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성경 다시 보기(7) (롬8:14~17)

2023. 4. 16.(일)
박 영 선 목사

1. 내용

가. 서론

(1) 종교가 성립하려면 신이 존재해야 하고 그 신을 섬기는, 추앙하고 경배하는 신자가 있어야 한다.

신은 자기가 누구인지 어떤 신인지 밝혀야 하고, 신자들은 그 신에게 무슨 책임을 지며, 무슨 보상을 받는지 알아야 한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공포의 하나님이 아니며, 전지전능하시되 그것을 앞세우지 않고 사랑을 앞세우신다.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고 자신을 선포하신다.

(2) 오늘 본문에도 있는 것처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는 우리가 믿는 신을 아버지라고 부른다. 이것이 다른 모든 종교와 비교할 수 없는 기독교의 특징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과 형상을 물려받은, 아버지라고 불리기를 기뻐하는 아버지를 둔, 그의 자녀들이다.

나. 본론

(1) 인간의 존재론을 언급할 때, 세상에서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라고 존재의 근거를 갖는다면, 예수를 믿는 사람들 에게는 나는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녀다, 가 근거가 된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를 기뻐하시며, 우리에게 찬송받으시며,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이 되기를 기뻐하신다.

그런데 왜 고단한가?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혈육같이 부르시고 묶으시고, 약속하시고 모든 것을 주려고 하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종이 아니고 자녀이다. 그래서 유산을 물려받을 후손이다. 다만 재산을 받는다, 가 아니라, 부모는 자식에게 모든 것을 줄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못할 것이 없다, 고 선언하는 것이며, 내가 네게 줄 수 있는 가장 귀한 것들을 다 줄 터이니, 너희는 받고 배워라, 라고 하시는 것이다.

세상에서도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놀라워서 이런 비유가 가능하다.

당신은 매우 훌륭한데 자식은 왜 그만 못한가?
이렇게 말하면 평생 원수가 된다.

부모는 자식이 부모보다 더 낫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당신 자녀들은 참 놀랍다. 어떻게 그런 귀한 자식을 낳았어? 이렇게 말하면 평생 동안 절친이 된다.

부모는 자식에게 줄 수 있는 것을 다 주며 심지어는 희생을 당해도 자식에게는 양보한다.

그러나 이런 부모도 자식이 커나가는 동안에는 서로 원수처럼 여겨질 때가 있다.

공부해라. 학교에 가라. 잔소리를 하기 때문이다. 자식들은 당연히 부모를 싫어한다. 받는 혜택보다 당하는 고통이 더 엄하기 때문이다.

부모는 왜 그럴까? 자식이 훌륭해지라는 거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들볶는 이유는 딱 하나이다. 너는 짐승이 아니다. 너는 종이 아니다. 너는 나와 상관없는 존재가 아니다. 내가 모든 성실함과 열심과 온 힘을 기울여 너를 만들었으며 그 결과를 보려고 하는 아버지이다.

그러니 너는 쉽게 갈 수 없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사랑은 대강할 수가 없다. 사랑은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만족하지 못한다. 할 수 있는 데까지 했다면 더 하겠다고 덤비는 것이 사랑이다.

(엡5:31~32) 결혼은 부모를 떠나서 남남이 만나는 것인데 이 결합은 교회와 그리스도가 연합된 것과 같다.
(엡1:23) 부모가 자식에게 해준 것보다 하나 더 간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모든 것을 상속받고 하나님보다 더 위대해지기를 바라신다. 분명한 모순이지만 사랑은 이 모순적인 표현을 사용할 수 있다.

(2) 우리는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분의 충만이다. 이 충만으로 가는 길을 부부로 묶으셨다. 그래서 상대방을 위해서는 죽어도 좋다 하는 데까지 묶으셨다.

그러나 자식이 크면서 부모를 이해하지 못하듯이, 부부도 살면서, 내가 왜 이 사람을 택했을까, 하는 과정을 거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랑으로는 답이 나오지 않는 현실을 만나기 때문이다.

우리가 연애를 할 때는 최선의 준비와, 최선의 조건 속에서 만난다. 돈이 준비되고 커피와 맛있는 음식을 사줄 수 있고 제일 좋은 옷을 입고 만난다.

그러나 생활을 하다 보면 하이힐 한번 신을 틈이 없는 현실을 만난다. 남편은 나를 왜 이렇게 살게 할까?

한편 남편은 직장에 나가서 모든 고초를 견디면서 버티고 있다. 나 하나 사는 거면 아무 데서나 자고 먹어도 되지만, 아내 때문에 그럴 수 없다. 싸우기도 한다. 이것은 상대에 대한 불만이 아니다. 현실을 견디어 낼 수 없는 우리의 취약함이다. 상대방을 사랑해서 걸었던 기대에 대한 절망과 후회가 분노의 말을 쏟아내게 한다.

