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성경 다시 보기(4) (엡1:3~6)

2023. 3. 5.(일)
박 영 선 목사

1. 내용

가. 서론

(1) 이 에베소서 1장 3절에서 6절은 우리 교우들은 다 외우도록 하자. 이 말씀의 놀라움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 하는 것을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스케일로 선언하고 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시다. 그런데 예수를 왜 보냈는가?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주시려고 보냈다. 이 일은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계획하신 것이다.

일어난 일들을 가지고 조작을 하거나,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세상이 있기 전에 먼저 계획하셨고 인간을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며 자식으로 만드시기 위해 그렇게 하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하심의 결과에 대하여 하나님을 찬송하는 한편, 하나님께 항복하고 만족하며, 하나님은 이것을 자랑으로 삼으시겠다고 한다.

본문의 종교적 용어들이 좋은 말로만 이어져 있으니까, 현실성이 부족하고 구체적이지 않은 때가 많은데 사실은 매우 구체적인 사항이므로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부터 보겠다.

(2) 모든 종교는 신앙의 대상이 있어야 한다. 신앙의 대상은 적어도 우리가 원인을 제공하면 결과를 보상하는 정도로는 신앙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우리가 결과를 만들 수 없는 것을 요구해도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어야 신이 된다. 우리 기독교적 용어를 쓴다면 신은 은혜를 베풀 수 있어야 한다. 기적을 베풀 수 있어야 한다.

신이 말이 되는 범주 안에 있으면 신앙의 대상이 될 수 없고 종교의 범주 안에 들어올 수 없다. 이런 문제가 가장 왜곡되어있는 것이 무속 신앙이다.

무속 신앙이란 대상은 없고 신자가 간절함을 가지면 바라던 것이 이루어진다고 믿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대상에게 요구하는 것은 없고 본인을 학대한다.

한겨울에 밤에 나가 소복을 입고 물을 끼얹고 자해한다. 신이라는 존재가 있다면 나의 정성에 답을 해 주십시오.

무속 신앙은 인간이 만든 신앙이어서 우리 모두에게 이런 요소가 있다. 기독교에서도 이런 비나이다, 비나이다는 초보적인 단계에 많이 쓰인다.

이때 하나님이 응답을 하시면 하나님을 더 알아가는 계기로 삼아야 하는데 신자들은 여기서 멈춘다.

그래서 그 후 급한 일이 생기면 산 기도를 가든가, 안 하던 헌금을 갑자기 하든가, 목사님 손을 잡고 흔드는 일들이 발생한다. 종교를 왜곡해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나. 본론

(1) 다음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우상이다. 우상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만들어 내는, 즉, 조작할 수 있는 신을 가지는 것이다. 이 신은 내가 만들었기 때문에 내가 조작할 수 있고 신이 그보다 큰 것을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가 만든 신에게 큰 것을 해 달라고 하는 모순에 빠진다. 인간은 하나님도 우상화할 때가 있다.

하나님. 제가 할 만큼 했으니까 하나님도 할 만큼 해 주셔야 합니다. 아니 하나님이시니까 더 해 주셔야 합니다. 나는 하나를 냈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니까 만을 내십시오. 잘못된 것이지만 자주 본다.

종교가 성립이 되고 신앙이 성립이 되려면, 그 경배의 대상인 신의 정체가 있어야 한다.

그 신은 어떤 신인가? 그 신은 우리와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그 신에게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가?

이것이 종교의 성립조건이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이 순서를 갖추지 못한다. 대부분 어느 날 불 받아서 갑자기 믿게 되었기 때문이다.

지금 공부하는 신약 성경 다시 보기는 성경의 표현들이 어떤 논리를 갖추고 있는가를 살피는 것이다. 하나님이 일을 어떻게 하시는가를 찾아 들어가겠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라고 표현하신다. 예수 그리스도는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인생을 사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의 인생과 사역을 구체적으로 알고 있다.

그러니 예수님의 삶을 역추적하면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성경은 이야기한다.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며 우리보고 어떻게 하라고 하시는 것인가?

하나님은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주고 싶어 하시고 우리를 사랑 가운데서 거룩하고 흠 없게 하시며 그의 자녀로 삼으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가장 큰 뜻이요 권능이요 영광이다. 우리의 행복과 만족을 당신의 영광이라고 하신다.

