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성경 다시 보기(10) (롬 5:17~21)

2023. 5. 28. (일)
박 영 선 목사

1. 내용

가. 서론

(1) 우리는 기독교에 대한 신약 성경에 설명된 내용을 구체적이고 자세하게 요약하고 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우리는 누구인지, 하나님과 우리는 어떤 관계인지 보는 것이다.

사랑하신다고 하는데 왜 고난의 현실을 살게 하시는가?
고난은 우리를 기르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라고 한다.

(고전 1:18) 십자가의 도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믿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니라.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한다. 우상과는 다르다. 우상은 내가 원하는 것을 갖기 위하여 신을 만들지만, 그것은 스스로가 신이 되는 행위이다.

(2) 순종을 한다는 것이 하나님께 책임을 다 떠넘기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순종할 때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시지 않는다.

하나님, 문과에 갈까요? 이과에 갈까요? 어느 교회를 나갈까요? 누구랑 결혼할까요?
이런 일들에 답을 하지 않으신다. 많이 기도해야 하지만 선택은 자신이 해야 한다. 많이 기도했으니까 하나님의 뜻일 거라고 생각 할 수 있지만 얼마든지 나중에 후회할 수 있다.

하나님은 그때 왜 분명하게 알려주시지 않았을까? 선택에는 지혜가 있어야 하고 지혜란 분별이다. 분별을 위해서는 경험이 필요하다.

나. 본론

(1) 우리는 예수를 믿으면 지옥에 가지 않고 죄를 짓던 자리에서 용서를 받아 거룩한 자가 되고, 이런 일들이 시간과 무관하게 즉각적으로 되기를 바라지만, 하나님은 오랜 시간이 지나가게 하시고, 답답하게 하시며, 체념하고 분노하고 원망하게 하신다.

구원이라는 문제에 있어서 한국교회는 성경의 내용을 다 담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약도를 이렇게 그려주는 것처럼 보인다. 남포교회를 가려면 어떻게 가는가? 지하철 강남역에서 내려 테헤란로를 따라 쭉 가면 있다.

이렇게 가기는 어렵다. 중간중간 랜드마크를 찍어 주어야 한다. 최소한 현대백화점, 종합운동장 정도는 표시가 되어야 한다.

천국을 가는 지도에도 랜드마크는 필요하다. 이때 모르겠으면 기도해라, 라고 하면 안 된다.

예수가 오셔서 우리를 구원한다는 성경의 설명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오늘 본문이다.

아담 안에서 죽은 자가 예수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게 되었다. 죄와 사망 아래 있던 자리에서 은혜와 생명의 자리에 가게 되었다. 이게 구원이다.

죄인이었는데 십자가의 대속으로 죄를 사함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잘 이해하고 있는 것이지만 본문은 세상이 달라졌다, 라고 강조하는 것이다. 내가 속한 세상이 달라졌다. 예수가 오시기 전에 우리는 사망이라는 질서와 운명을 벗어날 수 없었는데 예수가 오셔서 은혜와 생명이라는 질서와 운명으로 바꾸신 것이다.

(롬 6:6~11) 보통은 이 구절을 죄짓지 마라, 하나님만 생각해라, 의와 진리의 거룩한 생활을 해라, 라고 이해한다. 여기서 죄에 대하여 죽는다는 것은, 죄는 이제 너와 상관이 없다, 죄는 너희의 규칙이 아니며 너희는 죄로 어떤 판단도 받지 않는다, 는 뜻이다.

성경은 이 말씀의 근거를 역사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롬 4:6~8) 죄를 회개하면 용서를 받는다고 하지 않는다. 아예 죄를 묻지도 않기로 했다고 한다.

우리의 가치판단은 범죄와 의로운 행위가 분명하게 대척점에 있기때문에 어느 한쪽을 지우면 다른 한쪽도 성립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에서 죄를 없앴다는 말씀은 여러 곳에서 나온다. (롬 8:1~2)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물어보실 때 그 기준안에 죄와 사망은 아예 없어졌다, 는 것이다. 생명의 성령의 법만이 남았다. 죄는 대부분 도덕 법이다. 살인, 도둑질, 악행, 등이 죄다.
그러나 죄의 범위는 넓다. 자식이 부모의 말을 거역하고 학교에 가지 않는다면 그것은 죄이다. 남편이 빈둥거리고 돈을 벌어오지 않는다면 그것도 죄이다.

이것이 도덕적으로 죄인가? 여기서 죄의 범위가 넓어진다. 신분과 자유에 해당하는 책임을 지지 못하는 것이 죄이다.

