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열왕기(29) (왕하:17:24~33)

2022. 8. 21. (일)
박 영 선 목사

1. 내용

가. 서론

(1) 오늘 열왕기하 17장에 있는 내용은 매우 놀라운 증언이다. 남북왕조로 분리되어 있던 북 왕국 이스라엘이 마침내 앗수르에 의해 멸망 당했다.

앗수르는 속국이 된 나라들이 나중에 힘을 길러서 배반을 하고 위협이 될까봐, 그 민족들을 타지방으로 흩어 버렸다. 북 왕국 수도 사마리아에 살던 백성들은 다 먼 나라로 보내고 이방 백성들을 거기 와서 살게 했다.

그렇게 해서 원래 선민이었던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없애 버린다. 남아있던 이스라엘 백성들도 이방 사람들과 혼인을 해서 혈족이라는 정체성도 없어진다.

(2) 신약시대에 와서 예수님이나 당시의 이야기 속에 사마리아 가 등장할 때 보면, 가까이해서는 안 될 천민을 대하듯이 외면하고 적대시한다. 앗수르가 보낸 민족들이 북 왕국 이스라엘에 왔을 때 하나님이 노하시고 재난이 일어나자, 앗수르는 생각하기를 우리가 이 땅의 신을 알지 못해서 이 재난이 왔으니 이스라엘민족이 믿던 여호와라는 신을 섬기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제사장이 오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법을 가르쳤다. 그 내용에는 율법과 제사가 담겨 있었을 것이다.

나. 본론

(1) 북 왕국의 멸망을 설명하는 사관은 이스라엘이 율례와 법도를 지키지 않고 우상을 섬겼기 때문에 북 왕국은 멸망했다고 주장한다. 그 후 이주한 민족들이 자기들의 신과 여호와를 섞어서 믿는 것은 이해가 간다. 그러나 성경은 이스라엘을 질타하면서 너희가 그와 같았다고 한다.

너희는 여호와가 누구인지를 알면서도 이웃 나라의 모든 신을 섬겼으니 지금 이 꼴과 무엇이 다르겠느냐, 라고 하는 핀잔을 주고 있다.

이게 무슨 뜻일까? 여러 신이 있는 경우 어느 신에게도 전심을 바치지 않는다. 필요한 부분만 의탁한다. 생산, 풍요를 위한 신이 있고 전쟁의 신도 있다. 요즘으로 얘기한다면 종합보험을 드는 것과 같다.

하나님은 여러 신중의 한 명이 되는 것을 분노하셨다. 하나님만이 인간에 대하여 목적과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 다른 신들은 신이 인간에게 목적과 계획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인간들이 자기의 필요에 의해 만든 신이다. 인간이 목적과 방법을 정했다.

이스라엘이 우상을 섬기고 율례를 행하지 않았다는 것은, 하나님이 하라는 것을 따라가지 않고, 하나님마저도 자기 필요한 것을 구하는 대상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그들은 무엇을 빌었을까? 행복과 평안이다. 그들은 그들의 운명을 누가 쥐고 계신다고 생각했을까? 하나님이 쥐고 계신다는 순종이 있어야 했는데 하나님을 자신들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삼았다.

우리 모두도 그렇게 신앙생활을 한다. 걱정거리가 없게 해 주십시오. 이것이 우리의 기도다. 하라는 것 다 할테니까, 제발 걱정거리가 없게 해 주십시오.

우상을 섬기는 것이며,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일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전쟁에 무너진다. 전쟁에 무너지는 것은 굉장히 의미가 있는 구약역사이다.

구약역사는 출애굽으로부터 출발한다. 물론 아브라함부터 시작은 하지만 국가라는 개념은 출애굽 때에 등장한다. 출애굽 해서 약속의 땅에 들어간다. 이때 여호수아가 계속해서 가르치고 유언에 까지 남겼던 것은 주 여호와 하나님만 섬기고 그의 말씀에 복종해라, 였다.

그러나 백성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들은 멋대로 살았고 많은 우상을 섬기고 끝에 가서는 왕을 요구한다. 왜 왕을 요구했는가 하면 그들이 사는 곳은 풍요로운 땅이어서 문제가 없었는데 주변 국가들이 약탈을 하니까, 이것만 막으면 살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시 열두지파는 국가의 형태도 아니었고 중앙집권적인 권력도 없었다. 그래서 사사기의 얘기는 각 부족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들은 왕을 달라, 왕을 달라 했고 왕이 세워진다.

