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요한복음(33) (요 15:9~14)

2020. 10. 11.(일)
박 영 선 목사

1. 들어가는 글

(1) 정부의 방역 조치가 1단계로 완화되었다. 무엇보다 교회를 다시 갈 수 있다는 기대가 크다.

코로나는 분명 우리에게 회개하라고 한다. 그리고 반성하라고도 한다. 이런 국면에서 톰 라이트는 말한다. 침묵하라. 그리고 기도하라. 하나님께서 우리 옆에 오셔서 같이 신음하고 계신다.

(2)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시험은 없다고 성경을 말한다. (고전 10:13)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능히 시험을 감당하게 해주신다고 한다.

이 말씀 자체로 위로가 넘친다. 그런데 내가 오해했었던 것을 톰 라이트가 지적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능히 시험을 감당하도록 해주신다. 어떻게? 시험을 당하는 우리와 함께 신음하시면서.

(3)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는 방안과 대처가 필요하다. 어떻게 해야 이 고비를 넘을 수 있는가? 우리는 기도한다. 그래서 지혜와 해결책을 얻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거기에 머물러 있는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나는 지금도 네 옆에 있다. 너와 똑같이 신음하면서.

2. 내 용

가. 서 론

(1) 요한복음 15장에 나오는 포도나무의 비유는 지난 설교에서도 설명했듯이 붙었다, 떨어졌다, 를 대조하는 내용이 아니다. 성경과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왜곡되어있는 부분은 믿느냐, 안 믿느냐를 대비하는 성향일 것이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셨고 범죄한 인류를 구하려고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다. 요 3:16에서 알 수 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도록 하려 하심이라.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세상으로 저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2) 우리가 나누는 이분법은 때로는 필요한 것이다. 믿는 것과 믿지 않는 것은 분명히 대비되어야 하고, 우리가 예수를 믿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우리의 책임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도는 창조 때에도 하나님이 모든 창조를 선하고 귀하게, 하나님 자신이 만족하는 창조를 하셨다는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우리가 불순종하고 거역하여 저지른, 타락과 죽음을 자초한, 때에도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 아들을 보내신 것이다.

나. 본 론

(1) 그러니 기독교인이 되면 나는 믿었고 너는 안 믿었다, 는 분별, 나는 천국 가고 너는 지옥 간다는 대비가 아니라, 하나님이 타락한 우리를 죄 가운데에서 구원하여 하나님의 나라로 부르시는 그 내용과, 방법과, 과정이 어떤 것이냐를 알아보자는 것이다.

오늘 포도나무 비유에 이어서 나오는 본문을 보면 9절~10절에 있는 것처럼 사랑 안에서 거하라 이다. 공포나 강요의 내용과는 얼마나 다른가?

우리를 늘 오해하게 만드는 것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라고 기록되어 마치 계명이 조건인 것처럼 되었다.

이 계명은 대부분의 성도들에게 당연히 종교적인 계명이면서 동시에 대부분 도덕적이다. 도덕적이라는 것은 잘했다, 잘못했다가 주를 이루는데, 지금 성경이 예수를 보내서 인류 역사와 우주의 운명에 대하여 하는 선언은 내가 만든 세계를 내가 회복하고 내가 영광을 얻고, 모든 피조물이 내 앞에서 감사하며 찬송하게 만들겠다, 는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 신자가 된 이들에게 허락된 길이다. 그런데 우리는 아닌 것들, 잘못한 것들만 대비되는 자신의 신앙의 길을 걷는다.

적극적이고 영광과 찬송으로 또 기쁨으로 소개되고 있는 길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고, 그 길을 가야 한다는 것을 못 가고 있다.

13장부터 16장까지는 전부, 예수님께서 마지막 만찬에서 죽는다고 알리고, 그리고 17장의 기도를 거쳐 18장에서 잡히고 죽게 되신다.

그 사이에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십자가를 져서 이루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가르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요 13:1)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요 13:31에는 유다가 예수님을 팔기로 하고 나간다. 그러자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다. 그리고 내가 십자가에 달리기로 작정함으로 아버지께서도 영광을 받으신다.

34절에는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라고 하셨다.

