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열왕기: 에필로그 (렘29:10~14)

2022. 12. 11. (일)
박 영 선 목사

1. 내용

가. 서론

(1) 이스라엘 남북 왕조는 성경에서 보았듯이 북 왕국은 기원전 722년에 앗수르에 망하고 남 왕국은 기원전 586년에 바벨론에 멸망 당한다.

당시 유대의 선지자였던 예레미아는 유다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한다. 이것은 하나님이 너희에게 내리는 벌이니 순순히 포로가 되어 잡혀가라. 하나님의 징계인 줄 알고 순순히 따르면 너희가 포로된 바벨론에서 평안히 살 것이며 70년 포로 생활이 끝나면 내가 너희를 회복시켜 본토로 돌아오게 하겠다, 는 말씀을 유다 백성들과 왕에게 전한다.

그러나 유다 백성들의 대부분과 왕은 이 명령이 전혀 이해되지 않았다.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친히 하나님이 되시며 그 백성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신 하나님이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 족속에게 팔려가도록 망하도록 성전이 파괴되도록 그냥 두신다는 것이 이해가 안된다.

우리가 쉽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명령을 듣지 않았다, 라고 판단해서 망한 것이 당연하다고 보지만 성경은 좀 더 깊은 얘기를 하고 싶어한다.

(2) 가장 중요한 질문은 결국 다시 돌아오게 할 포로는 왜 필요한가? 다시 회복할 나라인데 왜 적국의 손에 파괴하시는가? 라는 것이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신약에서도 이 부분에 대한 오해는 많다.

하나님의 법도를 지키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승리하게 하신다는 말은 우리의 기대와 다른 결과를 낳고 있다.

남북 왕조의 왕들이 하나님의 율례를 지키지 않아서 멸망할 수밖에 없었다, 는 간단한 공식은 짧은 생각이다. 선한 왕들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바꿀 수 없었고, 그들의 순종이 하나님의 마음에 들어 하나님께서 멸망시킬 계획을 취소하시지도 않았고, 선한 왕들 때문에 승리의 증거를 주시지도 않았다.

선한 왕들이 있었어도 남 왕국이 멸망했다는 것은 우리에게 더 깊은 질문을 하게 한다.

나. 본론

(1) 율법은 하나님을 움직이는 메뉴얼이 아니다. 사용설명서이다. 하나님께서 구약 역사에서 가장 화를 내시는 것은 너희는 나를 모른다는 것이었다.

인류역사상 종교는 도덕성과 치성의 문제로 치부된 것같이, 하나님을 열심히 섬겨서 정성을 다하면 우리의 요구에 답을 주시는 분으로 생각하는 것을 강하게 반대하신다.
율법에서 가장 중요한 계명이 무엇이냐고 묻는 율법사의 질문에 예수님은 답하셨다. 첫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둘째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율법이 메뉴얼이 되면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관계의 대상이 아니라, 조작해야 하는 기계가 되고 만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과 사랑의 상대가 되고 싶어 한다. 하나님은 그 대접을 받고 싶어 하시고 우리는 그런 특권을 가진 존재다.

우리의 기도는 대부분 편안함을 구하고 형통함을 구하는데 모아져 있으니까, 이웃을 사랑하기에는 거리가 멀다.

모두 자기 잘살기 바쁜 존재들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너는 이웃 앞에 그런 사랑과 믿음의 대상이 되라고 하신다. 그것을 나누는 주인공이 되라고 하신다.

기독교 신앙에서 하나님은 권력을 주시는 분, 승리를 주시는 분이라고 할 수 없다. 이 단어의 의미가 바뀌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고 소원을 말하고 열심을 바치는 것은 감격이요 감탄이요, 만족이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정체와 인간의 정체를 이해해야만 가능한 것이다.

우리는 예수를 믿고 살아도 우리의 현실이 형통하지 않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다. 늘 조바심과 불신 속에 긴장 속에 살아야 하는 인생을 하나님은 왜 요구하시는가?
하나님은 왜 이스라엘에게 힘을 주지 않고 주변 강대국에게 힘을 주어 이스라엘을 괴롭히게 하는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 하나님의 사랑과 믿음에 상대가 되는 것이다. 세상에서의 권력, 힘, 승리, 성공이라는 말들로 하나님이 알려지는 것을 거부한다.

우리의 정체성과 하나님이 우리를 대접하시는 것과는 너무나 차이가 난다.

기독교는 신이 인간을 위해 죽을 수 있다, 는 것이고 그것은 하나님이 계신다는 결정적인 증거이다. 신이 인간을 위해서 죽는다는 것은 인간의 경쟁, 자존심 등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말이다.