그들은 왕에게 부탁했다. 외부의 약탈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달라.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제국적인 권력을 허락하시지 않았고 솔로몬 이후에 나라를 찢어 놓으셨다. 남북으로 나누어 국력을 약화시켰고 또 두 나라가 늘 싸우게 하셨다.

그러니까 힘으로는 외부세력을 감당할 수 없어서 남북왕조는 있는 대로 우상을 섬기게 되었다. 그리고 생존을 위한 국제 외교에 집중했다.

애굽에 보호를 요구하고 아람의 손을 잡기도 하고 앗수르 제국에 손을 내밀기도 하고 바벨론에도 손을 내밀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요구한 진정한 율법을 지키지 않았다.

우리는 여기를 쉽게 간다. 하나님께 구하지 왜 안 그랬을까? 무슨 생각이 바탕에 있는 것인가? 하나님께 구하면 전쟁도 역병도 근심도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러나 구약 내내 전쟁이 있었다. 또 신약시대의 교인들도 각자 이중적 생활을 하면서 산다. 왜 그런가? 여러분도 걱정거리가 없는 인생을 요구하고 있지,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인생의 정체성과 운명을 무엇인가, 라고 묻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하나님이 계속 요구하신다. 그 땅을 진멸해라, 백성들은 순종하지 않고 그 땅 백성들의 풍요로운 삶을 부러워했다. 결국은 그 땅 백성들은 이스라엘의 올무가 되고 덫이 된다.

인생이 행복해서 아무 생각이 없게 되는 것을 하나님은 극도로 반대하신다. 신앙이 자라야 한다고 생각하신다.

우리는 아니다. 예수 믿으면 뭐든지 된다고 생각한다. 죽으면 천국에 간다고 확신한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요구하는 것을 간과한다.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사랑과 믿음을 나누자. 그러려면 실력을 키워야 한다. 더욱 깊은 인간이 되어야 한다.

율법은 가르친다. 이 세상은 답을 주지 못한다는 것을.

율법이 기독교의 용어라면 세상에서는 도덕법으로 대치할 수 있다. 그러나 도덕을 다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없고, 그래서 사람은 겸손해진다. 겸손하다는 것은 잘난척하지 않는 것이고 다른 사람의 흉을 보지 않는 것이다.

나는 부모님께 걱정을 끼치기 싫어 물만 먹고 산다. 이것이 도덕의 최대치이다.

성경은 다르게 얘기한다. 너희는 내 아들이다. 내 기업을 이어받아야 한다. 내 후사다. 천하를 우주를 다스려라, 그 일을 하는 주인공이 되라, 너희는 그런 내 자식이다. 그래서 나는 내 자식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너희를 그냥 둘 수 없다.

그래서 늘 들볶으신다.

구약 내내 이스라엘 백성의 허탈함은 이것이었다.

왜 율법을 지켜도 보상이 없는가?

사무엘이 사사로 있을 때 블레셋과 싸우다가 대패를 하자 하나님을 모시고 나가면 이길 것이다, 라고 해서 법궤를 모시고 나갔는데 그날 전멸을 하다시피 했다. 법궤도 빼앗겼다.

승리를 해야 한다는 우리의 목적을 정함으로써 하나님의 역동적인 권능이 전혀 쓰이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 창조, 부활, 구원은 없고 그저 그런 인생이 되고 우리는 체념하는데, 아무도 분해하지 않는다.

(2) (롬3:19~27) 율법이 주어졌다. 그러나 율법으로는 구원이 없다. 율법은 우리들이 한계가 있음을 알게 하려고 주신 것이다. 그 한계란 우리는 하나님의 눈에 찰 수 없다는 것이다.

말했지만 도덕법은 최고의 경지가 겸손이다. 무엇을 만들어 내지는 못한다. 창조적, 역동적 단어가 아니다. 마찬가지다. 율법으로는 구원, 사랑, 용서 같은 것이 나올 수 없다.

