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성경 다시 보기(9) (마 25:14~30)

2023. 5. 14. (일)
박 영 선 목사

1. 내용

가. 서론

(1) 오늘 본 본문은 천국에 대한 어떤 설명이다. 마태복음 25장에는 세 가지 비유가 나왔는데, 지혜로운 처녀와 미련한 처녀, 신랑을 맞이하려고 등을 들고 나갔으나 기름은 준비하지 않은 처녀들과 기름을 준비한 슬기로운 처녀.

그리고 우리가 오늘 본문으로 택한 달란트 비유, 착하고 충성된 종과 악하고 게으른 종의 비유. 세 번째는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하지 않은 것이 주께 하지 않은 것이고, 지극히 작은 자에게 베푼 것이 주께 한 것이다, 라고 천국의 어떤 특성들을 이 비유에서 다루고 있다.

오늘 다루려는 달란트 비유에서는, 하나님께서는 그 자녀들에게 무엇을 부탁하고 목적하고 있는 가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

나. 본론

(1)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주시고 우리의 아버지시며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고난을 주시는가?
고난은 잘 잘못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기르려고 하시는, 성숙하게 하시려는 당연한 과정이다.

부모가 자녀들이 원치 않는 공부를 시켜야 하는 것과 같다. 공부를 자신을 위해서 하지만, 철이 없을 때는 부모를 위해서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부모의 말을 들어서 공부를 열심히 한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를 깨닫는 아이는 없다.

고통스럽다. 언제까지 해야 하는가? 나 그냥 일찍 그만두고 장사하면 안 돼?

부모는 답한다. 철없는 것.

기독교는 잘 잘못을 판정하여 보상과 벌을 내리는 종교가 아니라, 부모가 자식을 기르듯 성숙을 시키는 종교이다.

우리가 신약 성경 다시 보기를 시작할 때 보았던 본문 엡 1:6 말씀처럼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신앙생활을, 잘하고 잘못하는 것에 대한 보상 관계로 전락시킨다.

오늘 바로 이 이야기가 달란트 비유에서도 나온다. 착하고 충성된 종과 악하고 게으른 종으로 쉽게 비교를 하기 때문에 충성한 자와 충성하지 않은 자의 보상으로 이해한다. 그래서 벌을 받았고 복을 받았다, 가 남는다.
본문은 조금 다른 얘기를 한다. 한 달란트 받은 자는 왜 충성되지도 착하지도 못했는가?

그는 주인을 엄한 분으로 오해했다. 잘못하면 벌 받을까 봐 잘못하지 않는 방법을 택했고 맡은 돈을 잘 감추었다가 고스란히 돌려주었다.

성경은 이것을 악하다고 게으르다고 얘기한다.

앞에 있는 두 종은 주인이 자기들에게 주인의 소유를 맡기고 떠났다는 것을 이해한다. 주인이 자기들을 어떤 대상으로 취급하는 가도 이해했다.

그들이 열심히 이익을 남긴 것은 주인이 자기들을 대하는 신분에 대하여 감격이 있었고, 이 감격은 다만 무엇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주인의 역할까지 자신을 끌어 올리는 기회로 삼았던 것이다.

그래서 자기 재산을 늘리듯이 주인의 재산을 늘렸다. 주인이 왔을 때 너희는 나의 기쁨에 참여하라는 보상을 받는다.

주인의 기쁨은 다스리는 자의 기쁨이었다. 종들은 주인의 다스림을 잘 받아서 보상을 받은 것이 아니었다. 다스리는 자를 한번 해보라는 높은 지위를 이해했고 그 역할을 해냈다. 시간과 경우 속에서 해냈다.

악하고 게으른 종은 그런 명예와 기회를 전혀 쓰지 못했다. 일반적으로 종교심 속에는 도덕과 윤리가 자리를 하고 있다. 잘하면 상 받고 못 하면 벌 받고, 가 너무 깊이 자리하고 있으며 인간의 양심 속에서도 최고의 가치이다.
게으른 종은 잘 잘못을 안 한 게 전부였다.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그 아들까지도 보내셨다는 십자가 사건을 전혀 모르는 것이다.

예수를 믿으면 천국에 가고 예수를 안 믿으면 지옥에 간다, 가 됐지, 살아서 예수를 믿어 얻게 된 신분과 지위와 시간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모른다.

