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요한복음(37) (요 17:1~5)

2020. 12. 6. (일)
박 영 선 목사

1. 들어가는 글

(1) 성경은 66권이다. 성경의 각권마다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가 넘치지만 나는 야고보서를 좋아한다. 그냥 좋아하기만 하는 것은 아니고, 경외하는 마음을 가지고 좋아한다.

예수님의 친동생이었던 야고보 사도는 너무도 담백하게 가르침을 전한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약 1:6∼8)

(2) 솔직하게 나는 잘 안된다.

첫째는, 내 기도 대로 안 되었어도 그 결과가 나에게 해롭지 않을 거야.

둘째는, 이번에는 안 되었지만,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때가 있으시겠지.

셋째는, 내 기도에 안 된다고 하신 것도 응답이야. 나를 사랑하시니까 안된다고 하신 거야.

당신은 어떤가? 야고보 사도는 단호하다.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아, 정말 어려운 과제이다. 어떨 때는 기도하면서도 내가 답을 미리 정하기도 한다. 이렇게, 이렇게 생각하오니 이렇게, 이렇게 이루어 주시옵소서.

(3) 잘 모를 때는 목사님의 말씀을 통해 배울 수밖에 없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여기서 나라와 의는 같은 의미의 다른 표현이라고 하셨고 그러니 먼저 그의 나라를 구하는 것이 강조된 표현이다. 이것이 우리 기도의 시작이 되어야 한다고 하신다.

하나님 아버지, 제가 이런 기도를 하게 하옵소서. 그리고 저의 일상에 필요한 모든 것을 아버지께서 이미 알고 계신다는 믿음을 주시옵소서. 그 믿음으로 구하게 하옵소서. 아멘.

2. 내 용

가. 서 론

(1) 요한복음 17장은 주께서 잡히시던 밤에 저녁 식사를 마치시고 마지막으로 제자들 앞에서 하나님께 드린 기도로 추측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오셔서 하신 일을 영광으로 고백하시고, 예수를 보내어 하나님 아버지께서 누구신지, 무엇을 하려고 하시는지도 영광이라고 선언한다.

이런 일들은 본문 3절에 있는 것처럼,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정의한 것 같이, 영생은 우리가 예수를 알고 하나님을 알게 되는 이해력과 정보가 아니라 혈연관계나 부부관계같이, 분리될 수 없는 관계가 되는 것이라고 선포하신다.

나. 본 론

(1) 우리는 하나님을 생각할 때,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불위하시고, 거룩하시고, 긍휼과 자비가 많으시고, 와 같이 많은 언어와 개념들로 하나님을 설명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깊이 이해하지 못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사랑이라는 단어가 그렇지만, 조건이 없고 포기가 없는 사랑을 우리에게 목적하고, 창조로부터 지금까지 계속하고, 궁극적으로 승리하게 하실 것이라고 성경은 증언하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하심이나,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하여 고백을 할 때는, 우리에게는 약간의 공포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회개해야 기도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로 이 증상이다.

기도할 자격, 기도의 당위성을 먼저 제시해야 기도가 전달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성경의 얘기와 다르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인일 때 그 아들을 보내신다. 처음 창조 때부터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과 신뢰의 대상이어서 그 관계가 기쁨과 감사로 충만하게 의도되었다. 예수 안에서 이것을 회복하시며 창조를 완성한다고 성경은 약속한다. 빌립보서 2장 이하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한 바울의 해석을 보라.

예수는 하나님의 영광의 본체이지만 지위를 내려놓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자기를 비우시고 종의 형체를 가지고 사람과 같이 되셨다. 또 죽기까지 순종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가장 높이 들어 올려,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님께 꿇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신다. 요한복음 17장에 나오는 그대로, 예수님의 영광은, 십자가를 지는 성육신과 죽음이 영광이라고 얘기하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이 영광이라고 얘기한다.

또, 아버지께서 인류에게 목적하시는 일 중 가장 중요하고, 가장 힘든 일을 당신에게 맡기신 것이 영광이고, 그리고 하나님이 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신 인류에게 복을 주시기를 기뻐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다고 증언한다.

(2) (엡 1:3∼6) 여기에 보면, 하나님은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주려고 하시고, 사랑 안에서 완벽하게 하시려고 하며, 기뻐하시며,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고 하신다.

여기에는 어떤 조건도, 어떤 불만도, 어떤 부정적인 것도 들어 올 수가 없고 천상에 속하고, 가장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것들로만 이루어진다.

