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요한복음(25) (요 12:1~11)

2020. 6. 21.(일)
박 영 선 목사

1. 들어가는 글

(1) 코로나 19 사태 때문에 제일 섭섭한 것은 초등 3부에서 내가 맡고 있었던 6학년 1반 남자아이들과 인사 한번 못하고 헤어진 일이다.

보통은 2월 마지막 주에 졸업예배를 드리고 애들을 보낸 후 그다음 주인 3월 첫 주에 중등부에 가서 아이들을 본다. 물론 우리 반 아이들만 보는 것은 아니지만 중등부에서 초등3부 때 얼굴을 아는 아이들을 다시 보는 것은 매우 즐거운 일이다.

장난도 치고 아직까지 담임 선생님인 것처럼 잔소리도 한다. 이런 일들이 얼마나 재미있고 유쾌한 일인지 알고 싶다면 초등3부 교사를 지원하시면 된다.

(2) 우리 반 아이들에게 3월과 4월에는 안부 문자도 하고 통화도 했는데 5월에 들어서면서 자꾸 느슨해졌고 6월에는 아이들도 중학교에서 수업을 받게 되었다. 당연히 소식도 뜸해졌다.

그래서 지금도 주일학교가 정상으로 시작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중등부에 가서 아이들 졸업선물도 줘야 한다. 그리고 6학년 마지막 회식도 해야 한다.

(3) 2주에 한 번이지만 목사님을 뵙는 것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어떻게 비유를 해야 그 반가움을 조금이라도 더 정확하게 전할 수 있을까?

재수했던 친동생이 연세대에 합격했을 때,
큰아이를 아들로 낳아 처음 안아 보았을 때,
첫 손자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대면했을 때,
집사람이 권사가 되었을 때, 보다
더 하지는 않아도 덜하지도 않다.

(4) 안내도 해주시고 찬양도 해주시고 예배를 위해 구석구석에서 봉사해 주시는 집사님들, 내 형제, 자매님들, 감사합니다. 남포교회가 있어서 행복합니다.

2. 내용

가. 서론

(1) 요한복음 12장에는 세 가지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나사로의 동생인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을 향유를 부어 씻기는 장면과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사건과 헬라인들이 예수님을 찾아 왔을 때, 영광을 받을 때가 되었다고 하시고는 고통스러워하시는 세 가지 사건이 있다. 모두가 다, 공통분모는 예수님의 죽음이다. 예수님의 죽음은 오늘 마리아의 사건에서도 보는 바와 같이, 이것은 우리의 이해보다 훨씬 더 크고 놀랍다.

나사로를 죽음에서 살리신 예수께서 집에 찾아오셨기 때문에 물론 마리아는 기쁜 마음과 감사한 마음과 경외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맞이한다.

당시 유대인의 사회법은 집에 손님이 오면 손을 씻고 발을 씻도록 정결법이 되어 있어서, 집주인이 발 씻을 물을 주는 것이 당연한 규칙이었다. 그런데 마리아는 물로 씻지 않고 비싼 순전한 나드향 한 근을 쏟아부어서 예수의 발을 씻겼다. 그리고 머리털로 닦았다.

쳐다보고 있던 제자들, 특별히 대표적으로 가룟 유다가, 이렇게 비싼 것을 왜 낭비하는가? 이걸 팔면 삼백 데나리온도 더 받을 텐데,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이 훨씬 낫지 않은가, 라고 항의했다.

(2) 우리는 가룟 유다의 배신도 알고 있고, 여기에 기록된 대로 그가 회계에 많은 부정을 일으켰을 가능성도 크지만, 성경이 대조하려는 것은 그런 윤리적 도덕적 차원의 대조가 아니다.

예수가 누구인지를 모르면, 인생은 거짓말하고 속이는 것 이외에 아무 것도 할 게 없다. 진실하게 산다는 것은 긍정적으로 볼 때 불가능하고, 소극적으로 살아서 거짓말 안 하고 남을 해치지 않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렇게 살면 다 밟혀 죽는다.

살아남으려면 선택의 여지 없이 악랄하고 무섭게 굴어야 한다. 가룟 유다를 욕해서 예수를 믿는다는 말을 쉽게 때워서는 안 된다. 이 사건에서도 그런 내용을 분명히 마음에 각인하기 바란다.

