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열왕기(35) (왕하25:27~30)

2022. 11. 27. (일)
박 영 선 목사

1. 내용

가. 서론

(1)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여호야긴은 남왕국 유다의 마지막 왕이 아니고 시드기야의 조카이다. 마지막 무렵이 되었을 때 요시야가 죽고 아들인 여호야하스가 이어받았지만, 곧 애굽에 끌려갔기 때문에 3개월밖에는 왕위를 지키지 못했다. 그래서 여호야하스의 동생인 여호야김이 11년간 통치했다.

유다는 애굽과 바벨론 사이에서 외교정책을 계속 번복하고 있었기 때문에 바벨론을 섬기기로 했다가 배반한다.

바벨론은 다시 와서 예루살렘을 포위했고 여호야김은 함락 직전에 죽는다.

그리고 아들인 여호야긴이 왕이 되었는데 3개월 만에 성이 함락되고 여호야긴은 바벨론에 끌려간다. 여호야긴은 37년 동안 옥살이를 하고 풀려났다.

(2) 그를 잡아간 바벨론은 그의 숙부 시드기야를 왕으로 삼았고 시드기야도 11년간 왕위에 있으면서 바벨론을 섬겼다가 배신했고 바벨론은 다시 침공했다.
성벽을 헐고 모든 기물을 빼앗아 가고 시드기야가 보는 앞에서 두 아들을 죽이고 그의 두 눈을 뽑아 멀게 했다.

나. 본론

(1) 구약 2,000년의 역사는 이렇게 허망하게 단원을 내린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후에도 400년이라는 시간이 지나야 예수께서 오신다.

그동안에는 아무런 선지자도 등장하지 않았다. 역사는 바벨론,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에 의해 승계되었고 유다는 약소국으로 피해 속에서 살고 있었다.

여호야긴이 풀려났다는 것은 성경이 유다 왕국의 왕권을 포기하지 않았다, 라고 증언하는 것으로 읽지만, 당시의 유대민족이나 그 후 신약시대를 사는 우리가 읽는 이 역사는 참으로 이상하다.

구약 내내 이스라엘은 피해자로 산다. 처음에는 애굽의 노예로, 가나안에 들어가서는 주변국의 약탈 때문에는 허우적거렸다. 그리고 남북 왕국으로 갈렸는데 북쪽에 있는 아람에게 늘 시달렸고 전쟁을 겪었다.

그리고는 앗수르가 나타나 아람과 북왕국은 멸망했고 그 후는 바벨론의 시대가 된다. 이 같은 역사적 사실을 볼 때, 이스라엘 민족이 겪었을 역사에 대한 혼란을 우리가 이해해야 한다.

이스라엘 민족은 정체성이 하나님의 선민이며 하나님의 약속 속에 있었다. 하나님께서 친히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라고 하셨다. 시내산에서 명백하게 약속하셨다.
그러나 그 후 역사들은 갈피를 잡지 못해서 헤매었다. 겉으로 보면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계명을 지키지 않아 혼이 난 것이지만 왜 그들은 우상을 섬겼을까, 하는 것은 심도있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하나님은 기대하는 답을 주시지 않는다. 그러니까 백성들은 그들이 원하는 것을 주리라고 기대되는 우상을 섬기게 되었다.

아람이 섬기던 신도 따라가고 앗수르가 섬기던 신도 따라갔다. 또 바벨론의 신도 섬기며 기대를 했다.

(2) 하나님은 왜 답을 하시지 않았는가? 하나님은 무엇을 답하지 않았는가? 하나님은 무엇을 원하셨을까?

인류가 역사 내내 원했던 것은 정의와 평화이다. 하나님은 분명히 정의와 평화에 대해 책임자이어야 한다. 그러나 역사의 증언에 의하면 정의와 평화는 시행된 적이 없다고 한다.

제국주의란, 한 나라가 힘을 가지고 부를 가지면 주변 국가들을 약탈해서 그 부와 지위를 이용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한 나라들을 말한다.

고대사회뿐 아니라, 중세에도 심지어는 오늘날까지도 제국주의의 판도 속에 있다. 지금은 부라는 것을 기준으로 강한 나라에 붙어 있어야 하며 어쩔 수 없는 손해도 감수해야 한다.

