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열왕기(26) (왕하16:1∼4)

2022. 7. 10. (일)
박 영 선 목사

1. 내용

가. 서론

(1) 오늘 본문에는 유다 왕 아하스가 등장하는데 열왕기 내내 등장했던 판정이 나온다. 그는 다윗의 길로 행하지 않았다. 이것은 최악의 혹평이며 하나님 마음에 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열왕기에서 보는 악한 왕은 대표적으로 여로보암이었다.

여로보암의 길로 갔다는 것은 잘못된 길을 갔다는 것이고 다윗의 길로 갔다는 것은 여호와의 마음에 들었다는 것이다.

여로보암의 길은 언급했으니 오늘은 다윗의 길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겠다.

(2) 다윗의 사건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다윗과 골리앗의 사건이다. 또 사무엘하 7장에서 성전을 짓겠다고 했던 헌신도 있었다.

이에 대한 하나님의 답은 매우 중요하다.

다윗이 골리앗을 이기고 사울의 핍박을 견디어 내고 성전을 짓겠다고 헌신을 한 후에 밧세바 사건이 터진다. 밧세바 사건 이전에 있었던 다윗의 영웅적인 업적과 치적들은 하루아침에 무너져 버린다. 회복의 가능성이 없는 저주 가운데로 떨어진다.

나. 본론

(1) 성경이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얘기하고, 다윗을 은혜의 조상이라고 얘기할 때 다윗이 겪은 실패와 범죄로 인한 회복을 늘 염두에 둔다.

(롬4:6~8) 바울은 시편을 인용하여, 허물의 사함을 받은 자는 복이 있다, 라고 다윗의 이야기를 풀어간다. 다윗은 용서를 받은 은혜의 대표자로 묘사된다.

그러나 이 문제는 만만하지 않다. 사무엘하 7장에서 다윗이 말한다.

나는 왕궁에 거하고 저 법궤는 (하나님은) 장막 안에 있으니 부끄러운 일이다. 내가 주를 위하여 성전을 짓겠습니다.

하나님이 답하신다.

내가 왜 집이 필요하냐? 온 우주가 다 내 것인데 쉴 곳이 따로 필요하다는 말이냐? 내가 언제 너희보고 내 집을 지어달라고 했느냐? 그러나 네가 이 기특한 소리를 하니 나도 너에게 감추어 놓았던 말을 해야겠다.

내가 너와 네 가문을 복되게 하여 네 왕권이 영원하게 하겠다. 네 후손들은 잘못하는 일이 있어도 사울을 내쫓을 때처럼 자르지 않고, 인생 막대기와 사람 채찍으로 징계하겠다.
다윗이 은혜의 대표가 된 것이 이 부분이다. 사울은 잘못하자 잘렸는데 다윗은 잘못해도 잘리지는 않는 것이다. 이 대조는 매우 중요하다.

사울은 하나님과 법적 관계에 있다. 잘하면 복 받고 잘못하면 벌 받는다. 다윗의 후손들은 자식의 관계에 있다. 잘못하면 그것으로 결판이 나는 게 아니라 징계가 되고 교훈이 되고 잘못도 손해 보지 않는다

이제부터 나는 너희 자손의 아버지가 될 것이고 너희 자손들은 모두 내 자식이 될 것이다.

법적 관계에서 은혜의 관계로 들어온 것이다.

은혜란, 죄를 지었을 때 처벌을 받는 것이 아니다. 죄를 지었을 때 그것이 훈련이 되는 것이다. 얘기가 다르다.

자식이 잘못되면 그를 벌할지라도, 죽으라고 하거나, 잘못에 대한 대가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면 안 된다, 라고 하는 것이다.

이러면 안 된다, 는 것은 이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은혜라는 것은 죄 사함을 받는 문제가 아니라 그 길로 가지 말고 이 길로 가라는 교훈을 위해 있는 것이다.

자식을 위하여 부모가 죽으면 죽었지, 부모를 위하여 자식을 잡는 법은 없다. 이것이 은혜이다.

