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요한복음(22) (요 10:22~39)

2020. 5. 10.(일)
박 영 선 목사

1. 들어가는 글

(1)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목사님 설교의 한 부분이다. 어떤 철학자가 그랬다는 것이다. 모든 종교는 사람이 신에게 빌고 있는데, 기독교는 신이 사람을 위해 빌고 있다는 것이고 그것이 놀랍다고 말했다고 설교하셨다.

나는 신학을 하지도 않았고 신학에 대한 이해도 낮은 편이다. 그러니 깊은 얘기는 밑천이 달린다. 성령님은 누구에게 기도하시는 걸까?

“마음을 살리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롬 8:27)

정말 잘 모르겠지만 바울에 따르면 성령님도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시는 것으로 보인다.

(3) 성령님의 기도는 그렇지만,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비실 때 무엇을 비시는 걸까?

⌜사람에게 비는 하나님」 (루이 에블리) 라는 책이 있다. 아직 읽어 보지 못했다. 읽어 보고 싶은 책 중에 하나다. 머리말을 보았는데 공감을 했다.

저자는 우리가 성령에게 호소하고 있지만, 사실은 성령이 우리에게 호소하고 계신다, 고 말한다.

아래의 저의 의견이 신학적으로 틀렸으면 용서를 구하고, 잘 알려 주시기 바란다. 다만 나의 생각일 뿐이다.

얘야, 내가 잘못했다. 네가 이렇게 고생하는 건 엄마 잘못이야. 엄마가 정말 미안하다.

이렇게 빌고 계시지 않을까? (나는 확신한다.)

그러니 엄마가 너와 함께 할 게. 엄마가 도와줄 게. 네가 잘되도록 엄마가 최선을 다할게.

성령님은 이렇게 우리에게 빌고 계신다. 그리고 이런 내용을 바탕으로 우리가 잘되도록,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넘치는 은혜를 받을 수 있도록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신다.

2. 내용

가. 서론

(1) 요한복음 10장은 예수님께서 이렇게 선언하신 귀한 장면을 담고 있다. 나는 선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에게 생명을 주고 더 풍성히 주려고 온 목자다. 그리고 나는 내 양들을 위하여 목숨도 바치노라.

그러나 전반부와 달리 후반부에서는 예수님을 대적하는 무리 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까지 한다.

유대 사회의 종교적 사회적 지도자들은 예수를 싫어했는데, 그 이유는 자신들이 지도자로서 가지고 있었던 어떤 권위와 가르침에 대하여 예수님이 대단히 심하게 지적하고 반대하고, 그동안 그들이 제시하지 못했던 진리와 생명과 구원에 대하여 하나님의 뜻을 설파했기 때문이었다.

(2) (요 10:26~27) 이 말씀으로 예수님은 당시 지도자들을 정죄했던 것이다. 너희는 나를 믿지 않으므로 나를 따르지 않는다.

우리로서는 어려울 것 없는 내용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심각한 왜곡의 소지가 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사실을 확인할 때, 궁극적이고 적극적으로 신앙에 대한 내용과 기회를 이해하지 못하면 이때의 반대자들 같이 부정하고 비난하고 정죄하는 것으로 자신을 확인하게 된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반대하고 부정하고 심지어 죽이려고 했었던 것은 자기네들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이었다.

저들이 예수를 반대하고 예수를 죽이고 자신들을 증명한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우리도 바리새인들을 비난하고 정죄함으로써 우리가 옳다고 증명을 하려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 반대를 받아들이신다. 그들 손에 죽으신다. 그러나 우리는 반대자들을 꺾어 심판하는 것으로 자신을 확인하지, 그 반대와 적대 속에서 살아야 하는 인생이 신앙 인생인 것을, 보복하는 것 때문에 놓치게 된다.

나. 본론

(1) (요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 8: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이렇게 두 말씀이 나누인다. 나를 믿으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고 나를 믿지 아니하면 너희는 이 죄 가운데서 죽을 것이다.

이 말씀은 지금 예수님이 공생애를 살던 그 시점에서 믿을 것이냐, 말 것이냐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은 어차피 십자가를 지셔야 하는 것이고 거기에 부활을 담아야 구원이라는 것이 완성된다.

이 시간의 순서를 생각해 보면 요한복음의 말씀들은 그 당시 사람들의 운명에 대한 심판이 아니다.

