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성경 다시 보기(5) (빌2:5~11)

2023. 3. 19.(일)
박 영 선 목사

1. 내용

가. 서론

(1)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어떻게 아버지의 뜻을 따라 자기를 비우시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냈는가 하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에서 핵심이 되는 구절들이다. 이것은 모든 신자들에게 실존적 신앙의 핵심이 되는 내용으로 모두가 깊이 간직하고 있다.

그런데 실존적 신앙만 가지고 있으면 기독교 신앙의 동력이 감동에만 그친다. 그러나 역사적 신앙관에 의하면 이 모든 일들은 창세 전에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하신 일이다.

죄에서 구원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더 크게,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는, 하늘에 있는 모든 신령한 복을 주시려는 원대한 그림이 상상되어야 한다.

(2) 종교라는 것이 존재하려면 경배의 대상인 신이 있어야 하고 그 신을 숭배하고 그 앞에 충성하는 신자가 있어야 한다. 신의 정체성이 설명되어야 한다. 신의 정체가 없으면서도 신앙이 존재하는 가장 많은 종교의 형태가 무속신앙이다.

간절한 마음. 상대가 누구이든지 나의 이 처절한 현실을 도와다오. 그래서 열심을 내는 것이 전부이다.

또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해주는 신을 만들어 자기가 조작하고 자기의 필요를 채우는 우상도 있다. 구약에서는 우상이 바알, 아세라, 몰록 등이 나타났고 현대 사회에서는 돈이 우상이다, 라고 한다. 그러나 살펴보면 우상은 바알도 아니고 돈도 아니고 자기 자신이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 있다. 우선 만사형통 다음은 이기는 것이고 다음은 자존심을 세워달라는 것이다. 이것이 신에게 바라는 내용의 극치이다.

나. 본론

(1) 그러나 성경은 뜻밖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그 아들을 보내시는데 우리의 조롱을, 배신을, 폭력을 받으시고 마침내 우리 손에 죽으신다.

이 문제를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 얼마나 모진 고통 속에서 죽으셨는가, 하는 단순한 구원론적 입장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은 어떤 분 이길래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기 자식을 내어 주고 그 자식이 우리 손에 죽는 것을 허락하시는가, 에 가야 한다. 우리는 경악해야 마땅하다.

여러분이 납득하는가, 그렇지 못하는가는 두 번째 문제이다. 성경은 이 신은 과연 어떤 분인가에 대한 강력한 증거를 제시하고 있다. 하나님이 이토록 모든 것을 내어놓을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그러나 이것도 다음 순서이다.
신의 정체성에 대한 우리의 상상을 모두 깨어 버리는 하나님이라는 분이 있다는 말인가? 이렇게 시작을 해야 한다.

저는 시중에서 설교 잘하는 목사로 꽤 알려져 있다. 그런데 우리 교인들은 아무리 설교해도 변하지 않는다. 실존적 신앙관에서 역사적 신앙관으로, 범위와 방법과 개념과 결론이 원대함 속으로 들어 와야 한다.

이렇게 하면 무엇이 달라지는가? 내가 좋고, 싫고, 억울하고 분하고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신에게 기대하는 것과 다른 폭력과 악함이 있는 속에 우리를 넣어두시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래서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우리는 예수 안에서 거저 주시는바, 그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된다. 어떻게 그런 연결이 가능한가?

여러분은 평소 하나님을 잊고 산다. 그러다가 급한 일이 생기면 찾아온다. 평상시에는 밉보이지 않을 정도의 신앙생활로 때우며 산다. 기독교 신앙에서 제일 많은 오해와 실패는 이것이다.

하나님은 아들을 보내시고 아들은 순종하신다.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로 계신다. 하나이지만 독립되어 있고 그러나 긴밀한 연합은 너무나도 강하다. 그래서 하나이고 우리말의 하나님은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아들이 세상에 와서 당한 고난은 삼위의 하나님이 함께 당한 고난이다. 아들의 순종도 하나님이기에 할 수 있는 어떤 굉장한 일이다.

세상의 신은 권력과 폭력으로 우리를 굴복시킨다. 작은 보상은 해주는 대신 더 큰 희생을 요구한다. 이것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에 대한 개념이다. 그래서 우리는 신에 대해 좋은 생각이 없고 공포가 먼저 있다. 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벌을 받는다는 생각이 강하다.