이스라엘의 생각은 하나님이 계신다면 마땅히 우리 민족에게 권력을 주셔서 주변 나라에게 과시하며 나눌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상하게 주변에 더 큰 국가를 세우시고 이스라엘로 약탈과 착취의 희생자가 되게 하신다. 역사 내내 반복되었고 역사의 진실이다.

우리가 예수를 믿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 주시지 않는다. 물론 응답하실 때가 있어서 그때 한번 반짝하지만, 그 뒤로는 역시 많은 사람이 그렇듯이 체념에 들어간다.

신앙생활이 행복하세요? 이런 질문을 아무도 해서는 안 된다.
답이 없기 때문이다.

어떻게 교회에 나오셨어요? 이런 질문도 안된다. 교회에 안 나오고 다른 데 갈 배짱은 없기 때문이다.

빨리 죽어 천국에서 눈을 뜨면 좋겠는데 데려가 달라고 하는 기도에도 응답하시지 않는다.

(3)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나님은 그들의 역사에 여러 번 개입하셨다. 그래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설명을 하셨다.

이스라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으로 시작한다. 아담의 실패로 인류는 죽을 수밖에 없었지만, 그 역사는 창세기 11장까지만 기록한다. 12장에 가면 돌연히 앞부분과 전혀 상관없는 아브라함이 등장하게 된다. (창12:3) 느닷없는 복을 약속하고 열방은 아브라함으로 인해 복을 받도록 되어 있는데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는다.

약속이 지켜지려면 힘과 재물이 더 필요한데, 그래야 나눌 수 있는데, 하나님은 그것을 주시지 않는다.

다윗이 하나님을 위하여 성전을 짓겠다고 했다. 내가 하나님이다. 내가 무엇이 부족하여 네가 나에게 채워준다는 것이냐? 내가 너의 모든 필요한 것을 준다.

너의 운명은 내가 약속한다. 이것이 다윗에게 한 은혜의 약속이다.

그러나 다윗은 고단한 인생을 살았다. 아들 솔로몬은 최고의 부와 영광을 누렸던 왕인데 그의 생애 중에 나라가 나뉜다.

정치적으로는 그의 아들 때에 나누어지지만 솔로몬 치하 때 여로보암이 하나님의 명령으로 북 왕국을 세울 10지파를 확보하게 된다.

이스라엘은 남북왕조로 나누어졌고 더 많은 지파가 모인 북왕조가 이스라엘이라는 국명도 쓰게 되었다. 남왕국은 유다와 베냐민 반 지파 밖에는 없어서 국명을 유다로 했다.

하나님은 우상을 숭배하는 이스라엘 민족을 꾸짖으시기 위해 엘리야를 세웠는데 엘리야는 갈멜산 전투를 벌인다. 엘리야가 이기고 하나님은 가뭄을 멈추신다.

이렇게 되었는데도 아합과 이스라엘의 세력은 그대로 유지되었고 엘리야가 도망간다. 엘리야는 죽을 결심을 했다. 하나님이 물어 보신다. 너 왜 여기 있느냐?

하나님 몰라서 물으십니까? 모든 하나님의 종은 전부 죽이고 저만 남았는데 저도 죽이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명령하신다.

너 가서 하사엘로 아람의 왕을 삼아라. 아람의 후사를 세우라는 뜻이었다. 또 예후로 아합의 뒤를 잇는 이스라엘의 왕을 삼아라.

하나님을 모르는 권력의 역사를 이어가라. 그리고 네 뒤를 이을 엘리사를 세워라.

하나님은 권력을 주시거나 간섭하시는 일을 유다에게 해주시지 않고 북 왕국에게 해주셨다. 아람도 역사를 이어가게 하셨다. 하나님의 일하심은 우리가 볼 때 전혀 뜻밖에 방법으로 마치 우리가 잘못한 사람처럼 대하신다.

그리고 엘리야를 통해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일하고 계심도 보여 주었다.

하박국에서 하나님은 바벨론의 포로가 될 것을 명하신다. 하박국은 항변한다.

어떻게 악인을 죽이기 위해 선인들도 함께 고난을 받게 하십니까?

