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요한복음(51) (요21:24~25)

2021. 7. 11(일)
박 영 선 목사

1. 들어가는 글

(1) 요한은 자기 자신을 지칭할 때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 (요21: 7, 20) 라는 표현을 감히 썼다.

열두제자의 분위기를 내가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의 제자였고 형제간이었던 야고보와 요한은 말하자면 선수를 쳤다.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옵소서. (막10:37)

그런데 마20:20~21을 보면 이들이 직접 말한 것이 아니라 치맛바람이 거셌던 그들의 어머니가 말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에 대해 제자들은 분을 내거나 화를 냈다.
별로 좋은 분위기는 아니라고 느껴진다.

(2) 그럼에도 요한복음에는 요한이 예수님의 각별한 사랑을 받았음이 분명한 구절들이 많다.

예수님의 품에 의지하여. (요2:20)

요한은 왜 그리 사랑을 받았을까? 목사님께서는 아마도 당시에 요한이 제일 어렸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고 간단히 언급하셨다. 사실 요한은 어려서 (미성년자여서) 성인 남자들은 들어갈 수 없었던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장에도 들어갈 수 있었다.

(3) 조금 다른 생각이 있다. 요한은 성질이 급했다. 예수님께서 친히 지어주신 별명도 있다. 우뢰의 아들. (막3;17)

그리고 행동도 별명에 걸맞는다.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눅9;54) 물론 야단맞았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이 어린데에도 당돌하다는 것을 아셨다. 그리고 물불 안 가리고 행동하는데 그것까지도 귀여우셨던 것이다. 그래서 항상 식사 때나 모임 때 품 안에 두셨다.

그리고 그 사랑에는 신뢰가 있었다. 보라 네 어머니라. (요19:27) 예수님 형제가 여럿이 있었음에도 어머니 마리아는 요한의 집에서 요한과 함께 사신 것 같다. 요한이 정성을 다해 어머니를 섬긴 것은 설명할 필요가 없다. 눈에 선하다.

(4) 요한복음의 끝은 세 제자의 이야기이다. 도마, 베드로, 요한. 물론 신학적으로는(죄송하다.) 베드로에게 가장 중요한 말씀도 하시고 사명도 맡기셨다. 과연 수제자답다. 그러나 다시 보는 요한복음 51편의 설교자는 요한의 역할이 만만치 않음을 역설한다.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요일4:8)
사랑은 오랫동안 참는 것이다. (고전13:4)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요일4:20)

에수님 가르침의 시작과 끝은 서로 사랑하라, 이다. 그 말씀을 가장 알기 쉽게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는 사람은 요한이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

2. 내 용

가. 서 론

(1) 요한복음이 끝나는 결국은 우리의 기대와 좀 다르다. 시작하는 1장에서는 말씀이 계셨고,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이 말씀은 하나님이시며 모든 창조된 것이 그를 말미암고 그가 관계되지 않은 창조물은 없다. 그는 생명이며 우리의 빛이며, 그는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임마누엘이시며, 그의 존재는 영광스럽고 그 안에는 은혜와 진리가 풍성하다.

이렇게 1장은 뭐라고 얘기할 수 없는 놀랍고 경이롭고 찬란한 하나님의 권능과 주인 됨과 우리를 향한 간섭과 부르심으로 시작한다.

그 후 복음서 내내 주께서 행하신 일들이 기록되고, 십자가를 지고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다.

우리가 복음서를 볼 때는 예수님이 얼마나 큰 권능을 가지셨는가가 우리의 주의를 끈다. 그리고 더 많은 기적과 더 많은 놀라운 증거가 있기를 바란다.

오늘 본문은 기록한다. 그가 행하신 일을 낱낱이 기록하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하다. 그러나 그의 행적은 여기 복음서에 기록된 것만으로 충분하다.
그러니까 복음서에 기록된 사건들이 대표적이고 특별하다, 는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고, 진정한 것은 이런 행사가 아니라 다른 것에 있다, 고도 얘기하는 것이다.

