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12. 20. 주일예배 (눅 2:1∼14)

2020. 12. 20. (일)
박 영 선 목사

1. 들어가는 글

(1) 힘든 한 해였다. 누구나 어디에 있든지 무엇을 하는 사람이든 모두에게 힘들었다. 이렇게 힘든 때에 우리는 어떻게 견디어야 할까?

야고보 사도는 말한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이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악 1:2∼4)

(2) 나는 이 말씀을 부담스러워하면서도 좋아한다. 맞는 말씀인데 참 실천하기 어려운 말씀이기 때문이다. 금 년 한 해를, 나는 박목사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보냈다.

1996년에 남포교회로 온 이후, 나는 요한복음을 테이프로, 주로 차 속에서 들었다. 음질은 좋지 않았지만, 내용은 뚜렸했다. 목사님께서는 정말 외과 의사였다. 타협 없이 말씀을 자르고 또 분석하셨다. 충격이었다. 이때 요한복음 전 테이프를 2번 정도 들었던 것 같다.

(3) 다시 보는 요한복음의 주제는 무엇인가?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지만, 따뜻함, 또는 따뜻한 위로이다.

예수님께서는 고난 속에 있는 이웃과 친구들에게 끝없이 위로의 말씀을 전하신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으니 죄를 짓지 말라. 너의 죄가 사함을 받았다. 나사로야 나오너라.

이 따뜻한 위로를 목사님께서는 조금도 식지 않게, 아니 오히려 더 따뜻하게 우리에게 전해 주셨다. 해 봐라. 다시 해 봐라. 네가 실패한 일도 결코 너에게 손해로 끝나지 않는다. 웃어라. 너는 웃을 만한 운명을 가진 존재다. 기도해라. 하나님께서는 네가 기도하기 훨씬 전부터 네게 필요한 것을 준비하고 계신다.

시련은 내년에도 계속될 전망이다. 그래서 목사님 말씀이 더욱 기다려진다. 아 참, 목사님 당신께서는 어떻게 위로를 받으실까? 걱정마라, 내가 한단다. 갑자기 이런 소리가 하늘에서 들리는 것 같다.

박영선 목사님,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2. 내 용

가. 서 론

(1) 우리가 잘 아는 예수님의 탄생이 본문에 기록되어 있다. 로마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절에 예수님께서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다.

본문에 기록된 대로 머물 여관이 없어서 마구간에서 예수를 낳고 그를 강보에 싸서 구유에 누였다. 구유는 가축들이 먹이를 먹는 큰 그릇을 말한다.

그리고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에게 천군 천사가 나타나서 이 사실을 알린다.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워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라 (12절), 라고 천군 천사가 찬송한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14절)

(2) 보통 정치적으로 음모론이라는 말이 나오면, 음모론은 어디서부터 시작이 되는가, 왜 의심이 드는가 하는 질문이 따르게 된다.

어떤 사실에 대해 context와 text가 맞지 않으면 음모론이 등장하게 된다고 한다.

예수님의 탄생은 음모론이 나오기에 딱 좋다. 하나님의 영광이 말 구유에 누워있다는 것은 음모론에 딱 맞는 context와 text의 분리이다.

하나님의 영광이라면 마땅히 권력과 모든 사람의 칭송과 우러러보는 자리에 임해야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장 낮고 어렵고 가장 말이 안 되는 자리에 임하셨다.

나. 본 론

(1) 우리가 종종 이 본문에서 오해하듯이,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라는 말을 잘못 이해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와 기뻐하시지 않는 자로 나누어 생각한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신 대상은 바로 뒤에 나오는 백성들을 말한다. 사람들이다. 인류를 말한다. 모든 사람을 기뻐하셔서, 사랑하셔서 그 아들을 보내는 것이다.

우리가 좁게 가지고 있는 구원론보다 좀 더 큰 차원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이 모든 인류를 향하여, 그리고 하나님이 지으신 온 세상을 향하여, 평화가 선언되고 있다.

여기서 생각해 보자.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어느 누구나 삶이 어렵다, 고 한다. 인생은 힘들다, 못 살겠다, 억울하다, 라는 공통되는 고백을 한다.

그 삶이 예수를 믿고 나면 더 나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수님이 오셔서 하늘에는 영광이고 땅에는 평화가 주어졌는데, 왜 나의 삶은 달라지지 않았는가, 해결의 기미가 없는가, 라고 묻는다. 이 질문은 틀린 게 없다.

성탄절마다 기독교 신앙을 위협하는 위험한 시험이 된 것은 산타클로스이다. 성탄절이 행복한 것은 선물을 받기 때문인데, 그 덕분에 성경이 말하는 평화는 기대하지 않게 되었다.

기뻐한다고 해도 성탄절 하루뿐이고 나머지 날들에 대해서는 기대도 희망도 없다. 그래서 성탄절이 지나가면 1년 동안 다시 성탄절을 기다려야 한다.