시간을 주를 위해 쓰지 않고 우리 자신을 위해 써야 한다. 우리가 만들어지는 것을 더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여기서 지혜의 문제가 제기된다. 하나님의 목적이 있고 그 목적을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으신다는 방향을 알고 목적지에 가기 위한 길 찾기가 필요하다.

지혜란 분별과 선택이 전제가 된다. 가고자 하는 길에 대한 분별이 없으면 우리는 헤매게 된다.

너희는 용사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고 부자의 부를 자랑하지 말라. 너희는 여호와를 아는 것을 너희의 지혜로 알라.

우리가 능력의 차원에서는 하나님을 전지전능하다고 많이 고백하면서도, 우리에게 아버지가 되셔서 자식을 위해서는 못할 것이 없다는 부모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다.

부모는 다만 자식을 보호하지 않는다. 자식을 위해서는 자신을 온전히 주고 희생할 수도 있다. 이것이 부모의 기쁨이고 자랑이다. 그러니 부모가 지금 나를 어떻게 이끌고 있는가를 알아야 하고 지혜가 필요하다.
(2) (엡 4:13~16)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는 죽어도 좋다고 하신다. 그리고 우리에게 이 내용을 이해하고 이것을 믿으라고 하신다.

모르면 못한다. 모르면 도덕으로 빠지게 된다. 그래서 대부분 신자들의 신앙생활은 회개가 주를 이룬다. 잘못한 건 분명히 알기 때문이다.

흠을 지워야 신앙행위를 한 것 같고, 신앙적으로 진정성을 가진 것 같아서 결벽을 떤다.

모든 신자에게 통하는 공격이 하나 있다. “당신 요즘 교만해.”

이 말을 들으면 봉사, 찬송도 못 하고 좋게 가지던 표정도 못 가진다. 결벽증이 되어 있는 거다.

아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야 한다. 자랑해. 기뻐해. 고함질러. 신자들에게 이런 방향이 없고 길도 없다. 이러면 신앙생활의 용어가 추상명사에 머무르고 말며 현실적인 도구가 되지 못한다. 현실적인 통찰도 없다.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네가 어떻게 되느냐에 집중할 것이 아니라 내가 너를 어떤 사람을 만들기를 원하는가를 집중해라.

이것은 하나님의 고집이며 창조 때부터 가지고 계시던 계획이었다. 그래서 십자가는 지옥 가는 사람을 천국에 데려가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딴 데로 가버린 허망한 인생을 건지시고 그에게 원래 가졌던 목적을 이루신다.

자라나고 크고 더 가야 한다. 십자가를 목에 걸고 반지로 끼고 울기만 하면 안 된다. 하나님은 나를 절대 포기하지 않으시는구나, 나는 명예와 영광이 약속되어있는 존재로구나.

늘 승리할 수는 없다. 한 사람이 철이 드는데 많은 실패와 많은 후회가 있는 것이 당연하다. 왜 그런가? 외워서 될 수 없고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시간이 필요하다. 지혜는 경험을 해야 생기기 때문이다.

잘못 들어갔는가? 거기서 회개하지 말고 거기서 나와야 한다. 그리고 아까 좌회전을 했다면 이번엔 우회전을 해야 하지 않는가? 그렇게 돌고 돌고 넘어지면서 우리의 삶은 변덕과 후회로 점철된다. 여기서 내가 크는 것이다.

가야할 길을 직선으로 가면 선 하나이고 헤매면 그 땅이 전부 내것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기가 막힌 방법이 실현되고 있는 것이다.

(고전 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왜 내 인생에 형통은 없고 곤고만을 주시면서 겁을 주시는가? 이것이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이라고 성경은 답을 한다.

여러분의 처지와 실력에 대해 긍정적인 마음이 생겨야 한다. 여기서 긍정적이라는 것은 신념이나 주문이 아니다. 나를 만드신 분이 나를 이끌고 있다, 라는 이해를 말한다. 다른 말로는 믿음이다.

(엡 4:17~20) 하나님이 없으면 인간이 어떻게 되는가? 가치와 명예를 만들 수 없다. 인간은 안심을 최고로 원한다. 그렇게 할 수 없으면 체념한다. 그래서 인간은 어려움을 만나면 죽어 버리겠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자기가 당하는 고난을 극복할 대안도 없다.

인간은 스스로 명예와 가치를 만들 수 없다. 인간은 방탕하다. 즉 시간을 낭비한다.

