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성경 다시 보기(6) (요일 4:16~21)

2023. 4. 2. (일)
박 영 선 목사

1. 내용

가. 서론

(1) 오늘 볼 본문에 의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사랑의 중요한 특징은 공포가 들어올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랑은 권력보다 크고, 능력보다 크고, 그 어떤 가치보다 큰데, 거기에는 공포가 없는, 아름다움과 영광이 있다.

우리가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셨음을 믿는다, 라고 할 때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긍휼과 진정성을 본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진지한 행동을 펴시는 것도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사랑이라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이해이다.

모든 종교는 신자들이 믿는 신에 대한 정체성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신들은 권력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권력으로 신자들을 강요하며 굴복시키며, 신자들이 빌 때 소원을 들어줄지라도 그 대가를 요구하는 폭력적인 신이다. 하나님은 다르다. 우리가 하나님을 전지전능하신 분으로 부르기 때문에 하나님을 최고의 권력자로 생각할 수 있지만,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하나님이 무엇을 주실 때에는 사랑하기 때문에 주시지, 권력을 동원하여 신자들을 두렵게 굴복시키는 방법을 쓰지 않는다.

우리 하나님은 설명하시는 자신을 납득시키는 신이다. 구약성경 내내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자신이 어떤 하나님인가를 설명하셨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호칭에 잘 드러나 있다. 오래 참으시며 선하신 목적을 밝히시며 그 일을 성실히 이루시고 우리를 자비로 대하셔서 우리에게 하나님을 설명하셨다.

나. 본론

(1) 하나님은 신자들에게 무엇을 목적하시는가? 하나님을 믿는 신자들은 이 하나님에게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가?

대부분은 섣부르게 안심과 형통을 요구한다. 안심과 형통의 요구는 다른 신들에게도 공통된 부분이다. 그래서 다른 신들은 신자들에게 주문을 외우게 하고 그래야 결과가 나타난다고 한다.

혹, 대화가 있고 설득이 있을지라도 그것을 응답하는 신은 대단히 폭력적으로 요구사항을 듣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요구하는 것에 대한 응답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지시는 창조와 사랑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하여 우리가 빌 바를 알지 못하는 것을 주시려고 한다.

하나님이 이삭을 주었다든가, 솔로몬에게 지혜를 주었다든가, 하는 여러 축복 들이 빌거나 성실히 행해서 받은 축복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성경은 이것들이 하나님이 주시기를 원하는 것들이라고 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 것은, 사랑이라는 개념은, 다른 어떤 개념과도 다르다. 경쟁적이거나, 승부에 관한 것이거나 비교적 차원의 이야기가 아니다.

적이 없다. 비교하여 우위가 성립되지 않는다. 홀로 충분한 내용이다. 사랑은 사랑을 함으로써 만족한다. 사랑은 받음으로써 만족하며, 그 만족은 비교하여 승부로 얻어진 결과가 아니라 그 자체로 영광되고 명예롭고 아름다움을 갖는다.

성경이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라고 하고 예수님께서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라고 하실 때 우리에게는 어떤 행위를 해야 하는 윤리가 된다. 그래서 사랑을 해야겠다, 가 된다.

열심히 봉사해야지, 열심히 살아가야지, 열심히 기도해야지, 라는 것처럼 열심히 사랑해야겠다고 생각한다.

성경은 말한다. 사랑은 사랑으로 밖에는 만족할 다른 것이 없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을 요구하시지 겁을 주려고 하지 않으신다. 공포와 권력으로 하나님의 지위를 펼치려고 하지 않는다. 우리의 반응이 겁을 먹어서 나타나게 하시지도 않는다. 오직 사랑으로만 응답하신다.

사랑은 신이 누구이고 그 신에게 무엇을 기대할 수 있으며 그 신은 신자인 나에게 무엇을 목적하시는가? 를 알게 한다.

기독교의 답은 존재론적으로 사랑을 요구한다. 사랑의 존재가 되어야 한다. 사랑은 이해관계로 사용되지 않으며, 권력이 되거나 강요가 될 수 없다.