그러니 죄에서 벗어났다는 것은, 하나님이 만든 인간이 죄나 사망으로 심판받는 질서에서 벗어나, 하나님께서 새롭게 만든 지위와 신분과 명예 속에 들어와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우리는 회개를 가장 우선하는 경우가 많다. 잘못을 까발리고 지우고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다짐한다. 그러나 성경은 잘못을 알았다면 분발하라고 우리를 독려한다.

잘못을 깨우쳤다면, 잘해라, 열심히 해라, 분발해라, 라고 한다. 명예와 영광의 자리를 소원해라. 연습해라. 책임져라.

이것이 구원이다. 죄와 사망을 치워놓으신다는 것은, 너희는 포기될 수 없어, 라고 선언하시는 것이다.

잘못하면 안 돼, 라고 하시지 않는다.
나는 너희를 위해 내 아들까지 죽여서 사망을 멸했어. (히 2:14)

주께서 사망으로 사망을 멸하셨다. 너희가 나를 도망해서 사망까지 갔지만 내가 그것을 없앴으니 너희는 더이상 도망갈 곳이 없다. 너희는 죽어도 죽지 못한다. 천국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하나님께서 이루어 내실 목적을 종합한 단어이다. 그래서 고난에서 도망가는 자리가 천국이라고 이해한다면 현실을 사는 신앙인의 자세가 아니다.

그 완성의 자리에 우리는 완성이 되어야 들어갈 것이다. 우리의 조건과 자격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처럼 우리를 만드시겠다는 것이다. (엡 4:13)

(2) 우리는 회개에 우리의 전 평생을 쓰는 것 같다. 그래서 기도가 회개 기도에 그친다. 그러지 말라. 아버지 제가 이번에는 70점 받았는데 다음에는 꼭 80점 받겠습니다. 앞으로 나아가는 기도와 소원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약속과 부름 앞에 우리가 서 있는 줄을 알아야 이런 기도가 나올 수 있다. 다 같이 통성기도하고 한번 시원해지고 지나가는 것은 안 된다. 이러면 다음 단계를 준비할 수 없다. 목욕탕에 가서 때를 밀고 나온 것 같다.

(고전 15:55~58) 여기서 주의 일에 힘쓰라는 것은, 우리가 자라나가야 한다는 뜻이다. 봉사도 전도도 아니다. 부모는 자식에게 훌륭해지기를 바란다. 인간이 인간다워지기를 바란다. 하나님도 그렇게 원하신다.

하나님께서 육신으로 이 땅에 오셨다. 성육신이다. 이것이야말로 신의 목적이 무엇이며 신의 진정성이 어디에 있는가를 알려준다.

우리는 육신을 벗고 추상적인 초월의 세계에 가고 싶어 하지만 천국은 이미 이 땅에 임했다. 하나님이 인류와 화해하시고 천국을 시작하셨기 때문이다.

(요일 4:10) 하나님의 사랑은 그 치열함, 처절함, 성의를 보고 눈물을 흘릴 일이 아니다. 내가 누구이기에 이런 사랑을 받고 있는가에 대해 경악할 정도로 놀라야 한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며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가? 그 요구를 이루기 위해 어떤 일까지 하실 수 있는 분인가? 모든 구원은 태초부터 하나님의 계획이 있었다. 그런데 왜 구원의 문제에서 예수를 언급해야 하는가? 왜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가?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의 구체성, 진정성, 영원성이, 예수를 보내신 하나님의 계획과 뜻에 담겨 있기때문에 우리는 예수를 믿는다고 한다.

아버지는 멀리 계시고 예수는 가까이 계셔서 더 친밀하다, 는 식의 접근은 아니다.

우리는 신약 성경 다시 보기를 시작할 때 실존적 신앙관이 아닌 역사적 신앙관을 가져야 한다고 얘기했다. 누구든지 예수님이 있어야 신앙을 시작하니까 실존적 신앙관으로 시작하게 된다.

당신은 구원받은 것을 확신하는가? 네.
당신은 오늘 죽어도 천국에 갈 것을 확신하는가? 네.

그러나 믿은 후에 우리는 시간, 공간, 현실, 경우에 있어서 확신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자리에 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게 뭐야? 하나님은 뭘 하고 계셔?

우리가 있는 이 자리가 바로 하나님이 온 우주를 다스리고 계시고 창조의 목적을 향하여 일하고 계신 자리인 것이다.

이걸 알아야 내 자리를 알고, 내 역할을 알게 된다. 그래서 우주가 나를 위해 있고 내가 우주를 위해 있다는, 하나님의 기이한 창조와 부활의 역사가 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

(엡 1:6) 상함도 없고, 해함도 없고, 찬송만 있고 모든 길이 황금길이지 않다. 이런 비유는 목적지를 가르치기 위한 것이다. 우리가 실제로 만들어나가야 하는 삶은 황금길만 있는 것이 아니다.