성경이 약속하는 평화는, 예수님이 오신 방식 그대로, 말하자면 그 방식이 하나의 증거로, 우리 모두의 일상에서 가능한 것이다. 어쩌면 이미 임재하고 있는 것이다.

(2) 예수님은 처녀의 몸에서 나셨기 때문에, 그 어머니는 대단한 불편을 겪었을 것이다. 당시 선민사상이 있었던 사회와 그 윤리 속에서 결혼 전에 임신을 했다는 것은 변명의 여지없이 잘못된 일이다.

우리 말에도, 처녀가 애를 낳아도 할 말이 있다, 라고 하는 것은 상대방이 억지를 쓰는 경우 비난하기 위한 말이다.

마리아는 예수 때문에 힘든 시간을 보냈다. 거기다가 아들의 죽음을 봐야 하는 인생을 산다. 예수님이 태어나는 바람에 희생도 많았다. 동방박사 세 사람이 속없이 헤롯에게 유대인의 왕이 태어났다고 했고, 그게 누구인지 몰랐던 헤롯은 베들레헴 인근 지역의 두 살 이하 영아들을 모두 죽였다. 굉장한 사건이다.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인류를 위하여 평화를 주기로 약속하고 보낸 예수 때문에, 그 지경의 어린아이들이 모두 살육을 당한다.

구유에 나시고, 처녀 몸에 나시고, 천사들의 찬송을 받으시고, 억울한 아이들이 죽고, 하는 모든 것들을, 예수의 나심과 예수로 인하여 일어난 모든 사건에 긍정적으로 적용하라고 성경은 말한다.

우리 신앙에서 우리를 괴롭히는 것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이 내게 잘 해 주실 것인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이 내게 평화와 만족을 주실 것인가, 하는 것이다.

한 번 더 기도하면, 한 번 더 선행을 베풀면, 이라는 것이 우리의 신앙공식이요, 우리의 신앙 방법인데 성경은 그렇게 얘기하지 않는다.

우리가 구하지 않을 때 오셨고, 우리가 우리의 필요를 모를 때 답을 주신 하나님이, 우리가 기대하는 권력과 부를 가지고 오시지 않고, 설득할 만한 논리를 가지고 오시지도 않고, 명분으로도 오시지 않고, 그냥 이렇게 아무도 모르게 오셨다. 예수님의 출생은 그 당시 아무에게도 기쁨이거나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생각해 보면 예수는 평생 동안 수많은 기적을 베풀었지만 당시의 권력이나, 관습이나, 상식과는 맞지 않아서 결국, 바리새인들과 대제사장들이 아닌 당시에 몰려들었던 백성들에 의해 죽게 된다.

그들은,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라고 외쳤으나 나중에는 그를 죽이소서, 그를 죽이시고 바라바를 놓아 주소서, 라고 했다.

더 나아가 우리가 잘못하는 일이 있다면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리소서, 라고까지 했다.

십자가의 형벌은 당시 로마의 가장 엄중한 처벌이었고 로마 시민에게는 절대로 허락되지 않았다.

이 모든 일들은 우리의 이해, 우리의 자격, 우리의 조건, 우리의 상식과 기대와는 다르게 일어났다.

로완 윌리암스는 그의 책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고난과 죽음을 은혜로운 하나님과 연결시키려고 오셨다, 라고 썼다.

하나님이 오셔서 여러분을 건강하게 하시고, 부하게 하시고, 걱정 없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고난과 원망과 낙심을, 여러분이 이해할 수 없는 여러분의 생애와 존재와 경우를,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과 묶으셨다.

이것이 성육신이다. 내가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다면 내가 왜 고난을 받고, 내가 왜 원망을 해야 하는 처지에 있어야 하는가? 라고 말할 때 성탄절 사건이 증언한다.

예수가 어떻게 오셨는가 보라.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요, 하나님이 그의 백성에게 허락하시는 평화의 방법이요, 권능이요, 증거다.

우리가 생각할 때, 이 문제만은 해결해 주시면 좋겠다, 이 문제가 내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고 있다, 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성탄절 사건과 연결되어 있다. 원망이나 자책이나 필요나 능력의 문제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약속이 성탄절 사건 속에 담겨 있다.

(3) (마 18:1∼7) 제자들이 천국에서는 누가 큽니까, 라고 묻는 것과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께 하는 질문은 같은 내용이다.

우리는 예수님이 태어나신 그 context를 다 믿으면서도 여전히 그것을 부인하고 있다. 예수님의 탄생이 하나님의 신비, 권능, 기적인 것을 다 알지만, 여전히, 저는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습니까, 라고 묻고 있다.

우리가 이 말씀처럼 어린아이와 같아야 한다는 것은, 순진해야 된다는 것이 아니다. 어렸을 때는 순진하다는 말을 듣게 되고 이 말은 무지하고 무능하다는 뜻을 포함한다.

