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요한복음(44) (요 19:1~16)

2021. 4. 4. (일)
박 영 선 목사

1. 들어가는 글

(1) 4월 8일(목) 나는 교회에서 보내신 택배 하나를 받았다. 발신인이 권사회로 되어 있어서 당연히 집사람에게 온 것으로 생각하여 안 열어보았는데, 밤에 집에 와서 보니 내 앞으로 온 선물 박스였다.

권사회의 권사님들께서 평소에도 환우들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시지만, 부활주일을 맞아 환자들이 힘내라고 선물까지 보내신 것이다.

(2) 선물 박스 맨 위에는 담임 목사님께서 보내주신 꽃 편지가 있었다. (수사적인 표현이 아니다. 정말 꽃이 달려 있었다.) 그 옆에는 원로 목사님께서 최근에 발간하신 ⌜씨 뿌리는 비유」라는 소책자가 있었다. 열어보니 첫 장에 눈에 익숙한 글씨가 있다.

이재철 집사님! 2021.3 박 영 선

(3) 그 밑에는 선물들이 있었다. 지면 관계상 간략히 쓰겠다.

감자칩, 후루트링, 스니커스 쵸코릿, 리츠 비스켓, 오레오 과자, 웰치스 후르츠 스넥, 생과자, 카프리선, 스위티자몽, 맛있는 우유(GT), 말린 땅콩 등이 있었다.
나는 주일학교 교사를 40년 넘게 해와서 아이들에게는 이런 행복 꾸러미를 주기도 하고, 담는 일도 해보기는 했다.

그러나 내가 아이가 되어 이 행복한 선물을 받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4) 감사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원로 목사님.
감사합니다, 담임 목사님.
감사합니다, 권사회 회장님과 권사님들.

2. 내 용

가. 서 론

(1) 예수님께서는 결국 빌라도 법정에서 사형을 언도 받는 셈이다. 빌라도는 끝까지 그 책임을 지지 않으려 하고, 문제를 다시 유대인들에게 넘기지만 유대인들의 주장은 한결같이, 우리에겐 사형 집행권이 없습니다, 라는 것이었다.

빌라도는 십자가에 못박도록 내어준다. 빌라도는 갈팡질팡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몇 번이나 묻고, 그 대답에 대하여 수긍하지 않으면서도 걱정스러워서 채찍질도 하고 군인들에게 내어 주어서 폭행을 당하게도 하고 홍포를 입히고, 가시관을 씌우고 하는 일들을 방관한다.

빌라도의 행보와 예수님의 반응이 첨예한 갈등을 일으키는 것은 네가 왕이냐, 아니냐 하는 것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네가 무엇이냐? 빌라도의 질문은 한결같았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 맞냐? 그렇다. 그러면 왕이면서 아무런 힘도 배경도 근거도 없이 그런 말을 하느냐?

(2) 예수님은 대답하신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 그러자 빌라도는 결정적인 질문을 한다.

진리가 뭐냐? 이것은 질문이라기보다는 조롱이었다. 빌라도는 세상 권력의 대표자다. 그는 사형 집행권이 있으며 세계를 지배하는 로마 황제의 신하이다.

예수님은 메시아이고 하나님의 아들이고 유대인의 왕이지만, 세상이 가지고 있고 증명하고 싶어 하는 권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러한 갈등이 빌라도와 예수님 사이에 극명하게 대립 되어 있다.

진리는 당연히 힘 위에 서 있는 것 아니냐?

나. 본 론

(1) 이 세상의 진리는 다 권력에 근거하고 있다. 그리고 세상의 권력은 전부, 폭력이다.

예수님이 주장하시는 진리는 사랑 위에 서 있다. 이것이 복음서이다. 기독교가 말하는 주장은 모두 사랑을 근거로 하여 제시된다. 권위인 것이다.

사실 세상에서는 권력과 권위가 잘 구분되지 않는다. 세상은 언제나 옳은 일을 한다고 하면서, 정의를 구현하고 평화를 만들겠다고 약속을 하지만 실제로는 늘 폭력을 동원한다. 피 흘리며 싸우며 공포를 자아낸다. 인류역사가 증언한다.

예수님은 똑같은 단어에 달리 행동하신다. 정의와 평화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신다. 그렇게 해서 진리란 사랑 위에 서 있으며 사랑은 언제나 폭력을 이긴다고 십자가를 통해 증명하셨다.