예수가 오신 것과 예수를 믿는 뜻이 무엇이며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가를 증언해 놓고, 그때는 알아듣지 못했던 모든 사람과 후에 오고 올 모든 인류를 위하여 십자가와 부활을 이루신 것이다.

이 시점에서 우리가 너무 쉽게 성경을 읽을 때마다, 바보 같은 바리새인 놈들, 우리는 달라, 라는 식으로 자기 신앙을 확인하기 시작하면, 그 적대를 감수하면서 적극적으로 신앙생활을 하지는 못하고, 잘못된 사람들을 심판하고 분노만 하면서 자기 책임을 다하는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그렇게 하면 신앙생활의 가치가 없어진다. 만족이 없다. 분노하는 것으로 무슨 만족과 행복이 있겠는가?

이 싸움이 큰 싸움이다. 예수님은 결국 어디까지 가느냐 하면,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소서, 저들이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까지 가신다.

그들마저 구원의 대상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전에 이분법으로 믿은 자와 믿지 않은 자를 나눔으로써 예수님이 십자가를 질 필요가 없는 것 같은 결론에 이르게 된다.

우리는 믿었고 저들은 안 믿었다, 라는 자기 증명으로 자신을 만족시키려고 하면, 우리는 십자가를 진 예수를 따라가는 인생을 적극적으로 우리의 권리와 책임으로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그런 인생을 감히 상상도 못 하게 된다.

나는 옳고 저 사람은 틀렸는데, 저 사람은 왜 편하게 사는가? 왜 나는 힘이 듭니까?

(2) (요 3:16~18) 모두 다 구원한다. 이렇게는 말할 수 없다. 안 믿는 자들이 분명히 있다. 지옥이 분명히 경고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 은 구원을 하자는 뜻이지 와서 둘을 가르자는 것은 아니다.

안 믿는 자들을 혼내주려고 온 것이 아니라 구원받을 수 없는 죄인들을 구원하려고 오셨다. 이 방향과 의도를 알아야 한다.

심판을 받지 않는 것과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은 차이가 무엇일까? 천국을 갔다, 지옥을 갔다, 라는 이분법이 아직 아니다.

예수를 믿어서 죽은 다음에 눈을 떠보니 천국이었다. 예수를 안 믿어서 죽은 다음에 눈을 떠보니 지옥이었다.

이런 얘기가 아니다. 벌써의 의미가 무엇이겠는가?

예수를 모르면,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과 하나님이 누구신가와, 우리와의 관계와 그 관계 속에서 자기의 정체성을 모른다면, 그는 사망이 운명인 인생을 살수밖에 없다.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다.
인간이 인간다워지고 인생이 인생다워지는 아무런 가능성이 없다. 이 문제가 심각한 것은 가능성이 없어진 인류는 자연주의로 가게 된다는 것이다.

자연주의란, 우리가 태어나서 살고 있는 이 정황, 이 환경, 이 원칙과 그영역이 어떤 질서를 가지고 있는가에 대한 이해 중 하나이다.

자연주의란 우선 우리가 자연에서 보는 질서이다. 해는 동쪽에서 뜨고, 여름은 덥고, 심는 대로 거두고, 그리고 약육강식의 질서가 존재한다.

그러니까 적자생존이고 무한경쟁의 상태가 된다. 그리고 죽어야 한다. 모든 것이 순환하는 것 같고 의미가 없어 보인다. 그래서 자연주의는 허무주의로 귀결된다.

그 체념이 삶을 무기력하게 만들기도 하고 반발하게도 한다. 잘 살면 뭐해? 열심히 살아서 뭐해? 정직해서 뭐해? 라는 분노가 일어난다.

자폭과 횡포로 드러난다. 이것이 우리 모두가 몸담고 있는 자연의 질서이다.

구원이란, 이 질서가 사망으로 끝나는 것을 막고 거기에 영생을 담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서는 메시아를 알지 못하면 사망에서 생명으로 갈 수가 없으니까 반발만 남는다. 실존주의적 반발이 생긴다.

죽음으로 끝나는 것을 뒤집을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살아생전에 책임있게 살겠다. 내 인생은 내가 책임지겠다. 그래서 한때 이런 말이 유행했다.

“내가 결정한 것이기 때문에 나는 후회 안 해”

이런 말이 매우 잘났다는 의미로 허리우드 영화의 대사로도 등장했었다.
네 마음의 소리를 들어. 더 나아가서 마이웨이(my way)가 있다.