은혜는 용서하고 회복하는 정도가 아니라, 더 가자는 것이다. 죄는 잘못하는 것이고 법은 그것을 처벌한다. 그러나 법은 잘하게 할 능력은 없다. 법은 선을 행하라고 하지 못한다. 죄를 짓지 못하게는 하지만 선을 만드는 힘은 없다.

은혜는 죄를 짓지 말라거나, 죄를 지어도 용서한다, 가 아니다. 은혜에는 선과 영광을 만들어 가자는 의지와 목적이 담겨있다.

(2) 다윗은 밧세바 사건을 통해 무엇을 고백하는가?

(시51:17)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다. 주께서 통회하는 마음을 멸시치 않으시리이다.

하나님은 너희가 무엇을 바치면 보상하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기르는 분이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께 바라는 것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목적하는 것이 우선한다. 그것은 너무 커서 비교가 안 된다. 상한 심령이란, 커나가라는 말이다.

우리는 상처를 받으면 말한다.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할래? 너 그 난리를 쳐서 얻은 게 뭐야? 너 부끄럽지? 그러니 다음엔 네 마음에 들지 않아도 예의는 지켜야 해.

이 힘든 길을 안 가면 되지 않습니까?
그러면 너는 못 배운다.

모든 고급한 것에 대해 인간은 거기에 못 미친다는 사실로 상처를 받는다.

국내 축구선수들이 제일 미워하는 선수가 손흥민이다.
너는 왜 손흥민 같이 못 해?

손흥민은 단군 이래 최고의 실력자이다. 그러니 누구나 다 손흥민처럼 잘할 수는 없다.

국민들이 프리어 리그를 보는 바람에 K리그를 아무도 안 본다고 한다. 그러지 마시고 열심히 보셔야 한다. 그들의 정성과 최선을 봐야 한다. 최선을 다해 땀을 흘리지만 미흡하다. 이것을 값지게 보아야 한다. 그래서 이들은 쉬지 않는다.

손흥민 부친에게 기자가 질문했다.

손흥민 선수는 월드 클래스이다. 어떻게 그렇게 키우셨는가?

손흥민이는 월드 클래스 아니다.
너무 하시는 것 아닌가?
아직 10% 부족하다.

이 말을 들은 손흥민이 말했다. 맞습니다. 저는 10% 모자랍니다.

무슨 뜻인가? 저는 더 노력해야 하는 사람임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다.

여기가 끝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잘못했지? 이건 못난 짓이야? 그리고 본인도 자책한다. 나는 왜 이것밖에 못 할까? 이렇게 우리는 분발한다. 이것이 은혜이다.

(3) 사울은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그러나 소와 양을 남겨 전리품으로 챙겨온다.

이거 왜 남겨 왔습니까?
이게 너무 좋아서 여호와께 제사 지내려고 가지고 왔습니다.

제사가 순종보다 낫겠습니까? 불순종은 우상에게 절하는 것과 같습니다. 왕이 하나님을 버리셨으므로 하나님께서도 왕을 버리셨습니다.

사울의 죄는 얼마나 컸던 것일까? 우상은 타협이다. 하나님이 가자고 하는 곳까지 안 가고 중간에서 타협하자는 것이 우상이다.

우리가 매일하는 기도 아닌가? 만사형통. 만사형통은 상처받을 일이 없다. 고민할 일이 없고 울 일이 없고 탄식할 일이 없다.

자책할 일이 있어야 복된 것이다. 자책은 더 나아가기 위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나님 제가 뭘 더 바라겠습니까? 남에게 아쉬운 소리 안 하고 자존심 지키고 자식들 건강하게 크는 것이 전부입니다. 이쯤은 들어주실 수 있지 않습니까?

그게 바로 우상이다.

우리는 욕심내고 있지 않는 것을 고급한 신앙으로 착각한다. 하나님은 볶으신다.

나는 왜 쩔쩔매면서 사는가?
나는 왜 늘 아픈가?
나는 왜 늘 재정적으로 시달리는가?
나는 왜 하는 일마다 안되는가?
내가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다.
하나님 왜 저를 살려 놓으세요?