그래서 성경은 권력을 말할 때 힘이라고 설명하지 않는다 (요일4:18) 사랑 안에는 공포가 없다. 사랑은 힘이 없는 게 아니라 폭력이 없다. 그래서 예수님은 답하시는 것이다. 내가 진리이다.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이러한 예수님의 모든 반응이 세상과 어떻게 충돌하는지 보지 못하면, 우리는 진리에 대하여, 권력으로 생각했다가, 권위로 생각했다가를 반복하게 된다.

우리가 가지고 싶은 진리는 힘이다. 이 힘은 예수 안에서 보여 주셨던 공포를 이기는 힘이 아니라, 사랑이기는 하지만 권력이 있는 사랑을 원한다.

우리는 예수님께서도 빌라도에게 지셨듯이, 세상에 대해서는 이길 수 없으니까, 우리끼리 모였을 때 폭력화한다.

소리높여 기도할 때, 큰 소리로 찬양하고 눈물 흘릴 때, 우리는 우리끼리라도 잠시 권력을 확인한다. 그러니 이것이 현실에서 무슨 실력이 되겠는가?

우리의 현실 적응은 예수님과 같아야 한다. 내가 유대인의 왕인데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다, 라는 말씀을 이해하고 그 죽음을 이해해야 한다.

마치 우리가 패자 같고, 틀린 것 같고, 알아주지 않는 삶을 살지만, 이것을 신앙생활로 연결하지 못하고 몹시 분하게 생각한다. 여기를 지나면 체념한다. 그래서 아무도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다. 수많은 기회를 놓치고 한탄만 하고 있다. 그러다가 나이가 들면 세상 사람과 똑같은 결론에 이른다.

산다는 게 다 그런 거야. 인생이 다 그렇지 뭐.
이렇게 말한다는 것은 큰 죄이다.

여기까지 오면서 겪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었다면, 진리에, 영생에, 하늘나라의 영광에 가까워서 있어야 되는 것 아닌가?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라고 하신 말씀을 믿고, 분한 현실을, 다 보여 줄 수 없는 현실을 감당해야 한다. 설명할 수도, 확인할 수도, 보상도 없는, 그런 인생을 살아야 한다.

가끔 성도들이 내게 와서 부탁한다.
목사님 좀 행복한 설교 해주세요.

베드로가 어떤 야단을 맞았는가?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뜻을 생각하는 도다.

여기를 명분화 하거나, 감동으로 얽어매려는 시도는 다 거짓이다. 그렇게 항복이 안 되고서는 실천을 할 수 없다. 우리의 어려움은 하나님의 권능이고, 하나님의 지혜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보상받지 못하는 삶을 산다고 생각해서 거부하거나 말씀대로 살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의 제자이고, 약속을 받은 자들이며, 부름을 받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 붙들려 있는데도 그런 삶을 실천하지는 않는다. 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네가 감히 나에게 누구냐고 묻는 거냐?

믿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 예수를 못 알아보고 예수를 채찍질해? 라고 경멸하는 바람에 우리는 억눌린 분노를 쌓게 된다.

그리고 생각한다. 예수님은 하지 않았지만, 내가 대신하겠다. 이 유혹에 빠져 막상 해야 할 일을 못 한다. 살아야 할 오늘을 외면하고 있다.

(요1:14) 여기서 진리가 나온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8:32)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하리라.
(마11:28)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예수님은 나는 폭력과 공포의 존재가 아니라고 여러 곳에서 말씀하신다.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나는 승부를 내러 오지 않았다. 나는 보복하러 오지 않았다. 알아 듣는 사람들에게는 복을, 못 알아듣는 사람들에게는 심판을 선언하러 오지 않았다. 나는 이 세상을 구원하러 왔다.

그러나 우리는 편 가름을 해서 우리를 확인하려고 한다.
난 믿었어, 너는 안 믿었어.
난 열심히 기도했어, 넌 게을렀어.

신앙의 긍정적인 기회를 놓치고 있으니까 부정적으로밖에는 확인이 안 된다.

저 요새 힘들어요. 집안에 어려운 일이 있어요.
어떻게 하면 좋아요?

내가 너 교회 안 나올 때부터 알아봤다.
얼마나 힘이 듣겠느냐, 라는 말을 한마디도 못 한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무엇을 수고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 모두 승부에 잡혀있다. 폭력에 잡혀있다. 그러나 예수를 믿게 되었다. 어떻게 할까?