그 다른 것은 무엇일까? 무엇이 사도 요한으로 하여금, 가나 혼인 잔치에서 포도주를 만든 것, 중풍 병자를 고친 것, 눈먼 자를 고친 것,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것, 폭풍이 이는 바다를 잠잠케 하신 것, 등등보다 1장의 설명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한 것인가?

나. 본 론

(1) 요한복음에서 특별히 강조되는 것은 예수님의 오심이 가지는 결과와 목적은, 우리를 예수님과 같이 되게 하겠다는 것이고 이것은 반복적으로 강조된다.

요한복음 14장을 보면 나를 믿는 이는 저도 나와 같은 일을 할 것이요, 이보다 더 큰 일을 할 것이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그 죄는 사함을 받고 누구의 죄든지 그냥 두면 그대로 그 사람의 저주가 된다.

마태복음 10장에서는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예수님이 하셨던 일이 우리에게 승계되는 놀라운 결론을 복음서들은 약속하고 있다. 이 부분을 우리 신자들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요한복음에서 가장 중요한 장은 17장이다. 17장에서 죽음을 앞두시고 대제사장 기도를 하신다.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한다.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 같이 저들도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옵소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낸 것 같이 나도 저희를 보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사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신 것 같이 내가 저들을 보냄으로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한 것 같이 저들도 사랑하는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세상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리에 들어오게 하시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로 들어오며 그들이 하나님이 가지고 있는 영광, 연합, 기쁨에 참여하여 그것들을 증거하는 존재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이 땅에 오셔서 해야 할 일이 있다는 사명과 속죄 사역으로 인하여, 오신 의미가 약화되는 경우가 많은데, 예수님의 오심은 일단 오셨다는 것으로 다 이루어진 것이다.

주께서 오셔서 하실 일을 실패하실 리가 없기 때문에 그가 오심으로 이미 하늘에서 천군 천사가, 하늘에는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 중에 평화로다, 라는 찬송을 할 수 있었다.

성경은 이것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 고 해석했다. 그러니 예수께서 우리와 함께함으로써 인류 역사는 하나님을 배반한 자리에서 하나님이 찾아오심으로 하나님과 묶인 세상으로 바뀐다.

모든 인류 모든 역사는 하나님의 호의, 긍휼, 자비, 구원, 회복, 영광으로 가게 되어 있다. 역사의 끝은 종말이고 심판이다. 심판은 잘못한 것을 벌주는 것 보다, 죄를, 사망을 멸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생명이시라고 소개되는 것은, 생명이란 죽음과 대조되는 의미가 아니라, 존재가 부요하고 풍성하고 충만하고 아름답게 커 가는 것, 끝이 없는 충만을 말하는 것이다.

사망이란 다만 살다가 죽고 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그의 삶이 허무하고 헛되고 거짓되고 결과가 없는 것이 사망이다.

이렇게 대조되는 차원에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고,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일, 즉 우리를 그의 자녀로 부르시고 사랑하시며 회복하시는 일을 하게 하셨고, 그것이 예수께도 기쁨이요 영광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불려 나온 우리에게는 새로운 신분과 지위가 주어졌다.

가나 혼인 잔치에서 기쁨을 만들어 내고,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 라는 용서와 회복을 기회를 주셨다.

날 때부터 앞 못 보던 소경이 눈을 떠 보라, 라는 주의 말씀에 눈을 떠 밝히 세상을 보게 되는 것처럼 우리는 다른 존재가 되었다. 우리의 존재가 다른 존재가 되었다는 것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것을 보니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를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은혜와 진리는 은혜를 받고 진리를 믿는 어떤 조건과 책임으로서가 아니라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개념들이 바뀌는 것이다. 행복이 바뀐다. 승리가 바뀌고 성공이 바뀌고 의롭다든가 자랑한다는 것이 다 바뀐다. 예수님의 자랑은 자신을 내어주는 것이었다. 이 세상 나라에서는 위에 앉은 자들이 아래에 있는 자들의 섬김을 받지만, 내 나라에서는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섬긴다.

사랑을 받는 것보다, 사랑을 하는 것이 복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지위를 얻은 것에 만족하지 않고 개별 사건들이 우리의 삶에 있기를 바란다.