나는 그걸 내식으로 했어.
마피아 주제가이다.
상대방이 말을 안 들으면 거절할 수 없는 방법을 제시한다. 총구를 들이대는 것이다.
어떻게 할래?
거절을 할 수가 없다.

그러나 실존주의가 허무주의에 반발한 것은 인간의 어떤 고상함과 기품을 나타내는 증거였다. 그러나 답은 역시 없었다. 왜 없었을까?

실존주의가 가졌던 내 결정이라는 것은 내가 아는 이해의 한계와 능력의 범위 안에서만 책임질 수 없는데 살아보니까, 나는, 이 우주와 시간 속에서 너무나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분노해 봤자 내가 잘해 봤자 세상이 변하거나 누가 보상을 해주지 않더라. 실존주의는 심각한 딜레마에 빠진다. 그래서 원망만 남게 되었다.

두 가지 사상이 다 우리에게 분노하는 결과만을 초래했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자연스러운 심성이다. 그리고 예수를 믿었는데 뜻밖에, 결론은 영생인데 현실에서 보상을 못 받는 것은 똑같다. 그래서 우리도 분노한다.

분노를 폭력으로 쓰는 것이 아니라. 안 믿는 것들을 저주한다. 이번 코로나 사건도 그렇다. 저 신천지 망한 것 봐라, 이렇게 가는 것은 그렇게 잘난 행동이 아니다.

신천지는 지금 심판을 받든, 나중에 심판을 받든 우리에게는 관심이 없다. 그게 문제가 아니라 교회가 신자들이 어떻게 인생을 살아야 하는지를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

누구의 책임이나 잘못이 아니지만, 아무튼 답을 낼 수 없는 이런 위기와 공포 속에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라고 해야 한다.

정치, 경제, 사회에다가 답을 내라고 하지 말고 교회가 답을 해야 한다. 우리가 그 답을 추구해야 한다.

우리는 기독교에 대해 자랑을 많이 했다. 우리 선배들은 핍박받을 때 다 순교했어. 왜 그 자랑을 하는가? 죽었으니까 했다. 변경될 수 없다. 그러니 부러워했다. 그리고 칭찬했다. 왜? 유명해졌으니까.

기독교 문화권에서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아이들 이름을 요한이라고 많이 짓는다. John, Peter, Paul, Tom 등 예수님 제자들의 이름을 많이 쓴다. 물론 좋은 의미로 한다. 그러나 그들이 모두 순교 당했다는 것을 아는가?

도마는 인도까지 가서 죽었다. 다 순교 당했다. 처절하게 살았다. 그러나 기쁘게 처절하게 살았다. 왜 우리 한국 기독교는 복이라는 말이 치사해져서 어떤 거스름이나 무지에 부닥쳤을 때 꼼짝도 못 하는가?
무슨 신앙생활이 그런가? 당연히 오해받는다.

너희는 예수를 믿는다며?
그러면 최소한 너희는 안 걸려야 되는 거 아니냐?

이런 비난은 충분히 예상되는 것이다. 예수님보고 뭐라고 했는가?
네가 남의 생명을 구하고 네 생명을 왜 못 구하냐?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내려와 보라.

이런 말을 듣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저 사람들의 입을 막아 주십시오, 라고 해야 하는가?

우리는 위대한 것을 놓치고 있다. 위대한 것을 놓치고 치사한 것으로 신앙을 증명하니까 우리 스스로가 힘이 없다. 자기 스스로 알고 있지 않은가? 예수를 믿는다면서 왜 이렇게 실력이 없는 것인가?

담대하라, 가 무슨 뜻인가?
나는 아무렇지도 않아, 가 아니다.

(3) (롬 10:16~21) 이사야 53장에 나오는 메시아에 관한 예언 중에 메시아가 오면 세상이 영접할 것이라고 되어 있지 않다. 세상은 환영도 안 하고 전혀 이해하지 못할 거다. 거부할 거다.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아무도 몰라봤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신다고 예언한다. 모세가 얘기하기를, 너희들이 제대로 하나님을 섬기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방을 불러서 너희를 시기하게 하실 것이다, 라고 했다.