하나님은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예수로 인하여 우리에게 주시며 이것은 하나님이 애초부터 계획하고 있었다. 예수 없이 살던 때는 도덕법이 전부였지만, 예수가 오심으로 우리는 창조와 부활이 허락되었다.

하나님의 의로우심이란 우리를 만드신 창조주의 책임과 진심이 포기되거나 타협할 수 없다는 것이다. 부모는 자식을 죽으라고 때리지 않는다. 잘못되는 길을 갈 때 내버려 두지도 않는다.

부모가 부모 노릇을 하듯 하나님께서도 하나님 노릇을 하시는 것이며 잘못된 인간을 내버려 두시지 않았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이다.

이제부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자라나야 한다.
이 세상의 평화와 정의는 걱정 근심이 없는 것이다.

(갈3:19~24) 예수를 믿어도 도덕성에 붙들려 있으면 죽어서 천국 가는 것이 다이고, 그 사이에 내용이 없다. 그래서 이렇게 묻는다. 오늘 죽어도 천국에서 깰 것을 믿으십니까?

그러나 우리는 살아가야 하는 존재다. 우리는 왜 입을 다무는가?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열왕기 내내, 사사기 내내, 이스라엘 백성의 원통함에 대해 하나님은 답을 안 하신다. 그들이 원하는 것을 주실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인생이 다만 한번 살고 죽는 것이 아니라고 깨우쳐 주시고 있다. 인간은 이 문제에 대해 답을 찾지 못한다. 왜? 인간은 죽으니까. 아무도 답을 찾지 못한다. 그러나 성경은 말한다. 부활이 있다. 영생이 있다. 내가 주인이다. 너희의 영광은 내 손에 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으로 우리를 꺾으신다. 그리고 우리 입에서 이 질문이 나오게 하신다. 인생이 이래도 되나? 이게 전부인가?

구원은 정죄로부터 시작된다. 인간은 그 정도여서는 안돼. 그리고 예수가 오신다. 그래서 우리가 만들 수 없는 세상을 펼치신다. 여기서 우리를 기르신다. 이곳으로 우리를 붙들고 들어가는 것이 은혜이다.

은혜를 얘기할 때 우리는 눈물을 흘리지 않아야 한다. 새로운 각오를 해야 한다. 기회가 왔다. 소망이 있다.

그러니 예수 믿는 것에는 역동성이 있어야 한다. 아침에 해가 뜨고 일상은 반복된다. 세상은 매일 사망의 권세로 나를 위협한다. 그 위협 앞에 내가 맞서야 한다. 나는 은혜와 믿음과 약속 속에 있기 때문에.
위대한 것 중에 아무런 근심이 없는 위대한 것은 없다. 품고, 감수하고, 극복하는 것을 위대하다고 한다.

예수는 이렇게 십자가를 지셨다.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를 백화점에 데리고 가시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만들어 내는 모든 부정적이고 비극적인 것들을 삼키고 극복하고 그 위에 부활의 십자가를 세우시는 것이다.

다. 결어

(1) (롬12:21) 싸우지 말고 잘 살아라. 너희가 문제를 다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설득하려고 하지 말고,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 우는 자와 함께 울고 웃는 자와 함께 웃어라, 세상을 네가 살기 좋은 낙원으로 만들려고 하지 말라

주님, 왜 저것들은 있습니까? 저 사람들은 너에게 계속적으로 도전하기 위해 있는 것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생이란 무엇을 만드는 것인가? 이것을 알 수 있도록 너희를 키우시는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이 저 사람들을 통해서 나타난다.

십자가가 믿지 않는 자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너희에게는 하나님의 지혜요, 권능이다.

우리의 현실은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일하시는 곳이다. 그래서 힘과 소망이 있다. 이런 인생을 살아내기 바란다.

【기도】하나님 아버지. 신앙 인생은 숨고 도망가는 것 아닙니다. 세상을 구원하는 메시야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자리, 지위, 환경, 조건 속에서 주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 같이, 도전과 시험과 위협을 정면으로 받아 내고 그것을 모두 뒤집어 놓으신 것 같이, 우리 인생도 그 뒤를 잇는 복된 존재들입니다. 자기의 인생을 살게 하옵소서. 자기 운명이 하나님 앞에 있다는 사실로 인하여 늘 든든하게 하옵소서. 감사할 수 있게 하옵소서. 찬송할 수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