사랑은 만족을 불러내며 기쁨을 불러내며 언제나 충만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누구시며, 나는 누구인가? 나와 하나님은 사랑의 관계로 엮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신자가 현실 속에서 살아갈 때 신자의 인생이 세상 질서인 사망과 거짓됨 속에서 몸부림쳐야 하는데, 사랑을 어떻게 유지할 수 있으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어떻게 유지할 수 있는가?

이런 질문이 아니면, 권력, 보상, 폭력에 집중하는 신앙이 되고, 존재론적으로도 하위로 처진다.

신자들에게는 ‘주십시오’가 너무나 당연시되어있다. 모든 주십시오, 는 안심과 형통을 위한 것이지 존재론적 가치에 대한 것은 없다.

(2) (요 17:18~22) 굉장한 기도이다.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신 것 같이 저도 저들을 보냅니다.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들도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어디로 보냄을 받는가? 현실로 보냄을 받는다. 우리가 그토록 필요한 것이 많은 이 세상, 어디에나 폭력이 있고 어디에나 거짓이 있는 그리고 절망밖에 없어 눈물과 비참함이 전부인 이 세상에 보내신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보내신 것 같이 보내신다.

아버지는 우리에게 사랑을 요구하고 있는데 우리를 죄와 사망이 가득한 곳에 보낸다.

예수님도 사랑으로 오신다. 그리고 이 세상 질서와 권력에 자신을 희생제물로 내놓으신다. 십자가에서 죽는다. 여기서 부활과 새로운 세상이 일어난다.

세상이 가지고 있는 권력, 사망, 절망이 끝이 아니라고 하시며 그것들을 뒤집어 놓으신다. 사랑이란 사망으로도 중단시킬 수 없다. 거짓으로도 막을 수 없다.

예수님은 사랑으로 세상의 모든 도전을 받아들이셨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지 않으면 가만히 있고 썩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땅은 씨를 삼켰는데 예수님은 씨를 심었다고 하는 것이 십자가 사건이다. 죽었는데 살아났다고 하는 정도가 아니라, 죽음이 그의 사랑과 영생을 막을 수 없었다.

우리의 현실에는 사망과 거짓됨의 도전이 있고, 예수님의 승리는 우리가 그것을 피해가게 하지 않고, 우리가 받아낼 수 있게 한다. 놀라운 일이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가 내 안에 있는 것 같이 우리를 초대한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든 우리는 하나님이 직접 사랑하시는 대상이다.
우리가 사랑을 열매 맺고 충만히 만들기를 원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는 것이다.

사랑은 사망을 이기며 죄를 이긴다. 그리고 세상의 승부에서 이기게 하신다. 승패가 아니다. 승부의 본질에서 이기게 하신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것은 죽음으로도 이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막을 수 없다. 내가 그 증인이다. 역사를 새로 쓰신다. 예수님의 부활이야말로 우리가 우리의 인생에서 승리를 확신할 수 있는 가장 큰 약속이다.

아버지의 깊으신 뜻이 아들에게 공감이 되는 이 순종은 사망으로 끊긴 것처럼 보였던 우리와 하나님을 묶는 은혜의 결과를 낳았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사랑이 실패할 수 없음을 보인 것 같이 우리도 우리의 생애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

사랑이란 대단히 모호하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저주하지 말고 축복하라.

우리는 이렇게 생각한다. 선을 더하여 악이 행한 것 보다, 훨씬 크게 되어 악을 항복시키려고 한다.

악한 자가 악한 짓을 하는 것 같이 너는 신자로서 신자의 역할을 해라. 이 악을 고치려 하거나 항복시키려 하지 말고, 그가 하는 악을 인하여 네 자리를 떠나지 말고 네 자리를 지켜라. 그다음에 일어나는 일을 내게 맡겨라.

큰소리를 칠 필요가 없다. 조심조심 자리를 지켜라.
그가 주리거든 먹이고 그가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악당이 악역을 하게 놔두어라. 너는 선한 역할을 해라.

이것이 빚어져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만들고자 하는 목표가 이루어진다.

메살라가 있어야 벤허는 성립한다. 메살라가 오랫동안 죽을 때까지 있어야 스토리가 흔들리지 않는다. 메살라는 전차 경기에서 죽는다. 복수는 했는데 답은 없다. 벤허의 부인이 말한다. 당신이 메살라 같아요. 벤허는 예수를 만나고 답을 찾는다.