하나님은 답을 안 주시고, 세상은 계속 으르렁거리고, 무슨 수가 없으니까 체념하고 산다. 그래서 우리는 억울하다. 차라리 예수를 몰랐으면 편하게 죄짓고 살걸, 괜히 예수는 믿어 가지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된 것이 원망스럽다.

설교를 하다 보면, 이해할 수 없는 부분에서 눈물을 흘리는 분들이 있다. 설교자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어떤 단어 하나에 울어 버린다. 무엇이라고 말하며 우는가? 하나님 제가 바로 그 억울한 사람입니다.

울고 나면 속이 시원해져서 간다고 한다. 무슨 뜻일까? 우는 게 왜 속이 시원한가? 눈물을 닦고 다음 한 걸음을 걸어야 하는 것 아닌가? 여기가 우리 모두가 정체되어 있는 자리이다.
예수님이 지금 겪고 있는 고난, 폭행을 당하거나, 침 뱉음을 당하거나, 모욕을 당하거나, 옷이 벗겨지거나 하는 것은 모두 폭력이 하는 짓이다. 폭력은 이렇게 부끄러운 짓만 만들어낸다.

예수님은 다만 이것을 견디신 것이 아니다. 이것을 넘어서신 것이다. 이것이 수치도, 고난도, 비극도 아닌 목적이 있었기 그 때문에 이 길을 걸어가신 것이다.

비를 맞을 수 있고 먼지를 뒤집어 쓸 수 있지만 위대한 목적지를 향해 가시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없이 걸어가셨다. 잘 견디셨다.

이렇게 아버지께 영광돌리며 우리 모두의 기쁨을 만들어 내셨다. 그리고 우리에게 물으신다.

너는 빌라도이냐? 내 제자이냐?

우린 여기에 제대로 답을 못한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라고 답할 때 우리는 기대한다. 보상해 주세요. 보복해 주세요.

(눅17:1~4) 같은 내용이 마18:6~7 에서도 등장하는데 마태복음은 작은 자를 어린아이로 표현하고 있다. 왜 어린아이가 등장하는가?

어린아이는 무력하다는 것이다. 권력에서 제외되어 있다는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만들려고 하는 것은 권력에 근거하지 않는다. 그러니 누가 너에게 잘못했을 때 보복하려고 하지 말고 그가 용서를 구하면 얼마든지 용서해주어라.

이것은 윤리가 아니다. 내가 세우는 나라의 목적과 성격과 본질이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눅17:5~6)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제자들이 놀랐다. 그들도 마음에 적개심과 보복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예수에게 나와서 많은 혜택을 입지만 그것이 제자들에게 권력이 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예수님을 따라 다녔다고 해서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보상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제자들도 마음에 이런 생각이 있었다.

나는 예수 믿고 저 사람은 안 믿는데 왜 내가 어려워야 합니까?

요한은 이렇게까지 말했다.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기를 원하시나이까 (눅9:55)

(2) (눅17:7~10) 놀라운 비유다. 종이 종일 밭일하고 돌아왔는데, 어 수고했다, 너 먼저 밥 먹어라, 라고 할 주인은 없다.

야, 너 수고한 건 알지만 나 배고프다. 밥상 차려라.
그 후에 너는 먹어라.

이렇게 종이 했다고 해서 감사할 주인이 있느냐? 그럴 리가 없다. 주인이 종이 이렇게 다 한 후에, 주인이 너 수고했다고 칭찬하면 종은, 저는 무익한 종입니다, 라고 해야 한다.

무익한 종이란 무슨 뜻일까? 제가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라는 뜻이다. 그가 맡은 일을 하는 것이 그에게 명예이다. 그는 보상받는 것보다 더 큰 일에 종이 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너희는 이제 내가 이룬 이 구원과 이 복음을 맡을 자들이다. 내가 문제를 해결하고 성취하는 것은 내가 할 것이지만, 너희는 그 일에 종이 되어 너희 생애와 너희 후손들 앞에 책임을 져야 한다.

제자들은 정말 무익해 보였다. 예루살렘교회도 나중에 박살이 났다. 하나님은 이런 방식으로 복음 전파를 시작하셨고 그것이 각 세대에 전송되어 오늘 우리에게까지도 복음이 전해졌다.

그러니 우리도 무익한 종인 것이다. 대단히 놀라운 기적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영광으로 여기지 않는다. 이것이 영광이 아니라면 우리는 계급장을 붙여야 한다. 아래와 위를 구별해야 하고 나와 적을 나누어 싸워야 한다.