나. 본론

(1) 마리아는 아까 얘기한 대로 순전한 감격과 기쁨으로 예수의 발을 씻겼고 예수님이 그럴 가치가 있다고 상상하고 믿었다.

그러나 예수의 증언대로, 그녀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어야 한다는 사실까지는 몰랐다. 예수님이 구세주라고는 알고 있었지만, 죽음으로 마리아의 감사와 경배를 완벽하게 결실해야 한다는 사실까지는 알고 있지 않았다.

다른 복음서에 의하면 이 일은 베다니 문둥병자 시몬의 집에 갔던 사건으로도 한번 나오고, 여기서도 어떤 여인이 들어와서 예수에게 향유를 붓고 동일한 기념비적인 일을 한다. (막 14:3) 여기서도 제자들이 이 비싼 돈을 왜 낭비하는가, 라고 얘기했을 때 예수님이 가만두어라, 저가 내 장례를 준비하는 것이라서 이일은 복음이 전파되는 어느 곳에서나 이 여인과 그가 한 일이 기억될 것이다, 라고 하신다.

요한복음의 마리아에게서나, 위에서 본 여인에게서나 향유를 붓고 예수님께 바친 감사와 숭배는 그들이 지금 가지고 있는 감격과 기쁨보다 훨씬 더 큰 내용과 큰 사건으로 하나님이 일하고 계신다는 것을, 먼저 예비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에게 데나리온이라는 돈은 노동자의 하루 임금이었다. 삼백 데나리온이면 1년 치 품삯이 되니까 아무리 적게 잡아도 천만 원이 넘는, 한 삼천만은 될만한, 가치가 있는 향유를 쓴 것이니까, 마가복음 14장에서는 유다라 하지 않고 제자들이 함께 어처구니없어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마리아가 한 일은 당시에 깊은 이해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자신의 처지에서 예수님께 감사했던 일이 나중에 보니까 훨씬 더 큰 일, 훨씬 더 위대한 사건에 자신이 한 몫을 한 것으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유다는 못난 짓을 했지만, 그 못난 것이 하나의 잘못, 또는 한 개인의 책임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없으면 이렇게밖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의 대표자가 되어 욕을 먹는다.

(요 12:44~47) 예수님은 내 말을 듣고 나를 따르지 않아도 심판하는 것은 내 임무가 아니다, 라고 얘기한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가 확인하고자 하는 것은, 누구는 안 믿었다, 누구는 잘못했다가 예수 믿는 표시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를 믿으면, 그들이 할 수 없었던 어떤 세상, 어떤 기회, 어떤 자리에 온 것이다. 세상은 할 수 없다는 것을 예수 때문에 할 수 있는 곳에 왔다. 여기에 오지 못한 자를 비난함으로써 실제로 해야 하는 것은 아무것도 안 하고 댕댕거린다.

여기의 대조는 가룟 유다의 생색내기를 보여 주고 있다. 그는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이용해서 자기 인생의 어떤 자기 확인, 자기 증명, 생존의 어떤 수단으로 삶을 뿐이다.

이것은 잘했다 잘못했다 의 문제가 아니다. 그 수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가룟 유다를 불쌍히 여겨야 하는 것은 그를 용서하자 가 아니라, 예수를 모르면 그렇게밖에 살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것이 드러나고 표면화되어 욕을 먹는 사람이 있고 감추고 있고, 크게 사기 치지 않아서 욕을 안 먹는 사람도 있다. 이 둘은 똑같은 것이다.

(2) (눅 7;36~50) 놀라운 장면이다. 이 죄인 된 여자는 예수님께 용서를 구하러 오지도 못했다. 그저 소문을 듣고 자기가 본대로, 이분은 우리를 구원하러 오셨고 우리를 대접하시고, 우리의 편이 되신다는 것만 알고 있었다.

그녀는 다른 곳에 가서 울 데가 없어서 여기 와서 울었다. 자기의 모든 것을 내놓고 울었다. 희망이 없고 핑계를 댈 수도 없는 자기의 처지와 못난 것 때문에 울 수밖에 없었다.