사랑은 조건적이지 않다. 사랑은 강요할 수도 없고 조작할 수도 없다.
가장 자발적이며 자신을 아낌없이 줄 수밖에 없는 것이 사랑이다. 이것은 다만 감정에 의한 흥분이 아니라,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정성과 가치와 모든 것을 아낌없이 바치는 것이 사랑이다.

예수를 믿는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어 타락한 인류를 구원한다는 선언은 모두 영광, 사랑, 기쁨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뜻밖에도 기독교 신자들은 긴장하고 있다. 틀리지 않으려고.
그리고 자신의 기대만 못한 자신의 신앙에 대하여 불안해 하는 것으로 긴장되어 있다.

완벽하려고 한다. 완벽이라는 것은 시간을 초월해서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니라 자라나는 것이다.

지난번 설교에서 엡 4:13 이하를 했다. 주 안에서 자라나는 것이다. 어린아이는 태어났을 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아이지만, 그는 불구가 아니다. 그는 커야 하고, 그는 생각과 인격에서 자라나야 한다.

여러분은 나이가 들면 여러분의 자녀에게 무엇을 기대하는가? 여러분은 말한다. 고달프게 살 것 없다. 행복한 시절을 보내라.

이런 마음이 들지 않은가? 우리가 자식을 키울 때는 정신없이 키워서 자식들에게 원망의 소리를 듣는데, 손주들은 다르다. 언제나 할머니 할아버지를 기억한다. 왜냐하면, 험한 소리를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우리 삶의 어려움과 비극은 겁을 먹는 것이다. 세상의 도전과 위협에 겁을 먹고 하나님의 부르심과 일하심의 놀라운 것에 대해서는 자녀들에게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다.

제가 받은 기독교 교육도 엄한 것이었다. 주일 날 뭐 사 먹으면 안 되고 헌금 떼어먹으면 안 되었다. 그래도 떼어먹었지만, 이것이 얼마나 오랫동안 가슴속에 공포로 남아 있었겠는가? 부모는 속일 수 있어도 하나님은 속일 수 없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겠는가?

하나님이 그거 떼어먹는 것에는 괘념치 않으신다는 것을 배우는 데 60년쯤 걸렸다. 그러니 상처받고 큰 것도 유익이 되었다면 더 따뜻하게 더 넉넉하게 했으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이제 와 생각해 보면 자녀에게, 책을 많이 읽혀야겠다, 피아노를 가르쳐야겠다. 좋은 음악회에 데려가야겠다, 박물관에 데려가야겠다, 좋은 그림들을 보여 주어야겠다, 많이 웃어주어야겠다, 이런 생각들이 당연히 든다. 기독교가 그렇다.

그러나 우리는 겁을 먹고 있다. 무엇 때문에 겁을 먹는가?
붙었다, 떨어졌다의 문제 때문에 그렇다.

그렇다면 붙어 있는데도 내 마음이 편하지 않고, 만족스럽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여기가 문제다.

(2) (마 13:1~9) 씨뿌리는 비유이다. 씨 뿌리는 자가 씨를 뿌렸는데 더러는 길가에, 더러는 돌밭에,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져서 결실하지 못 하나, 옥토에 떨어진 것은 백배, 육십 배, 삼십 배의 결실을 했다.

그러자 모두가 옥토가 되자고, 생각했다. 옥토가 되기 위해서 열심히 착한 일을 하자. 전혀 그런 비유가 아니다.

(마 13:10~17) 왜 비유로 하십니까? 제자들은 답답했다. 예수님께서 죽은 자도 살리시고, 바다도 잠잠케 하시고, 눈먼 자도 뜨게 하실 수 있었는데, 뭘 이렇게 에둘러 표현을 하십니까?

예수님께서 영광을 나타내시면 다 새파랗게 질려서 무릎을 꿇을 것인데, 뭘 이렇게 비유로 하십니까?

예수님의 육신의 동생들도 예수를 믿지 않았고 빈정댔다.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안 올라가겠다고 하자, 당신이 메시아라면서 왜 숨어다니십니까? 대중들에게 나가서 속 시원하게 하나님의 종인 것을 드러내시지 왜 숨어다니십니까? 라고 비난했다.

