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요한복음(30) (요 13:36~14:12)

2020. 8. 30.(일)
박 영 선 목사

1. 들어가는 글

(1) 언젠가도 한번 얘기했다. 목사님께서는 목회자가 성도들과 분리된 삶을 살면 안 된다고 생각하신다.

“나도 성도들과 똑같은 인생을 산다. 똑같은 고통과 어려움을 겪는다. 그리고 인생에서 마주칠 수 있는 난관을 모두 마주친다. 그런데 역할이 있다. 나는 하나님께 말씀을 듣고, 그것을 받는 역할이 있고 그것을 성도들에게 전한다. 성도들은 그 말씀을 양식으로 받아 존재하며 세상에 나가서 견디며 많은 이들에 자신의 삶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한다.”

내가 감히 목사님의 목회 철학을 논할 처지는 못 된다. 그러나 내가 목사님께 여러 번 들은 얘기는 이것이었다.

(2) 말하자면 설교는 천사가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하는 것이고, 설교를 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은 역할이 다를 뿐 하나라는 것이다. 나는 이 말씀이 은혜가 된다. 성육신의 사랑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선 하늘에 계시지 않고 우리와 함께 계신다. 그리고 우리와 함께 고통을 견디신다. 코로나 19를 물리칠 수 있는 월등한 백신이나 치료제 없이 그냥 우리와 똑같이 견디신다. 감사합니다. 하나님.

2. 내 용

가. 서 론

(1)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마지막 만찬을 제자들과 하시고 십자가의 죽음으로 나아가는 장면이다. 제자들에게 내가 가는 곳을 너희는 따라 올 수 없다고 하자 베드로와 도마가 나서서 그 길을 왜 우리는 따라갈 수 없습니까? 라고 물었다. 베드로는 목숨을 걸고라도 따라가겠다고 하자, 예수께서 너는 나를 세 번 부인한다고 꾸중하셨다.

도마가, 그 길을 가르쳐주시지 않으면 우리가 어떻게 쫓아갈 수 있습니까? 라고 하자 예수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라고 하셨다.

(2) 제자들이 따라가야 할 길은 예수님께서 먼저 길을 열어야 따라올 수 있다는 대목이고 그것은 그 길이 방법론이거나 어떤 규칙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그 길이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우리가 명분과 개념과 가치로 잘 알고 있는 진리와 생명까지도 인격에 속해 있다고 말씀하신다.

길과 진리요 생명이라는 표현은, 예를 들면 요한1서에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라고 표현하는 것 같이, 성경은 그것이 독립된 명분으로, 즉, 추상명사나 규칙같이 서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나. 본 론

(1) 이런 문제는 우리가 요한복음을 시작할 때부터 저자인 요한이 가장 크게 염두에 둔 예수님의 공생애에 대한 자신의 이해를 정리한 핵심 표현이다.

요한은 1장 1절에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로 시작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천지를 지으셨다라는 표현을 잘 알고 있다. 요한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는데 이 말씀으로 모든 만물이 창조되었다. 이 말씀 안에는 생명이 있다. 이 생명은 우리의 빛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독생자의 영광을 보니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이렇게 가장 큰 가치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것으로, 또한 인격과 직접 연결된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러한 표현들의 가장 큰, 우리를 향한 가르침은 이런 것들이 인격과 분리되어 무인격의 개념이나 명분이나 신념이 되는 날에는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이 그 내용을 얼마든지 왜곡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많이 경험하고 있는 것으로, 율법이 그렇게 되었다. 율법이 그것을 사용하는 유대인들에 의해서 심히 왜곡되어 나중에는 성전에 가서 제사드리고, 법궤를 소유하고 있고, 안식일을 지키면, 자신이 할 일을 다했다고 생각함으로써, 사무엘 상에서 법궤를 앞세우고 블레셋과의 전투에 나갔다가 법궤를 빼앗기는 사건이 발생한다.

또 성전만 지키고 있으면 되는 줄 알고 있다가 성전이 파괴되고 바벨론의 포로가 되는 멸망을 맞기도 한다.

예수님 당시에도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근거로 하여 예수를 배척하고 자신들의 옳음을 주장했던 사건을 우리가 잘 알고 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믿지 않았고 스스로 자기 의를 주장하다가 예수까지 못박은 원수로 우리는 생각하지만, 그것은 바리새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든 인간이 가진 죄성이다.

내가 곧 길이요 생명이다. 라는 식으로 일하시는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시고 복을 주시기를 원하시며 우리에게 영광을 목적으로 하는 일들이, 우리가 조종하고 조작할 수 있는 제3의 객관적인 존재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지, 하나님의 인격, 하나님의 기쁘심에 속한 선물임을 알아야 한다.

이 개념들은 하나님과 분리될 수도 없고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실패할 수도 없다. 우리의 종교적인 헌신들은 그 행위들이 언제나 하나님과 분리될 수 있다는 것을 늘 기억해야 한다.