하나님은 공포가 아니시다. 나는 너희의 부모요, 너희는 내 자식이다. 예수로 말미암아 너희는 내 자녀가 되었다. 부모의 매질은 폭력이거나 공포일 수 없다. 그건 사랑이다. 매질을 하는 이유는 자식이 더 커야 하기 때문이다.

그대로 안주하고 그 나이로 끝내자고 주저앉는 것을 일으키는 것이 매질이다.

하나님은 부모로서 우리를 일으키는 긴 과정을 허락하신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어도 하나님은 우리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으로 하시기 위해 의지를 가지고 그 과정을 이끄신다.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는 것은 하나님이 자비로운 분이라는 걸 나타내는 정도가 아니다. 그 대상에 대하여 완성을 목적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 목적을 이루시기까지 포기하지 않으신다.

그러니 잘했다, 잘못했다, 로 자신을 점검하지 말라. 명예와 수치로 자신을 점검해야 한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자며, 하나님이 기르시는 자이다. 나는 지금 전진하고 있는가, 주저앉고 있는가? 못난 짓을 하고 있는가? 부끄러워해야 한다.

회개라는 이름으로 잘못을 지워 순진하고 진실하려고 하지 말고 철이 들어야 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의 진정성이 분노로 표현되는 것이다. 겁을 내라는 것이 아니다. 더 가자고 하시는 것이다. 나는 타협할 수 없다. 나는 여기서 만족할 수 없다.

하나님의 목표와 인간의 목표는 구약 내내 갈등을 빚어왔다. 이에 대한 하나님의 슬퍼하심과 분 냄이 구약에 가득히 있다.

우리는 쉽게 판단한다. 왜 이 바보들은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우상을 숭배했을까?

하나님을 따른다는 것은 학교 공부와 같다. 1학년이 끝나면 2학년에 가야 한다. 문제를 다 외웠는데 그 문제가 아닌 다른 문제가 나온다. 계속 발전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투정을 부린다.

이 정도면 되지 않았습니까? 더 가자.

끝이 없다는 것은, 영생으로 가자는 것은 아름다움의 충만한 것으로 가자는 거다. 책임이나 보상이나 상급이 아니다.

오늘 본문은, 찬송하리로다, 곧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로부터 시작되는 모든 약속, 전망, 목표에 대해 하나님의 의지를 나타내고 있으며, 우리를 설득하고 있다.

예수를 믿어 의에 이른다는 말은, 즉 믿음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우리를 설득하여, 우리로 하나님을 섬기게 하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믿음은 관계와 경험이 없이 일어날 수 없다. 믿음은 다짜고짜 하는 베팅이 아니다. 억지로 믿어야 한다고 우겨봐도 우리는 믿을 수 없었다. 갑자기 성령 충만을 받거나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만났다.

우리가 아는 식의 이해가 아니고 현존을 그대로 만남으로써 시작을 했다. 그 뒤에 설명을 들었다. 당신이 만난 하나님은 누구신가? 무엇을 해 오셨는가? 어떻게 인도하시는가? 이런 것들을 성경에서 확인하게 된다.

여러분의 결단, 시작, 감동은 여러분 쪽에서 보면 시작이었지만 성경에서 보면 하나님을 만난 것이다. 이 하나님에 대한 설명은 신, 구약을 통틀어 너무나 분명하게 풍성하게 설명이 되어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설명이 여러분의 삶 속에서 열매 맺을 수 있도록 인도하신다. 우리는 그 인도 속에서 우리의 역사를 인생을 훈련받는다.

(2) 믿음이라는 말을 성경에서 보자.

창세기에는 창조를 간략히 기술하고 그 후에는 아담의 실패와 불순종으로 인해 인류가 사망에 빠지는 일이 더 많게 기록이 된다. 모든 인류는 절망 속에 빠질 수밖에 없고 죽을 수밖에 없다. 이렇게 창세기 11장까지 끝난다.

12장에서는 느닷없이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복의 근원이 될 것이라고 축복하신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약속을 받지만, 하나님을 이해하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린다.

22장에 이르러 이삭을 바침으로써 인정을 받는다.

네가 네 아들을 바치기까지 나를 신뢰하였은 즉, 내가 나를 두고 맹세하노니 너에게 복을 주고 복의 근원이 되게 하여 모든 족속으로 복을 받게 하겠다.
아브라함이 처음 하나님을 만났을 때 아브라함은 정신도 없었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도 없었다. 약속만 있었다. 이 약속에 대한 신뢰가 경험상 없으므로 애굽으로 피난도 가고 가나안 전쟁에 말려들기도 하고 이런저런 일을 겪는다. 그 하나하나에 하나님은 개입하신다. 결국, 백 살에 이삭을 얻게 되고 그 후에야 이삭을 바치게 된다.