이것은 사랑하는 이만이 그 상대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사랑을 하면 상대방을 위해 무엇이든지 할 수 있고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딱 하나 요구하는 것은 사랑은 사랑으로 반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구약 역사 내내 보이신 것이며, 신약에서도 예수님을 통해 베푸신 것이다.

(2)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잘했느냐, 못했느냐를 따지고 있지 않다. 잘잘못의 문제였다면 애초에 아담이 잘못했을 때 죽여버리고, 새로 만들면 되었다.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 송아지를 만들었을 때 모세에게 하신 말씀은 내가 이 백성을 다 죽여버리고 새 백성을 만들겠다고 하셨다.

모세가 답한다.

하나님 그러시려면 제 이름도 생명책에서 빼 주십시오.

여기에 모세가 이해하는 하나님, 모세로 인하여 성경이 증언하는 하나님의 궁극성이 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과 사랑과 믿음의 관계를 맺기를 원하시고 성숙해지도록 가르치는 일을 포기하지 않으신다.

우상을 섬긴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 이외에 다른 신을 섬긴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라고 하는 일을 따라 들어오지 않고 적당한 선에서 인간 스스로가 멈추어 선다는 것이다.

자녀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안 가고 껌을 팔아 집안 살림을 돕겠다고 하면 그냥 두겠는가?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역사를 통해 인류에게 하시는 꾸중이다.

우리가 신앙을 도중에서 얼버무리는 것은 대부분 도덕적인 차원에서이다. 도덕이란 무엇을 잘못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은 잘못을 넘어 더 가야 한다고 하신다.

뜻밖에 기독교인들은 죄를 안 짓는 것이 전부이고 죄를 지으면 빨리 회개하는 것이 전부다. 그러나 회개로 다룰 수 없는 더 나아가야 하는 하나님의 도전과 일하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 그래서 이렇게 기도한다.
“하나님 제가 무엇을 잘못해서 이렇게까지 하십니까?”
“제가 어떻게 하면 저를 편안하게 해 주시겠습니까?”

이 하소연은 부모님에게 난 자라지 않겠다고 하거나 선생님에게 공부하지 않겠다고 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두려운 대상이거나 적당한 거리를 두어서 하나님을 찾아가지도 않고 더 알고 싶지도 않은 상태에 머문다.

(3) 하나님은 반가운 분이고 기쁜 분이고 언제나 내 편이다. 하나님이 없다면 나의 오늘 나의 현재 나의 이곳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깊은 관계에 들어와야 한다.

이러지 못하면 잘잘못에 대해서만 회개를 하고 잘잘못에 대해서만 비난을 하고 잘잘못의 차원에서만 안심을 한다.

더 위대한 삶에 대해서는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다.

이스라엘도 이 문제에 대해 계속 실패했다. 가네스 바네야에 정탐꾼을 보냈을 때 가나안 들어가기를 거부한다.

하나님께서는 이때에도 이 백성 다 죽이고 새 백성을 주겠다, 고 하셨다. 모세가 답한다.

하나님. 여태 고생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뭘 그러세요. 이 백성을 죽이시려면 제 이름도 빼주세요.

신약에서는 바울이 이 고백을 한다.
이스라엘의 실패로 이방인 너희가 은혜를 입었다. 이스라엘을 비난하지 말라.

2천년 기독교 역사에서 성도들이 유대인들을 비난 함으로써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인하려고 했다.

유럽의 유명한 성당의 벽에 있는 부조물을 보면 이스라엘을 개, 돼지로 비하한 묘사가 작품 속에 얼마든지 감추어져 있다.

이스라엘의 실패로 너희가 은혜를 입었다면 이스라엘이 순종할 때에는 얼마나 더 큰 영광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열매 맺을 것인가?

나는 내 민족이 구원을 받는 일에 필요하다면 내가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져도 좋다.

다. 결어

(1)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바벨론에 보내신 것은 죽이고자 하심이 아니었다. 더 큰 데로 나가기 위한 꼭 필요한 징계였다. 그래서 회복시켰다. 이들에게 일어난 모든 일을 보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과 궁극적인 목적에 도달할 때까지는 손을 놓지 않으신다. 구약의 역사는 이렇게 읽혀야 한다.

우리의 현실 속에 우리가 답을 낼 수 없는 일이 나오는 것은 마치 이스라엘이 도무지 극복할 수 없는 주변 열강 속에서 늘 떨어야 했던 것과 같다.

너희의 정체성은 무엇이냐? 하나님을 누구라고 이해하느냐?
이 도전을 하시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이 평안하면 교회에 나오겠는가?

