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성경 다시 보기(1) (엡1:1~6)

2023. 1. 8. (일)
박 영 선 목사

1. 내용

가. 서론

(1) 이 에베소서는 사도바울이 기독교 신앙에서 중요한 이해를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다. 기독교 신앙의 중요한 이해라는 것은 모든 종교가 그렇듯이 신앙의 대상과 그 대상을 경배하는 이들의 정체성과 운명을 말하는 것이다.

종교에서 보통 바라는 것은 도덕성과 성실함을 대부분 그 목적으로 하고 있는데 오늘 에베소서에서 보듯이 기독교는, 창조주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이 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고 말한다.

번역마다 조금 다르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번역본은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한다, 라고 되어 있다. 또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 라고도 되어 있다.

영광을 찬송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베푸실 구원의 크기와 놀라움에 대한 기꺼운 반응을 묘사하는 것이다.

(2) 물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본래의 의도에 조금 못 미친다. 하나님의 구원, 하나님의 복주심, 하나님이 허락한 영광 같은 것들을 기뻐하고,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그런 차원보다 더 크게,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의 꽃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우리가 없이 혼자서는 완성하지 않겠다고 하신다는 뜻이다. 기독교가 말하는 구원, 창조, 심판은 전부 그의 형상대로 지으신 인간들과 대등한 관계를 약속하신 것이다.

대등하다는 것은 성경에서는 사랑이나 믿음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이유가 된다. 존재론적으로 우리는 하나님과 같은 지위일 수 없으나 관계성에 있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대등해야만 성립할 수 있는 믿음과 사랑을 목적하고 있다.

나. 본론

(1) 에베소서 1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목적, 인류를 향한 운명은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의 꽃이 되는 것이라고 바울은 설명한다. 그때 바울은 옥중에 있었다.

예수를 믿는 일에서 가장 복된 일을 그가 억울한 옥살이를 하는 현실 속에서 해야 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우리는 바울이 예수님의 부름을 받기 전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박해하러 다니던 사람이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바울은 권력을 가졌고 정죄와 형벌을 요구했다. 그러나 사도가 된 후에는 권력과 정죄의 피해자가 됐다. 그는 그 속에서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의 목적, 인간의 운명과 정체성을 말하고 있다.

바울은 다메섹에까지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러 가다가 예수님을 만난다. 예수님이 바울을 부르는 장면도 뜻밖이고 그때 나눈 대화도 뜻밖이다.

바울이 묻는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예수님은 답하신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왜 이런 상황에서 바울을 부르셨을까? 사도가 되는 소명을 바울이 예수님을 핍박하는 정도까지 놔두셨다가 주셨을까?

너는 모든 족속과 임금과 왕들 앞에 하나님의 뜻을 전하기 위한 사도로 보냄을 받을 것이다. 네가 많은 고난을 겪을 것이다. (사도행전 9장)

사도행전 26장에서는 그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체포되어 유대인들이 가지는 종교와 다른 신을 섬기는 자라는 핍박 속에서 시저 앞에서 재판받을 것을 요구해서 로마로 떠난다.

그전에 분봉왕 아그립바와 총독 베스도 앞에서 재판을 받는 장면이 나온다. 거기서 아그립바나 베스도는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이렇게 멀쩡한 사람이 최악의 경우에만 형벌로 주어지는,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를 증언하고 다닌다는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너 미친 것 아니냐? 도대체 네가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이냐?
바울이 답한다.

이 쇠사슬에 묶인 것을 빼고, 두 분이 다 나와 같기를 원합니다.

세상에서 좋은 일을 얘기할 때는 권력의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세상은 뺏어야 자기의 것이 되는 질서 속에 있기 때문이다.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께 물었다. 계명 중에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러자 예수님은 십계명을 둘로 나누어서 핵심을 말씀하셨다.

네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둘째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 둘을 우리는 할 수가 없다. 우리는 보상을 원하고 우리의 신은 보상을 해 줄 수 있는 신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경쟁 사회에서 이겨야 한다. 내 필요를 채우려면 이웃의 것을 뺏어야 한다. 세상은 자유경쟁이라고 표현하지만 우리는 우리 스스로 우리의 필요를 채울 수 없다.

이런 세상에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를 영광으로 불렀다고 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영광은 싸워서 이기는 영광인데, 경쟁에서 승리한 자가 가지는 영광인데, 예수는 죽음으로 영광을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다.

(2) 그러나 우리는 신앙을 권력이라는 틀에서 떨쳐내지 못하고 있다. 사랑이 무엇이길래, 경쟁에서의 승리보다 사랑이 우위에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보통은 이런 질문도 안 한다. 모든 것이 승자의 윤리가 되기를 바란다.

