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성경 다시 보기(11) (롬 8:31~39)

2023. 6. 11. (일)
박 영 선 목사

1. 내용

가. 서론

(1) 모든 종교가 그렇듯이 예수를 믿는다는 기독교 신앙의 근거와 이해의 출발점은 우리가 믿는 신이 어떤 분인가, 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세상에서 종교로 인정되는 것은 그 신이 인간이 하지 못하는 권력과 능력을 가지고 있고, 어떤 조건을 만족시키면, 그 신이 우리가 만들 수 없는 어떤 결과를 만들어 준다고 믿을 수 있을 때 종교로 인정한다.

기독교 신앙에서도 하나님을 창조주요 심판자라고 이해하면서도 일반적인 종교성과 혼합이 되어, 하나님의 권력과 능력에 초점을 맞추면서 그분을 내 편으로 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라고 생각한다.

믿음을 가져야 한다고 표현을 하면서도 그분이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는가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 그래서 치성과 선행을 조건으로 삼는 관계를 맺는다.

(2) 우리가 예수를 믿고 나서 가장 당황하는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다고 하시면서도 왜 우리에게 고난을 주시는가? 하는 것이다.

고난은 왜 있는가? 성경은 고난이 우리를 키우기 위해 있다고 한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치성이 아니고 순종이다.

다른 신들은 권력을 가지고 있고 신을 향한 소원과 목적은 신자들에게서 나온다. 기독교는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가지는 욕구보다,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실 때부터 우리의 운명, 신분, 가치에 대해 이미 목적을 가지고 계셨다는 것을 강조한다.

나. 본론

(1) 책임있게 선택해야 한다는 것은 성장하는 사람에게 꼭 필요한 일이다. 부모가 자식에게 잔소리를 할 때 그 내용을 조작할 수는 없다. 자식이 그 고집을 꺾는 것이 출발점일 수밖에 없다.

자식이 학교에 가지 않는 것이 부모에게 알려져 야단맞고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묻는다. 어떻게 하나? 학교에 가야 한다. 가서 공부를 해야 한다. 말보다는 고집을 꺾는 순종이 필요하다.

아버지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이 기도를 오해하면 안 된다. 자기의 고집을 내려놓으면 그다음은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는 게 아니다. 책임을 전가할 수 없다. 자신이 그 길을 가야 한다.

하나님이 무엇을 하라고 하시는가? 현실을 살라고 하신다. 우리가 그토록 속상해하는 한계와 조건을 가지고 살라고 하신다. 이런 도전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만들어 가신다. 이것이 순종이다. 그러니 순종은 자발성이 있어야 한다. 분별과 선택이 있어야 하고 책임을 져야 한다.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기독교는 은혜의 종교이고 은혜는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해주시는 것인데, 분별과 선택이 있고 책임을 지라고 하신다면 은혜의 역할은 과연 무엇인가?

은혜란 구원의 조건이다. 우리가 자격이 있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

은혜는 우리를 죄에서 생명으로 데리고 간다. 그렇다면 은혜는 죄를 어떻게 해결했을까? 이 답을 찾을 때 우리의 도덕성은 죄 사함을 받아 죄의 문제를 해결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더 나아가야 한다. 무엇을 위해 용서하고 죄를 사하는가? 대부분의 신자들이 이 문턱을 넘지 못한다.

(2) 아담이 죄를 짓고 인류는 신분이 죄인이 되고 운명이 죄인이 된다. 무슨 죄를 지었는가?

하나님은 아담을 창조하시고 지위를 주시고 기회를 허락하셨다. 생육하고 번성하라. 세계를 다스리라. 다만 한가지, 동산에 있는 모든 과일은 먹어도 좋으나 선악과만은 먹지 말라. 먹으면 네가 죽으리라. 엄하게 경계하셨다.

아담은 먹었다. 우리는 질문한다. 먹으면 안 되는 과일나무는 왜 만드셨는가? 먹으려고 하는 것을 왜 안 말리셨는가? 아담이 먹었으면 아담을 죽이시고 인류 역사를 새로 시작하면 될 것을 왜 긴역사를 계속하여 고통을 주시는가?