무슨 자비를 구하고, 용서를 구한 것도 아니다. 다만 울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그러자 바리새인이 금방 마음으로 욕을 했다.

죄인이 왔는데 알아보지도 못한다구.

예수님이 꾸짖으신다.

이 여인은 내가 들어올 때부터 내 발에 향유를 붓고 머리털로 씻고 그 눈물로 내 발을 씻었는데 너는 발 씻을 물도 주지 않고 너는 내 발에 입맞추지도 않았다.
이 여인은 내 발에 입을 맞추었다. 내가 여자에게 말한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 여인이 회개를 하고 죄 사함을 요구하고 와서 울며 간구한 것이 아니다. 그의 불쌍한 처지에 대하여, 예수님은 그의 요청에 반응한 것이 아니라 그의 형편에 반응하고 있다.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죄를 사해 주셨다. 여기에는 어떤 조건도 없다. 죄를 많이 졌으나 예수께 와서 믿음을 가지고 용서와 구원을 요구했다, 라는 조건이 있기를 바라지만 본문은 그렇게 얘기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이렇게 그 여인을 용서하고 죄 사함을 선언하신다. 사람들은 놀랐다. 그가 누구이기에 죄를 사하는가?

대부라는 영화를 전에도 한 번 인용했다. 대부의 시작은 마피아의 보스인 돈 꼴레오네의 집에 딸 결혼식이 있는 것으로 시작한다.

마피아 두목들이 찾아와 축하를 하고 축하금도 듬뿍 내놓는다. 결혼식을 끝내고 딸과 함께 춤을 추는 것이 관습이어서 딸과 춤을 추고 식을 끝낸다. 그리고는 비즈니스를 위해 자기 방에 들어간다.

어두운 방에서 서로 표정을 식별하기 어둡지만 거래가 이루어진다. 이런저런 거래를 다 하고 해결책을 제시하고 나중에 낯선 사람이 들어온다. 동네 장의사이다.

내 딸이 백인 청년 여럿에게 수치를 당하고 폭행을 당했는데 돈은 얼마든지 낼 테니 복수를 해달라.

돈 꼴레오네가 말한다.

너는 이 방에 들어올 때 나에게 인사도 하지 않았고 내 딸의 결혼식에 대하여 축하하지도 않았고 내 손자의 나이도 묻지 않고 나에게 가까운 어떠한 표시도 하지 않았다. 너는 내 손에 입맞춤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짜고짜 돈은 얼마든지 줄 테니까 복수를 해달라는 요구를 했다. 너는 나에게 어떠한 존경심도 친밀감도 보이지 않았다. 네가 만일 나의 가족이었다면 너에게 일어난 일을 네가 나에게 요청할 필요도 없었다. 그것은 내 문제이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과 같지 않은가?
예수님이 무엇이라고 하시는가?

돈은 얼마든지 낼 테니까 내 기도를 들어 달라구?
너는 나를 무엇으로 알고 있느냐?

예수님이 이 여인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기 자식으로 보고 있다는 선언이다.

네가 용서받을 자격이 있고, 용서받을 무슨 일을 해야 한다는 조건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이 여인의 가엾음과 이 여인의 불쌍함에 대하여, 그 여인이 예수님 앞에 감사와 간구를 보였기 때문이 아니라, 당신이 만든 자녀이며, 백성이고, 영광이요, 목적한 존재라는 것을 위하여 예수님은 그녀를 용서하신다.

(3) 마리아의 행위가, 여기 이 여인의 행동도 예수의 장례를 예비했다고 말하는 것은 저들에게 일어난 이 모든 일과 처지에 대하여 하나님이 우리의 부모로서 우리를 그의 자식으로서 이해하고 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조건과 제한의 범위를 넘어선다. 무한정이다. 즉, 내가 죽는 자리까지 너희를 위하는, 하나님의 기쁜 행위가 될 것이다.

하나님은 기꺼이 자신의 목숨까지 내어놓는다. 그것을 우리는 비장하게 생각한다.

여러분이 젊었을 때 연애를 하면 이런 경우를 겪었을 것이다. 자기가 사랑하는 상대방을 위해서는 죽어도 좋다. 이것은 절절한 것이 아니라, 기쁜 기회라고 생각을 하는 것이다.