넉넉해서 사랑하고 넉넉해서 봉사하는 것으로 하고 싶다. 이렇게 기독교를 우리식으로 꿰어맞추고 있다.

내가 어려운 삶을 살지만 이건 내 신앙의 부족 때문이야. 내가 좀 더 진정한 신앙의 경지에 올라가면 하나님이 나에게 보상해 줄 거야.

우리는 이 생각을 떨쳐 버리지 못한다.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이것이다. (요일4:18)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워하는 자는 아직 사랑 안에서 온전하지 못한 것이니라.

사랑이 왜 두려움과 대비되는가? 인간은 하나님을 외면하고 떠난 순간부터 경쟁 질서 밖에는 남은 것이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의 교제를 원하셨다. 여기에는 폭력이 없다. 사랑이란 이렇게 경쟁과 공포와 싸움이 없는 관계를 말한다.

우리의 신앙이 명분이 되고 윤리가 앞서면 핵심을 놓친다. 말은 성경이 말하는 명분으로 하지만 여기에는 아직도 폭력과 공포가 있다.

우리 교회는 사랑이 없어. 당신은 왜 기도 생활을 하지 않아. 이런 말을 무슨 권리로 하는가?

예수를 믿는 것이 명분이 되고 권력이 된 것이다. 내가 누구에게 뭐라고 지적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기독교 신앙은 내가, 내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의 상대역으로 만들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하나님은 다윗의 헌신과 소원에 이렇게 답하신다.

나는 궁궐에서 사는데 저 법궤는 천막 속에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위해 성전을 짓겠습니다. 하나님이 꾸짖으신다.

다윗아. 어떻게 내 필요를 네가 채운다는 거냐? 내가 하나님인데 나에게 모자란 것이나 핍절한 것이 있겠느냐? 그걸 네가 할 수 있다구? 너의 말이 얼마나 어리석은 소리인지 모르고 있구나.

(3) 우리는 내가 하나님께 무엇을 해드릴 테니 무엇을 해 주십시오, 라는 상거래를 하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기쁨으로 삼으며, 그 기쁨이 둘 사이에 일어나는 화음으로 엮어지기를 원하신다. 성경은 이것이 우리를 영광으로 부르는 일이라고 말한다.

성경은 사랑을 얘기할 때마다, 그것이 어떻게 공포와 다른지, 어떻게 폭력이 될 수 없는지를 수없이 언급한다.

(갈5:22) 성령의 열매를 보라.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이다.

어느 단어에도 폭력이 없다. 내가 나 자신이 되려고 할 때 어디가서 약탈해 올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예수 안에서 불렀다는 것은 우리를 하나님의 영광의 꽃으로 불렀다는 것이고, 매 절마다 예수 안에서 사랑 안에서가 반복된다.

예수 안에서라는 것은 신이 우리를 붙들기 위하여 우리의 자리까지 내려 오셨다는 것이고 죽음마저도 동참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과 함께하겠다, 고 역사에 개입하시고 그 증언을 성경에 남기신다. 우리는 끝없이 우리의 인생 속에서 등장하는 시험에 허우적거린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이런 운명을 약속하셨다면 우리의 인생에 왜 고달픔이 있느냐? 성경은 답을 한다.

우리는 생존 경쟁이라는 세상 속에서 큰다. 세상에서 이웃의 것을 빼앗아 오는 것이 가치가 없다는 것을 배우는 데 일생이 걸린다. 하나씩 배운다. 미워하고 싸우고 저주하는 것들이 인간에게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것을 실제로 배우는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셔서 우리를 만드신다. 우리를 순진한 대상으로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주고받는 대상으로 요구하신다.

손자 손녀를 낳아 보시면 애들이 안 컸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크면 말을 안 듣는다. 이쁜 게 오래 가기를 바란다.

애가 안 크면 큰일이다. 병은 치료하면 되는데 안 크면 어떻게 하겠는가?

여러분의 자식이나 손주가 거짓말을 안 하면 병원에 가야 한다. 거짓말이란 다만 나쁜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산다는 것은 정직한 것으로 모두 설명하거나 극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거짓말을 하고 그 거짓말이 우리에게 독이 되고 우리를 불명예스럽게 만든다는 것을 알게 된다. 후회도 하고 수치를 배워 명예가 무엇인지를 깨우쳐야 한다.