(엡 4:24) 새 사람 새 생명, 헌사람 사망. 이 대조는 도덕적으로 더러웠던 자리에서 깨끗해졌다는 것이 아니다. 나아가고 자라나는, 영광되고 실력이 쌓이는 하나님 자녀로 굳게 서라는 것이다.

다. 결어

(1) 하나님은 왜 이런 일을 하시는가?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저 사람의 마음만 얻을 수 있다면 지금 죽어도 좋아. 나는 너의 사랑을 얻을 수 있다면 죽어도 좋아. 신이 우리에게 너 내 말 안 들으면 죽여버릴거야, 라고 하지 않는다. 그에게 애걸복걸하고 무엇인가를 바쳐야 떡 한 조각이라도 얻을 수 있는 신도 아니다.

그 신은 나를 자식으로 삼으셨다. 태어나면 책임이 끝나지 않는다. 길러야 하고, 가르쳐야 하고, 속을 채워야 한다. 하나님은 긴 시간 동안 우리에게 힘을 다하시고 기회를 주시고 붙잡으시고 격려하신다.

(엡 1:23) 예수님은 우리가 없이는 혼자서 충만하시지 않겠다고 하신다.

(엡 3:14~21) 하나님은 우리에게 약속만 하시고 손을 놓고 계시지 않는다. 늘 얘기하시고 설득하시고 일하신다. 모세가 물었다. 그동안 뭐하고 계시다가 이제야 나타나셨습니까? 제 나이 80입니다. 뭘 하자고 오신 것입니까?

나는 하나님이기를 한순간도 멈추지 않는 자니라.

그러니 여러분의 인생 속에서 이만하면 됐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은 죄다. 여러분 자식이 여러분에게 난 대학은 안 갈래요, 그 돈으로 부모님 여행 다녀오세요, 라고 하는 것과 같다.

너 잘되는 것만 보면 난 아무래도 좋다.

부모에게는 모든 것을 희생하고 줄 수 있다는 자식이 있다는 것이 행복이다. 이건 고난이 아니다. 명예이다. 자식이 잘되는 것이 인생 최고의 복이다.

하나님의 마음이다. 오죽하면 아들을 보내시겠는가? 이것이 기독교다. 이런 기독교를 도덕법으로 나누면 안 된다. 너는 지옥 가, 나는 천당 갈 거야. 그 가운데가 비워진다. 어떻게 채우는가?

(2) 표정을 좋게 하라. 웃어야 한다. 현실이 힘들어서 웃기가 힘들

다는 것을 알지만 웃어야 한다.

신앙생활에서 제일 큰 병이 체념이다. 모르겠어, 그냥 사는 거지. 이건 안 된다. 어제와는 다른 오늘을 살아야 한다.

누구와 대화할 때 정답을 말하려고 하지 말라. 그냥 얘기를 들어라. 상대방의 경우와 정황을 공감해 주라. 그게 성육신이다. 우리의 자리에 오신 것이다. 들을 것도 없어. 너 빨리 기도원에 가. 이런 설교를 하지 말라.
이때의 설교란 정황은 듣지 않고 결론을 먼저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설교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의 경우에 하소연에 따라 들어오시고 같이 가자고 하신다. 그리고 놓지 않으신다.

생명과 은혜가 사망과 죄를 이겨 우리가 왕 노릇 할 수 있는 세상으로 우리를 붙잡아 오신다. 이것이 구원 아닌가?

여러분은 위대해질 수 있다. 인간이란 이런 거야, 라는 말을 들어야 한다. 삶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히 12:8~9) 너희가 꾸지람들을 일이 전혀 없다면 너희는 버려진 자식일 뿐이다.

두 번 다시 하나님 앞에 오지 않게 해주세요, 이번에 다 이루어 주세요. 이 기도야말로 여러분에게 침체의 길을 가게 한다.

지금 여러분의 자리에서 시작하라. 언젠가 우리가 다 만나서 간증이 넘치는 복이 있기를 바란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지금 일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살아있고 우리가 주 앞에서 묻고 있듯이 하나님은 우리를 붙잡고 놓지 않으시며 약속을 상기시키시고 한 걸음 더 가자고 하십니다. 그 하루를 살아내게 하옵소서. 이해가 되지 않고 마땅하지 않고 만족스럽지 않지만, 인간의 소원과 상상력으로는 우리의 영혼을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상상력으로는 우리의 영혼을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그 영광과 자랑스러운 자리를 사모하게 하시고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믿음을 허락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