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요한복음(38) (요 17:8~19)

2021. 1. 3. (일)
박 영 선 목사

1. 들어가는 글

(1) 폭설이다. 1월 6일(목) 저녁, 온 국민이 눈 때문에 곤욕을 치루었다. 나도 폭설의 한가운데 있었다. 일 때문에 수원에 갔다가 저녁 7시에 내 차로 집으로 출발했다. 집에는 12시에 도착했다.

떠날 때 눈발 몇 개가 날려 빨리 가야지 했는데 30분도 못가 도로는 눈밭이 되었고 고속도로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차들이 거북이 걸음을 할 때는 그래도 좀 나았다. 어느 구간, 도로가 넓어지고 차량 간격이 멀어지자, 그야말로 각자 도생이었다.

미끄러진 차, 뒤집힌 차, 차끼리 추돌한 차, 벽을 받고 서 있는 차, 기어서라도 가는 차.

나는 기어서 집에는 왔다.

(2) 오는 내내 기도를 안 할 수가 없었다.

“주여, 은혜를 내려주옵소서. 집에까지 무사히 가게 하옵소서.”

이 기도를 수천 번 올리면서 왔다. 집 앞에서는 집사람이 그 밤에 집 앞길 도로의 눈을 쓸고 있었다. 주차를 겨우 하고 다시 감사 기도를 드리고 같이 들어오는데,
“나도 계속 방언으로 기도하고 있었어요.”

(3)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약 1:6)” 믿음이란 무엇일까? 25년 전 내가 남포교회에 처음 왔을 때 키 크고 잘생긴 목사님께서 (나중에 그분이 이대원 목사님이라는 걸 알았다.) 주신 작은 책자는 말 그대로 충격이었다.

믿음은 믿음 A와 믿음 B가 있는데 이 두 개의 믿음이 만나서 우리를 바른 믿음의 길로 인도한다. 믿음 A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일방적으로 구원하신 믿음으로 은혜라고 표현해도 된다. 믿음 B는 그렇게 구원을 받은 우리가 날마다 현실에 도전하며 성도로서 실력을 쌓아가는 것인데 성화라고 표현할 수 있다.

첫 번째, 충격은 믿음과 은혜가 섞였다는 것이다. 믿음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이고 은혜는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는 것인데, 이것이 어떻게 같을 수 있는가?

두 번째 충격은 위 질문의 대답에 쓰여 있었다.

구원받기 전, 우리는 영적으로 시체였다. 그래서 우리는 복음을 들을 수 없었다. 우리가 복음을 들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이후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구원에 전혀 개입도 간섭도 할 수 없다는 명백한 논증이었다.

최근 어떤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니 이렇게 말씀하신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과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받아들이는 순종에서 시작한다.

표현은 조금 다르지만 두 분 목사님의 말씀이나 생각이 매우 근접해 있음은 분명하다. 고수끼리는 통한다.

2. 내 용

가. 서 론

(1) 요한복음 17장은 예수님이 돌아가시기 직전에 마지막 만찬 석상에서 행하신 기도로 특별히 대제사장적 기도라고 우리가 기억하고 있다.

오늘 본문에는 중요한 내용 세 개가 나온다. 하나님의 거룩하심, 그리고 하나님께서 예수님과 친밀하게 연합되었고, 또 그를 보내신 것같이 우리가 성부 성자 성령의 연합에 부름받고 있으며, 성부 하나님이 성자 하나님을 보낸 것 같이 예수님께서 우리를 세상에 보낸다, 하는 3가지 주제가 아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2)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오늘 본문에도 이렇게 소개되고 있다.

(11절) 나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여기서 거룩함을 언급하는 것은 우리를 부르기 위해서이다.

예수님은 하나님과의 연합을 요청하면서 거룩함으로 시작한다. 이것은 나중에 우리를 보내는 일에도 언급이 된다.
(17절)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나로 하여금 그들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다

그러니까 보내시는 이가 거룩한 것 같이 우리도, 우리의 보냄을 받는 일이 거룩한 일이다, 라고 얘기한다.

나. 본 론

(1) 우리가 거룩을 생각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개념이 구별된다는 것이다. 거룩하다는 것은 세상과 구별되어 있다는 것이다. 초월적이라는 뜻이다. 이때의 초월은 도덕성에서 말하는 도덕을 넘어서는 것이다.

속된 것과 구별되는 천상의 것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따라서 진리나 분리가 먼저 생각되어진다.