(2) 우리는 기독교 신자이다. 기독은 그리스도를 한문으로 쓰고 우리말로 읽어서 기독이 된 것이다. 그리스도교, 예수교인 것이다. 하나님이 자신을 예수 안에 나타내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예수그리스도의 아버지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로부터 시작하여 따라 들어갈 수밖에 없다.

우리는 실존적 신앙으로 시작한다. 예수를 만나고 죄 사함을 얻고 영생을 얻는 일이 급격하게 뭉쳐서 우리를 깨우친다. 물론 시간이 걸려서 깨닫는 경우도 있지만, 신앙의 황홀과 오늘 죽어도 천국에 간다는 확신이 자리를 잡는다.

그러나 성경은 매우 긴 시간에 걸쳐서 하나님을 설명한다.

신약은 구약을 이어 오고 그 긴 이야기 속에 하나님은 자신을 설명하신다. 신약을 시작하는 마태복음 1장에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그리스도의 계보라, 라고 쓰여있다.

예수를 논하려면 아브라함과 다윗을 알아야 한다. 예수를 알아야 예수를 보내신 하나님을 알게 된다.

(창12:1~3) 이 선언은 놀랍다. 아브라함은 복의 근원이 되며 아브라함으로 인해서 땅의 모든 족속이, 모든 인류가 복을 받는다. 그런데 이 내용은 12장에 나온다. 11장까지를 지나서 비로소 12장에서 복이 선언되고 있다. 앞은 타락이었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시고 그에게 복을 약속하셨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졌고 온 세상을 다스릴 권한을 가졌다. 단 하나의 금기조항이 있었다. 선악과는 먹지 말라. 그러나 먹었다.

그래서 인간은 죽는다. 당장 죽지는 않았다. 900살이나 살다가 죽었다. 그의 후손도 다 죽는다. 선조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 뒤를 잇는 자들도 같은 DNA를 받아 사망 아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모두 살아있는 동안에 죄만 지어서 하나님이 진노하셨고 노아 홍수로 싹 쓸어 버리고 노아로 새로운 시조를 만든다. 그러나 노아의 후손들도 죄를 짓고 바벨탑을 쌓고 하나님께 대적하려고 하여 하나님은 그들을 흩으신다. 그리고 아브라함을 부르신다.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복은 엄청난 것이다. 문맥상 안 맞는다. 다 죽어버리기 때문이다. 이거 먹으면 다 죽는다, 에서 갑자기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신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실 수 있다.

하나님의 변덕은 늘 좋게 하려고 하시는 변덕이다. 우리의 변덕은 나쁘게 하려는 변덕이다. 하나님의 변덕은 변덕이라고 하면 안 된다. 모든 부모가 자식 앞에서 변덕을 부린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드셨을 때 아담에게 허락한 특별한 권리가 있었는데 자유를 주신 것이었다. 아담은 자유인이었다. 선택의 권리가 있는 것이다.

아담은 이 선택의 권리를 적극적이고 좋은 것에 쓸 틈이 없이 맨 처음 했던 행동이 법을 어긴 것이었다. 그래서 아무것도 못하고 죽었다.

하나님이 아담을 항복시키시고 아담에게 자신을 이해시킬만한 기회가 없이 죽었다. 아담에게는 금기사항을 선언하셨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는 복을 선언하셨고 그 후로 계속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설명하셨다.

신이 조작의 대상이라면 신앙은 필요 없다. 신앙은 대단히 인격적이며 전인적인 교류를 전제로 하고 있다. 신앙이란, 기대하고 항복하고 원한다. 이것이 진정한 신앙이다. 인격적인 신은 하나님을 제외하고는 없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인생에 오셔서 만나시고 계속 도전하신다.

아브라함은 부름을 받고 왔다. 갈대아 우르에서 하란을 거쳐 가나안까지 온 것이다. 기근이 들어서 애굽에 간다. 겁이 났던 아브라함은 아내가 미인이어서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워질까 봐 아내를 누이라고 속여서 바로가 부인을 빼앗아간다.

하나님의 간섭으로 아내는 돌아온다. 바로는 아브라함에게 항의한다. 나, 너 때문에 죽을 뻔했어. 얼른 데리고 가.

아브라함은 놀랐다. 나를 불러내신 하나님께서 바로를 혼내셨구나. 나중에 가산이 늘어서 조카 롯과 함께 지내기가 어려워지자 서로 헤어진다. 그 후 전쟁이 생겨서 롯의 가족들이 포로가 되자 아브라함이 구한다.