기도의 시작은 불평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 앞에 나아감으로 말미암아 내가 원래 시작했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받게 되는 것이 기도이다.

요구한 것을 받는 것 보다, 더 크다. 비로소 나는 누구이며 하나님은 누구이신가 하는 것이, 우리의 기도와 현실 속에 나타난다.

하나님은 나를 만들고 있고 흔들고 있고 나에게 물어보시고 나를 깨우치게 하신다.

이 하나님의 일하심은 모든 세대, 모든 인류에게 나타나셨다.

(2) 이스라엘이 율법을 어겨서 포로가 되는 벌을 받았다, 라고 쉽게 말하면 안 된다. 율법의 조항들은 하나님은 누구신가? 내 이웃은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 깊이 묻고 있다.

율법은 우리가 소원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목적이 더 크다, 라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율법이 우리를 끌고 가지는 못한다.

율법은 우리가 요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과 어떻게 다른가를 가르치는 것이다.

(갈3:8) 약속은 율법보다 430년 전에 있었다.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나님은 복을 주기로 하신 그 하나님을 알게 하려고 계명을 주셨다. 살아가는 작은 욕심에 급급하지 말라고 주셨지만, 우리는 율법에 근거하는 쉬운 규칙을 만들고 쉬운 규칙에 안심을 하고 하나님까지 찾아갈 필요 없는 세상 살기를 평생 간구한다.

그러니 갈등이 그칠 수가 없다.

(히3:11 ) 히브리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는 나왔으나 가나안에는 들어가지 않은 잘못을 지적한다.

그때 저희가 나를 거역하고 순종하지 않았다. 너희는 그 역사를 보고 배워라. 충성스럽게 순종해라. 이 시제는 오늘이다.

이 말씀을 우리의 전 생애를 통해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을 섬긴다. 하나님의 자녀다, 라는 것이 지금 어떻게 사용되어야 하는가?

세속과 분리된 종교적 경건성이 아니다. 이것은 사랑이다. 사랑은 대단한 것이다. 사랑은 만드는 것이다.

내가 죽어버려야지 했던 생각이 가장 크게 공헌을 하게 만들어라. 여러분이 잘못했던 것을 지워 버려야 되는 것이 아니라 잘못한 것이 일을 하도록 해라.

소소한 잘못은 넘어갈 수 있는데 큰 잘못은 어쩔 수 없다고 말하는가? 아니다.

(3) 하나님은 그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으셨다. 지극함을 보이신 것이 아니라 그 십자가의 죽음에까지 따라 들어오셨다. 그것이 사랑이었다. 진정성이었다.
예수님의 순종이 영광이 되었다는 하나님의 선포가, 우리가 죽을 만큼 괴로운 자리까지 빠졌다 해도 최악의 결과를 빚지 못하도록 한다. 이 선포는 우리를 죽음에서, 기만에서, 고집에서 돌려세우며 더 큰 영광의 자리에 가도록 만든다.

(롬6:15~23) 영생은 사망과 대조된다. 영생은 오래 사는 것이 아니다. 죄가 부끄럽고 쓸모없고 아무것도 아니라면, 영생은 자라고 자라고 충만하고 찬란한 것을 말한다.

하나님은 매일, 이 일을 우리에게 선택하라고 하신다.
왜 하나님은 우리를 꽉 붙들어서 강제로 시키시지 않는가?

사랑과 믿음은 자발성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유를 주시고 선택을 하게 하신다. 선택을 하려면 분별력이 있어야 한다. 분별력이라는 지혜를 가지려면 경험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마음껏 기회를 주시며 경험을 쌓게 하시며, 우리가 더 영광된 곳으로 나아가겠다는 깨우침을 주신다.

나이를 먹는 것은 쇠락하는 것이 아니다. 더 찬란해지고 충만해지는 것이다. 나이가 들면 품을 수 있게 된다. 잘못도 미움도 절망도 품을 수 있게 된다.

우리를 삼켰던 것도 우리가 품게 된다. 걱정이 없는 것이 아니다. 어렵지만 모든 것을 품게 된다는 것이다. 이 정체성이 존재의 자랑이자 영광인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께 찬송이 드려지며 그것은 우리의 복이다. 그런 복된 하루하루를 보내기 바란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늘 아슬아슬합니다. 우리는 대강 살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더 치열하게 살라고 하십니다. 하루가 헛되지 않게 하라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시간 속에서 배우고 고치고 순종하고 자랑하고 울고 후회하고 돌아서겠습니다. 질 수 없는 운명을 가졌다는 사실이 우리를 감사와 찬송의 자리로 이끌 것이며 그 배짱과 감사가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