(2) ( 엡 1:3~6) 구원은 전부 하나님의 의지이고 창조의 목적이다. 사랑, 헌신, 등의 가치들을 사용할 때 언제나 대상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랑도 믿음도 대상이 있어야 하고 기쁨도 대상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기쁨이라는 단어가 혼자서 돌아다닐 수는 없다.

말씀도 그렇다. 말씀은 먼저 말하는 분이 있다. 그리고 그분이 내용과 목적과 의지를 가지고 있다. 그다음엔 대상이 있다. 그래서 대상의 반응을 요구한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했다, 말씀으로 찾아오신다, 라는 것은 굉장한 것이다. 하나님은 인격과 의지가 있으신 분으로 그 뜻을 우리에게 두고 있다는 놀라운 선언이기 때문이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기뻐하시고 우리를 당신의 형상으로 지으시며 하나님의 모든 권능을 동원하여 우리에게 복 주시는 것을 기쁨으로 삼으신다.

에베소서 1장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왜 보내셨는지, 그리스도 안에서 무엇을 만들려고 하시는지를 설명한다. 이러한 내용은 계속 강조되고 있다.

이것은 신앙인들에게 자주 왜곡되거나 오용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잘 알지 못하면 늘 부족한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매우 기쁜 일과 기적의 연속이 아니다.

신앙을 인격에서 분리하여 하나의 명분으로 삼으면 안 된다. 나는 진실해, 나는 열심이야, 나는 예수를 사랑해, 하는 문장들에 묶이면 오히려 예수는 배제된다. 종교적인 언어들이 되고 마는 것이다.

예수님과 불가분의 단어가 아니라 단어 자체가 가지고 있는 명분에 붙잡히면 자신도 모르게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놓치게 된다. 놓치게 되면, 다만 놓치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 부작용이 심각하다.

(3) (욥 13:20~22) 여기서 욥은 엄청난 발언을 한다.
이것을 우리가 알기 쉬운 말로 풀어 보면 이런 얘기다.

“하나님, 계급장 떼고 한번 따져 봅시다.”

이 부분이 욥기에서 가장 중요하다. 욥은 잘못한 것이 없는데 벌을 받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나중에 벌이 아닌 것으로 밝혀지지만 당시에는 벌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욥은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다.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욥에게 보이신 것은 창조세계였다.
하나님은 창조세계를 통해서 욥에게 무엇을 설득하시는가?

창조세계에 있는 존재들이 이유가 있어서 만들어진 것이냐? 아니면 그 존재들 스스로가 있어야 할 어떤 근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냐?

없었다. 내가 만들었다. 무에서부터 만들었다. 내가 만든 창조물 중에 잘못된 것이 무엇이 있느냐? 모든 것이 아름답고 위대하지 않느냐?

악어가 등장한다.

악어의 갑옷을 보아라. 너희가 그런 갑옷을 만들 수 있겠느냐? 우박 창고를 봐라, 어떻게 이 어마어마한 것을 만들 수 있겠느냐? 무슨 이유가 있어서 이것을 만들었겠느냐? 이런 창고가 어떤 일이 스스로 발전한 결과로 여기에 있을 수 있겠느냐?

다 내가 만들었다. 나는 창조의 하나님이다. 너는 이유를 따지자고 하지만, 너에게 일어난 일들은 원인과 결과의 법칙을 벗어나는,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여기서 욥은 항복을 한다. 이 항복의 마지막 부분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꾸중하신다.

(욥 40:8) 네가 옳다 하려고 나를 그르다고 하려느냐? 이 번역은 개역 개정 이전 성경의 번역이다. 이해가 좀 쉽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습니까?

너의 그 자신감은 무엇을 근거로 형성된 것이냐?

나는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내가 이 벌을 받아야 합니까?

네가 잘했을 때 복을 받은 것은 네가 잘하면 복이 절로 생긴 것이 아니다. 네가 잘했을 때 내가 복을 보상으로 준 것이다.

네가, 잘못하지 않았는데 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라고 묻는다면 나는 대답한다.

너는 지금 잘못해서 벌을 받는 것이 아니라 잘못하지 않았어도 고통이 들어온 것이다. 이것을 네가 알고 있는 인과 관계로는 설명할 수 없다. 창조주인 내가 너를 더 고급 한 곳으로 데려가려고 그렇게 한 것이다.

그런데 너는 네가 이해가 안 되면 하나님이 틀렸다고 단정해 버리는 것이냐?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라는 이 표현은 하나님의 주권과 인격을 설명하고 있으며 이 속에 모든 가치가 종속되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살아보면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큰 명분은 믿음이 좋다는 것이다. 보통은 기도 많이 한다, 회개 많이 한다, 전도 많이 한다는 것으로 믿음을 표현하지만, 믿음이 좋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그런 행위들은 반드시 있어야 하지만, 그것이 방법론이나 규칙이나 책임에 머물면 안된다. 이것들은 우리의 항복에서 쏟아져 나와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생명과 구원이라는 것이 명예로울 수 있고 복될 수 있는 길로 부름을 받았다는 이해한다는 것은 복된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즉 우리가 기독교적인 모든 가치를 예수와 연결하는 것을 놓치면, 우리는 비정해진다. 인간성이 없어진다. 명분, 가치, 신념 등이 판단의 기준이 되면, 사람이 인정머리가 없어지고 표정이 객관화된다.