그러니 우리로 망설이게 하거나, 의심하게 하거나 걱정하게 하거나 하는 요소가 전혀 없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 대하여 가지는 작정으로서, 우리가 근심하거나 조건을 만족시켜야 하는 전제가 없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약속이고 곧 우리의 운명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도덕과 윤리의 결정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기준에서 조금이라도 틀린 것이 있으면 잡아내는 무서운 심판자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심판이란, 하나님이 그의 백성에게 요구하는 궁극적 영광을 완성해야만 끝이 온다, 라는 것으로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대부라는 영화를 보면, 여러 번 인용하지만, 그 첫 장면이 장의사가 돈 꼴레오네에게 와서 자기 딸을 폭행하여 완전히 얼굴을 망가뜨려서 원상회복이 되지 않게 한 자들에 대한 복수를 요청한다.

돈은 얼마든지 드릴 테니 내 딸의 원한을 풀어 주십시오. 그러자 꼴레오네가 대답한다.

너는 들어와서 나를 만날 때 웃지도 않고 예의를 갖추지도 않았다. 나에게 입을 맞추지도 않았다. 그리고 내 손자의 나이도 물어보지 않았다. 그런데 돈을 얼마든지 줄 테니 복수를 해 달라고? 너는 나를 무엇으로 보는 것이냐?

(3) (눅 7:36∼50)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말미에, 예수님께서 행한 기적을 다 적으면 이 세상이라도 그 기록한 책을 감당할 수 없다고 기록했다. 그만큼 예수님께서 행한 기적이 많다는 것이다.

요한복음은 짧은 장이다. 마해복음은 28장이고 누가복음은 24장이다. 그 많은 복음서의 기적 중에 오늘의 기적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본문의 설명이 매우 길다. 바리새인을 생각하기를, 이 사람이 정말 하나님의 종이라면, 이 여자가 누구인지를 알았을 것이고 그러면 물리쳤을 것이다, 라고 생각했다.

당시의 바리새인은 가장 고급한 신자였다. 말하자면 윗줄에 서는 자였다. 그가 아는 하나님과 신앙은 잘잘못을 지적해 내는 것이었다.

여기서 예수님이 꾸짖으신다. 너는 내게 물도 주지 않았고 감람유도 주지 않았다. 너는 내 손에 입 맞추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인을 봐라. 이 여인은 와서 내 발에 향유를 붓고 머리털로 씻고 입 맞추기를 그치지 않는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었으면 좋겠는가?
하나님이 공정했으면 좋겠다, 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다 기독교를 잘 모르는 것이다. 상대방을 벌을 주어서 나를 증명하려는 것은 폭력이 하는 짓이다. 기독교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소서, 이다. 저들을 사하면 내가 죽어야 하는데 그 길을 가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드라마틱한 어떤 각오가 아니다. 이것은 진정성의 문제도 아니다. 성경은 다른 얘기를 하고 있다.

성경은, 여러분이 기도를 할 때 회개부터 하지 말고 감사부터 하고 기도를 시작하라고 말한다.

하나님, 내 기도를 들으시는 줄 알고 감사드립니다. 제가 기도할 자격이 없지만 하나님도 아시고 저도 아는 것이니 잠시 옆으로 치워 놓겠습니다. 죄송하지만 바쁜 소원부터 아뢰겠습니다. 이런 기도를 하라.

저 사람 죽여 주세요, 저놈은 나쁜 놈입니다, 라는 기도를 하지 말라.

하나님, 따지지 마시고 내일은 정말 잘 살게 해 주세요. 너무 힘드니까 좀 봐주세요.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네게 분부한 모든 것을 지키게 하라.

죽은 자는 죽은 자들에게 장례를 치르라 하라. 너는 나가서 복음을 전해라. 여기 소망이 있다. 여기 기쁨이 있다. 여기 축복이 있다. 괜찮다. 나는 아무것도 안 따진다. 와라. 네 인생을 다르게 살아라. 죽음의 권세가 아니라 생명의 운명 속을 살아라.

하나님을 어떤 분이라고 보고 있는가? 일개 마피아의 패밀리 수장도 이렇게 얘기한다.

너는 나에게 돈만 주면 내가 모든 것을 한다고 생각을 했단 말이냐? 섭섭하구나. 네가 나에게 친분을 앞세웠다면 내가 왜 너의 부탁을 거절했겠는가? 나는 너에게 공포와 공포의 수단에 불과했던 것이냐?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다.