병이 낫고 자식들이 잘되고 사람들 앞에 큰소리칠 수 있고 누구를 만나든지 괄시받지 않고, 자랑할 자존심이 지켜지고 걱정할 일이 없는 인생을 살고 싶어 한다.

이런 것들은 성육신 안에는 들어가 있지 않다. 그는 기꺼이 고난을 받으러 온다.

우리가 놀라는 수많은 권능을 행하셨지만, 요한복음의 저자는 그러한 사건은 아무리 많아도 큰 의미가 없다고 쓰고 있다. 그는 그것으로 자신의 힘을, 자신의 사명을 해결하지 않았다.

(2) 이사야 53장에서 보는 것 같이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다.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냐, 그는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여러분이 가장 못 견디는 부분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살아야 한다는 예수를 믿는다는 고백과,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이보다 큰일도 하리라는 두 가지 대조는 기대가 너무 상반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일을 하고 있다. 아무도 모르는 거다. 예수님을 그들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 정도로 밖에는 생각하지 않았다. 자기 죄 때문에 하나님 앞에 벌 받는 죄인으로 여겼다.

우리가 세상에 나가서 매일 당하는 경우다.
‘예수 믿는다며?’

괄시와 조롱의 크기가 크다. 예수님께서 친히 당하신 것이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 이어든 내려와 보라.

그러나 예수님이 오심으로 드디어 세상은 죄와 사망에서 벗어나게 된다. 하나님의 사랑과 영광의 지위와 신분과 기회와 과정과 운명을 가지게 된다.

예수님이 우리 손에 죽는 것으로 사망과 폭력까지도 모두 구원이 되었다. 우리의 자유를 우리가 깨닫게 되자 일어났던 기적이 크게 보이지 않게 되었다.

내가 살아있고 내가 이 시대에 보냄을 받았다면 하나님은 이 시대에 나를 인하여 빛을 비추시고 생명을 비추시고 은혜와 진리를 베풀고 계신다고 이해를 해야 한다.

세상은 우리를 그렇게 대접하지 않는다. 예수님께 그랬듯이. 그런데 우리는 부활과 생명의 결론을 이미 알고 있으니 역추적하여 우리에게 힘과 권능이 있어야 할 것으로 왜곡시키고 있다. 그것이 왜 잘못인가? 그렇게 되면 위대해질 수있는 기회가 없어진다.

(3) 사랑하며 섬기며 용서하며 그렇게 하나님이 예수를 보내시면서까지 자기를 증명하신 거룩함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권능은 사랑이다. 요한일서가 증언하고 있다. 사랑은 이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다. 사랑은 쉽지 않다.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왜 오래 참는 것으로 시작하는가? 상대가 완성되고 상대가 복 받기를 바라고 참는 것이다. 상대가 우리에게 주어진 복을 알고 그 복을 받기를 기다려 주는 것, 기회를 주는 것이 사랑이다.

우리는 심판을 빨리 도입하려고 한다. 그 이유는 폭력을 행사하려는 것이다. 폭력을 행사하려는 이유는 내가 지금 만족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성도들의 간절한 소원은 무엇인가?
‘하나님 언제까지니이까?’

이것은 시 13편이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역사 내내 울부짖었던 고난의 역사 문이자 기도이다. 신약시대에도 동일한 기도문이 우리에게 있다. 너무 힘이 들어서 그렇다. 예수님도 그러셨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나님은 여기까지 몰아넣으신다. 겟세마네 기도에서 내가 언급했었다.

아버지여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제게서 비켜주옵소서,
하나님은 대답하신다. 더 가자.

벤허에서도 보인다. 노예로 팔려가면서 우물 앞에서 물 한잔이 먹고 싶은데 간수가 물을 주지 않는다. 저놈에게는 물을 주지 마.
예수님이 오셔서 주신다. 벤허를 풀어 주시지 않는다. 물을 먹이고 노예로 가서 살게 하신다. 물을 먹는다. 이 말이 세상에서 가지는 또 다른 의미를 알고 계시지 않는가? 벤허는 물을 먹은 것이다. 그는 왜 그 인생을 걸어야 하는가?