그러나 이런 질문의 밀도가 높지 않아서 답도 대강 찾고 쉬운 타협을 하고 대강 지낸다. 우리는 제안한다. 그냥 믿으면 그다음은 하나님이 다 하시겠죠.

아담의 사건에서 아담은 왜 선악과를 따 먹었는가, 하나님은 왜 방관하셨는가, 가 핵심이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준 권리와 지위가 얼마나 굉장한 것인가를 설명한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감히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할 권리도 주셨다.

피조물인 아담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런 아담이 감히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할 수 있는 권리를 가졌다는 것이다.

아담은 명령을 거부했다. 그래서 벌을 받은 것이 아니다. 자신이 선택한 결과를 보게 된다.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다는 것은 다만 도덕적인 차원에서 불순종했다는 것이 아니다. 모든 존재의 근원으로부터 분리되자 그는 소멸될 수밖에 없게 된다.

요한복음 15장의 포도나무 비유같이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으면 많은 열매를 맺고 떨어져 있으면 땅에 떨어져 밟히고 마르고 썩는다.

사망은 벌이 아니다. 하나님을 떠난 자가 겪는 당연한 비극이다.

죄의 값은 사망이다. 여기서 죄란 윤리 도덕적이 개념이 아니라, 가치와 운명에 대한 것이다.

아담은 자기의 권리를 마음대로 쓸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잘못된 선택을 하면 그는 사망에 이를 수밖에 없다. 사망은 어떤 가치도 어떤 노력도 모두 쓸데가 없다는 사실의 궁극적인 표현이다.

하나님은 이 사망을 회복시키겠다고 작정을 하신다. 그래서 아들을 보내신다.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신다. 우리는 쉽게 이래서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고 넘어간다. 성경은 좀 다르게 지적한다.

(히 2:9~16) 하나님은 모든 존재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없는 곳은 없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이 없는 곳을 만들었다. 인간이 하나님을 거부했던 것이다. 여기는 모든 가치와 운명이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 이 어두움 속에 예수를 보내신다.

성경은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낳았다고 한다.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의 작품이므로 예수님은 우리를 형제라고 부르시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 형제는 어디에 있었는가? 하나님이 없는 곳에 있었다. 그 형제들은 예수님을 믿거나 선택하지 않은 상태로 있었다.

천사들은 우리가 부러워하는 도덕적 승리자들이다. 예수님은 이 천사들을 붙들려 하지 않으셨다. 하나님 없음을 고집하여 사망을 초래한 우리를 붙들기 위해 오셨다.

하나님이 없는 자리에 하나님이 들어오셔서 사망이 무효가 된다. 하나님 없음이 없어진 것이다. 우리가 거부한 하나님이, 우리가 거부해서 생긴 하나님 없는 자리에 오셔서 사망을 없애 주신다.

(고전 15:55~56) 율법은 잘잘못에 의해 심사된다. 잘하면 상을 받고 못 하면 벌을 받는다. 이 규칙에서 벗어나는 것이 은혜이다.

은혜란 인과 법칙을 벗어나는 하나님의 의지이다. 은혜는 거저 주신다는 것보다 더 깊게 하나님의 고집이다. 창조주가 그의 형상으로 만든 인류에 대해 가지는 하나님의 고집, 하나님의 의리, 하나님의 성의를 은혜라고 한다.

우리의 거부와 실패의 자리까지 그 아들이 따라 들어오셨다. 죽음의 자리까지 가려면 죽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죽을 수 없는 분이 오셨기 때문에 사망이 더 이상 승리할 수 없었다.

아담이 하나님을 배반한 것보다. 우리의 죄는 더 크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으면서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리라는 참담한 말까지 했다.

이런 우리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신 것이다.

(3) (엡 1:3~6) 은혜가 굉장하다는 것은 알겠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우리는 당황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질서와 논리를 벗어나기 때문이다. 성경은 요구한다. 어떻게 할래? 하나님이 너를 이렇게 사랑하시는데 너는 아무렇게나 살 거야?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신이 나에게 그런 의지를 가지고 있다구? 그럼 나는 쉽게 살 수 없어. 방심할 수 없지. 최선을 다할 거야. 그러나 실패가 두려워.