그러나 구별에 대한 중요한 개념이 로완 윌리엄스에 의해 이렇게 소개된다.

로완 윌리암스의 가치는 그가 성경에 있는 단어들의 개념을 세상적 개념에서 성경적 개념으로 제대로 이해시킨다는 것이다.

그는 이 거룩을 구별로 보지 않고 연합으로 본다. 참여로 보는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하심, 예수님의 거룩하심, 또 보내는 자들에게 구하는 거룩은 모두 연합과 참여의 뜻에 묶여 있다.
하나님의 거룩은 하나님이 우리와 멀리 떨어져 있고, 극명하게 대조되는 간격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찾아오심으로 이해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존재론적으로 비교할 수 없는 차이가 있다. 하나님께는 우리가 가까이 할 수 없는 간격이 있다. 그러나 요한복음 17장에서는 예수님은, 나는 이제 곧 아버지께 갑니다, 그러나 나는 저들을 보냅니다, 내가 저들을 보내는 것은 아버지가 나를 보내신 바로 그 방법입니다, 라고 말씀하신다.

또한, 아버지께서 보내신 뜻과도 같은 뜻이며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저들도 우리와 하나이기 때문에 내가 아버지의 뜻을 이룬 것 같이 저들도 아버지의 뜻을 이루게 될 것이며 이 일에 내가 증인입니다, 라고도 하신다.

우리가 신앙에서 거룩하고 완벽한 것을 구하고 그래서 책임과 의무로 연결되어 있다면 다시 생각해야 한다.

우리의 생애는 예수님의 성육신처럼, 예수님이 아버지를 드러내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려고 왔다, 라고 하신 것처럼, 예수님께서 우리와 아버지를 연결시켜 주신 것처럼 살아야 한다.

이런 일은 하나님과의 연합이 있어야만 가능하며 우리가 받은 위임은 우리의 영광이며 동시에 아버지의 영광이라고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2) 우리의 신앙 이해는 세상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할 일을 다하셨으니 이제는 하나님께 갚자, 라고 생각하는데 성경은 다르다.
생명이란 비가 오면 자란다, 해가 나면 자란다, 씨를 심으면 싹이 난다, 라는 식으로 유기적인 관계와 질서를 가르친다.

우리가 세상에 속하지 않고 거룩해야 한다고 할 때, 우리는 죄와 구별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우선적으로 한다. 그러나 예수님이 세상과 구별된다면, 예수님의 성육신은 무엇인가? 그는 세상에 오셨고, 죄인을 구하려고 오셨고, 죄인 취급을 받으셨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로완 윌리암스의 도움을 받아서, 거룩은 하나님의 참여이고 찾아오심이다, 라고 이해한다면 단순히 거룩이 성속을 구별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훨씬 더 적극적이다. 거룩은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우리가 보내질 때에도, 우리가 성자 예수님을 역할을 이으러 간다는 뜻이다. 그러니 우리는 성삼위와 연합되며 그런 지위와 대접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에서 못 볼 것과 말이 안 되는 일을 만났을 때, 하나님이 바로 저걸 고치고, 회복하고, 재창조하시기 위해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을 깨닫고 받아들이게 된다.

늘 웃으라는 얘기도 아니고, 늘 낙관적으로 생각하라는 얘기도 아니다. 처세술이나 캐치프레이즈로 생각하여 신자의 삶을 영위하라는 것도 아니다.

전체저인 안목이 있어야 한다. 존재론과 운명론과 세계관을 정립해야 한다. 그래야 이 세상이 비록 하나님의 심판으로 끝이 나지만, 하나님이 어떻게 그 심판을 완성해 가시는가, 어떻게 은혜와 영광을 받으시기에 충분한 자리에 가시는가, 하는 것에 대한 이해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하나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신다. 아버지와 아들이 연합되었을 때, 세상이 아버지와 화목했으며, 우리와 삼위 하나님의 교제가 확대되었다는 사실을 기도 속에서 고백하신다. 이것이 창조고 재창조이고 종말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시작과 진행과 종말이 함께 눈 앞에 펼쳐지는 국면을 말씀하시며 이 내용을 기도하고 계신다.

우리가 삼위일체라는 말을 자주 듣지만, 우리에게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이 어떻게 하나인가는 하는 것은 만만치 않은 내용이다.

우리는 모르겠다, 고 하거나 끝까지 알 필요는 없다, 고 넘어가는데 성경은 말한다.

하나님은 창조 위에 계시는 초월자이시며 그 초월자가 실제로 세상에 오셔서 역사 속에 들어오셨다. 그리고 지금까지 신자들과 함께 생애를 함께 하고 계신다, 는 것이다.