악하고 게으른 종도 시간을 낭비했다. 주어진 시간 안에 한 일이 무어냐? 이것은 결과가 무어냐와는 다르다. 주인이 가지고 있는 지위의 명예와 영광에 대하여 무엇을 했느냐? 아무것도 안 하지 않았느냐?

너는 악하고 게으르다.

정성이란 가야 할 길을 열심히 가는 것을 말한다. 가야 할 길을 알고 가야 한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은 모르는 것을 열심히 하는 사람이다. 계속 헤맨다. 열심히 가지만 위치는 다른 곳에 있다.

하나님이 무엇을 하자는 것인지 모르고 내가 욕 안 먹는 것이 전부인 신앙생활을 한다. 회개하지 말라, 가 무슨 말인지를 이해해야 한다. 잘못하고도 뻔뻔해라, 가 아니다. 돌아서서 제 길을 찾으라는 것이다.

생명이 없으면 방탕하고 감각이 없어진다. 인간은 죽는 것이 끝이지만 우리는 다르다.

(엡 4:21~24) 의와 진리는 생명, 가치, 명예, 영광에 속한 단어들이다. 인간이란 이래야 한다, 는 기준에 따라 철이 들어야 한다. 수준이 향상되어야 한다.

막다른 골목에 있는 인간이 비명을 지르는 것과는 얼마나 다른가? 우리는 위로를 할 수 있다. 용서를 할 수 있다. 같이 있어 줄 수 있다. 우리밖에는 없지 않은가?

그러니 세상 사람들처럼 너 죽고 나 죽자는 아니다. 자폭하지 않아야 한다. 소망과 성장을 배우고 결실해야 한다.

(3) (엡 5:15~18) 여기서 성령 충만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특별한 감격을 말하지 않는다. 자라나는 것을 말한다. 자라나서 열매를 맺는 것을 말한다.

필요한 경우 성령께서는 우리를 확신시키기 위해 감동으로 오실 수 있다. 그러나 보편적으로 모든 성도들에게 이미 성령이 와 계신다.

성령은 우리가 걸어야 할 정황 속에서 우리가 선택할 때 자꾸 말씀을 더 하여 주신다. 우리는 겁이 나서 믿음의 법보다는 세상의 생존 경쟁의 법을 택하거나 체념한다.

나이가 들면 젊었을 때 게을렀던 것이 후회가 된다. 그 결과로 손해를 많이 봤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시 보면 게으르지 않았던 것의 결과와 게을렀던 것의 결과가 꼭 세상의 법칙에 따라 나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신자들에게서 보게 된다.

후회, 비명, 절망이 우리를 다음 단계로 밀어냈다.

우리를 안주하지 못하게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이 되는 자리까지 끌고 나갔기 때문에 우리는 고달프다. 그러나 복된 길로 붙잡혀 온 것이다.

술 취하지 말라는 것은 생각이 없어지는 상태를 만들지 말라는 것이다. 술 취하는 것은 머리를 완전히 비우는 것이고, 성령 충만은 완전히 믿음에 맡기는 것이다.

믿음에 맡긴다는 것은, 책임을 미루는 것이 아니라, 내가 최선을 다한다는 것이다. 그때의 실력만큼 현실에서 부딪치는 많은 우회로를 하나님의 인도로 받아들여야 한다. 모든 것이 과거 없이 현실에 뚝 떨어지지 않는다. 후회가 많았던 그 과거가 나를 깨우치게 하는 것이다.

다. 결어

(1) 성경은 계속 말한다. 어리석지 말라. 지혜로운 자가 되라,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이 누구이고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어떻게 일하시는지, 그것이 얼마나 복된 길인지를 알아라.

씩씩하게 배짱 좋게 살아라. 부닥친 것이 나를 곤란하게 하지만 내 운명은 아니다.

여기가 끝인가 보다. 나는 더 못가겠다.
이것까지 나중에 일을 한다고 말씀하신다.

예수를 모르는 사람들과 동일한 조건 속에서 만났을 때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한 차이가 있어야 한다.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탁하신 일이 무엇인지, 이것을 이루기 위해 왜 우리의 간절한 기도가 있어야 하는지를 보여야 한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시간과 공간과 경우와 시대와 환경, 또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뜻을 막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영광으로 삼으십니다. 이제 알았으니 힘내게 하옵소서. 충성이 있고 인내가 있고 믿음이 있고 자랑이 있게 하시고 하나님께 대한 감사가 매일 새로워지는 기적의 인생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