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성경 다시 보기(8) (히 5:7~10)

2023. 4. 30. (일)
박 영 선 목사

1. 내용

가. 서론

(1) 우리는 기독교 신앙을 말할 때 대표적으로 예수를 믿는다, 고 고백한다. 예수를 믿는다는 말 속에는 죄 많은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우리 대신 피 흘려 죽으사 우리를 천국에 가게 하셨다, 는 내용이 있다.

이것은 복음주의적 신앙관이며 신앙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고백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한 사람의 인생에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스스로 확인할 때에도, 나는 예수를 믿어 천국에 가는 것을 믿습니다, 라고 한다. 또 오늘 죽어도 눈을 뜨면 천국일 것으로 확신한다고 한다.

이런 고백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이 고백들이 다음으로 나아 가는 것을 막고 있지는 않는지, 생각해 보는 것이 신약성경 다시 보기를 설교하는 이유이다.

(2)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고 우리의 운명이 하나님의 성실하심 속에서 흔들리지 않고 포기되지 않는다, 는 것을 우리는 믿는다.
그런 믿음으로 아직 천국에 불려가지 않았을 때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것을 설명하려면 구원론적이고 복음주의적인 가치가 근거가 되어 현실 생활에서 발휘되어야 하지만 한국 교회의 설명은 아직 부족한 것 같다.

우리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전도가 대부분이었다. 전도는 적극적으로뿐만 아니라 부정적으로도 했었다.

너는 예수 안 믿어서 지옥에 가.
나는 예수 믿어서 천국에 갈 거야.

이렇게 이분법이 되면 자신의 신앙을 확인하는 것이 남을 정죄하고 비난하는 방법밖에는 남지 않는다. 그러면 적극적인 신앙생활이 어려워진다.

나. 본론

(1) 오늘 본문처럼 그가 아들이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 온전하게 되었다, 라고 성경은 기록한다.

그렇다면 그전에는 무엇이 부족했다는 것인가?
또 온전하게 되었다면 무엇이 온전해졌다는 것인가?

이런 문제들은 좀 더 설명되어야 한다.

예수님 겟세마네 기도이다.

아버지여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비켜주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우리는 순종을 우리의 정욕과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에 내가 나를 바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순종은 더 나가야 한다. 내 뜻을 버린 것까지가 아니라, 예수께서 십자가를 진 것같이 말이 안 되는 길을 가야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왜 이 길을 가셨는가? 우리의 죄를 씻기 위해서이다. 구원론적으로 정확한 답이다. 그러나 초월자가 왜 육신으로 오셔서 우리의 손에 죽는 자리까지 들어가시는가? 에 대해서는 좀 더 심각한 질문과 놀라움이 있어야 한다.

우리가 초월을 생각할 때. 자연적인 것이나, 육체, 역사, 질서 등을 초월에 비해 열등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초월을 동원하면 부족분이 채워지고 부족분을 넘어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은 초월이 육체에 들어오고, 무한이 유한에 들어옴으로써 하나님의 영광과 뜻이 이루어지고 그가 만들고 사랑하고 목적한 인간들에 대해 찬송을 받으신다고 얘기한다.

우리는 계속 초월을 구하는데 하나님은 초월을 한계가 있는 육체에 집어넣겠다고 하신다. 이 말씀은 다만 육체를 그릇으로 본다는 것이 아니다. 이 초월이 우리의 이해, 정체성, 분별, 선택, 책임에 작용하도록 하겠다는 뜻이다.

우리가 우리의 일상을 한계 속에서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가 삶에 대해 불만이 있기 때문이다. 소원하는 대로 안 되고 이룰 능력이 없고 기대는 큰데 할 수는 없다.

그래서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게 되면 초월이 그러한 부족한 부분을 메꾸어 줄 것으로 기대한다. 그러나 성경은 그 반대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예수님이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땅에 오셔서 그 뜻을 이루시는 것 같이, 그 뜻을 부족한 세상의 형식으로 이루시는 것 같이, 예수님은 세상의 역사와 운명을 우리에게 맡기셨다.

땅끝까지 가라.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함께하리라.