(요 15:9∼15) 여기 나오는 단어들은 무엇인가? 사랑, 기쁨, 친구 등이다. 친구란 무엇인가? 서로 의존적인 관계인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시는가? 요한복음을 더 나아가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낸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가 나온다.

말하자면 우리가 예수이다. 예수가 하신 일과 예수의 몫을 잇는 존재이다. 역사는 우리가 볼 때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하고, 아무런 소망이 없어 보이지만 우리가 있는 한, 교회가 서 있는 한, 하나님은 일하고 계시고 실패하지 않는다는 눈에 보이는 증거들이 남는다.

그러나 우리는 스스로 공포를 만들어서 하나님 앞에 벌 받지 않는 것이 전부이기 때문에 전전긍긍한다.

저 사람은 저보다 더 했어요.

나를 증명하기 위해서 남의 잘못을 밝혀내고 그렇게밖에는 자신을 증명하지 못한다.

이러면 빛은 어디에 비치며, 진리는 어디서 오며, 소망은 어디서 열매를 맺겠는가? 여러분이 여러분의 인생을 흑암 속에 던져 놓고, 저주와 정리밖에 없는 곳에서, 어디에 복음이 있겠는가? 어디에 용서가, 소망이, 빛이, 감사가 있겠는가?

다. 결 어

(1) (롬 8:14∼17)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성립된 존재들은 법으로 판단하지 않는다. 사랑으로 판단한다. 관계가 성립될 수 없는 세상에서는 법 이외에는 무엇을 판단할 근거가 없다.

용서, 회개가 없다. 회개는 다시 새로워질 수 있어야 가능한데, 세상에는 후회가 끝이기 때문이다.

여러분의 회개가 후회가 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회개가 부활이 되는 회개가 되고 그래서 더 나은 곳으로 갈 수 있다고 믿는 기도를 해야 한다. 여러분이 그런 존재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정체성에 있어서, 운명에 있어서,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그 무엇으로도 방해받지 않는 존재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호 2:19∼20) 하나님이 우리에게 장가든다고 하신다. 이것보다 친근하고, 운명을 같이 하겠다는 관계가 있을 수 있는가?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과 의지를 기억해서 힘있게 풍성하게 살아내는 빛과 생명과 진리가 되기를 바란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삶과 우리의 운명이 주님의 손에 있으니 우리는 포기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넘어진 것이 운명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다시 일어나야겠고, 성경의 말씀대로 빛과 진리와 생명입니다. 우리를 만나는 모든 사람 앞에 우리는 기적입니다. 우리는 복입니다. 그 복을 누리는 귀한 인생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3. 에필로그

(1) 모세는 시편 90편을 언제 썼을까? 내용을 읽어보면 노년에 썼던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렇게 인생을 잘 정리할 수 있단 말인가?

모세가 정리한 인생이다.

우리 인생은 티끌입니다.

인생이 긴 듯해도 평균수명은 칠십이고 저녁에 지고 마는 나팔꽃 같은 인생들이지요.

그리고 평생 죄만 짓다가 하나님의 분노 속에 혼만 나고 순식간에 지나갑니다.

(2) 이러던 모세가 시편 90편 중반 이후에는 갑자기 기도 내용을 바꾼다.

하나님, 그러니까 저희 인생들에게 남은 날수가 얼마 되지 않는다는 걸 깨닫게 하옵소서.

하나님, 언제까지 야단만 치시겠습니까? 불쌍히 여기시고 이제 좀 부드럽게 대해 주세요.

지금까지는 힘든 나날을 주셨죠? 이젠 좋은 날만 주세요. 불행이라면 평생 충분히 겪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괴롭게 하신 날수만큼 복을 주셔서 우리를 기쁘게 하셔야 해요. 아셨죠? 하나님.

보통은 기도가 여기서 끝나야 하는데 모세는 한마디 더 한다.

하나님 은혜를 내려 주셔서 우리 손으로 하는 우리 일이 잘되게 해주세요. 틀림 없으신거죠? 약속하세요.

(3) 독자들에게 물어보겠다. 이런 기도를 하실 수 있는가? 박목사님의 오늘 설교는 기도를 이렇게 하라고 하신다.

마치 기도할 자격이 있어서 기도하는 것처럼 하지 말고, 아버지 저 못난 것 아시죠? 그러니까 그 얘기는 그만하시고요, 지금 힘드니까 좀 도와주세요. 제발요.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신다. 아멘.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