이 일을 한 분이 하셨다는 것이 아니라, 세분이 각각 독립된 존재로 하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을 어떻게 묶어야 할까?

하나님은 세상에 성자 하나님을 보내셨고 성자 하나님은 우리를 세상에 보내셔서 성자 하나님의 일을 잇게 하셨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유업을 잇게 하신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은 동등하시며 그것처럼 하나님은 성자 하나님과 우리를 동등한 위치에 두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우리 안에 계셔서 일하고 계신다.
이런 풍성한 개념을 우리에게 허락하셨고 또한 우리가 받아드릴 것을 요구하고 계신다.

하나님은 신이시니까 나는 한사람인데 내가 천지도 창조했고, 세상에도 왔으며, 아직도 세상에 있다고 하셔도 충분하다. 그러나 그렇게 안 하신다. 하나님은 이런 일을 세 위의 연합적인 관계와 교제 속에서 일하시고 있다고 굳이 말씀하신다. 우리에게 유익하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하나님은 직접 하시면 될 일을 우리와 관계를 맺으시고 우리에게 하라고 하신다. 우리는 이것이 고통스럽다. 그래서 왜 이렇게 하시는가, 라고 묻지만 이런 관계 속에서 일하는 것이 우리를 위한 것이고 우리에게 유익하다고 답을 하신다.

네가 울고 나에게 기도하고 내가 네게 답하고, 너의 눈물과 슬픔과 세상을 찾아가는 일이 오히려 기적이고 은혜이고 복이니까 그 인생을 살아라.

그 발걸음마다, 너의 기도마다, 너의 모든 호흡마다, 나는 너와 함께 하겠다. 네 기도를 듣고, 네 비명을 듣고, 네 발걸음을 복되게 하겠다.

이러한 내용은 음악으로 생각해도 이해가 된다. 혼자 노래를 잘하는 것보다, 화음은 아름답다. 그래서 중창이 되고 합창이 된다. 음악을 하는 사람들만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듣는 우리 모두가 공감한다. 너희는 하나 된 것을 즐겨라. 그 영광을 누려라.

그런데 예수님은 왜 가시는가? 예수님이 떠나면 우리가 손해이고 우리는 목자 잃은 양이 되는 것 아닌가?
예수님은 아니라고 하신다. 이제 내가 씨를 심었고 싹이 났다. 그렇게 내 할 일을 했으니 너희가 내 역할을 해라. 이렇게 하면 아버지의 거룩하심과 나의 기쁨이 너희의 것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생애는 만만치 않지만,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깊으신 뜻이고 놀라운 지혜이고 상상할 수 없이 거룩하신 모습을 알게 하시는 것이다.

우리의 인생을 이런 명령을 받은 자로 살고 있다고 인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하시는 신비에 우리가 들어가는 것이다.

놀라운 일 아닌가? 어떤가? 그냥 정답을 말하고 백 점 받고 빨리 하늘나라에 가고 싶은가?

아니다. 이런 신비와 이런 드라마를 살아가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 이것이 영광의 자리에 초대받은 일인데도 잘 이해하지 못한다. 예수를 믿고 난 후 만나는 이 첫 문턱을 넘어야 한다. 쉬운 인생을 살고자 하는 문턱이 늘 우리를 넘어지게 한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얼마나 대단한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을 이제 우리 보고 하라고 하신다. 따라서 종말이라는 말이 우리에게 공포스럽게 이해될 이유는 없다. 완벽한 절정의 대단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모든 피조물이 회복되고 완성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일에 참여하고 있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가 내 안에 계셔서 하나가 되고 기쁨과 영광을 나누고 있다. 예수님은 이 기도를 하셨던 것이다.

수사적으로 말해 보겠다. 이일은 꼭 해야 하는 일은 아니다. 그러나 안 하면 바보가 되는 것이다. 인간과 인생의 현실을 외면하고 도망가는 것은 촬영현장에서 도망가는 것이다.

(3) 고등학교 시절 교내 밴드부가 너무 멋있게 보여 입회를 했다. 나는 음정과 박자가 틀리는 사람이었는데, 반장이 나를 테스트 해 보더니 바리톤이라는 악기를 주었다. 바리톤은 매우 고운 소리가 나는 악기이고, 현악의 첼로 악보를 받는 악기이다. 아름답지만 소리는 작다. 브라스 밴드에서는 아무렇게나 분다고 해도 괜찮았다. 그래서 나는 밴드부에서 주로 심부름을 맡았다. 물 떠오고 잔일을 했다. 그러나 행복했다. 음악 속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행진곡만 연주했지만, 함께 한다는 것 때문에 행복했다.