이방이 누구인가? 오늘 본문으로 말하자면 바리새인들을 먼저 불러서 먼저 믿었다고 큰소리치는 우리를 시기 나게 하겠다, 라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이분법을 훌쩍 넘어선다. 우리가 모르는 거 많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의 크기, 하나님의 은혜의 권능에 대하여 모른다. 우리는 마음에 쉬운 분노, 쉬운 심판을 내려놓고, 그 긍휼하심에 대한 깊은 감격으로 말없이 우리 인생을 살아야 한다. 이 길을 가는 것이 한국 교회에서는 별로 소개되고 있지 않다.

(롬10:21)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르되 순종하지 아니하고 거슬러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포기하지 않았다. 거부하고 딴소리하고 우상 섬기는 내 백성을 나는 한 번도 외면하지 않았다. 나는 한 번도 팔짱 끼고 바라만 보지 않았다. 나는 내 팔을 벌리고 내 품을 열어 놓고 있었다.

(롬 11:29~32) 순종하지 않는 것을 용납하신다. 바리새인들 욕할 게 없다. 지금 나쁘게 구는 사람들을 심판하지 말라. 먼저 믿었으면 이렇게 해야 한다.

나도 불순종하는 시간을 하나님이 허락했고, 항복을 받아 내셨고, 그리고 앞서 걷게 하셨다. 저 말 안 듣는 것들도 하나님께서는 긍휼하심으로 완성 시킬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이런 신앙의 크기와 관대함으로 담아내지 못하면, 우리는 아까 얘기한 자연주의와 실존주의에서 본 바와 같이 체념과 실망이 주는 분노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렇게 되면 예수를 믿어도 동일한 분노를 가지 게 된다. 누가 잘되는 꼴을 볼 수가 없다. 내가 힘든 것이 이해되지 않는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 것이 늘 억울하다.

억울한 것이 하나의 과정이 되는 것은 괜찮지만, 그다음으로 넘어가지 못하는 것은 목사가 야단을 쳐야 한다. 이것이 정당한 부모 아닌가? 이것이 진짜 선생님 아닌가?

거기서 붙잡혀 있지 말고 나와. 더 가보자.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도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 지로다. 아멘. (롬 11:33~36)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너무 커서 내가 다 이해하지 못합니다, 라고 해야 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고, 바울이 스데반을 죽이는 것이다. 기가 막히지 않는가? 그때 우리가 하나님이었다면, 바울을 죽이지 스데반을 죽이겠는가?

하나님은 바울 손으로 스데반을 죽이게 하시고 바울을 대 사도로 삼아 복음을 온 세계에 전하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는다. 내 조건과 내 한계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으로,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극복할 것이다.

이런 믿음이 여러분에게 충만하여 이번 코로나 사태뿐 아니라 앞으로도 살아내야 할 여러분의 인생 속에서 만나는 모든 시험과 위협 앞에서 믿음을 가지고 산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자신에게 물으시고 답하시고 이겨내셔야 한다.

여러분 각각은 하나님의 자녀이며 기적을 누리는 복을 받은 사람들이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예수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를 위해 오신 창조주이시며, 구원자이시며, 우리의 생명이시오, 우리의 소망이시오, 영광이신 예수를 믿습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을 믿습니다. 부활하신 것도 믿습니다. 순종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승리하고 예수 안에서 일어난 기적들과 약속들이 우리 생애에 넘쳐나는 예수님의 증인이 되겠습니다. 함께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3. 에필로그
(1) 나는 이번 주 2부 예배 내내 울었다. 사실은 통곡을 하고 싶었다. 아, 내가 사는 동안에도 교회에 갈 수 없는 날이 다 있구나, 생각하니 설움이 복받쳤다.

그런데 목사님 설교를 들으면서 정말 통곡을 했다.

“여러분이 교회 예배에 참석하지 못하다가 참석하시니까 감격이 있는 거 안다. 나도 그렇다. 그러나 여러분이 가정에서 예배드릴 때 하나님은 어디에 계신다고 생각했는가?”

코로나 19가 작은 사태라는 뜻이 아니다. 엄청난 일이지만 이때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산다는 일이 무엇인지를 우리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고 하신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답을 하라고 하신다.

(2) 그리고 이겨내라고 하신다.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이며 이미 기적을 누리는 복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라고 하신다.

처음 내 눈물은 어린애 같은 칭얼거림이었고 나중 나의 통곡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목을 놓아 울었다. 통곡이었다. 끝.