다행인 것은 그 정도에서 헤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헤어지는 것이 더 괴로우니까 그냥 견딘다. 사는 게 사는 게 아닌 현실이지만 어느 틈에 환갑이 넘고 일흔이 된다. 불만은 남아 있지만 험한 소리는 안 하기로 한다. 험한 소리를 하면 내가 손해라는 걸 알게 된다. 어차피 내가 빌어야 끝날 싸움 아닌가? 내가 참자.

아니 뭐라구?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봐.

당신은 아직 기운이 남아 있어서 참 좋다구.

부모가 찾아와서 놀란다. 너는 지금까지 누구에게 진 적도 없고, 양보한 적도 없는데, 마누라한테는 잘하더라.

우리는 최고의 경지, 최고의 보상을 기대하지만, 나이가 들면 그것을 넘어선다. 인간이 해낼 수 없는 지경에 간다. 세상에서 인간만이 이룰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3) 하나님은 아담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셨다. 이 세상을 다스려라. 다만 이 열매만은 먹지 말라. 아담은 하지 말라는 것을 한다. 그러자 하나님은 한 걸음 더 나오신다.

사망밖에 남지 않은 세상에 아브라함을 두시고 그를 복의 근원으로 삼으신다. (창12:2~3)

너 이거 먹으면 죽는다. 먹었다. 죽어라. 아담이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겠다. 아브라함이다.

같은 인간을 놓고 하나님은 한 걸음 더 나아 가신다.

우리를 창조하신 것 때문에 하나님은 당신이 하시는 최선을 넘어 서신다.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이렇게까지 나아가신다.

이스라엘 민족은 애굽에서 종노릇 하게 되는데 하나님은 모세를 세우셔서 그들을 끌고 나오신다. 그들이 말을 안 듣자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이 백성 다 죽이고 내가 새로운 민족을 만들겠다.

모세가 말한다. 하나님, 저는 하나님이 누구신지 압니다. 죽이긴 누굴 죽이시겠어요. 여기까지 끌고 나오시지 않았습니까? 참으세요.

그래. 네 말이 맞다. 더 가자.

하나님이 변하신다. 모세를 세우고 사무엘을 세우고 엘리야를 세우고, 이사야를 세우고 하박국을 세우고 이스라엘 민족을 이끄셨다. 하나님은 더 나아 가신다. 하나님은 당신께서 이제까지 베푸셨던 최선을 스스로 넘어서신다.

그들의 변덕, 반역, 실패를 넘어서신다.

다. 결어

(1) 새 언약을 너희에게 주노라. 이번 언약은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꺼낼 때 했던 언약과 다르다. 그때는 내가 너희의 남편이 되었어도 너희가 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래서 이제는 내 아들을 보낸다. 내가 가졌던 원래의 목적을 이루겠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름이 갖는 영광에 이르게 하겠다.
사랑은 놀라운 것이다. 사랑은 환상이 아니다.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다. 모든 것을 믿고 바라고 견딘다.

믿음, 소망, 사랑은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우리가 천국에 가면 믿음도 소망도 필요가 없다. 이미 실현되었다. 그러나 사랑은 남아 있을 것이다.

사랑은 더 하기 때문이다. 만족이 없다. 우리의 최선을 끌어내며 우리가 할 수 없었던 일을 할 수 있는 경지까지 사랑은 이끌고 간다.

여러분이 처음 부부가 되었을 때 가졌던 정열, 진심, 기대에서 벗어났는가? 길을 잘못 가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범위와 한계와 실력에서 넘어섰는가를 보라. 지금 할 수 있는 최고의 자리, 그것은 감수이다. 손해를 억울함을 못마땅한 것을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 감수란 다만 견디는 것이 아니다. 그 지경에서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뜻한 눈을 가질 수 있으며 축복할 수 있으며 자기 자리에 맞지 않아 몸부림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다.

이 세상은 정치와 경제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기다리심으로 돌아간다. 다 망할 것 같지만 하나님은 승리를 준비하고 계신다는 것을 소망을 가지고 바라보아야 한다.

(2) (엡4:13) 우리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 것,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가지시는 궁극적인 목표이다. 어디서 그 열매를 확인할 수 있는가?

교회이다. 교회와 그리스도의 연합 안에서 확인되어야 한다.

여러분의 가정, 사회, 국가 안에서 우리는 어떤 약속과 운명을 가지고 있는가? 우리의 존재를 알며 우리의 책임을 다하고 있는가?

그래서 은혜는 공짜라는 개념이 첫 번째 특징이어서는 안된다. 은혜란 하나님의 고집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이루시고야 말겠다는 고집이다. 우리를 불러서 하나님 좋게 하자고 사랑을 논하시는 게 아니다. 우리로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심으로 기쁨으로 우리와 마주하시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이다. 이 명예와 영광을 누리는 여러분의 신앙 현실이 되기를 바란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주의 사랑을 받은 자들이 모여 주를 찬송하며, 감사하며 예배합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 속에서 이 사랑을 주고받는 우리의 역할을 믿음으로 지켜내게 하옵소서. 그 자랑과 그 영광을 나와 나를 만나는 모든 사람 앞에서 하나님의 영광으로 드러내는 충성과 승리가 풍성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