이사야 6장에는 이사야의 소명이 나온다.
누가 우리를 위해서 갈꼬?
제가 가겠나이다. 제가 여기 있나이다. 저를 보내소서.
가라. 그러나 네 말을 알아듣지 못할 것이다.

예수님은 마 13:16~17에서 말씀하신다.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고 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듣고 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

앞뒤가 맞지 않는다. 예수님은 자신을 보여도 알아듣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비유로 말씀한다고 하신다. 그러면서도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알아듣지 말라고 그렇게 하신다고 한다.

그러면 이 씨뿌리는 비유는 도대체 무슨 뜻인가?

그러나 내가 왔다. 알아듣지 못하는 자를 위하여 보아도 깨닫지 못하는 자를 위하여, 말로는 되지 않는 자를 위하여 내가 왔다.

이 내용이 씨뿌리는 비유에서는 어떻게 설명되고 있는가?

길가나 돌밭이나 가시떨기 위에서는 자라지 못했고 옥토에서는 자랐다. 너무나 뻔해 보인다. 그러나 지금 얘기한 것 같이 알아들을 수 없는 이를 위해 오셨다는 예수님의 자기 증명은 이 비유를 다음과 같이 이해해야 맞아 들어간다.
범죄 한 우리 인류의 현실 속에서는 아무리 귀한 것이 와도 열매를 맺을 수 없다. 무슨 핑계를 대든, 어떤 조건에서든, 우리는 다 사망으로 끝이 난다. 귀한 것을 봐도 모르고, 영생을 보아도 모른다. 요한복음 1장의 시작이었다.

(요1:5)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이러니 왜 몰라? 라는 말은 통하지 않는다.

그러면 옥토는 무엇인가? 예수님이 바꾸어 놓은 존재가 되어야 비로소 생명이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자들은, 말하자면 그의 존재가, 그의 영혼이 되살아나지 않고는 아무리 좋은 말도, 아무리 큰 기적도, 그들에게서는 결실되지 않는다.

그들의 세계는 죽음이 운명이기 때문에 무엇을 해도 다 헛되고 거짓되고 외면될 뿐이다.

그러나 예수가 바꾸어 놓은 세상에서는 그 결실을 아무도 막을 수 없다.
어떤 이 에게는 삼십 배, 어떤 이에게는, 육십 배, 어떤 이에게는 백배의 열매를 맺을 것이다.

(마 13:12)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생명과 영혼이 돌아와야 열매가 있다. 이것이 없으면 아무리 좋은 것을 주어도 그것을, 그의 인생을, 그의 모든 정성으로 다 낭비하고 소비할 수밖에 없다.

없는 자란 우리가 보통 이야기하는 믿음이 없는 자이다. 이때의 믿음은 조건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오셔서 고쳐 놓은 인생이 아닌 자, 예수를 모르는 자, 예수가 없는 자는, 있는 것도 그의 생애에서 다 손해가 되고 비극이 되고 헛수고가 된다.

성경은 말한다. 없는 자들과 비교해서 너는 헛되고 나는 헛되지 않아, 라고 얘기하려면 열매를 맺으라는 것이다.

삼십 배, 육십 배, 백배가 크다고 느끼면 세 개, 여섯 개, 열 개라도 맺어야 한다.

우리의 신앙이 믿지 않는 자, 겁먹는 자와 다르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한다.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여 어디로 끌고 가고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3) 예수님은 자기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 그래서 그의 죽음이 영광이고,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주며 내 기쁨이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라고 오늘 본문에는 터져 나온다.

예수 믿는 것이 치사한 것은 예수를 욕되게 하는 것이다. 사랑하라. 사랑하라는 것은 시작부터 사랑이 풍성하고 가슴이 뛰는 게 아니다.

사랑은 오래 참는 거다. 미운 말 안 하는 거다.
이 나라가 왜 이래? 코로나는 뭐야?
악을 쓰고 저주할 이유가 없다.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고쳐 내셨다. 나의 영광을, 나뿐 아니라 내가 보낸 아들을 통해서 얻었다. 그것으로 너희의 찬송을 받고 너희를 기쁨으로 채우리라.

이 과정을 겪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다르게 살게 된다.

기독교가 왜 복음인가? 찬송이 왜 소리 높은가?