죽으면 사랑이 깨지지 않는가?
그래도 좋다.

여러분 표정을 보면 다 중매로 결혼한 사람들 같다. 중매로 결혼을 하면 모든 조건이 다 꼴 보기 싫어진다. 잘생긴 거, 그 집안이 유명한 거, 공부 잘한 거, 다 꼴 보기 싫다.

연애를 하면, 아무래도 좋다가 된다. 상대방의 눈이 하나 없어도 결점이 안 되고 나도 따라가겠다, 가 된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렇게 찾아오신다. 우리를 대접하신다. 나는 너희들을 편들러 왔다. 너희에게 조건을 얘기하지 않는다. 너희에게 어떤 자격이 필요하지도 않다. 나는 무조건 너희 편이다. 이것을 위해서라면 나는 뭐든지 할 수 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나는 죽을 것이다. 나는 너희를 사랑한단다.

(4) (마 25:14~30) 달란트 비유이다. 주인이 오랫동안 타국으로 여행을 가게 되어 종들에게 돈을 맡긴다.

다섯 달란트 받은 종은 다섯달란트를 남겼고,
두 달란트 받은 종은 두 달란트 남겼다.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칭찬을 들었다.

한 달란트 받은 종은 땅에 감추었다가 돌려주었다.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엄격한 사람이라, 분명한 사람이라, 내가 실패할까 봐 감추었다가 본전을 돌려 드립니다.

내가 굳은 사람인 줄 알았다고? 그럼 왜 은행에 맡기지 않았느냐? 그러면 이자라도 받았을 것 아니냐? 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

우리는 늘 오해한다. 받은 만큼 남겨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아니다. 앞의 두 종은 이 일이 임무도 책임도 아니고 자신의 일이었다.

주인의 경영과 기업의 동료였다. 주인이 맡긴 것이 심부름이 아니며 다만 지켜야 될 명령이 아니라, 자기의 일로 생각했다.

너는 내 잔치에 참여해라. 같이 즐기자. 너는 나의 가족이다.

마지막 종은 자신과 주인을 구별했다. 관계에 있어서 정리하고 계산하고 책임을 져야 하는 두려운 대상으로 생각했다.

네가 나를 굳은 사람으로 밖에는 보지 못하느냐? 그렇다면 나도 너에게 책임을 묻고 계산하겠다.

마태복음의 뒷부분에는 염소와 양으로 심판받는 자들을 서로 반대편에 앉게 한다.

충성된 자들에 대한 이유가 무엇이었는가?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 병들었을 때 옥에 갇혔을 때 와서 돌아보았다.

그들이 물었다. 언제 저희가 그렇게 했습니까?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보상을 받을 수 없는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내 가족이라면 내 식구라면 내 피가 흐른다면 그는 존재와 감정과 언행과 반응에 있어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며 여유로움이 넘쳐나야 한다.

반대편에 있는 자들이 항의했다. 언제 우리가 돌보지 않았습니까? 너희가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다.

이것을 뒤집어 보자. 하나님은 우리 중에서 가장 부족한 자에게 최선을 다하고 계신다는 얘기가 된다. 이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심판하실 수 있다.

나는 너희에게 조건이나 구차한 기준을 들이대지 않는다. 너희 모두를 위해서 누구에게나 다 그렇게 한다.

누가복음 7장에서 죄지은 여자는 최고의 복을 받았고 바리새인은 최고의 꾸중을 들었다.

너는 나에게 빚진 게 없다는 거지?
바보 같은 놈.

다. 결 어

(1) 여러분의 신앙생활이 밖으로 보이는 것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조건과 환경을 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지, 모르고 있는지가 문제의 성패를 나눈다.

우리는 기도한다.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하나님. 그러나 현실을 살 때에는 아무런 필요가 없는 하나님이 되어 버리고 만다.

하나님이 우리를 편든다면,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롬 8:31~32)

이것이 여러분에게 힘이 되고 어떤 위협과 공포 속에서도 살아갈 유일한 근거이자 넉넉한 힘이라는 것을 안다면 예수 믿는 일은 참으로 신나는 일이 될 것이다.