이런 기쁨을 증명하는 역사적인 증거가 나폴레옹 군대에 있었다. 나폴레옹이 유럽을 제패한 이유 중 하나는 그의 군대가 다른 나라의 군대보다 용감하다는 것이었다.

유럽에서 근대가 시작되었지만, 서구는 귀족과 서민의 구분이 확연했다. 귀족은 상류 지배층을, 서민은 일반 백성 층을 유지하고 있었다.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이 있었던 것이다.

군대에도 이러한 질서가 유지되어 귀족의 자손은 장교가 되고, 서민의 자손은 사병이 되었다. 그래서 사병이 전쟁 중에 공을 세워도 장교가 될 수 없었는데 나폴레옹은 이와 달리 사병이 공을 세우는 경우, 장교로 진급을 시켰다. 이것이 사병들의 사기를 진작시켰다. 이것이 나폴레옹 군대를 용감하게 만든 이유 중 하나였다.

다. 결 어

(1) 우리 신자의 경우 목숨을 걸었다는 것이 치열한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그것이 진정한 가치처럼 되었다.

지나간 시절, 금식과 철야기도의 진정성을 이해하지만, 이것이 지나쳐 명분과 구호뿐이고 내용이 없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니 어쩌지 못하는 몸부림을 쳤지만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2) 우리의 생애는 하나님이 그 거룩하신 뜻을, 창조하실 때 은혜를 베푸시는 일에서 나타내셨고, 그것을 우리와 함께 나누자고 하시는 것이 우리의 삶의 현장이다.

그 자리에 부르시고, 그 일을 부르시며, 그 역할을 우리에게 허락하신다. 이 인생을 살아낸다면, 여러분이 고단하게 살아왔던 인생의 의문이 풀리게 된다. 여러분이, 기쁜 순종이 있고 이해가 있고 기대가 있는 인생을 살기 바란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귀히 여기시며,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라 하시고, 우리를 자녀라고 하시고, 내가 어찌 너희를 잊겠느냐, 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내 아들을 너희에게 주어 불러낸 너희를 누가 나와 가를 수 있겠느냐, 너희의 인생과 운명이 어찌 쉽게 포기되겠느냐, 너희는 내 기쁨과 의지와 소망이니라, 라는 말씀 앞에 섰습니다. 여기서 시작하여 우리 생애 내내 이 영광과 기쁨과 자랑을 누리는 정체성을 갖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3. 에필로그

(1) 목사님께서 자주 가시던 당구장이 코로나 때문에 임시로 문을 닫았다. 건강이 나빠지셔서 특별한 운동을 못 하시는 목사님께 당구는 꼭 필요한 운동이었는데, 요즘은 어떻게 하셔야 하나, 진심으로 걱정이 된다.

목사님께서는 당구를 치시는 여러 가지 이유 중, 참으로 은혜가 넘치는 이유 한 가지를 우리에게 말씀해 주셨다.

설교자가 조심해야 될 행동 중 하나는, 나는 설교를 듣는 청중하고는 조금 구별이 된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고, 그 생각이 행동으로 보이면 더 안 좋다고 하셨다.

설교란 너와 내가 똑같은 위치에 있는데 하나님께서 한 사람에게는 말씀의 사역을 다른 사람들에게는 듣는 기쁨을 주신 것이다. 그러니 설교자가 천사의 말을 하거나, 특별한 사명자로서 예언을 하거나 하는 것은 설교의 일반적인 모습이 아니다. 나는 당신들과 똑같은 생각을 하고 똑같은 공간에 있고 똑같이 당구를 치는데 다만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일이 조금 다르다는 것뿐이다.

(2) 목사님과의 나 사이의 거리가 전에는 1,000걸음 정도 떨어져 있었다면 이 말씀을 들은 후의 거리는 한 걸음뿐이었다.

한 걸음만 내딛으면 바로 만날 수 있는 우리 목사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가까운 목사님을 통해 넘치는 은혜를 베풀고 계셨다.

(3) 목사님께서 당구를 즐기시는 또 하나의 이유.

당구를 워낙 잘 치시기 때문이다. 천부적인 창의력과 소질을 가지고 계신다. 증거가 있냐구요?

아니, 내가 직접 내 눈으로 본 사실이라니까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