그는 이삭까지도 바쳤다가 아니다. 내가 너희를 항복시켜서 백 살에 낳은 자식이라도 바칠 수 있는 지경까지 너희를 설득하겠다. 너희의 항복이 너희의 복이며 자랑이 된다는 결론을 만들고야 말겠다.

그는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영광을 나누는 자리를 비우고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죽기까지 순종하셨는데 그 죽음은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나 땅에 있는 자나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시인하게 했다.

내가 이것으로 영광을 받는다. 나는 너희를 짓누르는 자가 아니다. 나는 초월적인 힘을 동원하여 너희를 형통하게 하는 신이 아니다. 나는 너희와 운명을 같이 하며 너희와 하나가 되는 너희의 아버지가 되겠다.

(고전 15:55~ ) 사망을 조롱하고 있다. 사망이란 소멸되는 것이다. 어떠한 가치도 쓸데없고, 어떠한 노력도 무산되고 만다. 사망아, 너의 독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승리한단 말이냐? 사망은 잘 잘못을 가리는 것 아니냐? 나는 잘잘못을 가리는 하나님이 아니다. 나는 부활의 하나님이다. 나는 죽음을 뒤집는 하나님이다.

내 사랑을 받는 백성들에게 사망은 아무 힘도 쓰지 못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흔들리지 말아라.

세상적인 것과 종교적인 것이 우리의 이해를 위해 나뉘어져 있지만,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서는 모두가 다 하나님의 대상이다.

(요 3:16) 하나님은 창세 전에 우리를 구원하실 계획을 세우셨고 우리를 택하시고 예정하사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십자가로 나타난 것이다.

죄에 빠진 자를 구원하시고 그 구원받은 자의 찬송과 감사를 받는 정도가 아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이 되려면 죄인인 상태로는 될 수 없다. 꺼내야 한다.

꺼냈다는 것은 영광에까지 가겠다는 뜻이다. 이 의지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표시이다. 그것을 우리가 소극적으로 받아들여 나는 이제 죽어도 천국에 간다, 에 그쳐서는 안 된다. 얼마나 가난한 고백인가?

인간이라는 존재가 달라진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을 알게 된다면 하나님과 우리가 대등한 관계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얻은 감동은 우리를 영광의 자리까지 이끄시려는 하나님의 준비였다. 사망이 왕 노릇하는 세상에서 싸워서 이겨야 하고 이기기 위해 폭력을 써야 하는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만들어 가겠다고 하신다.
다. 결어

(1) 우리가 자식을 키울 때 숨겨 놓고 키우지 않는다. 나가서 놀게 한다. 싸우기도 하고 울기도 한다. 이것이 아이를 만든다. 이겨야 된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그것은 주먹이 강해야 된다는 것이 아니라, 자라면서 철이 들어야 한다는 것을 아이는 알게 된다.

다섯 살짜리의 순종, 일곱 살짜리의 진정, 이것으로 그 사람을 어른이라고 말할 수 없다. 육십이 되고 칠십이 되었는데 아직도 진실과 눈물밖에는 보일 것이 없다면 정말로 비참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왜 보복하지 말라고 하시는지, 왜 용서하라고 하시는지 알아야 한다. 이것은 네가 폭력보다 훨씬 더 큰 실력을 가져야 가능하다.

누구를 원수로 삼는 것은 우리를 소모시킬 뿐이다. 위대한 행동을 해라. 성경은 말한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하나님이 인도하시지 않으면 사람이 얼마나 치사해지는지를 봐라. 얼마나 못났는가를 봐라. 부끄러워하라. 그리로 가지 마라. 이리 와라.

이 싸움을 평생 하는 것이다.

여러분이 승자가 되기를 바란다. 여러분의 찬송이 하나님의 기뻐하심이 되기를 바란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복되고 영광스러운지와 명예와 수치도 배웁니다. 선행을 몇 가지 베푸는 것으로 때울 수 없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매일 하나님의 인도하심 속에 있습니다. 위협과 시험 앞에서 하나님의 은총이 이긴다는 것을 믿습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만들어지고 커나갑니다. 우리는 명예와 승리와 영광의 자리에 나아갈 것입니다. 믿음의 인내와 충성과 승리가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