(2) 아까도 말했지만 헬라인들이 찾아 왔을 때, 내가 영광을 받을 때가 되었다고 말씀하시지만, 뒤이어 내 마음이 근심으로 죽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라고 기도하셨다.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때에 왔나이다. 이 고통을 감당하게 하시고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나게 하옵소서.

하나님이 답하신다.
내가 이미 영광을 받았고 또 받으리라.

고통스러운 것과 영예로운 것이 나뉘지 않는다. 고통스러운 것은 언제나 잘못한 것이고, 영광과 명예는 언제나 승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성경이 하고자 하는 말과 다른 것이다.

죽음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의 신비와 깊이와 크기를 우리가 다 모르고 있다.

여러분을 만든 가장 중요한 경험은 무엇이었는가? 우리들의 실패였다. 그것이 우리를 만들고 우리를 복되게 할 것이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기로 하셨다.

이 귀한 깨우침과 승리와 자랑이 여러분 모두의 것이 되기 바란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세상의 위협 아래 있습니다. 저들은 우리 보고 사납게 살자고 합니다. 우리는 그럴 수 없다고 대답합니다. 우리는 고통과 의심과 두려움 앞에 설 수밖에 없고, 그 한복판을 주께서도 걸어가셨다는 사실을 만나야 합니다. 그 길은 충성해야 하고 순종해야 하고 희생해야 하고 울어야 하는 길일 것입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인간이란 하나님이 특별하게 만든 존재입니다. 편안하고 쉽고 웃고 사는 게 다가 아니라, 그것보다 깊고 큰 존재입니다.

우리의 인간 됨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있고, 하나님과의 믿음이 있고 사랑이 있고 교제가 있고 기쁨이 있고 자랑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이기게 하옵소서. 승리하게 하옵소서. 우리의 눈물들이 우리에게 큰 명예와 영광이 된다는 것을 놓치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3. 에필로그

(1) “우리를 괴롭게 하신 날수 대로와 우리가 화를 당한 연수대로 우리를 기쁘게 하소서” (시 90:15)

시편 90편을 목사님께서는 언젠가 어떤 주일에 마음먹고 설교 제목으로 삼아 설교하셨다. 그 CD를 20번 이상은 들었을 것이다. 그만큼 은혜가 깊다.

첫 번째 충격은 이것이었다. 모세는 이렇게 기도했다는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 이 형편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그 많은 엄청난 기적들을 베푸셨단 말씀입니까?”

깜짝 놀랐다. 어디를 읽어봐도 그런 생각이 안드는 데 이 설교를 듣고는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아, 모세가 역시 큰 선지자이구나.

(2) 두 번째로 놀랐다. 괴롭게 하신 날 수만큼 기쁘게 해주세요. 아니 백성들이 형편없다고 바로 위에서 말하고서는 바로 다음에 이런 기도는 무엇인가?

CD에는 여기에 대한 답은 없었다. 당시에 목사님께 여쭈어보니 2부에서는 그 얘기를 하셨다고만 하셨다. (2부는 CD가 없지 않은가?)

수요일(6/24)에 목사님께서 전화를 주셨다. 목사님 전화는 항상 천상에서 걸려오는 느낌이다. 이런저런 말씀을 듣다가 요즘 인기 있는 사랑의 콜센타 핑계를 대고 위의 말씀에 대해 질문을 했다. 모세는 어떻게 이런 기도를 할 수 있었을까요? 조금은 얼굴 두꺼운 기도로 생각이 됩니다.

(3) 이스라엘 백성들이 겪었던 괴로움은 분명히 괴로움이었지만, 그것이 그들을 꼭 해롭게만 한 것은 아니었다. 모세는 이것을 깨달은 것이었다. 모세는 이 백성들이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라는 것을 다른 말로 표현한 것이다. (여기까지가 목사님의 답변이다.)

하나님 얘네들은 하나님 자식들입니다.
괴롭거나 기쁘거나 부모는 자식을 버릴 수 없고
자식은 부모의 사랑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자식들이 못났어도 더욱 사랑해 주세요.
(뒷부분은 목사님 설명을 듣고 내가 상상해서 쓴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