그가 복수를 해서는 답이 나오지 않는다, 는 과정을 알아가야 했기 때문이고 그보다 더 중요한 과정은 없었다.

다. 결 어

(1) 우리의 인생에서 우리를 좋게 하는 것이 행복이요, 자랑이요, 보상이라면 우리는 예수를 믿는다는 말을 감히 할 수가 없다.

예수를 믿는다는 고백을 한 후 그에게 그것이 진정한 복이 되려면 많은 시행착오가 필요하다. 예수를 믿었으니 해결해 주십시오, 가 먼저 온다. 예수를 믿었으니 아쉽지 않게 해 주십시오, 가 제일 먼저 찾아온다.

실현될 수 없다면 그 하루는 내 것이 아니며 헛된 것이다. 죽어서 천국 가면 받을 보상으로 뒤로 미룰 문제는 아니다. 지금 해보라는 것이요 지금 만들어지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 인생 앞에 부름을 받았다.

(2) 그 많은 기적을 오늘 내 인생 속에서는 왜 한 번도 안 해 주시는가? 이런 원망 속에 살고 있다면 아주 잘 못 알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기적 속에 있다.

우리는 임마누엘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생명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 안에 있으며 그 영광은 은혜와 진리를 내용으로 한다.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러 가서 의인 열 명이 있으면, 이라고 얘기한 것 같이, 우리 시대와 우리 이웃과 우리 사회와 우리 역사 앞에 하나님이 일하시는 실제적인 증거가 우리이다.

이 권능과 기적과 소망이 우리라는 것을 이해하여 하루 하루를 승리하기 바란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우리에게 큰 권능을 주셨습니다. 그 권능은 아버지의 기쁘신 뜻이요,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신 은혜요 진리요 영광입니다. 이 세상을 살리고 인간을 인간답게 하며 우리 인생을 복되게 하는 참다운 내용이 하나님의 약속과 의지 속에 있습니다.

스스로를 위하여 이웃을 위하여 하나님이 보내신 이 세상을 위하여 눈멀고 병들고 분노하고 보복하고 자멸하는 이 세태 속에서 우리가 생명과 길과 소망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3. 에필로그

(1) 거리 두기 4단계가 실시되었다. 한마디로 모이지 말라는 뜻이다. 우리 교회는 방역에 모범적인 교회라 항상 시키는 대로 한다. 좋은 일이다. 왜 교회가 방역을 소홀히 하겠는가? 몇 달 전 거리 두기 2단계일 때 교회에서 열린 결혼식에 갔었다.

결혼식 시작 시간이 다 되어 가는데 하객들 중에 자리를 비워 앉지 않거나 소란스러우니까 목사님 표정이 안 좋으셨다. 나는 목사님을 조금 안다. 기초적인 질서, 기본적인 예의 이런 것들에서 벗어나면 아주 싫어하신다. 좋아하는 사람이야 없겠지만.
목사님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라고 선언하시지만, 그분은 질서의 하나님이시기도 하다, 라고 선언하시는 것이다.

(2) 수련회를 못 해서 아쉬운 것이 있다. 남포 가족 노래자랑에 못 나가는 것이다. 나는 남포 가족 노래자랑을 좋아하고 최근 3년 연속 출연했다. 최우수상은 아니어도 인기상은 받았을 거라고 자부한다. 내가 바람직하다고 여기는 노래자랑은 이런 것이다.

재작년인가, 남성성가대였나(?) 합창을 하는데 빨간 구두 아가씨였다. (아시나요? 남일해라는 가수를) 퍼포몬스도 좋았고 재미있었다.

(3) 제발 남포가족 노래자랑을 찬송가나 복음성가나 그 비슷한 메뉴들로 전부 채우지는 말아달라. 수련회는 쉬는 시간 이기도 하다. 그러니 좀 까불거나 흥겨운 시간이 있어야 한다.

금년에 택트로 노래자랑을 했다면 나는 또 출연했다. 곡목은? BTS의 Butter이다. (안무는 서정걸 목사가 안 계실테니 내 마음대로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