실패가 운명이 되지 않아. 그건 너에게 약이 되는 거야. 해봐. 괜찮아 울고 때우지마. 믿사오니, 라고 외치고 때우지마.

하나님은 명분으로 나를 누르지 않으신다. 얼렁뚱땅 넘어가지 않으신다. 너는 이 자리까지 가야 해. 너는 내 영광의 꽃이, 찬송이 되는 거야. 나는 포기 안 해. 너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합력해서 선이 되게 할 거야.

(엡 4:17~24) 하나님을 모르는 자는 진리에 대한 감각이 없고, 기준이 없고, 고집만 부린다. 권리는 있고 분별은 없다. 생존경쟁이 있을 뿐이다. 약육강식의 규칙을 따른다.

그러나 세상의 승자가, 모든 사람을 짓밟고 승리의 자리에 서 있어도 자신에게 명예가 되지 않는다. 인간에게 못 할 짓을 하고 그 자리에 온 것이며 이는 역사 내내 반복되었다.

하나님을 따르는 새사람만이 의미, 가치, 명예, 용서, 인내, 충성 같은 단어들의 뜻을 알게 된다. 구원을 받은 것이다.

폭력밖에 없던 자리에서 용서를 하고 위로를 나누는 자리에 온 것이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자리인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조작하거나, 강요하지 않으신다. 우리가 되기를 바라신다.

다. 결어

(1) 이 모든 것은 믿고 나면 주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창세 전부터 이런 계획을 가지고 계셨다. (롬 5:8)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다. 자신의 형상을 닮은 자신과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존재를 만드셨다. 그리고 그 목적을 포기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이 과정에서 자유를 주시고 선택권을 주시고 해 보라고 하신다. 창조주를 거부하는 권리까지도 우리에게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피조물인 우리가 그만한 책임을 지고 있는 상대방이 되기를 원하셨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고 그를 아버지라고 부른다는 것이 무슨 뜻이며 우리를 위하여 아들을 주셔서 무엇을 만들려고 하셨는가?

(2) (요 3:16) 하나님은 세상이 죄와 사망 아래 있을 때 독생자를 보내셨다. 인류의 운명에 대해 책임을 지기로 하신 것이다. 그리고 이 문제에 모든 권능과 지혜와 정성을 쏟기로 하셨다.

그럼 우리가 믿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위와 같은 약속을 알고 있는 것과 모르고 있는 것은 천지차이이다. 나 오늘 죽어도 천국에 가. 맞는 말이지만 이 사람은 얼마나 더 커야 하는 것인가?

애가 어렸을 땐 이렇게 부모를 따라간다.
엄마가 하랬어, 엄마가 하지 말랬어.

그러나 크면 본인이 결정을 해야 한다. 이 문제는 안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실력이 생겨야 한다. 하나님은 이 모든 과정을 허락하신다. 우리는 자연에서 초월로 가는 것이 종교라고 생각한다. 기독교는 초월을 육신에 담겠다는 종교이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 오시고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사랑과 믿음을 나눌 수 있는 상대가 되라고 하신다. 이 일을 역사 내내 행하고 있다.

모든 인생이 각각 이 일을 겪고 있다. 저 사람은 어떻게 되나요? 그걸 말할 틈이 없다. 그 사람을 보고 어떻게 여러분의 현실을 배우느냐가 더욱 중요하다. 그들 모두가 조연으로 쓰이고 있다.

(롬 9:17~18) 바로는 왜 저렇게 되었나요? 바로는 억울하지 않다. 너는 네 인생을 가라. 너는 하나님의 자녀다. 비난과 저주로 지금을 살지 말아라. 네 인생을 치열하게 살아라. 그 길을 명예롭게 가라. 자부심과 자랑을 가지고 가라.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 각자의 현실이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임을 믿습니다. 우리가 순종해야 하는 것은 우리에게 실력이 있어야 한다는 가르침을 믿기 때문입니다. 책임을 미루고 운명만을 바라고 현실을 외면하는 핑계를 대지 말게 하옵소서. 비겁하거나 어리석거나 두려움에 떨지 말게 하옵소서. 하나님께서 나를 통하여 영광 받기를 기뻐한다는 사실을 알게 하옵소서. 이것이 저희의 자랑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