하나님이 답하신다.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의인은 권력으로 살지 않는다. 나는 권력으로 일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이 가르침을 왜 이렇게 길게 하실까?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지신 목적이 권력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 권력이 무엇인가를 보이신다.

권력은 자기 필요를 위하여 이웃을 약탈하는 폭력이다.

어느 시대에나 동일했다. 어느 시대에나 모든 사람은 이웃을 약탈해야만 자신이 넉넉할 수 있고 자신이 그런 힘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희생자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 인류의 역사였다.

이러한 인생을 살라고 하신 것이 구약의 기록이며 구약의 목적이다. 이러한 희생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문제가 반복되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너희는 망해라, 하셨고 백성들은 하나님, 망하게 할 수 있다면 흥하게도 하실 수 있었을 텐데 왜 거기에는 대답을 안 하시고 이제와서 망하라고 하십니까? 라고 했다.

우리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백성이 여기까지 몰려가면 어떤 반응을 해야 하는가?
우리는 신약시대를 사니까 쉽게 회개해야지 한다.

쉽지 않다. 예수가 이 땅에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인생은 신앙만 가지고 살기 힘든다. 인생을 그냥 놔두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최소한이라도 타협을 하고 산다. 보란 듯이 정도를 걸을 재주는 없다.

(4) (사 63:15~19) 놀라운 탄식이다. 막바지에 오자 우상에게는 한탄도 하지 못하고 마지막으로 여호와께 돌아온다.

사실은 돌아온 게 아니라 막말을 하게 된다.
악에 바쳐 있다. 하나님 이게 뭡니까?

이 반발 속에는 무엇이 있는가? 아브라함은 우리를 모르고 이스라엘은 우리를 모른다 해도 하나님은 그러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 이시지 않습니까?

이 극단적인 절망의 자리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이유가 무엇일까?

나는 너희에게 권력을 주려는 것이 아니다.
그럼 피해를 보고 살라는 것입니까?
아니다.
그럼 이 피해는 무엇입니까?
그 피해가 일을 한다. 권력으로 만들 수 없는 것을 만든다.

권력을 추구할 수밖에 없는 역사 속에 집어넣고 여러 가지 약속을 하셨다.

너는 복의 근원이다.
나는 네게 은혜를 베풀 것이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도록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약속 속에서 답을 얻지 못했고 권력의 희생자로 사는 것을 반복하고 있다.

무엇을 위해서, 무엇을 만드시기 위해서인가?

그러자 예수님이 오셨다.
이것이 답이다.
예수는 무슨 답을 주셨는가?

우리를 죄와 형벌에서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고 천국에서 영생을 누리게 하셨다.

이 고백을 구약의 배경없이 한다면 이 말은 허공에 떠 버린다.

신약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구약백성이 울부짖었던 자리가 없는 고백은 쉬운 고백에 불과하며 의미를 잃기 쉽다.

하나님께서는 신약시대에도 구약시대와 똑같이 권력을 주시지 않는다는 사실, 즉, 우리는 희생자 같은 지위에서 일하고 있다는 것이 배제되는 허무한 고백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현실 속에서 성실하게 만들며 그것이 기적이라는 사실을 놓친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7장에서 여러 유언을 남기신다.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너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알게 하고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기를 원한다.

이것이 예수를 믿는다는 말이 가지는 내용이다.

예수가 오심으로 세상의 권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우리 중에 하나가 되심으로 인류를 구원이라는 영역 안으로 끌어 안으신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시는 절차가 필요하지만 예수님께서 오신 것이 곧, 하나님의 작정, 즉 결과가 된 것이다.

지금은 지구상에서 기독교를 모르는 자리가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보내진 여기가 땅끝이다. 이 땅끝은 다 하나님 없이 살며 권력이 유일한 진실이다.

여기서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하사엘을 왕 삼아라, 예후를 왕 삼아라, 하는 문맥을 우리에게도 주시며 이 속에서 우리를 키우신다.

예수를 인간으로 보내시어 사망을 뒤집듯이, 인류의 운명을 뒤집듯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보내셨고 그 사명을 감당하라고 하신다. 이것은 존재론적인 사명이며 메시아의 연장이다.