그분의 말이 내 가슴속에 있던 칼을 내려놓게 했어.

우리의 인생에서도 일어난다. 극적이고 힘에 지나는 일을 여러분에게 당하라고 하지 않는다. 그저 자기 자리를 지키는 것이다. 사랑이다. 권력이 아니다. 명분도 아니다.

(3) (마 28:18~20) 전 인류를 향한 명령이다. 우리도 그런 보냄을 받았다. 지리적으로도 멀리 가는 것이 땅끝이 아니다. 우리가 있는 곳이 땅끝이고 바로 모든 족속 중 하나가 있는 곳이다.

시작된 예루살렘에서 보면 우리는 극동이다. 내가 소속되어 있는 곳에서 보면 내 사회와 내 집안은 이방 나라이다. 그 끝에 내가 있고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

하나님은 나를 존재론적 차원의 사랑으로 만들려고 하신다. 그러니 모든 것을 겪는 수밖에 없다. 쉽게 해결하는 폭력을 원하기도 하고 외면하기도 하고 타협하기도 하고 도망가기도 하는 현실 속에서 하나씩 겪는다. 무엇을 겪는가?
그게 가치가 있느냐? 부끄럽지는 않느냐?

신앙은 도덕적으로 판정을 하는 게 아니라 가치로 판정하는 것이다. 우리가 믿는 신이 자신의 가치를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은, 어떤 세상의 가치를 가져다 댄다 해도 그 앞에서는 부끄러워진다.

그 신이 자신을 사랑이라고 소개하는 것에, 우리는 놀라야 한다. 그 신이 우리에게 사랑을 요구한다는 것은, 그 신이 얼마나 우리를 대접하는 것인가?

우리의 신분과 지위에 대해 우리는 기절할 만큼 놀라야 한다. 처음부터 이 자리에 올 수는 없다.

처음에 하나님은 여러분의 요구를 들으신다. 또는 안 들어주시기도 하면서 여러분을 키운다. 나이가 들면 가치가 변한다. 죽음이 임박하면 드디어 죽음을 이기게 된다. 죽는다는 것을 수용하면 진작에 멋있게 좀 살아보면 좋았을걸. 이런 후회가 남는다.

그때 그렇게 치사하지 말았을걸. 과거에 대한 후회가 일어나지만, 단순히 잘못했다는 후회가 아니라, 참 철이 없었다, 더 멋있을 수 있었는데. 이런 후회가 든다.

그것이 늙은, 이 자리에서 후회로 끝나지 않고 마지막을 멋있게 살아야 한다.

다. 결어

(1) 우리는 ‘주시옵소서’가 전부이다.

이 나라 대통령이 정치를 잘하게 해주시옵고, 우크라이나 전쟁이 빨리 끝나게 해주시옵고.

이것은 치사한 기도이다. 모든 책임을 다 남에게 넘기고 나는 할 게 없다. 하나님 아시겠지요? 저 불편하게 하지 마세요.

우리는 이 기도를 너무 열심히 무식하게 해왔다.

기도란 무엇인가?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을 목적하고 있으며 어떤 대우를 하고 있는지를 깨달아 기도 제목을 정해야 한다.

(2) 하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신다. 이웃은 언제나 있다. 먼저는 집안 식구이다. 직장동료가 있다. 매일 만나는 동네 사람이 있다. 여기서 너는 다를 수 있는가? 모두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휩쓸려 다닐 때 너는 다를 수 있는가?

이것이 신자의 현실이고 이 현실은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시는 은혜이다. 오늘도 공부를 시키시고 키우시는 하나님이라고 감사해야 한다. 반성하고 자라나야 한다. 여러분의 기도가 변할 것이다.

여러분의 하루하루가 영적으로 살이 찌는 하루가 될 것이다.

【기도】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서 일하시며 우리는 매일 커야 마땅합니다. 사랑으로 믿음으로 그리고 기적과 영광으로 자라나는 것을 믿습니다. 이 인생을, 이 운명을 요구하시는 하나님께 늘 감사함으로 전심을 기울여 하나님이 허락한 영광에 참여하는 귀한 존재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