이렇게 시간과 공간 속으로 들어오신다. 부족하고 미흡한 육체에 초월을 담으신다.

하나님은 자신이 하나님 되심을 누구에게 증명하시는가? 그가 창조하신 인류가 그 대상이고 그들에게 증명하신다.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셨다. 그리고 인간을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으로 만들겠다, 고 하신다. 이 일을 위해 인간의 육신에 자신을 담으신 것이다.

인간에게 담기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성품을 우리에게 담으신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순종이다.

성경적 논리로 볼 때, 종교가 성립하려면, 믿는 신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하고 그 신이 우리에게 무엇을 약속하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은 자신을 설명하기 위해 역사를 허락하셨고 구약의 역사도 같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이 목적하신 바를 이루시기 위해 자신을 설명하신다.

크게 보면 이것은 사랑이다. 우리의 질문은 이어진다. 사랑하는데 왜 고단하게 하십니까? 왜 우리 신앙에 고난이 있습니까?

(2) 고난은 하나님이 우리를 기르기 위해, 어린아이로 놔두지 않고 가르치고 키우기 위해, 베푸신 과정이다.

우리는 이만하면 됐습니다, 라고 하고 하나님은 안 된다, 고 하신다.

어린아이가 다섯 살 까지만 크고 안 큰다면 큰일이다. 어떤 병보다도 무섭다. 애는 자라서 성인이 되어야 한다.

어린아이 때는 단순하고 순진하다. 신앙의 다섯 살도 이와 같다. 잘못이라는 것이 아니다. 커야 할 것 아닌가?

아이도 커지면 거짓말을 하게 된다. 부모가 요구하는 것에 대해 자신이 다 해낼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숙제 다 했어? 이번 시험은 몇 점 받았어?

이 질문에 사실대로 대답하면 손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거짓말을 하게 된다. 이건 일주일이면 들통난다.

너 왜 거짓말했어? 몰라.

몰라가 있어야 한다. 더 하고 싶은데 안되는 것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거짓말에 대한 후회도 물론 생긴다.
또, 엄마는 왜 속사정을 몰라 줄까? 하는 원망도 생긴다. 이런 틈에서 아이는 성장한다.

사람은 뭐야?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해?
왜 나는 하고 싶은 게 안돼?

아이가 초등학교를 마치고 더 진학하지 않겠다고 하면 그걸 그냥 둘 부모는 없다.

네가 여기서 멈추면 어떻게 해? 생각이 있어야 하고 지혜가 있고 고급한 꿈을 가지는 성인이 되어야 할 것 아냐?

이게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고단하게 하시는 이유다. 이 고난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순종이다. 그래서 순종은 내 욕심을 버리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무엇을 하려고 하시는가, 를 아는 것이다.

부모도 같다. 너는 엄마가 하라고 하는 대로만 해. 학교가, 공부해, 숙제해, 학원에 가.

신자에게는 어떻게 나타나는가? 여러분의 현실이 바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학교이며 학원이며 전쟁터이다.

여기서 이기라고 하신다. 승부에서가 아니다. 인간이 소원하는 것과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에서 오는 한계를 보며, 그러나 거기서 비롯되는 갈구를 채울 수 있는 분은 하나님뿐이라는 것을 배워 간다.

여러분이 보란 듯이 여길만한 지위나 승부를 위해 여러분을 내몰면 안 된다. 사회적 성공이 인간의 보편적 목적이 아니다.

인간은 세상이 주는 것으로는 채울 수 없다는 것을 우리가 처해진 자리에서 배우게 된다. 이것이 순종이다.

순종은 하나님께서 그 자식들에게 채워주시고자 하는 것을 배워나가는 것이다. 이것은 일반종교에서 신들이 폭력으로 강요하는 것과는 얼마나 다른가?

하나님은 우리와 관계를 갖기를 원하시며 목적을 가지고 계신다. 그래서 우리에게 순종을 요구하신다. 이것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우리는 잘못 생각한다. 열심히 봉사하고 기도해서 보상을 받기를 원하지 그것들이 나를 만들어 간다는 생각은 못 한다.