우리는 세상이 우리에게 하는 도전과 유혹에 말려서, 욕 안 먹고 근심 걱정이 없는 것을 원한다. 다만 세상사에 따른 걱정이 있을 뿐이다.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걷고 있다는 것을 몰라서 하루하루를 살 줄 모른다.

탕자의 비유를 생각해 보자. 탕자는 아버지에게 유산을 미리 달라고 해서 나간 뒤 허랑방탕하게 지내다가 돌아온다. 아버지가 반갑게 맞는다. 그 후에는? 여태껏 자기 마음대로 살았지만, 이제부터는 죽어난다. 자식 교육을 받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 세계를 다스리는 동역자로 부르신다. 아담에게 했던 약속이고 예수 안에서 보이신 것이고 우리로, 아직도 구원받아야 할 사람이 많은 세상을 살게 하는 이유이다. 이 기쁨과 이 영광을 못 누린다.

군대에 가면 구보를 한다. 그런데 사병은 탈락해도, 장교는 안 한다. 장교는 사병들의 낙오를 막기 위해 정해진 구보 거리보다 더 뛰게 된다. 그러나 그는 완주한다. 그의 자랑은 모두가 낙오 없이 구보를 마치는 것이다. 그런 기쁨이 있어야 한다.

예수님께서 내 계명을 지키라고 하셨다. 그리고 내 계명은 너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라고 하셨다.

예수 안에 있자. 충성되자. 사랑 안에 거하자, 기쁘자. 이것을 어떻게 현실에서 적용하는가?

(갈 5:16~23)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른다. 그러면 어떻게 육체를 좇는지 성령을 좇는지 아는가? 열매를 보라. 성령은 열매이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이다.

육체는 열매가 아니고 일이라고 칭한다.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 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다.

한국교회 초기의 진정성은 두려움이었다. 성수 주일. 무서웠다. 이것이 필요 없다는 얘기가 아니다. 너무 단단해서 우리는 약간 겁에 질려 있었다. 기쁨과 자랑, 그리고 해보는 기회, 시행착오와 실수를 인정하는 과정을 이해하지 못해서 한점의 흠결도 없기를 바라서 아무것도 못 했다.

늘 회개만 했다. 아직도 뭔가가 남아 있을 것 같아서. 그렇지 않다.

실패하지 않는 연습은 없다. 연습이 없으면 자라나지 않는다. 다듬어지지 않는다. 이것이 성경이 하는 약속이다.

여러분이 무슨 일을 할 때, 명분은 맞는데 무서울 때가 많다. 이것이 교회와 신앙생활을 방해했다.

편을 들어야 한다. 상대방이 잘못된 일을 했을 때 편을 들어야 한다. 수준이 낮은 고민에 휩싸여 있을 때 격려해야 한다. 어쩔 수 없는 과정을 지나는 것에 대해 따뜻한 눈을 가져야 한다.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알아야 한다. 더구나 지금 장로라면 그것은 대단한 기회이다. 목사는 말할 것도 없다. 반주를 하거나 찬송을 하는 것도 대단한 기회이다.

이런 기회와 모든 일상에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자와 모르자 자는, 있는 자는 더 받아 풍성하게 되고, 없는 자는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라는 말대로 된다는 것이다.

내 계명을 지켜 내 사랑 안에 거하라, 라는 것은 예수께서 무엇을 하려고 오셨는지, 우리에게 어떤 인생을 살라고 하셨는지를 내 안에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순종은 그 자체가 내용이 아니다. 예수가 하신 말과 예수의 생애를 우리 안에 담으라는 것이다.

(마 7:15~23) 거짓 선지자를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오지만 속은 노략질하는 이리라 어떻게 구별하는가? 오늘 설교내용과 같다. 겉은 명분으로 가득 차 있지만 속은 아니다. 어떻게 아느냐? 열매를 보면 안다.

여기도 열매가 나온다. 포도나무에서 엉겅퀴를 따겠느냐?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열매를 맺으라 이상으로 그 나누는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열매를 맺으라는 게 아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으라는 거다. 그 열매로 그들을 알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경고가 무엇인가?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라.