우리는 관심이 없을 수 있지만, 하나님은 그 일에 우리에게 직분을 주시고 우리에게 그 삶을 살라고 하신다.

여러분은 매번의 경우마다, 나는 지금 빌라도인가, 나는 지금 예수인가를 자문해야 한다.

로완 윌리암스의 책에서는 갈팡질팡하는 빌라도의 행보를 이렇게 해석한다. 빌라도가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너희들은 왜 이 말도 안 되는 일은 나에게 떠넘기느냐? 너희들이 봐도 말이 안 되는 것 아니냐? 나는 이 일에 책임지기 싫다. 너희들이 하고 싶은 대로 해라. 나는 상관하지 않겠다”

그에게는 권력과 지위를 유지하는 것 이외에 진정한 진리, 진정한 가치, 진정한 명예, 진정한 영광이라는 것은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
그렇게 예수는 죽는다.

다. 결 어

(1) 오늘은 부활절이다. 월터 브루그만의 예언자의 기도라는 책에 실린 기도 중 한 편을 읽겠다.

“이 놀라운 아침에

견딜 수 없는 침묵으로 가득 찬 좌절의 밤 우리는 그 밤을 압니다. 춥고 굶주리며 억눌린 형제들은 더 잘 그런 밤을 알겠지요. 주님 당신 또한 언약궤가 아스돗에 있었던 밤처럼 고독과 치욕으로 가득한 밤을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당신을 버리려고 했던 무수한 시도, 또한 알고 계십니다. 당신께 그 밤이 어땠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어쩌면 우리와 비슷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밤이 지나고 아침에 당신은 우리를 놀라게 하십니다. 수천 년 전 블레셋 사람들에게 그렇게 하셨듯 우리가 공들인 계획을 무너뜨리시고, 우리가 섬기는 우상들을 산 산 조각 내시고 우리의 계획과 욕망을 꺾으십니다.

그렇게 당신은 아침에 여기며 당신 홀로 빛과 영광과 권능 가운데 계십니다. 오늘 우리는 기나긴 밤 한가운데에서도 영광 속에 계시는 당신을 봅니다.

주님, 오늘 우리의 많고 많은 어두움 가운데 영광의 빛으로 임하소서, 당신의 새로운 날, 부활의 아침으로 우리를 이끄소서.”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몰라서도 못하고 알아도 못하는 우리의 현실 신앙이 오늘 말씀으로 한 걸음 앞으로 걸어 나아갈 수 있는 위대한 시각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기적이고, 성육신을 입고 사망 권세를 이기고, 부활을 만드는 증인이요 구체적인 실존이라는 것을 깨달아 자신의 인생을 위대하게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3. 에필로그

(1) 눅17:10은 늘 의문이었다. 아니 내가 주님께 받은 명령을 다행했으면, 잘했다 신실한 종아, 이런 칭찬을 받아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성경은 찬바람이 확 도는 냉정한 말씀을 하신다.

네가 할 일 다 했어도 저는 무익한 종입니다, 라고 해라. 이 구절을 읽고도 성경의 냉정함에 서운한 적이 없었다면 당신은 당장 신학교에 갈 것을 깊이 고민해 보아야 한다. 굉장한 믿음이기 때문이다.

나는 늘 서운했다. 더구나 같은 누가복음 17장 바로 아래에는 열 명의 나병 환자가 예수가 지나가시는 것을 멀리서 보고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부르짖었더니 예수님께서는 열 명을 다 낫게 해주셨다. 이런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라 서운함은 계속되었다.

(2) 오랜 숙제가 오늘(4/4, 일) 풀렸다. 내가 주님께 명령받은 모든 일을 다 하는 것이야말로 나에게 영광이요 가장 큰 명예이다. 그걸 조금이라도 보상 운운하는 순간, 내게 주어진 영광과 명예는 보상을 받는 만큼 흠집이 생긴다.

주님께서는 너무나 위대한 길을 내 앞에 열어 놓으셨고 그 길을 내가 묵묵히 가는 것이 최고의 영광이요 명예이다.

그러니 간절히 주님 저 잘했지요? 하고 싶겠지만, 주님, 주님께서 다 하셨습니다, 저는 무익한 종입니다, 라고 말하라. 그게 복이다.

(3) 나는 오랫동안 복을 복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발로 차면서 지내왔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