께서 진정성을 가지고 개입하셨으며 인도하셨고 나를 만들어 가시는 과정입니다.

우리는 더 잘해야 합니다. 형통해진다는 기대가 아니라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믿음이며 순종입니다. 하나님의 기적이 매일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하옵소서. 그것을 깨닫는 지혜와 믿음을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