그때 내가 저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노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얼마나 무서운 말씀인가? 명분, 어떤 지위, 어떤 책임, 어떤 권세의 문제가 아니라 아름다운 나무가 되는 싸움, 그것을 해야 한다.

얼마나 많은 유익을 남겼는가, 얼마나 많은 열매를 맺었는가가 아니라, 그런 열매를 맺는 존재가 되라는 것이다.

이것이 주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구원이요, 그 구원이 가지는 부요한 열매들이다. 하루하루가 그런 기회이다.

여러분은 하루에 몇 번이나 순종할 수 있을 것 같은가? 최고의 야구선수가 가지는 타율이 3할이다. 10번 나와서 3번 안타를 친다는 것이다. 하루에 3번만 하라,

많은 기회를 놓친 것을 안타까워하면 안 된다. 수준 높은 타자들은 삼진을 당할 때, 씩 웃고 들어간다고 한다. 수준 낮은 타자들일수록 방망이를 집어 던지고 들어간다.

다. 결 어

(1) 매일의 실패에 대하여 자폭하지 말고, 좋아, 다음엔 내가 더 잘 할거야, 이렇게 해야 한다. 이것이 하루이다. 그래서 나이가 들면 나이든 값을 해야 한다. 이것은 겁을 주거나 책망을 하자는 것이 아니다. 성경이 약속하는 기쁨과 감사와 명예로 부른 기독교 신앙을 스스로 못 누리고 있으니 그러지 말라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교회가 재미가 없다. 신앙인들이 모였을 때조차 따뜻하거나 너그럽거나 열려있지 않다.

이것은 분명한 반역행위이다.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혹은 한 교회에서 어른이나 신자로 부름을 받았다면, 절망 속에 있고 하루를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모르는 사람 앞에 서야 한다.

저주하거나 비난과 분노밖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사람에게 용서, 이해, 공감, 격려를 할 수 있다. 우리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2) 값싼 구원을 약속하라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 작은 일 하나로 하나님은 세상을 뒤집으시겠다고 우리에게 우리의 인생을 맡겨 주셨다. 이런 인생을 사는 것은 물론, 스스로가 예수 믿는 행복을 누리는 인생이 되기 바란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복과 사랑과 기쁨과 감사와 찬송으로 부름받은 존재들입니다. 우리로 인하여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기를 원하시고 우리로 인하여 세상이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인생은 지지고 볶는 것이 끝이 아니며 분노하고 절망하고 자폭하는 것이 선택이 아닙니다. 우리는 책임 있는 명예로운 인생으로 부름을 받고 있습니다. 하루를 기적의 날로 기억하는 우리의 인생, 우리의 신앙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3. 에필로그

(1) 지금까지 목사님의 씨뿌리는 비유의 설명은 이랬다. 많은 결실을 맺을 수 있는 옥토가 되라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라는 씨앗이 그 땅에 심겨야 그 땅이 옥토가 된다. 이번 주일에 하신 말씀도 비슷하나 조금 진전했다.

이사야가 보내질 때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가라, 그러나 사람들은 네 말을 못 알아들을 것이다.

그리고 많은 시간이 지나 예수님이 오셨다. 사람들은 여전히 못 알아듣고 있다. 그러나 이제는 이사야가 보내졌을 때와는 다르다.

내가 이 땅에 왔다는 것, 자체가 너희에게 복이다. 나를 보고 내 말을 들었다는 것이 복이다. 나는 너희를 사망에서 건져 영생으로 운명을 바꾸었다. 이것은 너희가 옥토이어서 많은 결실을 맺어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내가 너희를 너희의 뜻과 관계없이 옥토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2) 씨뿌리는 자의 의미는 다소 이중적이다. 씨앗이 옥토에 뿌려지면 물론 잘 결실한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의 쉬운 비유일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와서 너희를 영생을 사는 옥토로 바꾸었다, 는 또 하나의 심오한 뜻이 있었던 것이다.

나도 당시 제자들처럼 예수님께 묻고 싶다.
주님. 내가 와서 너희를 옥토로 만들었다, 하시면 될 것을 이렇게 비유로 말씀하시니 자칫 오해가 있을 뻔하지 않았습니까?

이런 나의 우매한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천하의 명답으로 답을 주셨다.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