그래서 성도들이 봉사를 한 후 가장 불만을 터트리는 것이 보상이 없다는 불평이다.

열심히 봉사했는데 아무도 안 알아주더라. 이것이 가장 큰 시험거리다.

내가 손해를 보면서 일하는 것이 맞다는 것은 예수님을 보면 알 수 있다.

우리의 조건을 넉넉하게 바꾸지 않는다. 우리가 낙심하고 불만인 우리의 조건에 채우신다. 예수님 자신도 하나님과 동등 된 분이시나 하나님의 조건을 바라지 않으셨다.
다. 결어

(1) (요 17:21)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보내신 것과 그처럼 저들도 사랑하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는 이유는 아들이 아버지가 누구신가를 구체적으로 드러냈기 때문이다. 아들은 우리가 보고 만질 수 있는 방식으로 이 일을 하셨다. 신이 받을 수 없는 모욕과 고통 속에 자신을 두셨고 통과하셨다.

우리가 알고 있는 신과는 얼마나 다른가? 이것을 알아야 하는 것이 인간이다.

당신 오늘 죽으면 천국에 갈 수 있어? 여기서부터 출발을 하라. 그러나 출발이 위와 같은 곳까지 오지 않고 시작에 머물러 있으면 밤낮 돌아다니면서 남을 비난하게 된다.

주께서 이렇게 힘든 길을 가셨어. 이것은 윤리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고 하나님은 나에게 이것을 요구하시는데, 살아 보니까 이 세상이 요구했던 경쟁, 생존, 승부 같은 것들이 만드는 인간은 제대로 된 인간이 아니다.

나이가 들면서 누구나 알게 된다. 여기에 항복이 있고 안목과 경지가 있다. 이것을 갖추는 것이 기독교 신앙이다.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저주하지 말라. 도리어 축복하라. 왜 그런가?

우리는 그를 이겨야 할 필요가 없다. 그와 싸우지도 않는다. 예수님도 받으신 조롱과 수치를 그대로 감수하셨다. 지라는 것이 아니다. 그 싸움을 통해서는 목적을 이룰 수 없다.

위대하게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 기독교인으로서 사는 길이다. 그러니 이 길에서 구체적 삶을 살아 보라. 얼마나 귀한 기회인지를 알라.

(2) (마 6:31~33)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하늘나라는 폭력적으로 구하는 것이 아니다. 초월이 내려와 악당들을 없애고 그 후에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보이는 것도 아니다.

아버지의 뜻이 무엇이며 우리가 믿는 아버지가 어떤 분이신지, 그가 아들까지 보내 주신 신자들은 어떤 사람들인지 알아내고 증언하라고 하신다.

그래서 우리는 주일날 모이고 신앙을 고백하고 찬송하고 예배드린다. 여러분의 일주일 생활 속에서 매일 마주치는 사람과 특별할 것 없는 일상 속에서 여러분은 다른 존재로서 있는 것이다.

특별한 일로 여러분의 정체성이 드러나지 않는다. 모두가 절망밖에는 남는 것이 없는 인생 속에서, 어떻게 이 삶은 소망 속에 있는가? 어떻게 이 사람은 세상의 것으로 자기를 채우지 않고 인간 다운가? 를 보여야 한다.

그래서 인간은 저래야 해, 라는 소리가 있어야 한다.

여러분의 책임 정도가 아니다. 여러분의 명예이며 이것이 구원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자의 고백이 현실화되는 것이다.

이런 명예와 특권이 여러분의 삶을 찬송으로 채우기 바란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매일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 속에 현실을 살고 있습니다. 십자가를 가리켜 하나님의 지혜요 권능이라고 하신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이 정해주신 길을 갑니다. 도전과 위협과 의심과 두려움이 우리를 협박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것들에게는 답이 없습니다.

우리가 진리와 생명에 속한 것을 시기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것들이 우리를 약화시키지 않고 우리를 담대하게 하며 극복하게 하며 더 위대하게 할 수 있음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된 빛과 진리와 생명이 있는 인생을 사는 감사와 찬송이 있게 하옵소서.

이것이 우리 모든 교우의 평상생활에 모든 관계에 모든 실존에 넘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