더 생각해라.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있으면 어떻게 해야 하니?
가서 강물에 뛰어드는 것입니다.
그래, 죽는 것은 쉽지. 그러나 그 짐을 안고 한번 따라올 수는 없어? 내가 너를 손해 안 보도록 해줄게.

성경의 이야기다.

나는 네 소원을 들어주는 하나님이 아니라 내 뜻을 너에게 완성하려는 네 아버지야. 내가 너에게 뭘 바라겠어? 네가 나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겠어?

다윗에게 하신 말씀과 같다.
왜 내가 집이 필요해? 네가 나에게 무엇을 해준들 너의 존재를 확실하게 할 수 있겠니? 내가 주는 자야. 모든 것을 나만 할 수 있어. 내가 줄게 걱정하지마. 하나님의 약속이다.

(4) 법적 관계에서 혈연관계로 변한다.

(사63:16~17) 아브라함은 우리를 모르고 이스라엘은 우리를 모를지라도 여호와는 우리의 아버지이시지 않습니까? 왜 이렇게 내버려 두십니까?

여기를 못 넘어오니까 우리는 이렇게 되었다.
나는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게 해서 그 보상을 받을 수 있는가?

무슨 보상인가? 만사형통, 자존심 세우기, 마음의 평안.

다윗의 회개의 시는 다만 용서를 받는 시가 아니다. 하나님이 누구시고 자신의 누구이며, 현실은 무엇인지를 깨달은 자의 감탄이다.

(시40:1~2)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 올리셨도다.

여기의 기가 막힐 웅덩이는 우리가 세상에서 당하는 그 모진 고난이 아니다. 하나님을 잘못 이해한, 하나님을 다만 우상으로 이해한 잘못을 깨닫는 것이다.

하나님을, 잘하면 보상해 주고, 못하면 외면하는 분으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나를 이끄는 그 고급한 목적과 길을 알지 못했다. 이러한 명예와 신분을 알지 못했던 어리석고 무지하고 바보 같은 자리에서 하나님이 나를 건져 주셨다.

왜 꺼내주셨는가? 밧세바 덕분이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다윗은 훌륭한 도덕군자로 생을 마쳤을 것이다. 다윗은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겁날 것이 없었다. 겁날 게 없다는 것은 모든 일에 답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무슨 일을 당하든지 그 일이 손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다. 결어

(1) 한국교회가 신앙을 유지하는 보편적인 방법은 회개이다. 잘못을 인정하여 용서받는 것, 여기에는 적극적인 것이 없다. 용서를 받는 게 문제가 아니라 그 길로 가지 말고 이 길로 와라, 가 제시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회개뿐이다. 움츠러든다. 겸손을 떨게 된다. 이렇게 오그라드는 신앙이 되면 안 된다. 자라나는 신앙, 더 가는 신앙이 되어야 한다. 어디로 가자는 것인가?

해봐. 70점이냐? 어디를 틀렸는지 봐라.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보아라.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되지? 노력은 꼭 성적을 위한 것만은 아니야. 성실한 인격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란다.

배움에는 왕도가 없단다. 믿음에도 지름길이 없단다.

이 모든 과정과 우여곡절은 하나님이 너를 향해 베푸시는 성실함이란다.

(2) (시40:5) 하나님께서 행하신 기적이 많고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도 많나이다.

생각이 많다는 것은 하나님이 복잡하게 생각하신다는 뜻이 아니다. 얼마나 많은 것으로 우리 인생에 개입하시며 나를 기르시기 위해 어떻게 모든 정성을 쏟아붓는가, 를 배우게 되었다는 뜻이다.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친 사건, 사울의 엄청난 핍박을 견디고 보복하지 않은 것, 성전을 짓겠다는 열심은 대단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거기에 머물게 두시지 않았다.

네가 왜 성전을 지어야 하냐? 내가 너를 위해 지어야지. 너는 네가 최선을 다하여서 나의 최선의 것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어림도 없다. 내가 한다. 내가 하나님 아니냐?