고린도전서 13장에서처럼 사랑은 환상이 아닌 것으로 등장한다. 사랑은 능력도 아니며 열정도 아니다. 그럼 뭐냐?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다. 사랑은 혼자 독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조작할 수 없다. 상대가 사랑의 대상이 되는 지위에 올라와야 하기 때문에 기다려야 한다.

그래서 과정이 힘들다. 권력이 가장 큰 대적이다. 힘만 있으면 사랑도 할 수 있고 헌신도 할 수 있고 도와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아니시다. 우리에게 능력을 펼치라고 하지 않으신다. 정체성을 존재를 지위를 요구하고 계신다.

놀라운 초대이다.

사랑은 또 무례히 행하지 않고 성내지 않고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모든 것을 참고 모든 것을 견디고 바라고 믿는다.

사랑에는 의지가 들어간다.

모든 어려움을 대신 극복해서 주는 것을 사랑이라고 하지 않는다. 우리는 상대가 커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완성을 하기 위해 여러 번 실패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

완성될 때까지 편이 되어 주고 꾸중도 하고 붙잡아 온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천지를 지으시고 인간을 당신의 형상대로 지으시고 당신에게 사랑과 믿음의 관계가 되어 달라고 요구하신다.

여러분은 아담이 범죄한 것에 대해 늘 불평한다.
선악과는 왜 만드셨나?
왜 먹는 걸 안 막으셨나?

우리의 주장은 이것이다.
왜 우리를 완제품으로 만드시지 않았는가?
시키는 대로 하는 인간으로 왜 안 만드셨는가?
왜 우리가 선택하도록 두셔서 이 고생을 시키시는가?

답이 노아이다.

노아는 범죄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족보에서 유일하게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이다. 그래서 노아와 그 자식만을 남겼는데 그들도 범죄한다. 무슨 뜻일까?

하나님은 완제품을 요구하시지 않는다. 자발적으로 사랑과 믿음의 대상을 요구하신다. 그래서 긴 역사가 시작된다.

이 역사는 잘하느냐 못하느냐를 심판하는 역사가 아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것을 만들기 위하여 하나님이 역사와 인생에 뛰어 들어오셨다. 인류가 앞으로 되어질 운명을 먼저 약속하시고 전개하신 역사이다. 바로 아브라함이다.

내가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어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을 것이니라.

역사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우리는 커야 한다. 자라나야 한다.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고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자리까지 가야 한다. 인생의 나이가 들수록 이것이 자라나야 한다.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의 꽃이 되는 것이다.

여러분의 요구는 단순하다. 나는 생각 안 할 테니 하나님의 뜻대로 해 주세요.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이 기도는 우리는 선택의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변명에 불과하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하셨는데요?

그렇다. 아버지의 뜻을 따라 십자가를 지셨다.

이 잔을 내게서 비켜 주시옵소서. 그러나 아버지의 뜻대로 하겠습니다. 그랬더니 책임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완벽한 수모와 오해와 핍박과 고통과 죽음을 맞이했다.

죽음마저도 하나님이 우리를 만들려는 목적을 방해할 수 없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어야 한다. 기독교에만 있는 반어법이다. 은혜요, 기적이요, 약속이다.

다. 결어

(1) 우리도 한 번쯤은 잘해볼 수 있지 않는가? 그것이 교회이다. 교회에서는 세상에서와는 조금 다르게 해볼 수 있다.
맨 처음에 할 일은 무엇인가? 인상을 풀어야 한다. 오는 사람마다 긴장한 표정이다.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겠다는 것이 역력히 보인다. 설교할 때 여러분의 긴장과 두려움을 뚫고 나가는 일이 가장 어렵다.

현실을 이기는 것은 면제를 받는 것이 아니다. 겪어야 한다. 그 속에서 배운다.

성경은 말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이것이 역사요 인생이요, 현실이다. 신앙은 우리끼리 모여서 종교적인 행사를 할 때만 자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거부하고 이해할 수 없고 해결할 수 없는 처지에 있을 때,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으로 겪게 하시고 자라게 하신다.

십자가가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믿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니라. 여러분이 매일 맞이하는 위협 속에서 이 약속이 여러분을 견디게 하고 키워줄 것을 믿는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가장 큰 영광으로 목적하셨습니다. 우리가 겪는 이해할 수 없는 현실이 우리를 위한 도전이며, 인도함이며, 깨우치게 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임을 믿습니다. 우리도 힘을 다하여 우리의 인생과 현실을 감당하게 하옵소서. 울어야 하고 웃어야 하는 모든 일들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선하심과 권능 아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 하루를 힘있게 살고 더 많은 찬송과 기쁨이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