왕들의 전쟁에 아브라함이 끼어들어 롯을 구한 것이다. 그 후 하나님께서는 두려워하는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신다.

아브라함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아브라함은 자신의 목축업에 필요한 종들이 있었을 뿐 군사력은 없었던 때였다.

그 후 아브라함은 후사가 없음을 걱정해서 자기가 믿는 종 엘리에셀을 후사로 삼겠다고 하나님께 말한다. 하나님은 아니라고 하신다. 너에게서 날 자식이 후사가 될 것이라고 하셨다. 아브라함은 믿지 못하고 사라는 웃었다. 하나님은 아이 이름을 웃음이라고 지으라고까지 하셨다.

99세에 약속을 받고 100세에 아이를 낳고 이름을 이삭이라고 지었다. 사실은 이 웃음이 비웃음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기쁨의 웃음으로 바꾸셨다.

그리고 창세기 22장에 가면 하나님께서는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하신다. 아브라함은 왜 이삭을 잡았을까? 아브라함은 그때쯤 하나님을 어지간히 알고 있었다. 또 그에게는 하나님 이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천사가 와서 말린다. 하나님은 놀라운 약속을 하신다. 내가 나를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네게 약속한 것을 다 이루겠다. 내가 너로 복을 삼겠다.

사실은 12장에서 복을 주셨던 내용과 같은 것이다. 이것을 잘못 읽으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자 하나님께서 복 내려 주시기로 맹세했다, 가 된다.

그래 이거야. 내가 너를, 나를 모르던 데서부터 네 인생에 개입하여 여기까지 오게 한 하나님이야, 나는 너를 이 항복의 자리에까지 데리고 왔어. 잊지 마라.

(3) 하나님은 납득시키신다. 무조건 겁을 주시지 않는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열심히 있어도 하나님은 아무런 답이 없으시다. 우리의 헌신과 감격에 대해 듣지도 않으신다. 어떻게 해야 하나? 이게 뭐야?

하나님께서는 이 시간, 하나님을 납득할 수 있는 시간을 우리에게 주신다.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너는 나에게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를 깨닫게 하신다.

내가 각오를 하면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더 편하게 만들어 주신다, 는 생각은 틀린 것이다.

다. 결어

(1) (롬3:1~7) 예수를 믿는다는 문장에서 핵심은 믿는다, 가 아니라 예수이다. 예수가 먼저 십자가에 죽으신다. 화목제물이 되신 것이다. 그러니 그 후에 내가 믿으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고, 내가 안 믿으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안 죽고, 는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믿음이라는 말은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가르치는 것이다. 내가 누구인지를 배우는 것이다.

행위나 율법은 조건을 제시해야 결과를 얻는다. 자랑도 내가 결과에 대한 조건을 가지고 있어야 성립한다. 은혜란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받은 것이다. 로마서 3장에서 바울은 은혜라고 써야 할 자리에 믿음이라고 쓴다. 왜 그런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은 하나님이 누구인지 알게 하시는 것이다. 또 우리가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를 깨닫게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을 찬송하는 자리에 가도록 이끄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지, 개입, 일하심이다.

그러니까 믿음이 좋다는 것은 현실을 열심히 산다는 것이다. 현실을 산다는 것은 폭력밖에 없는 세상의 도전 속에서 영광 명예 생명을 가진 자로서 부딪친다, 는 것이다.

(2) 이번 월드컵에서 손흥민이 유명한 말을 했다.

꺾이지 않는 마음.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를 죽일 수 없는 것은 나를 키운다. 어디서 크는가? 넘어지는 자리에서 큰다.

하나님은 예수를 보내서 우리에게 무엇을 하시려는가?

하나님은 진정한 인간을 만들어 가고 계신다. 하나님의 사랑과 교제에 우리를 부르신다. 찬송과 자랑과 명예의 자리에 보내신다. 이것이 구원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증명이다. 형통하기 때문에 찬송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도 이길 수 있는 생명의 힘이, 하나님을 아는 실력이 우리로 하여금 찬송하게 한다.

우리는 항복했다. 그러니 우리의 하루하루는 하나님께서 도전하신다. 하나님께서 만들어 가신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 인생의 하루의 깊이와 무게를 깨우칩니다.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심을 압니다. 열심히 반응하게 하옵소서. 넘어지면 일어나게 하옵소서. 더 나아지고 멋있어지게 하사 우리 입술에 기어코 찬송을 담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