내가 너를 위하여 최선의 집을 짓고, 최선의 인생을 만들고, 그리고 최선을 다해 너와 함께 하여 내가 목적하는 나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겠다. 이것은 다윗이 은혜의 대표가 되는 역사적 증언이기도 하다.

(3) 이것은 모든 성도에게 허락된 것이다. 예수를 믿으면 우리는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 인간이 어디까지 가야 하는가? 하나님이 요구하신다.

우리의 삶에는 명예도 있고 기쁨도 있고, 영광도 있고, 기적도 있고, 놀라움도 있고 고난도 있고 자책도 있고, 후회도 있고, 수치도 있고 말 못 하는 사연도 있다.

이 모든 것이 우리를 흔들어 우리가 알고 있는 최선을 벗어나 창조주이시며 우리를 사랑하사 십자가를 세우신 하나님의 크신 기적과 영광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매일 매일 우리를 찾아와 도전하신다. 위협, 시험, 유혹을 만나게 하신다. 그리고 이것들이 일하게 하신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실력만큼 반응한다.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오히려 미흡함과 실패가 일을 한다.

(4) 다윗은 언제 가장 인간다워졌는가? 어디서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에 대한 증인이 되었는가? 밧세바다.

마태복음 1장 6장이다.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이 말은 얼마나 무서운가? 공포가 아니다. 죽음을 뒤집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극한 상황에서 내뱉는 분노의 말과 절망의 탄식을 뒤집을 수 있다는 것이다.

(삼하12:15~25)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서 낳은 아이는 낳자 얼마 안 되어서 하나님께서 치셔서 심히 앓았다. 다윗은 금식하며 이 아이를 살려주십사고 기도했지만 아이는 죽었고 아이가 죽자 다윗은 일어나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옷을 입고 음식을 먹었다.

신하들이 물었다. 아이가 살았을 때는 금식하고 우시더니 죽은 후에는 일어나서 잡수십니까?

다윗이 대답했다. 살았을 때는 여호와께 불쌍히 여겨 주십사고 기도했지만 죽은 후에야 무슨 방법이 있겠느냐? 하나님이 내 기도와 다르게 응답하실 때에는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우리 인생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우리는 완벽하게 답을 할 수는 없다.

애절하게 되는 때가 있다. 할 수 없는 때가 있다. 하나님이 내 기대와 다르게 답하시면 할 수 없다.

다윗과 밧세바는 둘째를 낳는다. 이름을 솔로몬이라고 짓는다. 다윗은 그런 생각을 했을지 모른다. 이번에는 이 아이를 죽이지 말고 살려 주십시오. 화평 조약을 생각했을 수도 있다. 솔로몬은 평화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나단을 보내 또 다른 이름을 주신다. 여디디아. 하나님의 기쁨이라는 뜻이다. 이 큰 죄 속에서 태어난 아이를 통해서도 하나님께서는 말이 안 되는 하나님의 승리, 하나님의 만족하실 일을 만들어 내신다.

여러분이 삶에서 겪는 어떤 일에도, 가슴 아프고 속상하고 무력감을 느끼고 절망할 때에도, 이것이 하나님의 기적과 약속을 벗어날 수는 없다는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기적을 바로 보기 바란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인생에는 별별 일이 다 일어납니다.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비극과 두려움과 아쉬움이 많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편드시고 그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사 죽음도 승리도 함께 하시겠다고 하시며 너희는 내가 아끼는 자식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누가 우리의 생애와 운명을 흔들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겪는 모든 어려움은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것이요, 하나님의 지혜요 권세입니다. 십자가에서 부활에서 그 결국을 보았습니다.

우리의 인생도 십자가를 거쳐 부활에 이를 것이며 눈물로 시작하여 영광과 찬송에 이를 것을 믿습니다. 우리의 생애를 통하여 하나님의 현존과 하나님 자녀의 복을 보이게 하옵소서. 사회와 이웃과 후손들 앞에서 복된 증인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