예수님께서 어린아이를 앞세운 이유는, 저들이 생각하는 것은, 어떤 자격과 조건을 만족시키면 더 큰 보상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이고, 예수님은 그런 자격과 조건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시기 때문이다.

너희가 갖추려고 하는 자격은 조건으로서의 자격이 아니다. 하나님이 나를 외면하셔서 나는 이 꼴이야. 나는 무능해서 하나님은 나를 귀하게 여기지 않을 거야. 내가 지금 당하고 있는 고난을 보면 하나님이 나를 외면하시는 것 같아.

이런 생각 자체가 하나님에 대한 신성모독이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잘해야 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특권이다. 조건이 아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자책하여 정죄하거나 비난한다면, 우리가 남에 대해서는 얼마나 더 많은 정죄와 비난을 하게 되겠는가?
저렇게 믿으면 안 돼. 이런 말을 하면 안 된다.
저건 나쁜 짓이야. 이런 말은 우리에게 허락되어 있지 않다.

우리는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실지 모른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를 보라.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소서. 저들이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

어린아이가 된다는 것은 아무것도 모르고 생각도 없고 순진하다는 것이 아니다. 무엇을 해야만 하나님 앞에서 허락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고쳐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사랑, 권능, 열심으로 일하신다는 것을 놓치고, 내가 발버둥을 쳐야 보상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것은 성탄절의 의미를 놓치는 것이다. 성탄절을 하나님을 찾아서 쫓아 올라가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찾아 내려오셨다.

우리의 고난, 고통, 우리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우리를 흔들 수 없다고 믿는 것이 성탄절이다.

구유에 오시지 않았는가? 목자들에게 오시지 않았는가?

우리는 배타적인 지위를 가지고 있지도 않고, 우리는 누구를 비난해서 우리의 정당성을 확보할 필요도 없다.

우리를 찾아오신 예수님,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 그래서 새로운 세상과 운명을 주신 아버지를 믿는다면 우리가 못 견딜 일은 없다. 우리를 절망하게 할 것도 없다.

로마서 8장은 얘기한다.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롬 8:30)

다. 결 어

(1) (마 11:25∼27) 예수를 처녀의 몸에서 낳게 하시고 말 구유에 누이게 하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게 하신 하나님의 방법 이외에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권능을 얘기하는 것은 전부 틀린 것이다.

여러분의 생애와 현실 속에서 여러분이 고난을 받는다는 것에 대해, 하나님이 고난과 절망으로 일하신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고난을 벗기에 급급하다. 예수 없는 기독교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행복을 믿는다.

예수님은 더 말씀하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마 11:28∼30)

너희 현실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도, 어떤 경우도 절망하거나 손해 볼 것이 없다는 것이 성탄절의 내용이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선포하신다.

배타적 경쟁, 약육강식은 없고 은혜만이 충만할 뿐이다.

우리의 고난을 통해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신다. 이것이 신앙의 승리요, 신앙생활이요, 신앙고백이다. 천군 천사의 찬송을 함께 마음에 새기는 기쁜 성탄절 되기 바란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믿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주셨을까요? 우리는 아직도 왜 늘 억울하고, 늘 목마를까요? 우리의 심령이 되살아나 왜 우리가 구유만도 못한 존재가 되었는지 도전받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를 품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3. 에필로그

(1) 이번 주일 설교의 핵심은 이것이다. 너의 믿음은 구유보다 더 나은가?

구유에는 평소 많은 가축들의 먹이가 담겨 있었다. 구유는 세상 만물 중, 비교적 선한 존재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아래는 구유의 독백이다.

어느 날 무척 시끄러운 밤이었다. 밤늦게까지 소란했던 밤, 한 아이가 태어났다. 나는 그 아이를 받아 안았다.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편안함. 나는 아이 아버지 요셉이 아침에 아이를 안고 마구간을 떠날 때까지 아이를 안고 있었다. 감사한 밤이었다.

(2) 목사님은 담대하게 말씀하신다. 당신은 구유보다 나은 존재인가? 하찮은 존재로 여겼던 저 구유도 예수님을 담고 있었다. 당신은 예수님을 담고 있는가? 당신은 진정 예수님을 마음에 담고 있는가?

(3) 나는 이 설교 말씀을 듣고 크게 반성했다. 내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는 내 마음에 예수님을 담고 있는가? 아, 창피하다. 나는 늘 예수님께 떼쓰기에 바쁜 인생을 살고 있을 뿐이다.

나도 구유가 한번 되어 보아야 하겠다. 예수님을 품에 안고 있어야겠다. 예수님은 울지도 않으시고 그 밤을 구유에게 안겨서 보내셨다. 아기 예수는 내 품에 오시면 불편하다고 우실까? 나는 예수님을 품에 안고 살고 싶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