반가움과 따뜻함이 만드는 용서, 이해, 인내 같은 것들은 없고 바로 정답을 맞추어 보자고 달려든다.

욥의 자신감이, 나는 잘못한 것이 없다, 이었던 것처럼, C S 루이스는 영광의 무게라는 설교를 하면서 이런 예를 든다. 그가 주변 사람들에게 물었다.

어떤 사람이 훌륭한 사람인가? 사심이 없는 사람이다.

우리도 그렇다. 진실한 사람이거나, 욕심이 없는 사람을 훌륭하다고 한다. 이런 생각은 부정적인 생각이다. 잘못을 하지 않는 선에서 그친다.

기독교가 말하는 것은 잘하라는 것이다.

사랑해라, 용서해라, 따뜻한 눈길을 보내라.
이것이 기독교이다. 이것이 십자가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이름으로 비정해지고 있다는 것, 즉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차원에서 기독교 신앙을 이해하는데 그치는 것은 본인이 잘못한 것이 없다는 생각에 비롯된다.

잘못한 것이 없다는 자신감은 남이 잘못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 이외에는 그 범위를 넓히지 못한다. 잘못을 비난하고 정죄하는 것밖에 선택이 없다.

기독교만이 잘하는 것을 격려하고 그것을 보여줄 수 있다.
용서, 섬김, 기다림, 등이 그것이다.

여러분이 인생에서 잘못한 것이 없다는 자신감이 들 때 이것이 용서와 따뜻함으로 가고 있는지 정죄와 비난으로 가고 있는지 스스로 점검해야 한다.

교회에서 가장 곤란한 일은 기도할 때 눈을 뜨고 있는 것이 아니다. 여러분의 표정이 전철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같다는 것이다. 낯선 사람과 같다.

다. 결 어

(1) (엡 3:14~21) 말씀으로 대표되는 하나님은 의지와 목적을 가지고 계신다. 그리고 관계와 반응을 요구하신다. 우리에게 선언하시고 찾아오신다. 하나님께서 주실 수 있는 가장 복된 것들을 주신다. 길과 진리와 생명이시고 은혜와 진리이고 기쁨이고 거룩하시고 충만하셔서 우리의 감사가 넘치도록 하신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하루하루를 복되게 하신다. 이것을 깊이 기억하여 따뜻한 눈, 넓은 가슴, 담대한 믿음이 여러분의 삶에서 기쁨과 소원이 되며 여러분에게 일어나는 기적이 되기를 바란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를 원하고,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의 기뻐함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그런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여 우리가 울며불며 반발하는 고통의 나날들이 사실은 진지한 하나님의 기적과 드라마이며 우리가 그 주인공이라고 이해하게 하옵소서. 주님의 은혜로 우리를 만나는 사람들에게 충만한 은혜를 함께 나누는 인생을 살게 하시고 감사하게 하시고 기뻐하게 하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3. 에필로그

(1) 이번 주 목사님의 설교는 매우 드라마틱했다. 나는 아침 10시에는 초등3부 유튜브 예배를 함께 드리느라, 대 예배는 12시 예배를 드리게 되는데 안방에서 집사람은 10시에 드리는 2부 예배도 함께했다.

한 참 예배 중인데 목사님의 매우 커다란 목소리, 그리고 어찌 들으면 매우 화가 나신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집사람에게 물었다. 지금 오늘 하는 예배인가요? 그렇다는 것이다.

(2) 지면에 쓰기는 좀 그래서 안 쓰지만, 목사님께서는 강력한 말로 우리를 꾸짖으셨다.

목사님은 콩나물 이론도 잘 아시는 분이다.

우리의 믿음은 꼭 콩나물 크듯 한다는 것이다. 콩나물에게 물을 부어주면 다 흘러내려 가버리고 없는 것 같아도, 사실은 콩나물이 그 물을 흡수하고 시간이 지나면 어느새 커 있는 것처럼 우리의 믿음도 그와 같이 자란다고 하셨다. 알아듣기도 쉽고 정확한 표현이다.

(3) 그러나 목사님께서 설교 중에 목소리가 커지는 것을 나는 알아듣고 이해한다. 왜 우리는 목사님 설교를 20~30년 동안이나 듣고도 변화가 없을까? 아니 변화가 있는 데 우리만 잘 모르는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우린 아직 멀었다. 자, 쉽다. 한번 해보자. 혹시 제가 도와드릴 일은 없을까요? 이 말을 하기 위해 준비할 일은 무엇인가? 자존심을 버려야 한다. 얼굴이 좀 두꺼워야 한다. 용기가 있어야 한다. 다 맞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목사님이 시키시니까 믿고 한번 해 봐야 한다. 그냥 한번 하면 된다. 두 번째는? 좀 쉬었다가 하면 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