우리라는 존재가 얼마나 귀한 존재인가를 알아야 한다. 예수님도 그 많은 고난 속에서 말씀하신다.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내가 한다. 아버지께서 늘 나와 함께 하신다. 아버지여, 제가 영광받을 때가 되었습니다. 아버지께서 영광 받으시옵소서.

예수의 존재론, 정체가 주어진 곳이 신약이다. 예수님은 권력이 전부라고 주장하는 세력들에게 사랑이라는 진리로 맞서신다.

우리의 소원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신다는 것을 알아라.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의 소원과 비교할 수 없다. 우리의 소원은 힘이다. 우리의 최고의 가치는 남한테 안 꿇리고 사는 것이다.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셨다. 빌라도 앞에서 꼼짝 못 하고 채찍을 맞고 조롱을 당했다. 유다의 배반을 당했다. 유다를 욕할 수 있는가?

우리 모두가 예수를 믿지만, 그렇게 안 사는 우리가 유다다.
유다라는 이름은 뜻밖에도 남 왕국의 국호이다.

(5) (사 53:1~3) 놀라운 사실인데 우리는 안 믿는다. 무엇에 가려서일까? 권력에 가려서이다. 인간의 소원에 가려져 있다.

우리의 성공이 얼마나 값싼 것인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만들려는 것과는 얼마나 많이 동떨어져 있는 것인지 왜 우상으로 갔는지, 왜 하나님이 우상이 되었는지, 생각을 해야 한다.

일부러 어려워지라는 것이 아니다. 어려움이 우리에게 무슨 작용을 하는지 보라.

기독교 역사상 가장 큰 신앙의 적은, 순수하고 열심히 있는 것이다.

철이 들어야 한다. 인간다운 것은 순수함에 있지 않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야 한다. 안목과 지혜와 가치와 소망에서 달라야 한다. 우리의 생각은 여기까지 오지를 못해 우리는 늘 현실 속에서 힘을 잃고 있다.

그래서 만나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런 반응도 없다. 반가워할 실력도 여유도 없다.

구약은 절묘하게 이것을 꼬집었다.

(창28장) 야곱은 쫓겨났다가 성공해서 돌아온다. 그러나 원한을 가진 에서가 쫓아오자 모든 가족을 먼저 보내고 얍복 강가에 홀로 남는다. 하나님이 찾아오신다.

너는 네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뭐라고 생각하냐?
권력입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저는 믿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항복시키지 못하고 최후의 경고를 하신다.

나 간다.
나를 축복하지 않으면 보내드릴 수 없습니다.
네 이름이 뭐냐?
야곱입니다.
그래 맞다. 너 날강도 아니냐? 너는 네가 필요한 것을 이웃에서 뺏어 오지 않았느냐? 왜 이제 와서 또 야곱이라 하느냐?

하나님은 야단을 치시는 대신 이름을 바꾸라고 하신다.

다시는 네 이름을 야곱이라고 부르지 말라. 너는 네 이름을 이스라엘이라고 불러라. 왜냐하면 너는 나와 싸워 이겼기 때문이다.

너는 더 이상 고아가 아니다. 네 필요를 네가 이웃에서 빼앗아 와서 생존하고 유지해야 하는 존재가 아니다. 너는 내 자식이다. 너 자식 이기는 부모를 보았느냐?

다. 결어

(1) 하나님이 우리보다 더 전전긍긍하신다.

심혈을 기울여 우리를 사람 만드신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런 감성도 감격도 없이 갈등이 있다는 이유로 체념하는 인생을 산다.

각오를 하고 분발하라는 얘기가 아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한 이해와 성경의 증언과 현실의 도전 속에 우리가 있지 않은가?

그러니 도망하지 말라. 답을 내라. 여러 번 도전해라. 시간이 걸린다. 이렇게 복된 하루를 살아 은혜를 쌓아 가는 인생되기를 바란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인생은 짧고도 긴데 그 속에 말할 수 없는 갈등과 고민이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신비라는 것을 배웠으니 이제는 좀 더 철이 들고 순종하여 복을 받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모습에 다가가게 하옵소서. 아버지 이일을 지체하지 말게 하옵시고 우리의 인생에서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름에 맞는 복과 명예와 영광을 누리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